
(남북국시대)
Ⅰ.<삼국통일 vs 삼한일통 신라>와 <나당연합과 나당전쟁> 그리고 <남북국시대>
신라통일에 대한 신라인들의 인식은 삼한통일 또는 삼한일통이 맞다.
그당시의 금석문인 청주 운천동 사적비나 692년 신문왕때 당태종의 것과 무열왕의 묘호가 같다고 당에서 바꿀것을 요구했지만
삼한일통의 대업을 이루었음을 밝혀 거부한 것에서 알수 있듯이 신라인들은 삼국통일이 아닌 삼한통일로 인식하였다.
이것이 후대로 가면서 최치원이 삼한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으로 비정한것에서 알수 있듯이
삼한일통이 삼국일통으로 인식이 변화된다. 신라가 대동강 이남의 고구려 영역과 사람을 차지한 이상 자연스런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고려시대 사서인 삼국유사에는 一統三國, 삼국사기에는 一統三韓으로,
삼국일통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였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일통삼국은 분명히 고구려, 백제, 신라를 가리키는 것이다.
청나라 관찬사서 만주원류고에는 신라때 계림이 만주의 길림으로 나오는데
발해가 강성해진후에 그땅을 차지한 것으로 추정한다.
당나라에 만주를 잃어버렸다고 보지 않는 것이다.
만주원류고는 신라와 발해를 하나의 역사, 남북국시대로 보고 있다.
신라탓에 익숙한 이들은 이러한 관점을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것을 신라탓으로 돌리려는 환원주의는 발해도 우리역사에서 지워버리고, 고려가 한때는 동아시아의 강국이었음 지워버리고
신라통일 이후 한번도 사대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역사가 연속되어 왔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원명 교체기에 요동이 힘의 공백상태에 있을때
요동정벌을 하러 보낸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하여, 나라이름 마저 명나라에서 정해준 조선으로 개국한 것이
만주역사의 최종적이고 완전한 상실임을 외면한다. 이때는 최종적이면서 최상의 기회였다고 본다.
조선말 우리가 쇄국을 버리고 일본보다 앞서 개항, 개화에 성공하였다면
일본이 아닌 우리가 제국주의의 반열에 올랐을 것이라는 것은 머리 속에 없다.
오로지 신라탓으로 돌리는데 포커스를 맞추다 보니 제대로 된 인식과 판단이 설수가 없는 것이다.
신라와 당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 연합도 했다가 전쟁도 하였다.
나당연합과 나당 전쟁은 우리역사가 삼국시대에서 이국시대(남북국시대)로 변하는 결과를 낳았다.
넓게 보면 고려과 금나라도 남북국 시대로 볼 수 있다.
금나라의 아골타는 신라인 함보의 후손이고 금나라의 황실에는 다수의 발해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주원류고의 역사관에는
모든 것을 신라탓으로 돌리는 편협사관과 자학사관, 패배주의를 넘어서게 하고
일본과 중국의 역사공정에 대응할 새로운 역사인식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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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삼국시대 - 삼국일통시대(676년~698년) - 이국시대(남북국시대)>
삼국일통이 영토적 개념이 강한 삼국통일 보다 정확한 개념이다.
신라말 최치원이 마한, 진한, 변한을 고구려, 신라, 백제로 비정한 것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200년전에 이미 고구려, 백제, 신라를 삼한으로 인식한 사례가 나온다.
"다음으로 검토할 것은 고구려인(高句麗人)을 삼한인(三韓人)으로 호칭한 점이다.
중국에서는 이미 7세기 초반부터 삼국(三國)을 삼한(三韓)이라 불러 왔는데,
이것은 3개의 한(韓)과 3개의 국(國)을 각각 일대일로 대응시킨 것이 아니라
3한과 3국을 뭉뚱그려 포괄적으로 인식하면서 나타난 결과로 이해한 견해가 있다
(盧泰敦,「三韓에 대한 認識의 變遷」『韓國史硏究』38, 1982 pp.130-133).
그렇지만, 645년에 당나라에 항복한 고구려 장수인 고연수(高延壽)와 고혜진(高惠眞)을
마한(馬韓) 추장(酋長)이라 한 사례를 염두에 둔다면,
적어도 당나라 때에는 고구려를 마한(馬韓)으로 인식한 전제 위에서 삼한(三韓)이란 용어를 사용한 듯하다."
당나라와 고구려인들이 고구려가 삼한에 속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볼때,
신문왕 6년(686) 청주 운천동 사적비에 나오는 '民合三韓而廣地'에 삼한과
신문왕때 태종 무열왕의 묘호와 관련하여 당에 보낸 문서에 나오는 '일통삼한의 대업'에 삼한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신라가 나당전쟁에서 승리하고 발해가 건국되기 전에(20여년), 신라와 당이 대립관계에 있을 때
신라인들이 말한 일통삼한(삼국사기)과 일통삼국(삼국유사)은 모두 고구려, 백제, 신라를 가리킨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 당시의 신라 영토와 인구는 삼분의 일은 백제의 것이었고, 또 삼분의 일은 고구려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통합을 위한 정치적 수사라 하더라도 삼국일통이라는 인식과 구호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삼국통일이라는 영토적 개념의 명칭보다는
비로서 삼국이 일가(一家)를 이루었다는
삼국일통(三國一統)이 그 당시의 인식 및 용어사용과 일치하므로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본다.
신라가 나당전쟁에서 승리하고, 당과 신라가 대립관계에 있으면서, 발해가 건국되기 전까지의
20여년의 기간은 삼국일통시대라고 봐야한다.
이 시기의 만주는 당과 신라가 대립관계이 있었고, 신라가 대조영에게 형식적이지만 관직을 주었고,
발해가 건국되기전 투쟁과정이었으므로 어느 누구의 영역도 아니었다.
즉 삼국시대 - 삼국일통시대(676년~698년) - 이국시대(남북국시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