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3일 연중 31주간 수요일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25-33
그때에 25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26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7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8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29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30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
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32 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할 것이다.
33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내 십자가는 어떤 십자가인가?
오늘 복음을 대할 때마다 내 십자가에 대해서 생각하곤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라야 한다고 하셨지만 아직도 나는 내 십자가의 정체를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정체성을 안다고 하여도 언제나 성찰하는 수준도 되지 못하고, 성찰하면서도 지고 살지 못하고, 지고 산다고 하여도 기쁜 마음으로 지지 않고 억지로 마지못해서 지고 살면서 운명이라고 탓하며 살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른다고 감히 말할 용기가 나지도 않습니다.
1. 예수님의 십자가는 화합과 일치의 십자가입니다. 하느님과 세상 사람들을 화합시키시고, 일치시키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을 감히 간직할 수 있게 되었으며 하느님의 품에 안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화합과 일치의 삶을 살았는지 반성해보면 그렇지 못한 것이 항상 마음에 걸립니다. 내가 세상 사람들에게 강력한 접착제처럼 그렇게 화합의 도구가 되었는지 반성해보면 내 믿음은 열악하고, 나는 주님께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교만과 아집으로 내 십자가는 높이 솟아나길 좋아했고, 위선으로 화합의 도구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2. 예수님의 십자가는 고난과 역경을 견뎌내신 승리의 십자가입니다. 세상의 삶은 모진 풍파에 내몰린 외로운 돛단배와 같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짧은 인생을 사셨습니다. 모진 풍파와 역경과 싸우며 외롭게 지셔야 했던 십자가였습니다. 처절한 고독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만나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풍요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조금의 역경도 못견뎌합니다. 아주 호화로운 여객선에서 귀공자처럼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병으로 고생을 하였다고 주님을 원망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가난도 참을 수 없었고, 나를 단련하기 위해서 주어진 역경도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3.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랑과 봉사의 십자가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당신 스스로 제물이 되셔서 지신 십자가였습니다. 그런데 나는 내 십자가를 사랑과 봉사로 지고 살았는지 반성해봅니다. 사실 이기심에 가득 차 살았던 삶이 내가 십자가를 지고 사는 방식이었습니다. 사랑 보다는 내가 얻을 이익을 위해서 봉사한다고 하거나 사랑한다고 하였을지도 모릅니다.
4. 예수님의 십자가는 당신 자신을 헌신하셨고 하느님아버지께 자신의 전부를 의탁하신 십자가였습니다. 그런데 나는 헌신과 의탁의 십자가가 아니었습니다. 삶에 찌들어서 마지못해서 진 십자가에 헌신이 있을 리 없습니다. 또한 온전한 의탁이 없이 의심하면서 나를 하느님께 맡기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래서 내 십자가는 반쪽짜리도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식들이나 가족을 위해서 헌신하리라 결심하고 다부지게 마음을 먹으면서도 작심삼일도 되지 못하는 것이 내 현실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헌신하고 희망을 갖지 못합니다.
5. 예수님의 십자가는 용서와 화해의 십자가입니다.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사람들을 하느님과 화해 시켜 주셨습니다. 십자가상에서도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간구하셨습니다. 그런데 진정으로 하는 용서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용서를 한다고 말로만 중얼거렸을 뿐이지 진정으로 용서한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많은 일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것은 용서와 화해 같습니다. 진정한 화해는 모든 것을 녹여 완전한 일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아직 나는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화해를 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 십자가는 정말 엉터리입니다.
이렇게 엉터리로 내 십자가를 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뒤를 따르겠다고 덤벙대면서 으쓱대면서 폼 잡고 살았습니다. 얼마나 꼴불견이었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렇게라도 반성한 것이 가상하다고 하신다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자신의 십자가를 한 번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그 십자가를 키워보십시오. 주님이 좋아하실 십자가로 키워보십시오. 복음에서처럼 현명한 사람은 계산을 잘합니다. 경영학적으로 잘 따져봅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에 더 합당한지,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하면서 영원한 지옥으로 빠져들 것인지 계산해보면 자명합니다. 현명한 사람으로 계산해 보십시오. 지금 어렵다고 그 십자가를 멀리하는 어리석음에 빠질 수는 없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13,8-10
형제 여러분, 8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9 “간음해서는 안 된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탐내서는 안 된다.”는 계명과 그 밖의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축일11월 3일 성녀 실비아 (Silvia)
신분 : 과부
활동 지역 : 로마(Roma)
활동 연도 : +592/594년경
같은 이름 : 씰비아
전설에 의하면 성녀 실비아는 시칠리아(Sicilia)의 원로원 의원 가문에서 태어났고, 로마 근교에서 태어난 그녀의 남편 고르디아누스(Gordianus)는 성 펠릭스 3세(Felix III, 9월 22일) 교황과 성 아가피투스 1세(Agapitus I, 4월 22일) 교황을 배출한 로마의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고 한다. “로마 순교록”에 의하면 성녀 실비아는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9월 3일) 교황의 어머니로 기록되어 있다. 또 다른 자료에는 파테리아(Pateria)라는 자매가 있었다고 한다.
574년경 남편 고르디아누스가 사망하자 아들 성 그레고리우스는 로마의 첼리오(Celio) 언덕에 있던 부모의 저택을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의 규율을 따르는 성 안드레아 수도원으로 만들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수도 생활을 갈망해 왔던 성녀 실비아는 이 수도원에 입회하였고, 시칠리아에 있는 가족 토지에도 5개의 수도원을 더 세웠다고 한다. 875년경 요한 부제가 기록한 내용에 따르면, 성녀 실비아는 로마에서 지금의 성 사바(Sabas) 성당이 있는 곳으로 가서 작은 거처를 마련한 후 수도원에 있는 아들에게 채소를 담아 보내기도 하면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592년 혹은 594년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 축일을 맞은 실비아 (Silvia) 자매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