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커, D.A. - 배재학당 운영
D. A. 벙커(Bunker, Dalziel A., 房巨) 선교사
D. A. 벙커는 1853년 8월 10일 미국에서 출생하여, 1883년 오하이오 주 오벌린대학을 졸업하고, 뉴욕 유니온 신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다. 이 무렵이 한ㆍ미조약(1882)이 체결된 후여서 구 한국정부는 근대 교육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을 설립하고 미국 측에 교사를 초청했다. 미국 공사 푸드의 주선으로 국무성을 통하여 유니온 신학교에서 벙커, 길모어(Gilmore), 헐버트(Hulbert) 등 3인이 선발되어 1886년 5월 두 여성(엘러스, 길모어 부인)과 함께 미국 북장로회 교육 선교사로 1886년 7월 4일 내한 했다. D. A. 벙커는 육영공원에서 고관 자제들과 관리들에게 영어를 가르쳤으며, 1887년 의료선교사 애니 엘러스와 결혼했다. 육영공원이 폐쇄 될 때(1894)까지 8년간 교사로 봉직했다. 그 후 배재학당으로 옮겨 미국 감리회 소속의 선교사로 활동 했다. 아펜젤러 선교사 순직(1902) 후 배재학교의 학당장이 되어 1911년까지 교육 발전에 열성을 다하였으며, 후임자 신흥우에게 교장 자리를 인계했다. 그는 종래의 주입식, 암기식 교육 방법을 개선하여 근대 교육을 실시하는 동시에 고대사, 물리학, 화학, 수학, 정치학 등 새로운 교육과정을 도입했다. 1892년 3월에는 교육의 공로를 인정받아 “通政大夫 戶曹參議” 정3품 당상관의 품계에 올랐다. 음악에 조예가 깊은 그는 1896년 독립문 정초식이 거행될 때 윤치호가 작사한 국가(國歌)를 스코틀랜드 민요 ‘로렐라이’에 맞춰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부르게 하는 등 한국 최초의 애국가를 만들기도 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옥중(矯導所) 전도를 통하여 인권을 보호하고, 민족 지도자들을 개종시켰다. 1902-1904년 독립협회 지도자 이상재 남궁억 등과 이승만 신흥우 등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투옥되었다. 이때 정부의 허가를 받아 감옥을 출입하면서 그들의 석방운동을 펴는 한편, 수감자들을 매주 만나 위로하고 신앙 상담과 예배를 드렸다. 선진 외국에서 시행되는 죄수들의 처우 개선, 야만적 고문제도의 폐지, 음식이나 의복을 차입할 수 있는 자유, 독서의 자유 등 인권 보호를 건의했다. 성경을 비롯한 기독교 관련 서적과 과학, 철학, 역사 등 서적을 감옥에 넣어 주기도 했다. 이로 인하여 이상재 등 민족 지도자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옥중 전도와 연계하여 감옥 안에 학교가 개설된 사례도 있었다. 당시 투옥되었던 신흥우의 아버지(申冕休)는 “옥중(獄中)에 학교가 설립되었다는 것은 예전에도 없는 일이다. 죄를 범하고 오랫동안 갇혀 있을 때에 울적함을 견디기가 어려워 책이나 읽는 것으로 세월을 보내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내 아들 흥우가 옥에 갇혀 마땅히 징역을 치를 것이지만 힘에 겨운 일을 시키지 아니하고 다른 죄수들과 같이 책을 읽게 하고 글도 쓰게 했다”는 ‘獄中開學顚末’이 전해지고 있다. 그는 1890년 6월 한국성교서회(The Korean Tract Society) 창립위원으로 활동했고, 1896년 이후에는 동대문교회에서 목회 활동도 했다. 1905년 9월 11일에는 교파를 초월한 기구로 “한국복음주의선교단체 연합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 in Korea”를 조직하여 하나의 한국 교회 연합을 지향하는 역사적인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는 초대 서기 겸 회계 및 찬송가 편찬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08년 자신의 선교사역을 계속하면서 성서 보급을 위하여 미국성서공회 책임자로 활동했다. 한편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인에 의하여 시해되고 고종 황제는 극도의 불안 상태에 있을 때, 벙커, 게일, 언더우드, 에비슨 선교사가 번갈아 왕실에 들어가 고종 황제를 호위하면서 왕의 신변 보호에 최선을 다하기도 했다. 그 후 1926년 7월 4일 73세의 노령으로 선교사직에서 은퇴하여 부인과 함께 귀국했다. 1930년 한국에 잠시 방문하였으며, 1932년 11월 28일 80세로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별세했다. 그는 숨을 거두면서 '나의 유골이나마 한국 땅에 묻어 달라' 유언하여 그 부인은 남편의 유해를 가슴에 안고 한국으로 돌아와 1933년 4월 8일 정동제일 감리교회에서 고별 예배를 드리고, 양화진 제1묘역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Until the day dawn the shadows free away(날이 새이고 흑암이 물러갈 때까지)'라는 어구가 기록되어 있다.
민족운동 지도자 D.A 벙커
방거(房巨)라고 불렸던 D.A.벙커는 1853년 미국에서 출생, 1883년 오벌린 대학을 졸업하고 유니온 신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다. 벙커는 우리나라의 초빙교사로 발탁되어 왔다. 조선 왕실은 1882년 조미조약이 체결된 이후 갑자기 대두되는 근대 교육의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 미국에서 교사를 초빙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렇게 초빙된 온 교사가 벙커, 헐버트, 길모어 선교사이다. 그들은 갑신정변으로 인해 애초 계획했던 시기를 접고 1886년 5월초 미 국무성에 소집되었고, 태평양을 건너 7월4일 우리나라에 도착했다.
벙커가 가르치던 ‘육영공원’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관립 근대 교육기관이었다. 1886년부터 1896년 육영공원이 폐교될 때까지 벙커는 그곳에서 9년간 영어교사로 지냈다. 그 뒤 감리교선교부의 요청에 따라 배재학당 교사가 되고 학당의 학감까지 올랐다. 학감으로 있을 때 그는 종래의 암기식, 주입식 교육방법을 폐지하고 공개식 고시 방법으로 새 교육을 실시하는 동시에 고대사, 물리학, 화학, 수학, 정치학 등 새로운 교과 과정을 많이 신설했다.
벙커는 우리나라에 도착한 이듬해(1887년)에 애니 앨러즈(Annie Ellers)와 결혼했는데, 앨러즈는 1886년 광혜원의 의사로 왔으며 얼마 뒤 명성황후의 시의로 채용되었다. 벙커 부부는 파란만장한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 살아온 선교사들 중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1894-95년의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1894), 명성황후 시해(1895), 아관파천(1896) 등 한민족의 고난상을 직접 목격해왔다. 그리고 1896년 독립협회운동, 독립문 건립, <독립신문>의 창간 등 근대식 민권운동도 직접 목격했다. 아니 단순 목격자가 아니라 그 민권운동의 동역자이며 후원자이기도 했다.
그 운동의 주역을 맡았던 서재필, 윤치호 등은 모두 벙커와 동지였고, 배재학당의 강사들이었으며, 학당 학생들의 지도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학생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수감되었으니 벙커로서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한편 독립협회도 강제 해산되어 이상재, 홍정후, 남궁 억, 정교 등 이상 독립협회 지도자들이 수감되었고 이승만, 양홍묵, 신흥우 등 벙커의 제자들도 만민공동회운동을 하다 체포되었다. 이로써 당시 한성감옥서엔 벙커의 지인들로 만원이 되었다.
벙커는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정부 당국에 죄수들의 처우 개선, 야만적인 고문 제도 폐지, 자주 방문하여 음식이나 의복을 차입할 수 있는 자유, 독서의 자유 등을 적극적으로 건의했다. 이로 인해 벙커는 정부의 특별 허가를 받아 감옥에 무상출입하며 차입도 하고 위로도 하며 예배도 드려 주었다. 그 결과 이상재, 이원긍, 김정식, 유성준, 안국선 등이 감옥 안에서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
이보다 앞서 그는 한국 교회 연합운동에도 크게 공헌했는데, 1905년 국내의 선교사들 약 150명이 모여 ‘한국복음주의선교단체 연합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 in Korea)’를 조직하여 ‘하나의 한국 교회’를 지향할 당시 회계와 서기를 겸직하고 있었다. 그는 교회 연합운동이라면 언제나 예외 없이 앞장섰다.
1912년 신흥우에게 배재학당 교장직을 넘겨주기까지 6년간 교육사역에 열성을 다한 벙커는 그 후 감리교선교부 소속 선교사로서 만년을 조용히 전도와 교육사업에 종사하다가 1926년 7월4일 75세의 나이로 은퇴했다.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1930년 한국을 잠시 방문했으나 1932년 11월26일 80세로 샌디에이고에서 별세했다. 벙커는 “나의 유골이나마 한국 땅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남겼기 때문에 1933년 4월8일 정동교회에서 고별예배를 드린 후 양화진에 묻혔다. 그 뒤 부인도 타계해 벙커의 묘와 합장됐는데 부부의 묘비에는 “날이 새고 흑암이 물러갈 때까지(Until the day dawn the shadows free away)”라는 비명이 새겨졌다.
D. A. 벙커(Bunker, Dalziel A., 房巨) 부인 애니 엘러스(Bunker, Annie Ellers, 房巨夫人)
미국 미시건주 버오크에서 1860년 8월 31일 장로교회 목사의 딸로 출생하였다. 1881년 일리노이 주 록포드 대학을 졸업하고, 페르시아 선교사로 갈 계획으로 보스턴 의과대학에서 수학하던 중 한국으로 와 달라는 알렌(H. N. Allen, 安連)의 요청과 한국정부의 초청에 의하여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로 1886년 7월 4일 내한했다. 그는 다음 해(1887년, 27세 때) 미국에서 함께 내한한 육영공원 교사 D. A.벙커와 결혼했다. 한국에서 40년간 선교사로 봉직하면서 제중원 의사, 명성황후 시의(侍醫), 정신여학교 교장 등으로 활동하다가 1926년 은퇴하여 귀국했다. 그 후 다시 내한하였다가, 1938년 10월 8일 별세하여 양화진 제1묘역에 안장되었다. 애니 엘러스 선교사는 가냘픈 여성으로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제중원 의사로 열심히 봉직하여, 왕실과 고관들의 환영을 받았다. 여성 환자 치료와 간호에 주력하고, 고종황제의 어의(御醫)로 활동하던 알렌 의사와 협력하며 황후의 옥체를 진료하기도 했다. 이 같은 공로(業精至善 施療衆民)로 그는 정3품 벼슬에 해당하는 당상계 통정대부(堂上階 通政大夫)의 높은 품계에 올랐으며, 명성황후의 시의로 임명되었다. 그의 글인 ‘閔妃와 西醫’라는 제목에서는 “나는 1888년 3월부터 여관(女官)의 직임을 띠고 나의 본직인 의사로서 황후의 옥체를 시위(侍衛)하게 된 것을 나로서는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한다”라 하였다. 그는 왕비에게는 손을 대고 진맥(診脈)도 못하던 시절에 놀랍게도 황후의 가슴을 헤치고 진찰했다. 이 같은 과정은 1895년 한국학연구지 에 ‘My first visit to her majesty, The Queen’ 제목의 글에 자세히 발표되었다. 전택부는 “알렌은 고종황제를 진찰한 적은 있으나 황후의 가슴에다 청진기를 댈 수는 없었다. 그런데 하루는 대궐에서 기별이 오기를 황후께서 탈이 났으니 약을 지어 보내라고 했다. 알렌은 그 증세를 물은 다음 짐작해서 약을 지어 보냈다. 며칠 뒤 또 기별이 나오기를 조금도 차도가 없으니 다른 약을 지어 보내라고 했다. 그래서 또 병세를 들은 뒤에 짐작해서 다른 처방으로 약을 지어 보냈다. 또 며칠 뒤에 내시가 나와 약효가 전혀 없으니 다른 방도가 없느냐? 다그쳐 물었다. 그래서 알렌은 용기를 내어 황후를 직접 진찰하기 전에는 약효를 낼 수 없으니 허락해 달라고 청했다. 그리하여 엘러스가 궁중에 들어가 명성황후를 진찰했다”는 것이다. 당시 왕비를 진찰하려면 손목에 실을 감아 병풍 뒤로 연결하여 진맥(診脈)하던 시절에, 엘러스는 참으로 놀라운 사건의 주인공으로 황후의 가슴을 헤치고 청진기를 들이댔다. 1886년 9월 14일은 황후가 현대 의술에 의한 최초의 진단을 시도한 날이라 할 수 있다. 언더우드(Underwood, H. G, 元杜尤)가 설립한 경신(儆新)학교와 엘러스가 세운 정신(貞信)여학교는 한국 장로교단 최초의 남매 학교이다. 경신사(고춘섭 편저)에 따르면 “1887년 언더우드학당에 고아 몇 명이 들어왔다. 여느 때와 같이 목욕을 시킨 다음 새 바지저고리를 입히고 머리를 곱게 빗어 땋아 주었다. 그런데 목욕을 시키는 과정에서 한 아이가 여자임을 발견하고 언더우드는 기겁을 했다. 곧바로 제중원 여의사 엘러스가 거주하는 옆집으로 보내 정동여학당의 첫 걸음이 되었다.” 한편 정신백년사(박광현 편저)’에는 “1887년 6월 엘러스 선교사는 정동 소재의 제중원 사택에서 한명의 고아(5살, 정례)에게 글을 가르쳤는데 얼마 안가서 그해 겨울에는 3명으로 늘었다. 이것이 정동여학당의 시초이고 이 자리가 바로 현재의 정동 1번지이다.”라 했다. 그는 정신여학교 기틀을 마련하고 초대 교장으로 1888년 9월까지 봉직했다. 그 후 남편 벙커가 배재학당으로 옮기게 되어 미국 감리회 선교사로 소속을 바꾸어 활동했다. 한국 YWCA 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창설에 협력하여 5천엔의 창립기금을 헌금하기도 했다. 1926년, 40년간의 선교사직을 은퇴하고 남편과 함께 귀국하여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던 중 남편이 별세하자, 남편의 유언에 따라 유골을 안고 재차 내한했다. 1937년 다시 내한하여 소래에 머물다가 1938년 10월 8일 서울 정동 그레이 하우스에서 별세하여 10월 12일 정동제일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르고 경성화장장에서 화장한 후 유골은 남편이 묻혀있는 양화진 제1묘역에 안장되었다. 묘비에는 '하나님을 믿자, 바르게 살자, 이웃을 사랑하자'라는 정신 학교의 교육 이념이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