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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6월20일 월요일 [(녹)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수도회] 먼저 자신을 살피는 겸허함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2역대 17,5-8.13-15ㄱ.18
† 복음 마태 7,1-5
◈ 오늘의 묵상
우리는 눈을 가진 덕분에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눈을 가졌다고 모두가
같은 것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보이는 것과 보고 싶은 것이 다르듯이,
무엇을 보느냐는 마음의 눈에 달려 있습니다. 내 이웃의 잘못은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기 때문에 쉽게 보입니다. 하지만 내 허물은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남에 대한 험담은 쉽지만, 자신에
대한 험담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은가 봅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는 예수님의 말씀은 누구나 한 번쯤은 되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하지만 내 눈 속의 들보를 보려면 나를 들여다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즉흥적이고 자극적인 매체들의 발전이 나의 내면보다는 외적인 매력에,
영적 감각보다는 육체적 감각에 빨리 반응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잠시도 쉴 틈 없이 먹고 마시고, 보고 듣는 미디어 홍수의 시대 속에서 잠시
‘멈추어 사색하는 힘’을 잃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안에 ‘중단의 본능’을 일깨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무엇을 위해
내가 뛰고 있는지, 내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잠시 멈춰서 자신에게
묻고, 하느님께 묻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기도와 묵상, 성체 조배는 하느님
앞에 비추어진 내 모습을 보는 시간입니다. 남을 판단하고, 남의 허물을
보기보다는 내 허물을 인정하고, 내 마음을 살피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나는 하루에 얼마나 그 시간을 갖고 있습니까?
- 매일 미사 -
◈ [인천] '티'와 '들보'
2016년 다해 6월20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제1독서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당신 앞에서 물리치시니, 남은 것은 유다
지파뿐이었다."
○ 열왕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17,5-8.13-15ㄱ.18
복음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1-5
선생님께서 반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한 쌍의 부부가 유람선 여행을 떠났다가 재난을 당해서 침몰 직전의
상황에 놓인 것입니다. 이제 구조선으로 옮겨 타야 하는데, 구조선에 남은
자리는 딱 한 자리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편이 아내를 침몰하는
유람선에 남겨둔 채 자기 혼자 구조선에 올랐습니다. 이 남편을 향해서
아내는 뭐라고 소리쳤을까요?”
“당신 같은 사람을 남편이라고 내가 믿었다니...”,
“내가 정말 눈이 삐었지.”, “당신을 저주해요.” 등등 학생들은 격분에 차서
힘껏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화가 나서 말하는 아이들의 말이 멈추어질
때 한 명의 학생이 “선생님, 아마도 아내는 아이를 잘 부탁한다고 말했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그때의 실제 상황 이야기를
전해주셨습니다.
사고 당시 아내는 이미 고칠 수 없는 중병에 걸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내는 아이를 맡기면서 자기 대신 잘 키워 달라는 것이었고,
남편은 아내와 함께 죽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아이를 위해서 자신만
구조선에 오른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 남편의 결정이 잘못한 것일까요? 그래서 비난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요? 보이는 것과는 너무나도 다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그냥 보이는 데로 믿고 보이는 데로 판단하고 단죄하였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선과 악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 세상 안에서 절대로 쉽게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성숙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 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아마 다름을 깊이
이해하는 마음을 갖고서 함부로 남을 판단하지 않는 사람이 아닐까요?
오늘 주님께서는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빼려기 전에 먼저 우리 눈에 있는
들보를 빼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뚜렷이 볼 수 있게 되어서 다른 형제의
눈에서 티를 제대로 빼낼 수 있다는 것이지요. 티는 재나 흙, 겨 등의
조그마한 부스러기나 찌꺼기를 말하지요. 그에 반해 들보는 집 지을 때
중심이 되는 두 기둥을 가로질러 걸치는 나무입니다. 티야 눈에 들어갈 수
있지만, 들보가 눈에 들어가면 큰 일 나겠지요.
따라서 성경에서 ‘티’란 것은 조그마한 흠집, 곧 남의 작은 허물이나 결점을
의미합니다. 그에 반해 ‘들보’는 상대의 작은 허물에 비교도 되지 않는
자신의 큰 허물이나 결점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즉, 자신의 큰 허물과
결점은 보지 않고 남의 자그마한 결점과 허물을 보고 있는 성숙하지 못한
우리들을 꾸짖는 말씀인 것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을 가슴에 담아서 함부로 판단하고
심판하지 않는 삶, 그보다는 이해하고 사랑하는데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성숙한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속도를 얻으면 풍경을 잃고 속도를 잃으면 풍경을 얻는다(김경집).
이 콩국수는 맛있을까요? 맛없을까요? 먹어보지 않고는 모릅니다.
못난이 콤플렉스에서 벗어납시다.
아이큐 173인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담임선생님의 실수로 아이큐가
73으로 잘못 알려진 것입니다. 아이는 친구들로부터 놀림을 당했고, 실제로
이 아이도 스스로를 바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감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성인이 되어서 자신의 진짜 아이큐가 173인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너무 늦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그는 자신감을 갖고
생활하면서 많은 발명품을 만들었고 후에 아이큐 150 이상의 천재들만
가입한다는 국제멘사협회의 회장 자리에까지 오릅니다. 그가 바로 책
‘바보 빅터’의 주인공, 빅터 세리브리아코프 회장입니다.
소위 ‘못난이 콤플렉스’가 얼마나 스스로의 성장을 가로막는지를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그 누구도 못난이가 될 수 없다는 것, 또한
하느님께서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도록 우리를 섬세하게 만드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난 안 돼. 나는 안 될 거야.’ 등의
생각을 버리고, ‘하느님께서 내 편이니 다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실제로 내가 나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면 부정적인 운명이
뒤따라온다고 하지요. 그러나 내가 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 나의 운명도
긍정적으로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못난이 인형.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먼저 자신을 살피는 겸허함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6월20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마태 7,1-5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 7,5)
먼저 자신을 살피는 겸허함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7,1-2) 다시 말하면 이웃을
단죄하면 하느님에게서 단죄를 받으며, 이승에서 행한 선행에 비례해
종말에 보상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왔다는 확신 때문에 이처럼 세상의
관행을 넘어서는 요구를 하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이어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7,3.5) 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성찰해 봅시다. 왜 우리는 남을 단죄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하느님만이 주인으로서 인간을 심판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피조물이요 죄 중에 살아가는 동료 인간들끼리는 심판이나
단죄가 아니라 사랑의 의무만이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아무리 친밀한 사이라 하더라도 남의 인간됨됨이 전부를 알 수는
없으며, 어떤 일의 원인 결과 그 영향을 전부 파악할 수도 없기에 단죄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사람의 단점보다는 그 안에 숨어있는
‘아름다움’과 ‘선’을 발견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그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자신이 옳고
의롭다는 일종의 자만과 자기중심적 사고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판단할 때 늘 우리는 상대방의 입장이 아니라 나의 기준을
앞세우곤 하지요. 단죄는 그 기준에 맞지 않을 때 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아무도 타인을 판단할 만큼 의롭지도 선하지도 못함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자신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 신념, 경험적 지식 등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들보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따라서 누구나 보통은 자기 들보를 먼저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빼내기도 어려운 것이지요. 이 들보를 빼내려면
먼저 내가 지닌 생각과 판단이 언제든 내 눈앞을 가로막는 들보가 될 수도
있음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나아가 좀 더 근본적으로 내 자신의 경험과 사고의 틀, 신념과 윤리적인
틀을 내려놓고 먼저 상대방을 헤아리려는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상처받고
고통당하는 거의 모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완고함은 보지 못한 채 남의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고, 사랑에서
우러나온 충고나 조언도 듣지 못하는 것은 독선과 자만에서 나온 것이
분명합니다. 이기적인 마음과 자기 보호본능에서 자신도 모르게 우러나오는
짜증과 거부와 미움을 버리고 자신을 먼저 살피는 겸허함을 지녔으면
합니다.
오늘도 겸허한 자세로 자신을 먼저 살펴 자신의 들보를 찾아 들어냄으로써
형제자매들 안에 있는 아름다움과 선과 사랑을 발견하는 창조적 발견의
기쁨을 체험할 수 있길 희망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 7, 5)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6월20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 7, 5)
감출 수 없는 우리의 들보입니다.
들보의 폭력을 우리 마음 안에서 바라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내 눈에서 내 들보를 알고
내 들보를 빼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내 들보를 빼내지 않고서는 서로의 아름다움을
결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서로를 향한 심판으로 살 맛을 잃어갑니다.
관계를 치유하는 길은 먼저 심판을 멈추는 것입니다.
저마다 소중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쉽게 판단할 것은 그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빼내어야 할 자기중심적인 들보에서 벗어나
아름다움을 다시 바라볼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내 마음을 먼저 들여다 봅시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6월20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태 7,3)
티는 알겠는데 들보가 뭐지? 하며 검색해 보니
들보(beam)는 기둥을 말하네요.
보통 '대들보'만 이야기하니 대들보란 큰기둥을 말하는 것이군요.
예수님도 참~ 비교도 좀 말이 되게 하셔야지
티와 들보라니 낙타와 바늘귀의 비교처럼 참으로 안 어울립니다.
그만큼 강조법을 쓰시는 것이겠지요.
눈에 티가 들어가도 빼내기가 참으로 힘들지요.
운이 좋으면 빨리 빠지지만 어떤 때는 오랫동안 고생합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때도 많지요.
그런데 사람마다 눈 속에는 저마다 집의 기둥으로 쓸 만한
크고도 굵고 긴 편견, 위선, 거짓, 선입관 등의 들보를 가지고 있답니다.
그래서 사물을 보아도 제대로 볼 수 없는 게지요.
다른 사람의 티끌같은 약점은 잘도 끄집어 내면서
내 안에 있는 커다란 약점들은 보지 못하는 게 우리의 문제겠지요.
여러분의 눈 속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이 보입니다.
오늘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조그만 약점을 보지 말고
내 안에 있는 들보같은 약점을 먼저 한 번 바라봅시다.
그 때문에 하느님이 잘 안 보이고
이웃을 사랑의 눈으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그 웬수가 무엇인지 찾아봅시다.
그제야 다른 사람의 약점은 더 이상 보이지 않고 맑고 깨끗한 눈으로
세상과 이웃과 하느님을 바라 볼 수 있겠지요.
그런 맑은 눈 되찾으시길 축원합니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서울]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2016년 다해 6월20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 마태 7,1-5
최근 언론에 ‘변호사’에 대한 보도가 있었습니다. 어떤 변호사는 수임료를
100억 이상 받았다고 합니다. 소유한 재산이 엄청나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법을 잘 아는 변호사가 법을 어겨서 조사를 받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당한 방법으로 이익을 취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 부당한 방법으로 이익을
취한다면 법에 따라서 심판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변호사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이 있습니다. 2001년 적성 성당에 있을
때입니다. 서울에 있는 변호사께서 연락을 주셨습니다. 교우들을 위해서
무료로 법률상담을 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시골에 사시는 분들은 법을
잘 모르시기 때문에 때로는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하고, 답답한 일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변호사께서는 ‘가정, 토지, 상속, 이웃과의 분쟁’에
대해서 상담을 해 주셨습니다. 먼 길 오시는 분에게 차비라도 드리려고
하면 한사코 사양하셨습니다. 시골밥상에 점심 한 끼면 만족하시던
변호사의 해 맑은 웃음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2009년 시흥5동 성당에 있을 때입니다. 대림특강을 준비하면서 시민활동을
하시던 변호사를 강사로 초대하였습니다. 변호사가 설립한 아름다운 가게,
아름다운 재단은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대림특강을
하시면서 핀란드의 교육을 이야기 하였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성공, 출세,
권력을 지향하는 교육에서 더불어 사는 교육을 이야기 했던 변호사님의
열정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2016년 저는 또 다른 변호사를 만났습니다. ‘가톨릭 다이제스트’를 발행하는
분이시고, 흰물결 아트센터를 통해서 복음과 문화를 전하는 변호사입니다.
성소국 임원연수를 하면서 강의를 부탁드렸습니다. 그분은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를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을 식별하는 영적인 기준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경쟁가치를 버리고, 신앙 안에서
비경쟁 가치를 추구하자고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1등만 기억하지만,
신앙 안에서는 모두가 소중한 존재임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참된 지혜는,
세상을 바꾸는 힘은 ‘사랑’에서 나온다는 말씀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같은 변호사이지만 어떤 분들은 신기루와 같은 ‘욕망’을 추구하였습니다.
지상에 재물을 많이 쌓아 두었지만 참된 행복을 만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어떤 분들은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공동선을 추구하였습니다.
중요한 것보다는 소중한 것들을 찾으려 하였습니다. 참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울지마 톤즈를 제작한 형제님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제가 고발
프로그램을 20년 했습니다. 잘못을 지적하고, 시정할 것을 보도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 저의 얼굴은 늘 심각하고, 화가 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20년이 지났음에도 세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공감을 이야기하고,
희생과 봉사를 이야기하고, 나눔과 사랑을 이야기하고, 사람 냄새가 나는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저의 얼굴도 환하게 바뀌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상이 조금씩 변화되는 것도 체험했습니다.’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행복한 한 주간되시기를 바랍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맘대로 살면 영원 세상에선 꽝!
2016년 다해 6월20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맘대로 살면 영원 세상에선 꽝!
남을 무시했다면 하늘 영원세상에서 남에게 영원히 무시당해야 되겠죠.
남을 미워했다면 역시 영원세상에서 남에게 영원히 미움받아야 되겠고.
남을 흉봤다면 죽은 후부터 영원히 남들이 나를 흉보는 걸 어찌하나요.
남을 용서하면 영원세상에서 모두가 주님께 나를 용서해주라 하겠지요.
현세와 내세의 이런 연관성을 예수님은 아주 명확하게 알려주셨잖아요.
예수님보다 자기가 잘났다며 맘대로 살면 영원 세상에선 꽝입니다. 꽝!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마태오 7,2)”
세금 안내며 사치생활 하는 연예인들? 국민 봉급자 서민들을 무시하는 짓.
영원세상에서 모두에게 영원히 무시당할 텐데 그게 좋다고 준비 중이네요.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청주]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6월20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 마태 7,1-5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
열심히 살아가려고 하면 남의 단점이 유난히 잘 보입니다. 남의 보기 싫은
모습 때문에 마음이 혼란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럭저럭 살아갈 때가 이 꼴,
저 꼴 안보고 마음이 편했습니다. 차라리 옛날처럼 살아가고픈 마음이
가득합니다. 언제쯤‘저 사람은 왜 저 모양일까?’하는 마음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걱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말고, 남을 되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남을 판단하기에 앞서 자신의 들보를 빼내야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빼낼 수
있으니 먼저 자신을 점검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등잔 밑이 어두운지라
여전히 자신의 부족한 점을 보지 못하고 남의 약점을 들추어내곤 합니다.
자신은 완벽하고, 다른 사람은 허물투성이처럼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입니다. 이러다가 결국 누군가에게
똑같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더더욱 하느님께로부터 그렇게 심판을
받는다면 지금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때입니다. 나에게 부드러운 만큼
타인에게도 부드럽기를 희망합니다. 남에게 엄격하기에 앞서 나에게
엄격하고 절제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자기성찰을 한다는 것은 삶의 지혜입니다. 자신을 살펴본 후에야 남을
도와줄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만 남을 업신여기지 않고 진정한 사랑으로
도와줄 수 있습니다. 혹 남보다 내가 낫다는 마음을 가지고 누구를 돕는다면
받는 사람은 고마움보다는 비참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이
잘 될 수 있도록 충고한다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내 삶의 모범 없이 강요하는 가르침이라면 상처만 더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먼저 자기성찰을 한 후 행동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도움은
기꺼이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옛 말씀도 “자기 몸을 닦은 뒤에 집안을
거느리고, 자기 집안 거느린 뒤에 나라를 다스린다.
”身修而后家濟, 家濟而后國治-대학- 고 했습니다. 자기 성찰이 모든 행위의
처음과 나중이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 자기성찰에 충실한 열심과 정열이 주어지길
기대합니다. 잘못된 열심은 영혼을 상처 나게 합니다. 눈먼 최선은 최악을
낳게 됩니다. 그러므로 열심이 더할수록 하느님 앞에 나를 비추는 일에도
소홀함이 없기를 기도합니다. 하루에 거울을 몇 번이나 보십니까? 그
횟수만큼 내면을 비추어 본다면 이미 성인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평생 직접보지 못하는 얼굴은? 자신의 얼굴입니다.
다른 사람의 얼굴은 직접 이리저리 살필 수 있으나 자신의 얼굴은 거울이나
반사경을 비추어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남의 티는 잘 보면서도 자신의
들보는 보지 못하나 봅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부행정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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