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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돌과 기와에 한국미를 새긴 와전각(瓦塼刻)의 새길열기
-단오 김충열 작가의 작품세계-
정태수(한국서예사연구소장)
1. 서예와 전각을 혼융한 새로운 풍격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미학수필』에서 “풍격은 영혼의 겉모습”이라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 말한 풍격이란 한 작가의 작품에 녹아있는 내용과 형식의 총체적인 특징으로, 그 작가만의 독특한 표현방식이기 때문에 그 사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현대 예술은 작품마다 새로워야하고 앞의 작품과 뒤의 작품이 달라야 하는 변화주의를 추종하려는 작가들이 많고, 그런 변화주의가 유행처럼 번지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과거 위대한 예술가로 일컬어지는 명가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갖고 있는 풍모를 바탕으로 다른 요소들을 추가하여 자신만의 풍격(風格)을 찾으려고 하였다.
서예도 예외는 아니다. 서예가들도 자신의 풍격을 반복적인 축적을 통해 자신만의 정체성으로 삼아왔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왕희지, 안진경, 왕탁, 김정희는 모두 여러 서체에서 일치하는 공통적인 자신의 풍격을 찾았던 작가였다. 우리는 역사에 남는 저명한 작가의 작품에서 이러한 풍격을 발견할 수 있다.
조급한 현대 서예가들이 각종 양식의 작품을 조석으로 양산하는 것을 볼 때 이는 풍격의 탐색이지 차원 높은 풍격의 추구와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깊은 울림을 주는 풍격은 오랜 시간 반복적으로 누적시켜 타자와 구별되는 자신만의 풍격을 만들어야 후대에 인정받는 작가로 자리매김 됨을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한 세대 가까이 전돌(塼乭)과 기와[瓦]에 전각기법을 응용한 독창적인 풍격을 선보이며 주목받고 있는 작가가 단오 김충열이다.(이하 단오로 호칭) 그는 한국서단에서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표현재료인 기와나 전돌에 문자나 선화(線畵)를 새긴 한국적인 풍격이 서린 작품으로 자신만의 새길을 개척하고 있다.
2. 수파리를 추구한 작가의 삶
단오와 서예와의 만남은 4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5년 봄. 무미건조하고 반복적인 일상에서 한 줄기 햇살과 같은 서예를 접하게 되면서 그의 삶은 바뀌었다. 일상적인 삶을 위한 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 10시간씩 서예에 몰입하였다. 서예입문은 순천의 호석 오기관 선생에게서 3년 동안 기본을 닦았고, 광주로 이사하여 금초 정광주 선생의 문하에서 서예이론과 실기를 병행하여 공부하면서 예술적인 서예와 작가로서의 삶에 대한 철학을 전수받는다. 전각은 고암 정병례 선생에게서 도법을 사숙하고 꾸준히 옛 명가들의 각법을 독학으로 두루 익혔다. 그는 이후로 아홉 번의 개인전을 통해 한국서단에 전각으로 분명하고 뚜렷한 독자적인 조형메시지를 던져왔다. 특히 기와작가, 전돌작가로 명명될 정도로 이 부문에서는 독보적인 위상을 견지하고 있다.
단오가 서예공부를 하면서 자신을 경계하기 위해 세운 요체(要諦)는 수파리(守破離)였다. 이 말은 일본 선불교에서 나온 것으로 검도에서 주로 인용하고 있는 용어이다. 그가 이렇게 수파리를 가슴에 새기면서 작가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이유는 좋은 스승을 만나 과거의 법을 지키면서 습득해 나가는 과정인 수(守), 고전의 법노(法奴)에서 벗어나 고전을 깨뜨리면서 자신의 개성을 살려나가는 과정인 파(破),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훌훌 벗어던지고 얽매이지 않는 리(離) 과정을 통해 작가로서 자신의 풍격을 완성해나가려는 굳센 의지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단오는 고전연마를 위한 수(守) 과정에서 천 종류의 비석을 보아야 비로소 어떤 비석이 좋은 비석인지 알 수 있다는 취법호상(取法乎上), 즉 최상의 비석을 법으로 취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추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여러 법첩을 임서하여 날마다 폐지가 수북하게 쌓이도록 부지런히 먹을 갈았다. 이런 맥락에서 전각학습도 박졸(朴拙)한 미감을 체득하기 위해 일천 방 이상의 모각을 하면서 20여 년 간 각고의 세월을 보냈다.
단오는 지천명을 넘어서면서 박습(博習)한 명가들의 법첩에서 벗어나 자신의 개성을 입힌 파(破)의 과정에 들어서자 독특하고 경이로운 작업으로 서단의 주목을 받았다. 흔히 볼 수 없는 기와, 전돌에 다양한 자법(字法)과 도법(刀法)의 전각기법을 응용한 독자적인 작품을 선보여 왔다. 게다가 작가가 선문(選文)한 내용을 보면, 작품의 외피(外皮)를 장식하고 있는 금석기(金石氣) 못지않게 문학적 감수성과 차[茶]와 불교에 심취한 그의 내면적 소확행(小確幸)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이렇게 20년 가까이 끝없이 시도하고 실험하는 작업으로 자신의 풍격을 쌓아가고 있는 것으로 살펴진다.
근작에서는 지금까지 견지했던 파(破)의 과정에서 벗어나 조금씩 리(離)로 흘러가려는 조형미감이 엿보인다. 작가 본인이 의식하지 않아도 작품에서 그런 경향성이 보여진다. 앞으로 어떤 풍격으로 작품이 전개될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작가가 수도하듯 초탈한 삶을 추구하는 모습 그대로 작품에 현현될 것으로 추측된다.
3. 전돌에 자연을 새기는 작가
기와는 지붕을 덮는 데 쓰는 건축 재료의 하나이고, 원래 흙을 구워 만들었으며 모양이 다양하나 수키와와 암키와로 크게 구분한다. 전돌은 점토로 성형하여 자연 건조시킨 날전돌과 불에 구워낸 소성(燒成)전돌로 구분되며 건축용재이다. 예로부터 무덤이나 지상 건조물의 축조에 많이 사용되었고, 지금도 기와와 함께 주요한 건축부재로 사용된다. 중국의 전돌은 전국시대(기원전 475~221)부터 무덤 축조용으로 공전(空塼)이 먼저 제작되었고, 장방형의 전돌은 서한시대 이후 묘나 성벽의 축조에 사용되었으며, 정방형의 전돌은 보도(步道)나 천장 등에 사용되면서 길상적인 문구나 여러 가지 도안이 그림으로 각인되어 화상전(畵像塼)으로 부르기도 한다.
우리나라 전돌은 삼국시대부터 제작되었다. 고구려, 신라, 백제 등 삼국마다 특색을 보이고 통일신라시대는 벽전돌, 탑전돌, 특수전돌과 연꽃무늬, 보상화무늬 등이 새겨진 전돌로 화려하고 장식성이 극치를 이루었다. 고려와 조선시대는 무늬가 없는 무문전돌이 많아졌고, 벽전돌이 많아지면서 바닥전돌은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궁전의 바닥전돌이나 무량수전의 바닥전돌은 무문전돌로 지금까지 오랜 세월을 견디고 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문자가 새겨진 문자전돌이다. 고구려 태왕릉에서 발견된 호태왕비체로 씌여진 장방형의 긴 문자전돌은 광개토대왕비 서체로 눈길을 끈다. 또한 천추총에서 기와와 함께 발견된 문자전돌은 장방형 긴 측면에 ‘천추만세 영원히 경고하다[千秋萬歲固]’와 ‘하늘과 해와 달이 다하도록 견고하게 보존하다[保固乾坤相畢]’란 여섯자씩이 새겨져 있다.
단오는 이런 문자전돌을 보고 영감을 얻으면서 무릎을 쳤다고 한다. 과거 대부분의 문자전돌은 좁은 측면에 세로로 새겨져 있다. 단오는 바닥이나 천정에 사용된 정방형의 전돌 넓은 면에 장식된 연꽃이나 다양한 문양 대신에 문자를 새기는 방법으로 전돌을 활용하고 있다. 그는 옛사람들이 전돌 위에 장식한 문양이나 그림을 문자로 바꾸었고, 문자가 전돌의 측면에 위치하여 객(客)이 되던 것을 넓은 윗면에 새겨 넣어 주(主)가 되게 재구성하였다.
이번 작품전에서 선보이는 전돌작업은 10여 년 전 어느 사찰로부터 작업제의가 있었으나 무산되어 작년 광주 무각사 로터스갤러리에서 몇 점을 선보이며 호평을 받았던 점을 상기하면서 영역을 확장하고 내용도 보강하여 미학적 완성도를 높혔다.
특히 기와 54장에 <금강경>을 새긴 뒤 탁출하여 병풍으로 꾸민 작품은 3년의 세월이 소요되었고, 전돌 210장에 전각도로 한 글자 한 글자를 새긴 <법성게>는 경전의 경건함과 작가의 예술혼이 맞물려 경이로움을 자아낸다. 아울러 옛기와에 다완을 새긴 작품들은 다완에 분청느낌을 재현한 재치가 돋보이고, <동다송 8곡병>에서는 여유롭고 한가한 붓의 느낌을 드러내고 있으며, 전돌에 새긴 <노자> 글귀에서는 도필(刀筆)의 여유로운 운치를 느끼게 된다. 이처럼 투박한 재료 위에 칼맛을 살린 문자의 꾸밈없는 소박한 자태는 오랜 수련 끝에 얻어낸 그만의 소박하고 탁월한 조형언어라고 할 수 있다.
평소 차를 즐기는 단오는 찻사발 작품이나 동다송 등 차에 관한 내용을 작품의 소재로 자주 이용한다. 예컨대 차를 좋아했던 당나라 노동(盧仝)이란 사람의 <일곱 사발의 차 노래[七碗茶歌]> 부분을 녹색의 전돌 70장에 새긴 작품에서는 작가의 소박하면서 자연스러움을 추구한 조형미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첫째 잔을 드니 목과 입술이 부드러워지고(一碗喉吻潤)/둘째 잔을 드니 고독과 번민이 사라지네(兩碗破苦悶)/셋째 잔을 마시니 마른 창자에 오직 문자 오천 권만 남아있고(三碗搜枯腸 惟有文字五千卷)/넷째 잔에 이르니 내 평생에 불평스러웠던 일들이 온몸의 털구멍을 통해 흩어지네(四碗發輕汗 平生不平事 盡向毛孔散)/다섯째 잔을 마시니 근육과 뼈가 맑아지고(五碗肌骨淸)/여섯째 잔에서 신선의 영기에 통한다(六碗通仙靈)/일곱째 잔에서는 마셔도 얻을 것이 없구나. 오직 양 겨드랑이에서 솔솔 맑은 바람이 나옴을 느낄 뿐이다(七碗喫不得 唯覺兩腋習習淸風生)”
우리는 이를 통해 다선(茶禪)일치, 서각(書刻)일치의 진면목을 가늠하게 된다. 이런 모습이 글씨는 그 사람과 같다는 서여기인(書如其人)의 진미가 아닐까 한다.
4. 작품에 투영된 자연스러움과 일획의 묘미
단오의 작품을 곰곰이 살펴보면, 재료도 그렇고, 작가의 심미의식도 그렇고, 문자의 형태미도 모두 자연스러움을 귀히 여기는 그의 작품관이 엿보인다. 그는 평소 선불교적인 삶의 방식과 노자의 도덕경을 탐독하면서 더욱 인위성을 제거한 자연성을 창작의 핵심적인 가치로 생각하고 있다. 『노자』 25장에서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으며,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고 하였듯이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작가의 창작의도는 그의 작품을 통해 감상자에게 있는 그대로 전달된다. 『노자』 1장을 새겨 탁본을 떠서 가리개로 만든 작품을 보면, 자연스러운 문자의 결구와 천진난만한 문자의 표정을 통해 해맑게 미소짓는 작가의 모습이 연상되는 게 바로 그 증거이다.
또한 작가는 서예뿐만 아니라 전각에도 일가견이 있어 누구보다 찰라에 이루어지는 칼맛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많다. 따라서 한 번 획이나 칼이 지나가고 나면 수정할 수 없는 서예와 전각의 일회성의 묘미를 살리고자 노력하였다고 한다. 당나라 장욱이 이러한 일회성을 두고 서예가의 개성과 감정은 기법을 통해 일우우서(一寓于書;하나같이 글씨에 맡김)하여야 된다고 말한 바 있다. 단오 역시 작업에 임하면 마음과 몸이 하나가 되고 잡념을 제거한 뒤 한 번에 마무리를 하는 일회성의 표현에 누구보다 능한 편이다. 그의 작품을 보면, 칼이 지나간 뒤 재료가 터져서 남은 도흔(刀痕)에 투영된 작가의 내면세계를 음미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소재와 글씨와 각이 모두 혼연일체가 되어 작가의 모습과 일체감을 이루니 가히 일가를 이뤄가는 단오의 자연스러운 미학세계는 타자가 흉내낼 수 없는 경지에 근접하였다고 보여진다. 지금처럼 앞으로도 단오예술의 무궁(無窮)과 불후(不朽)를 기원한다.
김충열 Choong-Yeol Kim
(아호:小峰, 丹悟, 海文, 聽石齋, 三隱山房)
■ 개인전
2020 제8회 개인전 (목인미술관)
2019 제7회 개인전 (서울봉은사)
2014 제6회 개인전 (순천꾼갤러리)
2012 제5회 개인전 (여수진남문예회관)
2008 제4회 개인전 (여수갤러리연)
2007 제3회 개인전 (진주채송아트홀)
2006 제2회 개인전 (광주대동갤러리)
2004 제1회 개인전 (순천문화예술회관)
■ 초대전
2023 남도정예작가10선 초대전
2022 무각사 로터리갤러리 초대전
2017 전북세계비엔날레 초대 출품
2016 학명미술관 초대전
2014 갤러리 뫼비우스 초대전
2012 국립순천대박물관 개관25주년기념 특별초대개인전
2010 남포미술관전각초대전
2009 진주죽향초대전 (천년의 차. 천년의기와)
2009 광주미술협회초대전 (광주메트로갤러리)
2007 백강미술관작가공모기획초대전
2005 호주한국문화원전각초대전
■ 단체전
2011 한·중·일국제전각교류전 (순천문화예술회관)
2010 한·중·일국제전각교류전 (제주문예회관)
2009 한·중·일국제전각교류전 (제주자연사박물관)
2008 한·중·일국제전각교류전 (전북대삼성미술관)
2007 목포문학관개관기념전각전 (목포문학관)
2006 한·중국제전각교류전 (중국인학박물관)
2004 남도인사전 (서울물파아트센터)
2001 남도인사창립전 (남도문화예술회관)
2000 한국미래서단창립전 (한국서예박물관)
■ 현재
한국미술협회회원. 단오전각연구원 주재
■ 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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