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와 나토(NATO)가 각축전을 벌이는 또 하나의 옛 소련 국가인 그루지야(조지아)의 총선이 끝났다. 하지만 정국 혼란이 이제 시작이다. 총선 결과를 놓고 집권여당 vs 대통령·야당 간의 힘겨루기가 대규모 시위로 발화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27일 그루지야 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친러시아 성향의 집권당인 '그루지야의 꿈'은 과반 득표(54%)에 성공한 것으로 전해졌다. 총 의회 150석 중에서 최소 80석은 확보했다. 비드지나 이바니슈빌리 '그루지야의 꿈' 대표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성공을 거뒀다"며 "국민의 뛰어난 현명한 선택을 보여주는 지표"라고 자평했다.
이에 친야당 무소속의 살로메 주라비슈빌리 대통령이 선거 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며 항의 시위를 촉구했다. 대통령 재임 당시 부정부패 혐의로 수감중인 그루지야의 '풍운아' 미하일 사카슈빌리 전 대통령도 야당 세력에 새 의회에 참여하지 말고 항의 시위를 벌일 것을 요청했다.
주라비슈빌리 대통령이 지지자들 앞에서 연설하는 장면/사진출처:페이스북
◇그루지야의 지정학적 딜레마
3년째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와 마찬가지로, 러-서방 간에 지정학적 충돌의 길목에 위치한 그루지야는, 나토가 지난 2008년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정상회의에서 가입(정확하게는 행동 계획 참여) 자체는 거부했지만, 우크라이나와 함께 향후 회원국으로 받아들일 것을 약속한 국가다.
물론, 그로부터 4개월 뒤 그루지야는 남오세티야 자치주의 러시아인들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침공한 러시아에 맞서 싸웠으나 곧바로 항복하고 말았다. 그루지야가 이후 우크라이나와 함께 친러, 친서방 세력간의 치열한 권력 투쟁으로 빠져든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고 할 만하다.
여야 대립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더욱 가팔라졌다. 친러 집권세력인 '그루지야의 꿈'은 이번 총선에서 "제2의 우크라이나가 될 것이냐?"며 지지를 호소했고, 친서방 야당 세력은 "이제는 러시아 종속에서 벗어나 유럽의 미래, 자유로운 서방 세계(예컨대 EU 가입)로 가자"고 주장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선거 결과를 놓고 두 세력이 충돌하는 것은 정해진 코스다. 서방측 인사들로 구성된 민간 국제 선거감시 단체가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고, 유럽연합(EU)이 신속한 의혹 규명을 촉구하기에 이르렀다.
정치적으로 급한 쪽은 주라비슈빌리 대통령이다. 총선 직전, 여당이 승리하면 대통령직 퇴임후 감옥에 갈 것이라고 야당 지지를 호소한 그녀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국민들에게 "28일 오후 7시에 수도 트빌리시에서 열리는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당초 친러 성향의 대통령 후보였으나,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된 그녀는, 정부 형태가 2020년 대통령제에서 의원내각제로 바뀌면서 실권을 의회 다수당 출신인 총리에 내준 명목상의 국가 수반이다.
4개 주요 야당 등 야권도 기대와는 다른 개표 결과가 나오자, 부정 선거로 나온 총선 결과를 수용하지 못하겠다고 반발했다. 야당인 '변화를 위한 연합'의 니카 그바라미아 대표는 "이것은 헌법적 쿠데타"라고 비판했다.
유럽안보협력기구(OSCE)와 미국의 비영리단체인 국제공화연구소(IRI), 국가민주주의연구소(NDI) 등 국제 선거감시 단체는 투표 과정에서 투표함 조작과 뇌물 거래, 유권자 위협, 신체적 폭력 등 심각한 위법 행위가 있었다고 거들었다.
그루지야 의회/사진출처: verelq.am
유럽의회 측에서 파견된 OSCE 관계자는 "조지아의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는 데 대해 깊은 우려를 계속 표명한다"며 "전날 선거 상황이 안타깝게도 그 증거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루지야 선관위는 이번 선거가 평화롭고 자유로웠으며, 국제 기준에 따라 진행됐다고 반박했다. 그루지야 선거 감시 단체인 '공정 선거 및 민주주의를 위한 국제사회(ISFED)'는 "200건 이상의 선거 관련 민원이 접수됐다"고 밝히면서도 "대부분의 개표가 이뤄진 전자 개표(특수 기기로 투표와 개표가 동시에 이뤄지는 시스템/편집자)에서는 중대한 위반 사항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27일 '그루지야의 꿈'의 총선 승리 소식을 전하면서 "총선이 대규모로 조작됐다는 확실한 증거는 아직 없으며, 서방의 어느 누구도 아직 그루지야 당국을 직접 비난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EU 측은 부정 선거 의혹을 조속히 규명하자구 촉구한 상태다.
이 매체가 부정 선거 의혹의 배척 요인으로 든 첫번째 요인이 투표소에 설치된 특수 전자 기기(서방 외신은 이를 전자 개표 시스템이라고 했다)다. 유권자가 투표용지를 복사기처럼 생긴 이 기기에 넣으면, 즉시 스캔돼 투표 결과가 집계되는 시스템이다. 이번 총선에서는 수도 트빌리시 등 전국 곳곳의 투표소에 투표함 대신 이 특수 기기가 설치됐다.
투표 완료후 이 기기는 마치 영수증을 뽑아내듯이 투표 결과와 정당별 득표 상황을 알려준다. 스트라나.ua는 "이 기기는 야당이 주장하는 투표 조작을 믿기 어렵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그루지야 총선에서 투표함 대신 설치된 투표및 개표 전자 기기/사진출처:스트라나.ua
그루지아 총선에 관한 OSCE 보고서도 비판적인 어조로 작성되었지만, 야당이 주장하는 대규모 투표 조작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는 담지 못했다. 보고서는 "유권자에게 후보자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었으며, 후보자는 대체로 자유롭게 선거운동을 할 수 있었다"며 "적극적인 유권자 참여, 시민 및 정당 참관인의 감시 활동 등이 있었다"고 썼다. 그러나 "이번 선거를 국제 민주주의 원칙에 부합시키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총선 후 정국 동향, 여야 충돌 위기?
야권은 총선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28일 트빌리시에서 대규모 시위를 준비하고 있다. 여차하면 대규모 유혈사태가 벌어질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스트라나.ua는 "그루지야의 꿈이 집권한 지난 10년간, 트빌리시에서 여러 차례 시위가 있었지만, 집권당을 흔들지는 못했다"고 돌아봤다. 시위는 대규모 군중이 모여 정부를 규탄한 뒤, 정부 기관의 점거를 시도했지만, 번번이 당국의 무력 진압으로 실패했다. 이번 시위도 같은 길을 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야권은 또 사카슈빌리 전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새 의회에 참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루지야 헌법 제38조에 따르면 재적 의원의 3분의2, 즉 150명 중 100명이 새 의회 개원에 참여해야 이전 의회가 해산된다. 그루지야 꿈이 확보한 80석의 의원들로는 새 의회를 소집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일부 야당이 새 의회의 개원에 동의할 여지는 남아 있다. 설사 새 의회가 개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루지야의 꿈은 여전히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다. 총선 이전처럼 여전히 의회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루지야의 과거 시위 모습/사진출처:영상 캡처
그루지야가 총선 후유증을 극복한다면, 이번 총선이 옛 소련권 국가들에게 주는 의미는 간단하지 않다. 러시아와의 전쟁에 말려들지 않고, 우크라이나의 운명을 반복하지 않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는 점을 주변 국가의 지도부와 국민들에게 각인시켜줬다.
산두 몰도바 대통령이 대선과 함께 유럽과의 통합(EU 가입)을 묻는 국민투표에서 사실상 패배한(찬성이 반대보다 약간 많았다) 것도 주변 국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산두 대통령은 러시아와 전쟁 위험을 부추기고 있으며, 몰도바는 러시아와 유럽, 우크라이나 등 모든 국가들과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야당 측 주장이 유권자들에게 먹혀든 결과다. 이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에는 옛소련권 국가들에게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정치적 구호이자, 민심을 흔드는 요소가 됐다.
스트라나.ua는 "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 인근 국가들에서 친서방 정책을 시행하는 데 점점 더 큰 문제를 안겨주고 있다"며 "전쟁이 길어질 수록 문제는 더욱 커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뒤돌아서서 웃는 러시아?
그루지야 여당의 재집권은 카프카스(코카서스) 지역에서 정치·경제적 대변혁을 일으킬 수도 있다. 대표적으로 러시아 주도의 국제남북회랑(INSTC) 프로젝트를 들 수 있다. INSTC는 러시아, 이란, 인도 등 회원국 간 운송 협력 촉진을 목표로 설립된 7,200㎞ 길이의 복합 운송망이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모스크바, 이란의 테헤란·반다르아바스·차바하르를 거쳐 인도로 이어진다. 지난 2000년 러시아, 인도, 이란이 이 프로젝트 추진에 관한 협정을 맺은 뒤, 2022년 비준 절차를 마쳤다. 2022년 6월에는 러시아와 인도의 운송 기업이 시험 운송을 시작하기도 했다.
INSTC는 수에즈 운하를 거치는 기존 항로에 비해 운송 시간과 비용을 30~50% 줄일 수 있다고 한다. 미 블룸버그통신은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러시아를 고립시키려는 상황에서 이 운송망은 러시아를 국제 무역의 중심에 편입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그루지야의 꿈'이 권력을 유지한다면 카프카스 지역에 지정학적 큰 변화가 찾아올 수도 있다. 크렘린은 2008년 전쟁으로 장악한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 자치공화국을 그루지야로 돌려줄 의향을 내비칠 수 있다. 협상을 잘 하면, 집권 여당 대표인 이바니쉬빌리는 우크라이나와 달리, 러시아와 전쟁이 아니라 협상을 통해 그루지야의 옛 땅 회복을 발표할 수도 있다.
그 대신, 모스크바는 카스피해를 통해 터키와 유럽으로 석유를 운송하는 물류망 확보에서 그루지야의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국제남북회랑 건설 프로젝트를 통해 러시아와 이란를 잇는 육로가 예상보다 빨리 현실화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최근 러시아에 등을 돌리기 시작한 아르메니아를 겨냥한 전략적인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다. '그루지야의 꿈' 재집권으로 아르메니아는 적대국(아제르바이잔과 튀르키예)이나, 러시아의 동맹국(이란과 그루지야)에 완전히 둘러싸이게 된다. 지정학적 압박감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러시아만이 옛 소련 붕괴후 인근 국가의 안보와 영토 보전을 보증할 수 있다는 메시지다. 서방 측은 이같은 흐름을 달가워할 이유가 없다. 부정 선거를 고리로 야당을 부추길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총선 이후 그루지야 정국의 앞날을 예측하기 힘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