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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1. 묵상글 (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 초월 싸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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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1.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초월 싸움
오늘 베드로 사도는 자기들이 명령한 대로 하지 않는다고 하는 시도자들에게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라고 합니다.
이 말을 묵상하면서 저는 이렇게도 묵상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사람들에게 순종치 않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라고.
이 말은 베드로 사도가 사람에게 순종하지 않겠다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 교만한 사람이 아니고 사람에게도 순종하는 겸손한 사람인데
다만 하느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사람에게 불순종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대통령이 옛날에 자기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고 얘기했습니다.
그 말이 멋있었고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를 훌륭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아마 대통령이 된 것도 이것 때문일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되고 난 뒤의 그를 보면 아무에게도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고,
모두가 자기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교만이 하늘을 찌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진정 훌륭한 사람은 순종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진정 훌륭한 사람은 가장 낮은 사람에게도 순종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순종에 관해 얘기하면 자기는 갓 들어온 수련자에게도
순종할 채비가 되어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사람에게 불순종할 경우는 딱 한 가지 경우입니다.
하느님 뜻과 다를 경우입니다.
우리가 받들어야 할 분은 가장 높으신 분,
하늘에서 오시고 모든 것 위에 계신 분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우리 신앙인이란 이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 살아도 이 세상에 섬기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살지만, 땅에서 난 사람들과 달리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이 세상을 초월합니다.
이것은 세상에 대한 무관심이나 정치 무관심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 세상이나 정치에 매몰되지 않으려고 함입니다.
일찍 자는 저는 어제 개표 결과를 보지 않고 잤고,
지금 저는 선거 결과가 어떨지 궁금하지만 확인치 않고 있습니다.
이 세상 문제에 너무 매몰되지 않으려고 일종의 초월 싸움을 하는 겁니다.
세상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그러니까
세속화되지 않으면서 복음화하기 위해서만 세상에 내려가기 위함입니다.
세상에 관한 관심과 무관심 가운데서 초월 싸움을 하면서,
주님과 사도들처럼 그리고 프란치스코와 성인들처럼
진정 복음을 들고 세상 가운데로 들어가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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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1.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지혜로운 현자가 길을 걷다가 누군가와 부딪혔습니다. 부딪힌 그 사람은 불같이 화를 내며 현자의 뺨을 가차 없이 때렸습니다. 그리고 큰 싸움을 벌일 험악한 기세를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현자는 실랑이가 벌어지자 곧바로 마음을 가라앉혀 싸움을 피했습니다. 때린 사람도 자신이 너무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현자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현자는 사과를 받아들였을까요? 저는 사과를 받아들였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예상과 달리 현자는 사과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맞은 기억이 없소.”
현자는 맞은 기억이 없기에 사과를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는 것이고, 이로써 나쁜 기분을 안고 가는 것도 거부한 것입니다.
상대의 말과 행동에 상처받은 일이 자주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공격에 일일이 대응하는 데 드는 힘이 얼마나 많이 듭니까? 오히려 당장 패배를 인정하는 편이 훨씬 더 지혜로운 모습입니다. 대응하는 것이 정당해 보이지만, 대응한다고 해서 상대가 항복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의 삶은 절대 손해 보는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손해를 줄여주고 함께 사는 힘을 마련해 줍니다. 큰 이득을 얻을 때가 더 많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도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패배인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 죽음이 있었기에 부활이 가능했고, 우리에게 커다란 희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사랑에 집중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절대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은 이제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절대’라는 말에 걸려 넘어져서 커다란 손해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 위에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께 모든 권한 주셨지요. 따라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만이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께 집중하는 것이 나에게 가장 유익한 것입니다.
예수님께 집중하는 사람은 결코 예수님의 말씀과 그 뜻을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의 시선을 외면하고 대신 주님께 집중할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안에서 모욕당하고, 세상 안에서 단죄받는다고 해도 억울할 필요 없습니다. 주님께서 원한 생명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들고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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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청렴은 백성을 이끄는 자의 본질적 임무요, 모든 선행의 원천이요, 모든 덕행의 근본이다(다산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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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1.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3,36)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증언하여 말합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3,36)
왜 그럴까? 왜 그분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그분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얻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졌다고 누구나 내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가진 것을 기꺼이 내어주시는 것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곧 그분의 신원과 그분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신원을 “위에서 오시는 분”, “하늘에서 오신 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고 반복해서 증언합니다. 곧 아드님(예수님)은 위에서 오신, 보내진 사랑입니다. 여기서, ‘위’ 혹은 ‘하늘’이란 단순히 하늘과 땅, 위와 아래라는 상대적인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 이’와 ‘오신 분’이라는 차이, 곧 본질적으로 다른 절대적인 차이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는 ‘태어난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태어난 이”가 아닌, 우리와는 전적으로 다른 “오신 분”, 곧 태어나지 않은 영원한 생명이신 분이십니다. 그것은,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분, 곧 우리를 넘어서 계시는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그분을 받아들이는 데는 이해를 넘어선 믿음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믿음”은 단지 자신을 열고 그분을 받아들이는 내면적인 응답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자신을 그분께 바치는 ‘행위’를 동반합니다. 곧 응답을 통하여 자신을 건네 드리는 실천적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믿음은 두 가지 차원’을 지니고 있습니다(게르하르트 로핑크의 “믿음의 재발견”). 곧 정해진 내용을 믿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차원인 ‘하느님께 성실함’을 뜻합니다. ‘성실함’(믿음이나 성실함은 다 같이 히브리어 “에무나”를 쓴다)은 “하느님께 자신을 고정하다.”, “하느님을 붙들고 놓지 않다.”라는 뜻으로, 구체적인 의미로 ‘순전한 헌신’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믿음’은 하느님께 성실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성실하심에 자신을 고정하는 일이요, 자기 자신에게서 하느님의 것으로 온전히 돌아서는 철저한 헌신을 토대로 하는 방향전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credo)라는 단어 역시, 자신의 심장, 생명, 곧 자기 자신을 건너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cro;심장, 생명’+dare;주다).
그러기에, “믿음”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그분과의 인격적인 결속을 의미합니다. 결국, 우리가 믿는 것은 하느님께서 세상 한가운데서 행동하시며, 오늘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서 행동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받아드리며, 실제로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믿는 이에게서는 이미 신적인 삶이 이루어지게 되는 일입니다. 곧 ‘오신 분’이 이미 ‘와 계신 분’이 되고, ‘이미’ 신적인 삶이 이루어지게 되고, 영원한 생명이 곧 현재가 되고, 현세에서 ‘이미’ 하늘나라의 생명을 살게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가 말한 대로, 우리는 땅에 발을 딛고 있지만 “하늘의 시민”(필리 3,20)이 됩니다. 땅에서 부활의 기쁨을 사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해서 세상으로부터 도망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요한 3,31)
주님!
항상 당신을 머리 위에 두고 살게 하소서.
당신 머리 위에 올라 당신을 조정하지 않게 하소서.
제 이성 위에 지혜로 계시고, 제 판단 위에 자비로 계시소서.
오늘도 당신에 신비, 그 놀라움 우러러 주님이신 당신을 찬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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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1.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홀만 헌트의 ‘세상의 빛’성화입니다
문 두드리는 예수님이십니다. 이 그림은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3,20).는 말씀에 기초하여 그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십니다. 그런데 문을 보면 문고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문 바깥쪽에서는 열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면서 문을 두드릴 때 결정적으로 내가 문을 열어드려야 합니다. 그리하면 빛 이신 주님께서 들어오셔서 내 마음의 모든 어둠을 몰아내시고 나를 변화시켜 주십니다. 문을 열고 열지 않는 것은 자유 의지로 내가 선택할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한없는 은총을 주시려고 해도 내가 협력하지 않으면 선물을 담을 수 없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께 다가와 문을 두드렸을 때, 성모님께서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여셨습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모두 주님께 맡기고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고 하셨습니다. 이리하여 성모님은 “여인 가운데서 가장 복되신 분”이 되셨습니다. 우리 마음의 문도 항상 열려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마음껏 당신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집회서에 보면,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이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16-15-17).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선택은 자유이지만 결과는 너무도 다르기에 신중한 처신이 요구됩니다. 죽음도, 생명도 지금 여기서 결정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 생명이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사실 미래의 생명은 지금 살고 있는 이 생명의 완성입니다.
그러나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늘에서 오신 분이 모든 것 위에 있으면서 그분이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하느님의 진노가 그들 위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자업자득입니다. 목이 마른 사람에게 우물이 있는 곳을 알려주어도 자기가 마시지 않으면 그림의 떡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땅에서 난 사람은 위에서 오신 분, 아버지의 모든 것을 받고 오신 분, 아버지의 사랑받는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곧 하느님의 말씀과 권능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믿음 안에 하느님의 아드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말씀을 읽고 성체를 모실 때마다 영생을 기뻐하고 또 그 기쁨을 전해야 합니다. 좋은 것을 혼자만 누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고,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을 모시는 영성체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활동하시도록 하면 할수록 나를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더 큰 영광을 받게 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땅에서 난 사람은 하늘의 삶을 갈망하고, 지금으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지금 자신의 영혼 사정을 돌보지 않는다면 영원한 생명보다 멸망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선택은 자유지만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으나 뽑히는 사람은 적다”(마태22,14).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으로 초대받았지만, 결코 아무나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는 기쁨을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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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1.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대한민국에서는 ‘제22 대 국회의원’선거가 있습니다. 지역구 254석과 비례대표 46석을 뽑는 선거입니다. 저도 재외국인 투표 등록을 하였고, 지난 3월 31일에 투표를 하였습니다. 선거에서 중요한 것은 3가지라고 합니다. 첫 번째는 ‘구도’입니다. 여당은 국정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지지를 호소합니다. 야당은 민생과 경제, 국방과 외교의 현안들에 대해서 잘못된 것들이 있으니 견제와 심판을 할 수 있도록 지지를 호소합니다. 때로는 이 구도에 안보와 이념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른바 ‘북한변수’라고 합니다. 대통령의 지지율이 높으면 여당의 구도가 유리하게 작용합니다. 대통령의 지지율이 낮으면 정권을 심판하자는 야당의 구도가 유리하게 작용합니다. 두 번째는 ‘정책’입니다. 대통령은 ‘민생토론’이라는 명목으로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규제를 완화하고, 개발을 약속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천문학적인 예산이 소요되기도 합니다. 정부는 민생토론이라고 하였고, 야당은 대통령의 선거개입이라고 하였습니다. 후보들은 지역의 현안들을 해결 할 수 있는 정책을 발표합니다. 현실성이 있고, 창의적인 정책을 가진 후보들이 선택을 받을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인물’입니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공천’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참신한 인물을 후보로 내세웁니다. 시스템에 의해서 능력 있고, 인품이 있고, 헌신할 수 있는 후보를 공천하는 정당의 후보가 당선될 확률이 높습니다. 무엇보다 깨어있는 시민들의 투표가 국가와 주민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국회의원을 선출할 것입니다.
사제는 ‘선출’되는 직무가 아닙니다. 사제는 ‘성사’를 통해서 임명되는 직무입니다. 교회는 사제에게 3가지 직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사명을 줍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셨던 사명과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3가지 사명을 주셨습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고,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것은 ‘제사직’입니다. 사제는 성사를 통해서 악의 세력을 물리칩니다. 미사를 통해서 사제와 교우들은 예수님의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고백성사를 통해서 죄를 사함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충실하게 살게 됩니다. 교회의 전례와 성사에 충실한 이들은 악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병자를 고쳐주는 것은 ‘봉사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늘 ‘겸손과 봉사’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낮은 자제로 봉사에 충실한 사제와 교우들이 있는 성당은 친교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예언직’입니다. 예언직은 앞날을 미리 알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직은 시대의 징표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시대의 징표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교황님은 ‘복음의 기쁨, 찬미받으소서, 모든 형제들’과 같은 문헌을 통해서 시대의 징표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교회가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였습니다. 하나뿐인 지구를 보호하는 것,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 것, 하느님의 영광을 먼저 찾는 것이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에 젖어있는 이 시대에 교회가 드러내는 예언직입니다.
오늘 성서말씀은 신앙인들이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현실의 삶에서 손해 볼 때도 있습니다. 박해와 시련이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신앙인은 사람에게 순종하기 보다는 하느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화답송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가까이하시고, 영혼이 짓밟힌 이를 구원해 주신다. 의인이 몹시 불행할지라도, 주님은 그 모든 불행에서 구하시리라.”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우리는 세상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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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1.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부활로서 그리스도께서는 닫혔던 하늘의 문을 여셨습니다. 아담 이후 낙원에 들어갈 수 없었던 인간은 그리스도의 순종과 부활로 다시 낙원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복음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그리스도는 하늘의 문이십니다. 그리스도를 통과하지 않고 우리는 낙원에 들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리스도라는 문을 통과할 수 있을까요? 무엇으로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문을 지나 낙원에 들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걸으셨던 모든 것이 낙원으로 가는 길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이 기도하셨던 그 모습이 하느님 아버지를 만나는 모습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사랑을 실천했던 그 모든 모습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분이 가신 길을 같은 모습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신 그분의 모습을 믿는 것입니다.
복음은 이런 믿음이 모습과 반대되는 모습을 조심하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이 ‘순종’의 모습이었다면 ‘불순종’의 모습을 조심하라고 말합니다. 불순종의 모습은 생명을 보지 못할 것이라 말합니다. 여기에서 생명은 바로 하느님 아버지를 의미합니다. 그분이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라갑시다. 그분의 걸었던 길을 걸어갑시다. 그분의 말씀을 믿고 그분이 걸었던 그 발걸음을 따라 걷는다면 우리도 낙원에 들어 생명, 즉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할 수 있음을 믿읍시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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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와 복종
권위와 복종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권위와 복종이 떨어져 있으면 한 사람은 독재적인 행동만을 하고 다른 사람은 현관에서 남의 신발을 터는 일만 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권위와 복종 둘 다 쓸모없게 됩니다.
복종해야 할 사람이 없이 권위만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영적으로 커다란 위험에 처해있는 사람입니다. 누구에게도 권위를 지니지 못하고 복종만 지닌 사람도 영적으로 위험에 처한 사람입니다.
주님은 강력한 권위로 말씀하셨지만, 그분의 전 생애는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완전한 복종의 생애였습니다.
주님은 복종으로서 모든 권위를 받으셨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요?
복종하는 가운데 권위의 삶을 살고 있는지요?
또 권위를 지닌 채 복종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요?
-헨리 나우엔의 영혼의 양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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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1.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 것인가?
-예닮의 여정-
“주님을 믿어라, 주님을 사랑하라”
“내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그 찬미가 항상 있으리라.”(시편34,1)
어떻게 살 것인가? 강론때 자주 인용했던 물음입니다. 답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입니다. 사람은 절대 혼자서는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사람이 물음이라면 예수님은 답입니다. 바로 예수님을 따라 닮아갈 때 비로소 참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이 우리 믿는 이들의 고백입니다. 예수님 없이는 물음만 있고 답이 없어 도저히 사람이 될 길이 난망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파스카 예수님이야 말로 우리가 하느님을 만날 유일한 통로입니다. 파스카 예수님이야말로 우리 삶의 목표와 방향, 우리 삶의 중심이자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36년동안 성 요셉 수도원에 정주하면서 가장 많이 바라봤던 게 아마 수도원 배경의 하늘과 불암산일 것입니다. ‘하늘과 산’은 제가 참 많이 인용했던 자작 애송시입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1997.2
하늘과 산은 파스카 예수님과 우리 각자의 관계를 말해줍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에 날로 예수님과 깊어지는 우정 관계를 상징합니다. 죽을때까지, 살아있는 그날까지 계속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중의 우리들입니다. 과연 날로 계속 예수님과 깊어지는 우정관계인지 자문하게 됩니다. 오늘 요한복음 사가가 전하는 예수님에 관한 묵상내용이 우리의 신원 이해에 큰 도움이 됩니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바로 위에서 오시는 분이, 하늘에서 오시는 분이, 모든 것 위에 계시는 분이 우리의 평생 주님이자 스승이신 파스카의 예수님입니다. 반면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한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 이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희망이 있습니다. 주님과 깊어가는 우정의 일치의 여정이 날로 위에서 오시는 하늘이신 예수님을 닮아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날마다 참여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사람이라 다 똑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평생을 살아도 욕망따라 살다보면 자기를 잃고 괴물도 야수도 악마도 될 수 있고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폐인도 될 수 있습니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요 잘못 미치면 폐인이다” 제 지론이기도 합니다. 역시 오늘 다산 어른의 말씀입니다.
“삶에서 무엇을 추구했느냐에 따라 죽음의 무게도 달라진다. 태산과 같은 죽음이 있고, 깃털과 같은 죽음도 있다.”
하느님을 추구했느냐 세상 것들을 추구했느냐의 차이일 것입니다.
“탐욕스러운 사람은 재물을 위해 죽고 열사(烈士)는 명예를 위해 죽는다”
어제 읽는 어느 초대 교부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거룩한 몸은 영적이며 빛이라, 당연히 위로 향합니다. 세상의 몸은 무겁고, 언제나 아래로 처집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영적인 것들을 붙든다면, 그것들은 여러분을 위로 데려갈 것입니다. 여러분이 세상 것들을 붙든다면, 그것들은 여러 분을 아래로 데려갈 것입니다.”
그래서 자나깨나 위에서 오시는, 하늘에서 오시는 파스카 예수님과의 우정을 깊이하자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오늘 복음 말씀도 고무적이요 힘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위에서 오시는, 하늘에서 오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 파스카의 예수님을 믿는 이들에게, 사랑하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선물이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땅위에 살지만 예수님과의 날로 깊어지는 우정관계로 이미 땅위에서 하늘나라의 삶을 사는 이들이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사도들이요 교회의 무수한 성인들입니다.
보십시오. 예루살렘 최고회의에서 대사제가 신문할 때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주님을 증언하는 사도들은 땅에서 살지만 천상에 사는 신원임을 드러냅니다. 땅위에서 이미 천상의 하늘나라를 체험하며 살기에 사도들의 샘솟는 용기에 확신에 찬 힘찬 증언입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분을 영도자와 구원자로 삼이 당신의 오른쪽에 들어 올리시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사도들의 핵심 선포내용이요 짧은 요약의 설교입니다. 예수님과 얼마나 깊은 일치의 친교관계에 있는지 깨닫습니다. 이런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에서 가능한 자발적 사랑의 순교입니다. 사랑의 순교는 사랑의 성체와의 결합입니다. 바로 오늘 기념하는 폴란드의 수호성인인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 순교자가 그 빛나는 모범입니다.
성인은 1030년에 태어나 1079년에 순교하셨으니 49년 생애를 사셨습니다. 저는 성인들을 기리는 미사를 봉헌할 때 마다 반드시 성인들의 생몰연대를 들여다 보며 제 나이와 비교해 보며 분발의 계기로 삼곤합니다. 스타니슬라오는 ‘국가와 영광’이라는 뜻입니다. 후에 주교가 된 스타니슬라오는 잘못됨이 있으면 아무리 권세가 높아도 두려움없이 책망하고, 신자들이 종교적 생활에 열심토록 했으며, 먼저 솔선수범해 좋은 모범을 보여줬습니다.
성인은 열심히 기도하며 재를 지키고 엄한 고행을 행하고 자선사업에 힘쓰며 성스러운 생활을 보냈으므로 사람들은 진심으로 그의 덕에 감복해 감히 그의 말에 거역하는 이가 없었다 합니다. 주교는 뛰어난 언변으로 왕과 농민들의 죄악, 특히 역사상 폭군으로 유명한 블레슬라우 2세 왕의 부도덕한 행동과 불의한 전쟁을 꾸짖었고, 왕은 스스로 사과하고 참회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다시 과거와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합니다.
스타니슬라오 주교는 반역죄로 사형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공개적인 반대를 계속했고 마침내 왕을 파문합니다. 이에 1079년 5월8일 스타니슬라오 주교가 성 미카엘 소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을 때 왕은 부하 병사들과 잠입하여 창검을 휘두르며 주교를 직접 살해 합니다. 백성들은 주교의 용감한 순교의 태도를 보고 성인으로 공경하고 왕을 부당한 자로 낙인찍어 폐위시키고 국외로 추방합니다.
헝가리로 도망갔던 블레슬라우 2세는 아마도 헝가리에 있는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참회하며 남은 일생을 보냈던 듯 합니다. 1253년 교황 인노첸시오 4세로부터 시성된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는 폴란드 국민의 상징이자 수호성인이 되었습니다. 순교하기 까지 예언직에 충실했던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 역시 예수님의 훌륭한 제자였습니다.
예수님과의 깊은 친교로 땅에서 살았지만 예수님처럼 하늘에 속한 하늘나라를 사셨던 분임이 분명합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예닮의 여정중, 날로 깊어가는 예수님과의 우정과 더불어 지상천국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가까이 하시고,
넋이 꺾인 이들을 구원하신다.”(시편34,1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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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1.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늘 땅 우리 님>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요한 3,31)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3,36)
하늘에서
땅으로
우리 님
오시니
하늘은
땅의 하늘이요
땅에서
하늘로
우리 님
맞으니
땅은
하늘의 땅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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