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대 출신 이현숙씨는 자신이 태어난 140년 된 서당 학이재를 캔버스 삼아 정원을 가꾸며 살고 있다. 아직 소문 나지 않았지만 알음알음 찾아오는 이들을 위해 언제나 문을 활짝 열고 있다. |
한낮의 국도는 정속주행을 해도 눈치 볼 일이 없다.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열었다. 흙내가 훅 하고 들어온다. 가뭄 끝에 내린 비는 달달했다. 저 멀리 논에 물꼬를 보는 촌로(村老)의 굽은 허리 뒤로 안도의 미소가 숨어 있으리라. 상상만으로도 하늘님이 고맙다. 그나저나 이젠 뜨거운 태양과 맞서야 하는 진짜, 여름이다. 이즈음이면 산과 바다를 놓고 피서지에 대한 고민이 깊어진다. 더위를 피하고 휴식을 취하는 게 목적이라면 단연 산이다. 그런 의미에서 올여름은 산청이다.
정겨운 골목과 정원
산청! 한자로는 ‘뫼 산(山) 맑을 청(淸)’을 쓴다. 두말할 것 없이 산청은 산 좋고 물 맑은 고장이다. 이 고장만큼 이름값 제대로 하는 곳이 또 있을까 싶다. 민족의 영산(靈山) 지리산의 주봉인 천왕봉(1915m)이 산청 땅에 있다.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산 208번지가 천왕봉의 주소다. 지리산에 깃든 수많은 골짜기에서 흘러들어와 하나로 합쳐진 경호강이 산청 땅 구석구석을 적신다. 생명의 원천인 물은 삶의 터전을 일구었다. 지리산이 주는 최고의 복을 누리는 고장, 산청으로 향한다.
평일 한낮 산청 읍내는 한가로웠다. 산청 사람들에게 지리산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60년째 문을 열고 있는 산향이용원 오삼원(78)씨는 “지리산은 우리 산청 사람들 밥줄이지. 가뭄도 없어. 사철 물이 철철 넘쳐 흐르니까. 그게 다 지리산 덕분 아니겠어”라며 읍내 취재를 하고 있다는 나에게 산청읍내가 한눈에 다 내려다보인다는 꽃봉산에 올라 보길 권했다.
군청에서 마주 보이는 옥산리의 해발 236m 꽃봉산은 산청읍 사람들의 산책로다. 골프연습장을 지나 금강도약수터 뒤로 난 길을 따라 20여분 오르면 전망대에 도착한다. 1000m급 산이 즐비한 주변에서는 낮은 뒷동산 수준이지만 조망 하나는 거칠 것 하나 없이 시원하다. 발 아래 경호강이 산청읍을 감싸 흐르고, 서쪽의 천왕봉을 필두로 남쪽의 웅석봉, 동쪽의 황매산이 빙 둘러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짧은 수고에 비해 이런 과분한 풍경을 만날 수 있다니. 오삼원씨가 추천한 이유를 알 것 같다. 길을 되짚어 다시 읍내로 향한다.
산청읍의 중심도로는 웅석봉로이며, 중앙로와 꽃봉산로는 이면도로라고 보면 된다. 읍의 서북쪽으로 군청과 경찰서가 나란히 붙어 있고 그 앞으로 주택가와 상권이 형성되어 있다. 중심가를 기준하면 동서, 남북 각 1㎞ 내외로 걸어서 반나절 정도면 돌아볼 수 있는 규모다. 일단 지리를 파악하고 보니 산청읍 기행의 절반은 이룬 셈이다. ‘강삼수경위길’이란 도로명이 독특해 따라가 보았다. 경찰서 앞에서 시작해 우측 골목을 따라가면 경찰서 뒤쪽 경호강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다. 경찰서와 군청 뒷길로 이어지는 ‘강삼수경위길’은 본래 중앙로 일부였던 것을 지난해 10월 6·25전쟁 당시 산청경찰서 사찰 유격대장을 맡아 북한군으로부터 주민과 지리산을 지키는 데 큰 공을 세운 산청군 출신 강삼수 경위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명예도로명이 부여됐다고 한다. 강삼수경위길을 걷다 보면 나지막한 언덕 위 느티나무 숲길을 지난다. 꽃봉산과 함께 읍내 주민들의 여름 쉼터다.
강삼수경위길을 뒤로하고 꽃봉산로61번길을 따라 군청 앞으로 내려섰다. 관광지하고는 거리가 먼 읍내에 게스트하우스 간판이 보인다. ‘난나’란 이름이 독특해 들어갔더니 4년 전 산청으로 귀촌했다는 김제식(57)·조영진(54) 부부가 7월 중 오픈을 목표로 한창 막바지 공사를 하고 있었다. 잠시 쉬어갈 겸 부부의 귀촌 이야기를 들어 본다.
“아이가 어릴 적에 산청 여행을 많이 왔어요. 특히 여름휴가는 거의 산청에서 보냈죠. 그때마다 늘 우리 아이가 대학생이 되면 꼭 산청에 내려와 살고 싶다는 상상을 했는데, 그런 거 있잖아요. 상상만으로도 흐뭇한 기분이 드는 거. 근데 누가 알았겠어요. 진짜 산청 주민이 됐잖아요.”
남편이 퇴직할 무렵 아들이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는 주저 없이 늘 꿈꾸던 산청으로 내려왔다.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일단 가면 뭔가 할 일이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김제식씨는 담담하게 이야기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현재는 토마토 농사를 짓고 있다. 카페와 게스트하우스는 조영진씨 담당이다. 부부는 여행자의 입장에서 여행자의 집으로 꾸며 보고 싶다고 했다. 귀촌을 희망하거나 소란스럽지 않은 잔잔한 소읍의 일상을 경험해보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집이다.
100년 넘은 툇마루집
“산청 읍내에서 정원이 제일 아름다운 집일 걸요.” 군청 뒤 느티나무 숲에서 만난 주민이 추천한 ‘어머니의 정원’을 찾아간다. 이 집은 이름 그대로 어머니가 평생 가꾼 정원을 개방해 그의 아들이 콩국수집 간판을 걸었다. “여기가 우리 집에서 제일 좋은 명당 자리야. 앉아 봐.” 집주인 김점악(82)씨가 이끈 100년이 넘었다는 한옥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온갖 야생화로 가득한 정원을 내려다보는 맛이 가히 일품이다. 집주인은 매년 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꽃씨 나눠주는 일을 십수년째 하고 있다. 동네에서는 이미 ‘꽃씨 할머니’로 유명하다. 야생화가 가장 아름다운 계절인 6월부터 8월 말까지만 영업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어머니의 정원’ 앞 한마음공원과 나란히 이어지는 꽃봉산로79번길로 들어섰다. 흑돼지삼겹고추장구이로 유명한 춘산식당을 비롯해서 다방과 음식점이 즐비하다. 지금은 뒷골목 분위기지만 예전에는 산청읍에서 가장 번화했던 골목이다. 군청 앞에서 시작해 산청초등학교를 지나 산청도서관 앞까지 이어진다. 이 골목의 터줏대감 윤주현(80)씨의 인쇄소는 40년 동안 한자리를 지켰다. “군청 일을 도맡아 하던 시절이 있었지. 이젠 저 인쇄기도, 나도 늙었어. 지금은 동네 사랑방이야. 일 없다고 내가 문을 안 열면 저 영감들 갈 데도 없잖아.” 허탈한 웃음을 짓는다. 관공서 주변이라 밤을 새는 날이 허다했다는 기계식 인쇄기는 멈춰선 지 오래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인쇄 기술을 따라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골목에는 주인이 바뀐 경우는 있지만 수십 년 한자리를 지킨 음식점이 여럿 있다. 주로 오래된 상점들이다. 카페나 체인점 같은 상점들은 한 블록 너머 웅석봉로에 집중돼 있다.
읍내를 벗어나 경호강을 건넜다. 군립공원인 웅석봉 자락 수선사로 향한다. ‘명산대찰’이라 했던가. 지리산에는 걸출한 절집이 많다. 하지만 수선사는 여염집 정원 같은 분위기의 마당과 연꽃이 둥둥 떠 있는 연지가 아름다운 절집이다. 입구의 현대식 건물 옥상에는 카페가 있고, 연못을 내려다볼 수 있다. 대웅전 앞마당은 넓은 잔디밭이다. 흔히 보는 절집의 무거운 침묵과는 다른, 정원이 잘 가꾸어진 찻집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방문한 때는 연꽃이 아직 개화 전이었지만 지금쯤이면 활짝 꽃을 피웠을 것이다.
다시 읍내로 나와 3번 국도를 타고 20여분 거리의 단성면으로 이동했다. 2000여㎡(600여평)의 라벤더 꽃밭을 꾸미고 자신이 태어난 서당 ‘학이재’를 캔버스 삼아 그림을 그리듯 가꾸고 있다는 이장호(59)·이현숙(55) 부부를 만나기 위해서다. 아쉽게도 라벤더 꽃은 시들고 있었다. 아쉬움은 라벤더향 가득한 차로 달랬다. “학이재는 제가 태어난 곳으로, 140년 된 서당입니다.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남편과 함께 내려와서 5년째 가꾸고 있어요. 방치돼 있던 곳이라 정리하는 데만 2년이 걸렸죠.”
결혼 전부터 라벤더를 기르고 싶었다는 이현숙씨는 미대 출신이다. 학이재가 눈에 선해 밤잠을 설치곤 했다. 그 소망을 꾹꾹 누르고 산 지 20년 만에 소원을 이루었다. 학이재 뒤로는 대숲이 감싸고 있고 바로 앞으로는 경호강이 흐른다. 유유자적 신선놀음 하기 딱 좋은 풍경이다. 이제는 좀 여유가 생겼다는 부부는 지난 봄 한 달간 바자회와 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관광지가 아니다 보니 아는 사람만 알음알음 찾아온다. 부부는 조상들의 흔적과 그들이 가꾼 정원의 문을 기꺼이 열어준다.
제일의 탁족처, 대원사 계곡
시원한 계곡이 그립다면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남한 제일의 탁족처’라고 했던 대원사 계곡을 찾아가면 된다. 가는 길에 있는 남사예담촌도 빼놓을 수 없는 산청의 명소. 단성에서 지리산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전통한옥마을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제1호로 선정됐다. 곡선의 흙담이 아름다운 고샅이 미로처럼 이어진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법. 남사예담촌에서 20여분 달리면 지리산 천왕봉에서 중봉과 하봉을 거쳐 쑥밭재, 새재, 왕등재, 밤머리재, 웅석봉으로 이어지는 산자락을 따라 12㎞에 달하는 비경이 펼쳐진다. 대원사 계곡이다. 골짜기 끝에는 비구니 수행도량인 대원사가 자리 잡았다. 이외에도 중산리 계곡과 마을에서 관리하는 자연발생유원지인 덕천강변 송정숲과 대포숲은 시원한 그늘이 있어 여름철 계곡 물놀이장으로 인기 있는 곳이다. 다만 휴가철이면 몰려드는 인파로 좋은 자리 잡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좀 더 한갓진 숲길도 있다. 구형왕릉에서 류의태약수터 가는 길로 고로쇠나무 가로수 숲길이 인상적인 곳이다. 금서면 화계리의 가락국(駕洛國) 제10대 구형왕의 무덤인 구형왕릉은 흔히 보아왔던 능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경사진 산자락에 층층이 돌무더기를 쌓아 올린 형태로, 멀리서 보면 마치 피라미드를 연상케 한다. 구형왕릉 뒤로 약 2㎞ 지점에는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의 스승인 류의태가 이곳 약수로 탕약을 조제하였다고 전해지는 류의태약수터가 있다. 산 아래 마을에서 평생 농사를 짓고 있다는 오석조(81)씨가 “그 물 마시믄 100살은 살끼다”라며 꼭 가보라고 했던 약수터다. 40분 정도 땀 흘리며 올라 마시는 약수가 달달하다.
정겨운 골목과 정원
산청! 한자로는 ‘뫼 산(山) 맑을 청(淸)’을 쓴다. 두말할 것 없이 산청은 산 좋고 물 맑은 고장이다. 이 고장만큼 이름값 제대로 하는 곳이 또 있을까 싶다. 민족의 영산(靈山) 지리산의 주봉인 천왕봉(1915m)이 산청 땅에 있다.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산 208번지가 천왕봉의 주소다. 지리산에 깃든 수많은 골짜기에서 흘러들어와 하나로 합쳐진 경호강이 산청 땅 구석구석을 적신다. 생명의 원천인 물은 삶의 터전을 일구었다. 지리산이 주는 최고의 복을 누리는 고장, 산청으로 향한다.
평일 한낮 산청 읍내는 한가로웠다. 산청 사람들에게 지리산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60년째 문을 열고 있는 산향이용원 오삼원(78)씨는 “지리산은 우리 산청 사람들 밥줄이지. 가뭄도 없어. 사철 물이 철철 넘쳐 흐르니까. 그게 다 지리산 덕분 아니겠어”라며 읍내 취재를 하고 있다는 나에게 산청읍내가 한눈에 다 내려다보인다는 꽃봉산에 올라 보길 권했다.
군청에서 마주 보이는 옥산리의 해발 236m 꽃봉산은 산청읍 사람들의 산책로다. 골프연습장을 지나 금강도약수터 뒤로 난 길을 따라 20여분 오르면 전망대에 도착한다. 1000m급 산이 즐비한 주변에서는 낮은 뒷동산 수준이지만 조망 하나는 거칠 것 하나 없이 시원하다. 발 아래 경호강이 산청읍을 감싸 흐르고, 서쪽의 천왕봉을 필두로 남쪽의 웅석봉, 동쪽의 황매산이 빙 둘러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짧은 수고에 비해 이런 과분한 풍경을 만날 수 있다니. 오삼원씨가 추천한 이유를 알 것 같다. 길을 되짚어 다시 읍내로 향한다.
산청읍의 중심도로는 웅석봉로이며, 중앙로와 꽃봉산로는 이면도로라고 보면 된다. 읍의 서북쪽으로 군청과 경찰서가 나란히 붙어 있고 그 앞으로 주택가와 상권이 형성되어 있다. 중심가를 기준하면 동서, 남북 각 1㎞ 내외로 걸어서 반나절 정도면 돌아볼 수 있는 규모다. 일단 지리를 파악하고 보니 산청읍 기행의 절반은 이룬 셈이다. ‘강삼수경위길’이란 도로명이 독특해 따라가 보았다. 경찰서 앞에서 시작해 우측 골목을 따라가면 경찰서 뒤쪽 경호강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다. 경찰서와 군청 뒷길로 이어지는 ‘강삼수경위길’은 본래 중앙로 일부였던 것을 지난해 10월 6·25전쟁 당시 산청경찰서 사찰 유격대장을 맡아 북한군으로부터 주민과 지리산을 지키는 데 큰 공을 세운 산청군 출신 강삼수 경위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명예도로명이 부여됐다고 한다. 강삼수경위길을 걷다 보면 나지막한 언덕 위 느티나무 숲길을 지난다. 꽃봉산과 함께 읍내 주민들의 여름 쉼터다.
강삼수경위길을 뒤로하고 꽃봉산로61번길을 따라 군청 앞으로 내려섰다. 관광지하고는 거리가 먼 읍내에 게스트하우스 간판이 보인다. ‘난나’란 이름이 독특해 들어갔더니 4년 전 산청으로 귀촌했다는 김제식(57)·조영진(54) 부부가 7월 중 오픈을 목표로 한창 막바지 공사를 하고 있었다. 잠시 쉬어갈 겸 부부의 귀촌 이야기를 들어 본다.
“아이가 어릴 적에 산청 여행을 많이 왔어요. 특히 여름휴가는 거의 산청에서 보냈죠. 그때마다 늘 우리 아이가 대학생이 되면 꼭 산청에 내려와 살고 싶다는 상상을 했는데, 그런 거 있잖아요. 상상만으로도 흐뭇한 기분이 드는 거. 근데 누가 알았겠어요. 진짜 산청 주민이 됐잖아요.”
남편이 퇴직할 무렵 아들이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는 주저 없이 늘 꿈꾸던 산청으로 내려왔다.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일단 가면 뭔가 할 일이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김제식씨는 담담하게 이야기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현재는 토마토 농사를 짓고 있다. 카페와 게스트하우스는 조영진씨 담당이다. 부부는 여행자의 입장에서 여행자의 집으로 꾸며 보고 싶다고 했다. 귀촌을 희망하거나 소란스럽지 않은 잔잔한 소읍의 일상을 경험해보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집이다.
100년 넘은 툇마루집
“산청 읍내에서 정원이 제일 아름다운 집일 걸요.” 군청 뒤 느티나무 숲에서 만난 주민이 추천한 ‘어머니의 정원’을 찾아간다. 이 집은 이름 그대로 어머니가 평생 가꾼 정원을 개방해 그의 아들이 콩국수집 간판을 걸었다. “여기가 우리 집에서 제일 좋은 명당 자리야. 앉아 봐.” 집주인 김점악(82)씨가 이끈 100년이 넘었다는 한옥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온갖 야생화로 가득한 정원을 내려다보는 맛이 가히 일품이다. 집주인은 매년 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꽃씨 나눠주는 일을 십수년째 하고 있다. 동네에서는 이미 ‘꽃씨 할머니’로 유명하다. 야생화가 가장 아름다운 계절인 6월부터 8월 말까지만 영업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어머니의 정원’ 앞 한마음공원과 나란히 이어지는 꽃봉산로79번길로 들어섰다. 흑돼지삼겹고추장구이로 유명한 춘산식당을 비롯해서 다방과 음식점이 즐비하다. 지금은 뒷골목 분위기지만 예전에는 산청읍에서 가장 번화했던 골목이다. 군청 앞에서 시작해 산청초등학교를 지나 산청도서관 앞까지 이어진다. 이 골목의 터줏대감 윤주현(80)씨의 인쇄소는 40년 동안 한자리를 지켰다. “군청 일을 도맡아 하던 시절이 있었지. 이젠 저 인쇄기도, 나도 늙었어. 지금은 동네 사랑방이야. 일 없다고 내가 문을 안 열면 저 영감들 갈 데도 없잖아.” 허탈한 웃음을 짓는다. 관공서 주변이라 밤을 새는 날이 허다했다는 기계식 인쇄기는 멈춰선 지 오래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인쇄 기술을 따라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골목에는 주인이 바뀐 경우는 있지만 수십 년 한자리를 지킨 음식점이 여럿 있다. 주로 오래된 상점들이다. 카페나 체인점 같은 상점들은 한 블록 너머 웅석봉로에 집중돼 있다.
읍내를 벗어나 경호강을 건넜다. 군립공원인 웅석봉 자락 수선사로 향한다. ‘명산대찰’이라 했던가. 지리산에는 걸출한 절집이 많다. 하지만 수선사는 여염집 정원 같은 분위기의 마당과 연꽃이 둥둥 떠 있는 연지가 아름다운 절집이다. 입구의 현대식 건물 옥상에는 카페가 있고, 연못을 내려다볼 수 있다. 대웅전 앞마당은 넓은 잔디밭이다. 흔히 보는 절집의 무거운 침묵과는 다른, 정원이 잘 가꾸어진 찻집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방문한 때는 연꽃이 아직 개화 전이었지만 지금쯤이면 활짝 꽃을 피웠을 것이다.
다시 읍내로 나와 3번 국도를 타고 20여분 거리의 단성면으로 이동했다. 2000여㎡(600여평)의 라벤더 꽃밭을 꾸미고 자신이 태어난 서당 ‘학이재’를 캔버스 삼아 그림을 그리듯 가꾸고 있다는 이장호(59)·이현숙(55) 부부를 만나기 위해서다. 아쉽게도 라벤더 꽃은 시들고 있었다. 아쉬움은 라벤더향 가득한 차로 달랬다. “학이재는 제가 태어난 곳으로, 140년 된 서당입니다.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남편과 함께 내려와서 5년째 가꾸고 있어요. 방치돼 있던 곳이라 정리하는 데만 2년이 걸렸죠.”
결혼 전부터 라벤더를 기르고 싶었다는 이현숙씨는 미대 출신이다. 학이재가 눈에 선해 밤잠을 설치곤 했다. 그 소망을 꾹꾹 누르고 산 지 20년 만에 소원을 이루었다. 학이재 뒤로는 대숲이 감싸고 있고 바로 앞으로는 경호강이 흐른다. 유유자적 신선놀음 하기 딱 좋은 풍경이다. 이제는 좀 여유가 생겼다는 부부는 지난 봄 한 달간 바자회와 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관광지가 아니다 보니 아는 사람만 알음알음 찾아온다. 부부는 조상들의 흔적과 그들이 가꾼 정원의 문을 기꺼이 열어준다.
제일의 탁족처, 대원사 계곡
시원한 계곡이 그립다면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남한 제일의 탁족처’라고 했던 대원사 계곡을 찾아가면 된다. 가는 길에 있는 남사예담촌도 빼놓을 수 없는 산청의 명소. 단성에서 지리산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전통한옥마을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제1호로 선정됐다. 곡선의 흙담이 아름다운 고샅이 미로처럼 이어진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법. 남사예담촌에서 20여분 달리면 지리산 천왕봉에서 중봉과 하봉을 거쳐 쑥밭재, 새재, 왕등재, 밤머리재, 웅석봉으로 이어지는 산자락을 따라 12㎞에 달하는 비경이 펼쳐진다. 대원사 계곡이다. 골짜기 끝에는 비구니 수행도량인 대원사가 자리 잡았다. 이외에도 중산리 계곡과 마을에서 관리하는 자연발생유원지인 덕천강변 송정숲과 대포숲은 시원한 그늘이 있어 여름철 계곡 물놀이장으로 인기 있는 곳이다. 다만 휴가철이면 몰려드는 인파로 좋은 자리 잡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좀 더 한갓진 숲길도 있다. 구형왕릉에서 류의태약수터 가는 길로 고로쇠나무 가로수 숲길이 인상적인 곳이다. 금서면 화계리의 가락국(駕洛國) 제10대 구형왕의 무덤인 구형왕릉은 흔히 보아왔던 능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경사진 산자락에 층층이 돌무더기를 쌓아 올린 형태로, 멀리서 보면 마치 피라미드를 연상케 한다. 구형왕릉 뒤로 약 2㎞ 지점에는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의 스승인 류의태가 이곳 약수로 탕약을 조제하였다고 전해지는 류의태약수터가 있다. 산 아래 마을에서 평생 농사를 짓고 있다는 오석조(81)씨가 “그 물 마시믄 100살은 살끼다”라며 꼭 가보라고 했던 약수터다. 40분 정도 땀 흘리며 올라 마시는 약수가 달달하다.
여행 Tip ‘어머니의 정원’(055-972-3661)은 군청을 마주 보고 왼쪽 골목에 있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정원이 아름다운 집으로 콩국수와 팥빙수, 꽃차를 낸다. 단성면 묵곡숲에 있는 서당 학이재(010-7567-3186)는 대숲과 경호강을 따라 가볍게 산책하기 좋은 분위기로 개인집이지만 언제나 문이 열려 있다. 귀농·귀촌에 대해 궁금하다면 산청군청 앞에 갓 오픈한 게스트하우스 ‘난나’(010-9334-4461)를 추천한다. 4년 전 귀촌한 부부가 운영하는 집으로 그들이 경험한 생생한 귀촌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이외에도 지리산 자락에는 숙박시설이 많다. 산청군에서 운영하는 한방자연휴양림(055-970-6951~2)과 삼장면 석남리 대원사 계곡 입구의 ‘지리산 털보’로 통하는 김문금씨가 운영하는 ‘털보농원펜션’(www.tulbo.co.kr·010-4586-3333)이 있고, 중산리 계곡에서 소박한 시골밥상을 내는 농가 게스트하우스 ‘마리의 부엌’(010-5065-7687) 등이 있다. 산청군 문화관광 http://www.sancheong.go.kr/tou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