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를 대접한 아브라함
(창 18: 1-15)
요약
두 천사를 대동하신 하나님의 모습에서 증거의 사역을 본다.
그 모습대로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을 또 다시 확증하시고, 소돔성의 멸망을 숨기지 않으시고 증거해 주셨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증거의 영으로 임하셔서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사역을 근거로 우리의 영혼을 거듭나게 하시고 죄의 옛사람을 불로서 소멸하고 계신다.
기억할 것은 성령께서 생명으로 임하실 때는 언제나 말씀 안에서 임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할 일은 더욱 성령 충만하도록 십자가 진리에 서고 그 사랑에 감복하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맡기신 일에 동참하는 진리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강해
본문은 하나님께서 두 천사를 대동하시고 아브라함의 집에 내방하신 장면입니다. 이 사건은 할례 직후에 있었다는 점에서 할례에 기꺼이 순종한 아브라함에 대한 보답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의 믿음에 민감하게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두 천사를 대동하신 하나님의 모습에서 둘이 증거의 수라는 점에서 이 모습은 증거로서 임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에게 또 다시 아들을 낳을 것을 확증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타나신 모습 하나까지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이처럼 오늘날도 아버지의 사랑과 예수 복음을 우리에게 실상으로 나타나도록 임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바로 성령이십니다. 우리는 이 성령께서 임하실 때 오는 축복의 내용을 할례에 순종한 아브라함에게 주신 두 사건에서 봅니다. 먼저 아들이 있을 것을 사라까지 알도록 확증하심에서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 영혼을 온전히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소돔성을 소멸하심을 통해서 옛사람을 멸하심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양면적 사역을 보여주십니다. 성령의 은혜는 언제나 동시적입니다. 그래서 18-21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의 강대한 복과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동시에 말씀하십니다.
이 일들은 성령이 임하시지 않고는 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고전12:3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했습니다. 그리고 사4:4에 “이는 주께서 그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케 하실 때가 됨이라” 말씀합니다. 그래서 성령강림 양상도 은혜와 심판 양면성입니다. 행2:18-19에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했습니다.
이것을 증거해 주기 위해서 14절에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이런 표현법을 씁니다. 즉 이삭이 성령으로 잉태한 것은 아니지만 성령 잉태의 예표가 되기 위해서 초자연적인 잉태의 모습을 띠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이 오시면 옛사람을 멸하여 주심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증거의 모습으로 임하신 하나님께서 소돔성도 함께 멸하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기록이 이처럼 성령으로 말미암아 객관적 혹은 주관적 구속사라는 내용으로 우리에게 그대로 다가와야 합니다. 그래서 이삭이 나고 소돔이 멸망하는 것처럼 우리 영혼이 거듭나고 옛 것이 성령의 불로서 소멸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런 해석이 제 해석이 아닙니다. 성경 기자들의 해석입니다. 고후4:6을 보세요.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했습니다. 즉 천지창조 이야기를 가지고 우리 영혼의 신령한 이야기를 합니다. 바울은 신령한 해석의 대가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하고 있는데 왜 그렇게 하기를 두려워합니까? 알레고리가 무조건 나쁜 것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알레고리가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해서 우리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럼 성령으로 우리 영혼이 더욱 거듭나고 옛 것이 더욱 처리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십자가 복음의 진리에 견고히 서야 합니다.
1절에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했습니다.
여기 마므레 상수리 수풀이면 보통 장소가 아닙니다. 흔히 상수리 수풀은 타락 시에는 우상의 중심지가 되기도 하나 일반적으로는 세속을 버리고 주님만 사랑하는 십자가 신앙을 가진 겐족속의 거주 표시입니다. 이렇게 상수리 수풀은 언제나 신앙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리고 마므레는 장차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묻힐 곳입니다. 그리고 마므레라는 지명 역시 인명 마므레에서 유래했는데 마므레는 아브람과 동맹을 맺고 목숨 바쳐 롯을 구한 아모리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마므레 상수리 수풀은 신앙의 최고의 중심지인 십자가 복음의 상징이에요. 그러므로 주님이 찾아오시고 우리에게 놀라운 사건이 이루어지려면 이 장소에 있어야 합니다. 나를 구원하신 십자가 복음을 믿는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찾아오시고 그의 구주가 되어주십니다. 또한 이 복음이 바로 내가 예수와 함께 죽고 사는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겐족속의 지킴과 마므레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그 믿음으로 복음에 굳게 서는 복음신앙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롬8:30에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하셨느니라” 이 말씀을 목숨 걸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진리가 모든 신령한 복의 기초입니다.
예수님의 보혈공로도 그래요. 우리가 자신을 살피면 하나님 앞에 감히 나올 수도 없어요. 신자생활도 그런데 강단에 서는 주의 종들에게는 양심이 더 예민합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 보혈공로 믿고 담대히 나오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정말 예수 복음 믿고 담대히 나오세요.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를 말씀하면서 히4:16에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증거합니다. 이 신앙의 기초들을 견고히 닦으시기 바랍니다.
2. 그 뿐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사랑에 감복하여 사랑해야 합니다.
1-3절에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문에 앉았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문에서 달려 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그랬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나게 된 때는 오정 즈음이었습니다. 이 때가 고대 근동에서는 유목민들이 점심식사하고 쉬는 때입니다. 이 때는 더운 시간이므로 밖에 나와서 쉬게 됩니다. 이 뜨거운 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브라함이 바라보니 세 사람의 나그네가 맞은편에 서 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아브라함은 달려가서 영접하며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히브리서를 참고할 때 아브라함은 이 분들이 하나님과 대동한 천사인 줄 몰랐습니다.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아브라함의 자세입니다. 그는 가장 뜨거운 때에 가장 겸손히 은혜를 갚고자 하는 마음으로 대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생명의 주님을 바로 모시려면 아브라함처럼 예수를 주로 모실 뿐 아니라 십자가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심정이 있어야 합니다. 즉 나는 주님의 것이요, 주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으니 나도 주님을 위해서 이 한 목숨 드리고 싶다는 그런 마음입니다. 이것이 아주 수준 높은 십자가 신앙입니다. 이 마음이 일어남이 없이는 모두 다 나를 위한 신앙일 뿐입니다. 이 신앙이 없이는 내 영혼이 잘되기 위해서, 내 마음이 평안하기 위해서, 내가 구원 받고 복 받고 거룩해 지기 위한 것에 머물 뿐입니다. 이런 신앙은 언제 넘어질지 모릅니다. 이 신앙은 세상 종교의 것이지 기독교 참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 사랑에 감동되지 않고는 항구적으로 주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3. 그리고 나아가 십자가 지고 끝까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려야 합니다.
4-8절에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 아브라함이 -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아브라함이 또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취하여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했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겸손과 대접하는 아름다운 자세를 봅니다. 이 자세는 할례를 받은 이후의 할례에 맞게 살려는 달라진 아브라함의 모습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대접해야 합니다. 마7:11-12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하신 말씀대로 하나님을 대접해야 성령을 충만하게 주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아브라함처럼 발을 씻겨드려야 합니다. 오늘 날로 말하면 먼저 각인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여 바로 살 뿐 아니라 나아가 선행을 통해 사회에 떨어진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마음이 시원하게 됩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짓밟고 있는지 그런 소식을 접할 때마다 괴로워서 견딜 수 없습니다. 그들도 문제가 없진 않지만 우리가 더 이상 세상에 밟힘을 받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번 기독교장로회 총회에서 교회 지도자들이라도 윤리강령을 정해서 모범을 보이자는 안건이 올라와 토론 끝에 그런 것은 너무 당연한 일 아니냐고 굳이 정해야 하느냐고 부결되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많아 우선 급한 대로 윤리강령이라도 제정해서 실천해야 합니다. 가령 “근검절약하며 사치하지 않는다. 교회 예산의 50%는 설립 초기부터 사회를 위해서 쓴다. 기도하고 복음 전하는 일에 전무하도록 한다. 목회자 세습을 방지하고, 전 교인이 하나님의 일에 동참케 하고, 교회가 성장하면 반드시 분립시키도록 한다. 등등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참으로 바른 신앙생활 못해보고 교회다운 교회 이루어보지 못하고 우리 일생 마칠까 두렵습니다. 참으로 세상에 짓밟힘을 받는 교회를 바라보면서 안타까워 견딜 수 없습니다. 더 많이 사회에 봉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십자가 지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처럼 떡과 고기를 대접해 드려야 합니다. 이 떡과 고기는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사라가 교회의 상징이듯이 이 일을 교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잘해야 합니다. 예배가 영성훈련의 기본입니다. 이 일을 잘할 때 우리의 영혼이 더욱 새롭게 거듭나게 됩니다. 온전케 됩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십니다. 그런데 이 일도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가 은혜 있다 없다 평가가 능사가 아니라 예배를 위해서 보이지 않는 배후의 준비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런 성도에게 하나님께서는 온전히 함께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주님 앞에 나아가 십자가의 주님 앞에 나아가십시다. 십자가 복음을 붙드십시다. 그 은혜를 믿을 뿐 아니라 그 사랑에 감복하여 생명 바쳐 사랑하십시다. 진실로 회개하고 사랑의 십자가 지고 봉사하고 예배하십시다. 이러한 성도에게 주님은 더욱 온전히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복음을 우리에 적용시켜 주시는 성령의 은혜로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