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이비니다.
그냥 참고로, 소설책 읽듯이 한 번 쭈욱 읽고만 오십시오.
참고자료 1
1. 독립 전야의 미주 대륙
미주 지역의 거주민들은 각각 자기들의 고향인 유럽에 살 때의
문화를 가지고 이주했다. 스페인, 영국, 프랑스에서 건너온 사람들은
스페인적이고, 영국적이고, 프랑스적인 문화방식으로 살았다. 이외에도
독일인, 스위스인,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인도 있었지민, 그들은
자기들이 터잡은 미주 지역의 중심 문화에 동화되어 갔다.
이때 미주 대륙에서 살았던 한 영국인이 이렇게 썼다.
“엘리자베스는 우리의 여왕이 아닌가? 세익스피어는 우리의 시인이 아닌가. 드레이크는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여 우리 조국을 멸망에서 구출한 영웅이 아닌가.”
영국계 사람이 사는 곳은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이 모두 영국 방식이었다.
1763년도의 대다수 미국 거주민은 영국이 프랑스에 승리하여 캐나다를 차지한 것에 애국적 국민으로서 자부심을 가졌다.
미국 독립의 아버지들 중의 한 사람인 프랭클린은 이렇게 썼다.
“우리를 보호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는 조국에 우리는 많은 인연, 혈연, 유대, 이해관계, 애정이 얽혀있다. 식민지 상호 간의 의의보다 더 친밀하다. 조국에 반항하기 위해서 식민지가 하나로 뭉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미국 13개 식민주는 각각이 독립이었고, 서로 간의 이해도 달라서 남남이었다. 서로 경쟁하고, 다투는 일이 많았다. 이해가 걸리면 적대적이기도 했다.) 프랭클린은 독집전쟁 이전의 분위기를 말한 것이다.
미국이 독립전쟁을 벌일 때에는 13개 주가 하나로 뭉쳤다. 1763년 이후의 ㅇ영국계 이주민은 영국 본국의 지배에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행정 절차를 밟는데 아무리 빨라야 6주 이상 걸렸다.
대서양을 사이에 둔 미국과 영국은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다. 언어부터 달라졌다. 미국 사투리를 영국인은 알아듣지 못했다. 산간벽지(backwoodsman), 통나무집(log cabin), 혼혈아(halfbleed)란 말은 아예 없었고 가을을 영국은 autumn이라 했고, 미국을fall이라 했다. 프랑스인도 corn(옥수수)이란 말을 알지 못했다. 미국인의 카드놀이를 영국인은 퇴폐적이다며 비난했다. 이 말에 미국인은 분노했다.
영국에서 미국에 온 사람은 비국교도로서 종교의 자유를 누리려 영국을 떠난 사람들이다. 영국 정부는 미국인에게도 국교를 강요하지 굉장한 불쾌감을 느꼈다. 런던 사람이 청교도를 조롱하는 말을 예사로 내뱉었다. 이에 미국인 분노하여 ‘이 썩어빠진 귀족 정치로 순결하고, 정직한 프로테스탄트를 다스릴 아무런 근거도 없다.’라고 했다.
미국
프랭클린이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에 갔을 때 영국서 온 대표는 미국 대표를 귀족이 시골서 올라온 촌뜨기 대하듯이 했다.
정치적으로도 미국은 영국보다 급진적이었다. 미국으로 건너온 사람은 평등을 누렸다. 미국도 잠시 영국의 신권정치가 펼쳐졌으나, 금방 국민이 정치하는 민주정치 체제가 되었다. 이미 영국과 미국은 문화 차이가 많이 벌어져 있었다. 이때 미국 총독으로 미국인이 가장 싫어하는 인물이 부임했다.(정치란 이런 것도 고려하여 임명해야 한다. 측근에게 한 자리를 선물하듯이 주는 것이 아니고)
경제 문제도(나중에 상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런던 상인은 미국을 물건이나 팔아먹는 시장으로만 생각했다.
이때 영국은 프랑스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카나다까지 차지했다. 미국의 거주민은 자기들에게 큰 이득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이때까지만은 미국민은 영국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신들은 영국의 이등 국민이라는 것을 느깨면서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미국의 13개 식민주는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면서도 이러한 이유들이 자연스럽게 유대감을 가지고 뭉치도록 하였다.
참고자료 2
영국은 성장을 거듭하면서 제국주의로 나아갔다. 제국주의는 필수적으로 전쟁을 몰고 다닌다. 전쟁 대상 국가는 프랑스였다. 프랑스와 전쟁은 미주 대륙에서도 이어졌다.
프랑스는 카나다 지역과 미시시피 상류 지역과 오대호 부근을 차지하고 영국에 대항했다. 프랑스는 이 지역의 인디언과 동맹을 맺고 영국에 대항했다. 그러나 싸움에서 패하면서 카나다 지역과 미시시피 상류 지역(루이지아나)의 광범한 땅을 영국이 차지했다. 영국은 이 지역에 영국민을 이주 시켰고, 워싱턴과 프랭클린은 회사를 설립하여 오하이오 강 주변의 광활한 땅을 개간하였다.(오하이오 강은 미시시피로 흘러 들어간다.) 이 지역을 근거로 생활하던 인디언들은 프랑스보다 영국이 더 위함하다고 보고, 적대시 하였다. 이로서 미국사에서 인디언 문제는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1763년 이후에 영국은 미주 식민지에 더 많은 것을 요구하였다. 영국과 미주 식민지 사이에 당연히 갈등이 생겼다. 미국을 누가 방위하느냐의 문제에서, 미국은 영국이 방위를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자기들은 영국 국밈임으로), 그러나 영국은 너희의 땅을 지키는데 드는 비용은 너희들이 부담하라고 했다. 설탕법을 제정하고, 인지세를 부과했다.
영국이 세법을 들고 나오자 미국 식민지 주민은 개개인이 자신의 이해득실을 따졌다.(업종에 따라서 다르다.) 그러나 인지세는 미국민 전부가 손해보는 세법이라고 보았다. 세금 부과를 반대하는 격렬한 저항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무역상, 소상공인, 남부 농장주 등등의 이해가 달랐으므로 저항 운동도 중심을 잃고, 춤을 추는 꼴이 되었다. 13개 주의 연합도 이해가 다르므로 의견 통합이 어려웠다. 프랭클린은 아예 불가능이라고 말했다.
영국 정부의 세금 부과를 두고 미국인은 영국의 압정이라고 했다. 영국 정부는 세금 부담은 당연한 의무라고 했다. 미국인은 통상을 거부하는 것이 영국 상인을 견제하는 수단이라고 했다.(이때도 자기는 영국민이라고 생각하고, 영국이 아니고, 영국 상인을 견제한다고 생각했다.) 식민지 곳곳에서 영국 상품 불매 운동이 일어났다. 미국의 영국 상품 수입은 격감했다.
1774년에는 미국도 불편함을 느꼈다. 차를 제외한 모든 상품의 수입금지를 풀었다. 그러나 일부 상인이 과감하게 영국 차를 수입하였다.(이럴 때 수입하면 하루 아침에 부자가 된다.) 값싼 네델란드 차를 수입하는 업자도 나타났다.
이때 ‘사무엘 애덤즈’는 ‘국왕에 반항하는 행동이 합법적인가.’라는 글에서 ‘민중의 주권만이 압제를 극복할 수 있으므로 합법이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1773년 12월에 동인도 회사의 무역선이 차를 싣고 보스턴 항으로 들어왔다. 공회당에 모여있던 보스턴 시민들은 흥분했다. 젊은이들이 모호크 족의 복장을 하고 배에 올라가서 차 상자를 바다에 던져 버렸다. 영국 정부는 차의 보상을 요구하면서 보스턴 항을 봉쇄해버렸다.
1774년에는 영국 의회가 5개 항의 법을 통과시켰다. 5개 항은 미국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었다.(인터넷 검색에 나오니 찾아 보세요)
미국인들은 살기 위해서 영국과 싸워야 했고, 영국 의회도 비타협적으로 나왔다.
갈 길은 뻔했다.
참고자료 3
전쟁의 시작
매사추세츠 주의회의 하위 조직으로 지방 민병대가 있다. 1분 대기조라고 부를 만큼 소집만 하면 1분만에 무장을 하고 모여 든다는(조금 풍이 섞인) 뜻.
1775년에 영국의 케이지 장군은 보스턴 교외에 민병대 화약 창고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화약고를 폭파하기 위해 600-800명의 병사를 선발하여 보냈다. 영국군의 움직임을 알아챈 민병대는 중간 지점인 렉싱턴에 40명을 잠복시켰다.
여기서 민병대와 영국군 사이에 총성이 울렸다. 이 전투로 민병대가 8명 전사하였다. 영국군은 274 명의 사상자를 내고 철수했다. 영국군은 다시 미국 민병대에게 약 1000명을 잃었다. 이 사건으로 미국민은 자신감을 가졌다.영국은 세 명의 장군이 지휘하는 7000명의 병사를 미국으로 파병했다.
미국은 국민의회에서 워싱턴을 만장일치로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때 워싱턴이 수락하면서 한 말이 유명하다.
“나는 적임자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맡은 일에 최선을 다 하겠다.”
영국의 신민으로 생각하였던 미국인이 영국을 상대로 싸운다는 것은 반란이다. 반란이 아니기 위해서는 전쟁의 명분이 필요했다. 이런 이유로 ‘독립선언문’을 작성했다.
선언문에 무엇을 담을까. 그 당시의 앞선 사상가였던 존 로크의 주장을 담았다. 영국과 분리해야 하는 이유를 담았다. 그 다음에 존 로크의 사상인 ‘생명, 자유, 행복 추구’ 이다. 이 부분은 나중에 프랑스 혁명에 엄청난 영향을 ㄹ주었다.(이런 이유로 미국 독립가의 창의적인 주장이 아니고, 유럽의 유행 사상을 베껴 왔다면서 폄하하는 학자도 있지만, ---)
당시에 영국의 육군은 모두 5만 6천 명이었고, 아일랜드와 영국에 남아 있어야 할 군대도 필요함으로, 미국까지 군대를 보내는 일에 제한이 많았다.
여기에 프랑스가 미국 편에 서서 참전했다(루이 16세).
영국으로서는 이득이 많지도 않는 지역에 군대를 보내서 전쟁을 치루기보다는 철군을 결정했다.
영국이 물러감으로 독립을 얻었다.
그러나 실제의 전투에서 미국군이 우세한 것도 아니었고, 결정적 승리를 거두지도 못했다. 오히려 미국이 패배한 일이 더 많았다.
그러나 영국이 철군함으로 독립하였다.
참고자료 4
독립 이후
영국이 물러감으로 미국민에게 독립이라는 선물이 떨어졌다. 13개 주의 대표들이 모인 대륙회의가 연합회의체(국민의회)로서 통치기구 역할을 했다,
군인들의 봉급은 밀렸고, 청산할 방법도 없었다. 국민들은 난동을 부렸다. 1783년의 필라델피아 난동은 국민회의를 위협할 정도였다.
1783년에는 워싱턴이 사령관 직에서 물러났다. 이때 군인도 겨우 80명만 남기고 모두 제대했다.
역사라는 바다에 아메리카라는 배가 출항했지만 배는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도 잡지 못했다. 연합회의는 사법권이 없었다. 정치는 강제가 있어야 하고, 법률에는 제제가 있어야 역할을 한다. 아메리카 연합회의는 이런 권한이 없으니 선장이 없는 배나 마찬가지였다.
개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미국민들도 국민회의가 강한 힘을 가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영국이 미국 상인을 자국민이 아닌 외국인으로 다루자 장사하기가 어려워졌다. 영국은 연합회의를 미국의 모든 주를 대표하는 기관으로 보지 않았다. 이러니 영국을 상대하려면 13명의 대사가 필요했다.
1786년에는 마사추세츠 주의 서부지역에서 농민들이 대대적인 봉기를 하였다. 미국의 국민이 연합하여 영국으로부터 미국의 땅을 지켜냈는데, 미국의 땅은 국민 공동소유라고 주장했다. 이미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미국의 문벌가들은 불안했다.(이들이 독립전쟁의 주역이었고, 연합회의 대표들이었다.)
이런 사건을 겪으면서 힘을 가진 정부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때 부자나, 가난한 자나 공동으로 자유를 부르짖었지만 현실적으로 주장한 것은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강력한 정부기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는다.
새로 얻은 땅인, 아팔라치아 산맥 너머 미시시피 강까지의 광대한 땅을 나누는 것도 쉽지 않았다. 13개 주가 공동으로 관리한다는 어리벙벙한 방법으로 봉합하였다. 공동통치는 손쉽게 결정하였으나 — 등등의 이유로 미국 정부가 탄생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사람은 평온한 삶을 원했고, 계약의 준수, 질서의 재건을 바라면서 중앙 정부의 필요성을 느꼈다. 헌법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 헌법의 가장 기본은 ‘공화주의 정부’이다.
1789년에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미국이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다.
(*미국 독립 및, 미국 헌법에 관한 자료는 널리고 깔려 있습니다. 선생님들께서 한 번 공부해보십시오. 헌법이니 뭐니 하면 골치가 아프지만, 그래도 오늘의 미국이 워낙 ---, 공부해 볼 가치는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