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11】
일반 대중과 일본 군부를 대상으로 한 귀국 공연의 수익금 2000원을 ‘조선문인협회’에 기탁한 최승희에게 황국신민화와 내선일체를 주제로 한 조선 최대의 합작영화 ‘그대와 나’의 출연 제의가 들어왔다.
애초에 당시 ‘만영의 간판스타’ 리샹란의 캐스팅이 예정되었던 이 영화에 제작진들은 여주인공을 최승희로 바꾸려고 했지만 무용 공연 일정을 조율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캐스팅 제의를 거절했다.
그러자 단역인 ‘음악학교의 체조강사’ 역이라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하지만 이 또한 안막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고,그 대신 군부에 헌납하는 것으로 영화 출연 문제를 무마하자는 심사로 또다시 지방 순회공연 수익의 일부인 2000원을 ‘군사후원연맹’의 국방기금을 기탁했다.
그렇게 해서 이 영화의 여주인공 역에는 당시 조선 영화계의 톱스타였던 문예봉이 대신 캐스팅되었다.
이어서 최승희는 1942년 2월 16~20일까지 ‘조선총독부 조선군·국민총력조선연맹·기계화국방협회 조선본부’가 후원하고 ‘조선군사보급협회’가 주최한 무용 공연을 5일간 치러냈다.
공연 주최측이 일본 관헌 세력이었다는 점에서 보더라도 이 공연이 제국 일본의 시책에 의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거니와, 바야흐로 이때는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촉발된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지 약 3개월이 지나고 있었다.
만주사변(1931)과 중일전쟁(1937), 그리고 태평양전쟁(1941)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15년 전쟁’의 수행 과정에서 조선총독부는 ‘국가 총동원법(1938.4.1.)’을 통해 조선의 산업을 군사적으로 개편함과 동시에 군사 인력을 강화하는 ‘고도국방건설’을 실현시키기 위해 ‘신체제’를 선언했다.
군·관·민의 전 영역이 전쟁 수행의 도구가 된 ‘신체제’하에서는 전쟁을 위한 목적과 수단 이외에는 그 어떤 가치도 승인받을 수 없었다.
조선 문인들은 ‘황군위문조선문단사절단’을 조직해서 ‘펜 부대’라는 이름으로 전선을 떠돌아야 했고, ‘조선문인협회’에 소속되어 일본 관헌에 복속되어야 했다.
모든 언론매체가 통제되고 조선어 사용이 금지되자 조선의 문인들은 황국신민의 언어인 일본어로만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최승희는 1937년부터 1944년까지의 무용공연 수익 중 7만 5000원이 넘은 금액을 국방헌금과 황군 위문금으로 헌납한 것으로 알려졌다.
1930년대 후반 교사의 평균 월급이 60원 가량이고, 쌀 한 가마가 20원이었다는 점, 그리고 당시 군용 비행기 한 대가 약 10만 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최승희의 군 헌납액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태평양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노,가부키,나니와부시,만담,야담과 같은 일본 전통예술공연이 모두 금지되었을 때조차 최승희의 공연은 연일 대성황을 이루었다.
글의 출처
제국의 아이돌
이혜진 지음, 책과 함께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