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89
11월29일[연중 제34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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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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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R9RGwePiG4Q
[서울대교구 임현호 도미니코 신부님 집전(대치2동 본당 보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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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참고 견디면 생명을 얻을 것이다."
<(1)시련과 관련한 핵심 요점정리>
우리네 인생이란 저마다의 등에 시련이란 짐을 하나씩 지고 걸어가는 여행길과도 같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고통 체험에서 제외될 수가 없지요.
고통은 대상을 가리지 않습니다.
결국 시련과 관련한 핵심 요점 정리는 이렇습니다.
"신앙 여정에 있어서 시련은 필수입니다. 살아 숨쉬고 있는 한, 끝까지 우리를 따라다니는 일상의 시련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에게 주어진 평생의 과제입니다."
오늘 복음은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시련 앞에, 신앙인이기 때문에 받게 되는 손해와 박해 앞에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명쾌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1. 걱정하지 말 것
2. 참고 견딜 것
그러나 간단한 위 두 가지 가르침을 실천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요? 난데없이 다가온 시련과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보통 어떻게 처신합니까?
우선 드는 생각이 "왜?"입니다. 그리고 지난 삶을 돌아보며 이렇게 반문합니다. "왜 하필 나인가?", "내가 무엇을 잘못했길래?"
"도대체 하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저는 한평생 바르게 살려고 노력해왔습니다. 저 악한 사람들 저렇게 떵떵거리며 잘 먹고 잘 사는데, 왜 하필 나입니까?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이런 생각을 가지신 분들은 빨리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시련을 겪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런 일이기 때문입니다.
시련은 삶의 일부입니다. 이 세상에 시련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시련이 없기를 바란다는 것은 숨을 쉬지 않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시련 없는 인생을 기대한다는 것은 너무도 이기적이고 비현실적인 기대일 뿐입니다.
시련의 강도가 너무나 지나쳐 힘겨울 때마다 시련, 그 배후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얼굴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의 관점에서 시련에 대한 해결책은 오직 한가지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일치 안에서 시련을 받아들이는 일이지요. 그리스도와의 일치 안에서 우리의 시련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일이야말로 복음의 근본 메시지입니다. 삶의 모든 순간은 의미가 있습니다.
가파른 시련의 오르막길을 걸어가는 순간은 불굴의 인내심을 청하는 기도의 순간입니다. 기분 좋은 내리막길을 걷는 순간은 찬미의 노래를 부르며 하느님께 감사하는 순간입니다. 향기 그윽한 오솔길을 걷는 순간은 주님의 향기에 취해 사랑을 노래하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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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결국 인내가 모든 것입니다!>
지나온 날들을 뒤돌아보시면 다들 지우고 싶은 기억들 한 두 가지 씩 있으시겠죠? 특히 그때 어떻게든 참았어야 했는데, 그 한 순간을 참지 못해 오랫동안 쌓아왔던 점수 다 깎아먹은 기억 말입니다.
심호흡 한번 크게 하고 그 순간을 넘겼으면 좋았을 텐데 그걸 못 참아서 나도 그도 큰 상처를 입고, 두고두고 부끄럽고 면목 없는 흑역사(黑歷史)는 수시로 떠올라서 우리들을 괴롭힙니다.
저도 잊어먹고 잘 지내다가도 불현 듯 지우고 싶은 흑역사가 머릿속에 떠오르면 자다가도 크게 한숨을 푹푹 쉽니다. 괜히 죄 없는 이불을 있는 힘을 다해서 발로 찹니다. 그리고 혼잣말로 외칩니다. “그때 내가 대체 왜 그랬지? 정말 내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지!”
그런데 다행인 것은 우리보다 앞서 살아가신 위대한 대성인들도 이런 면에서는 우리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와 똑같이 어처구니없는 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역대급 과오를 범했습니다.
급하고 과격한 성격 자제하지 못해 일을 저지르고서는 두고두고 후회하고 반성하며 마침내 인내의 최고봉에 올라간 분들이 성인(聖人)들이었습니다.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이 타고난 결함과 결핍으로 인해 괴로워하면서 마침내 자신을 극복하고 벗어나는데 성공한 성인들께서 오늘 우리들을 향해 이렇게 권고합니다.
“결국 인내가 모든 것입니다.”
조만간 골고타 언덕에서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극한의 인내를 앞둔 예수님께서도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복음 21장 19절)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 이 세상 안에서 뭔가 대단한 것들을 꿈꾸지만 현실을 결코 녹록치 않습니다. 뒤돌아보면 우리 모두 공감하듯이 우리네 인생사 안에서 순풍에 돛단듯한 나날을 불과 며칠도 안 됩니다. 하루하루가 좋아 죽을 것 같은 호시절은 찰나입니다. 내게 호의적인 주변 환경은 드믑니다. 내 마음에 딱 드는 사람들 만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우리의 기대치를 대폭 낮추는 것입니다. 자주 인생의 역풍을 만나더라도 마음 크게 먹고 ‘그러려니!’ 하는 것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나를 크게 낮추는 것입니다. 주변 상황과 타인이 나를 맞추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대신에 나를 그들과 맞추고 나를 보다 넓히고 성장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결국 이런 모든 노력의 기초요 첫 출발점은 인내입니다.
구원자 예수님께서 주실 구원은 아무에게나 해당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인내로써 모든 것을 얻을 것입니다. 인내하는 사람만이 구원이 가능합니다. 죽어도 양보 못하고, 틈만 나면 내지르고, 여기서 폭발 저기서 폭발, 좌충우돌하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은 요원합니다. 어쩌면 그들은 살아서부터 벌써 지옥이나 연옥 벌을 제대로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무엇에 대해 인내할 것인가 고민해봐야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누구에 대해 인내할 것인가 성찰해봐야겠습니다.
끝도 없이 인내하신 하느님, 해도 해도 너무할 정도로, 마치 바보처럼 인내하신 예수님의 인내 앞에 우리의 보잘 것 없는 인내를 비추어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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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45vc46jXO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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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목숨과도 바꿔서는 안 되는 두 가지>
오늘 복음 말씀도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한 표징의 일부입니다. 이 앞에서는 세상이 생명력을 잃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전쟁과 기아, 전염병과 자연재해 등이 일어날 것인데 이는 자기 주위에 생명력을 잃어가는 사람들이 많다면 그 사람이 죽어가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사람이 건강할 때는 주위 사람들을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봉사할 수 있지만, 약할 때는 오히려 봉사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날씨나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오히려 주위 사람들을 건강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생명력이고 은총이라 합니다.
은총은 성령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과 함께 ‘진리’에 관한 내용입니다. 세상 마지막 때가 되면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을 모든 사람이 박해할 것입니다. 이때 그들과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라고 하십니다.
저도 책을 낼 때 그런 말을 쓰면 분명 박해를 받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합니다. 그들은 저를 위해 하는 말이지만, 저는 그들에게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하고 싶습니다. 내 안의 진리를 두려움으로 깨버리려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느님이 나의 죽음으로 내 안에서 소멸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내 안에 진리와 은총으로 존재하시는데, 믿음이 있다면 이는 죽임을 당하더라도 지켜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곳에서 죽을 수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잔 다르크 성녀는 그야말로 선한 영향력을 미친 존재입니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습니다. 먼저 은총이 충만하였습니다. 1412년경 프랑스 돔레미(Domrémy)에서 태어난 잔 다르크는 13세 때 하느님에게서 오는 환시를 봅니다. 16세 때 전쟁에 참여하고 17세 때 적군에게 잡혀 그쪽 교회의 재판을 거쳐 19세 때 산 채로 화형당합니다.
그녀 덕분으로 1429년 오를레앙에서 중요한 승리를 거두어 전쟁의 판도를 바꾸었습니다. 잔의 도움으로 대관식을 한 샤를 7세는 그녀의 석방을 위해 협상을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1920년에 이르러서야 잔 다르크는 재평가되었고 시성됩니다. 그런데 재판 과정에서 글을 배우지도 못한 시골 처녀인 그녀의 변론들은 신학자들을 무색게 할 정도로 오류가 없고 강력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자신이 믿는 ‘진리’에 대해 죽음도 그녀를 변하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죽음으로 위협하는 그들에게 그녀는 말합니다.
“모든 전투의 승패는 마음에서 먼저 결정됩니다.”
“나는 두렵지 않습니다. 나는 이것을 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내가 아는 죄나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을 하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믿는 것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칩니다. 우리가 가진 전부는 단 한 번의 삶이며, 우리가 믿는 대로 살아가고 나면 사라집니다. 하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포기하고 믿음 없이 사는 것은 죽는 것보다 끔찍하고, 젊어서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합니다.”
하느님이 세상 사람들의 위협에 영향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내 안에서 은총과 진리를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목숨에 대한 위협으로부터 내가 믿고 주장하는 것이 흔들린다면 이는 자신 안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지 못했음을 증명합니다.
자신 안에 생명을 바칠 무언가를 찾지 못했다면 아직 참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참 진리가 있고 그것을 위해서는 목숨도 두렵지 않아야 영원한 생명을 품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남에게 영향받지 않습니다.
그 영향을 멈추는 방법은 죽음뿐입니다. 그러나 죽음조차도 그 영향력을 멈추지 못합니다. 이것이 내 안에 성령께서 계신다는 증거이고 내가 영원한 생명을 지녔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지금 교회는 지옥을 거부하는 분위기, 성체를 왜 영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심지어 삼위일체를 잘못 이해하여 하느님을 한 분으로 고백하기도 합니다.
거의 진리가 교회 내에서도 사라져가고 이것을 거부하는 이들은 박해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합니다. 살아있는 자가 되기 위해 잔 다르크처럼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신앙인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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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날씨가 추워지면서 온풍기를 틀었습니다. 작동이 잘 되었는데 이번에는 무슨 문제가 있는지 잘 안되었습니다. 신문사의 운영이나, 사람과의 만남에는 울렁증이 없는데 기계에는 울렁증이 있습니다. 잘 모르면 배우면 되는데, 잘 모르니 관심도 없는 편입니다. 밀림은 비가 자주오니 더욱 밀림이 되고, 사막은 비가 오지 않으니 더욱 사막이 되는 것처럼 ‘디지털’ 시대에 더욱 문맹이 되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그래도 은행 업무, 온라인 쇼핑 업무는 디지털로 할 수 있으니 다행입니다. 젊은 신부님들은 디지털 시대에 최적화된 것 같아서 부럽습니다. 온라인으로 기차표를 예약하고, 손가락 몇 번 움직이면 새로운 세상으로 쉽게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곧 추운 겨울이 오기에 큰맘 먹고 온풍기 앞으로 갔습니다. 빨간 불이 깜빡이는데 들여다보니 필터라고 표시된 곳이었습니다. 지난번에 세탁물 건조기도 필터를 깨끗이 하라는 말을 들었기에 온풍기 옆과 뒤를 보니 손으로 뺄 수 있는 필터가 있었습니다. 꺼내니 먼지가 수북이 쌓여있었습니다. 지난 4년 동안 한 번도 청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깨끗이 청소해서 다시 제자리에 놓았습니다. 그랬더니 온풍기는 잘 돌아갔습니다. 안 해서 그렇지 저도 하면 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세례를 받아 깨끗해진 우리의 마음에도 영적인 먼지가 쌓이기 마련입니다. 한두 달은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먼지가 쌓이면 우리 마음의 필터도 문제가 생기고 하느님과 소통하는 데 어려움이 있기 마련입니다. 어떤 먼지가 쌓이기에 우리는 양심이 무디어지고, 열정이 식어갈까요? 첫째는 교만이라는 먼지입니다. 이것은 한번 우리 마음에 쌓이면 좀처럼 떨어지지 않습니다. 작정하고 떼어내야만 합니다. 우리의 원죄도 ‘교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만한 바리사이의 기도와 교만한 바리사이의 헌금을 나무라셨습니다. 겸손한 세리의 기도와 겸손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둘째는 근심이라는 먼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늘 제자들에게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풍랑에 마음이 흔들리던 제자들에게도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 곁에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물 위를 걷다가 두려움 때문에 빠져들던 베드로의 손을 잡아 주시면서도 ‘왜 두려워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근심이라는 먼지가 쌓이면 우리는 아름다운 가을의 단풍도 보지 못합니다. 하늘을 나는 멋진 새의 모습도 보지 못합니다. 내 앞에서 손을 내미는 기쁨을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 마음에 쌓인 죄의 먼지들을 깨끗하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양심성찰을 하는 것입니다. 고백성사를 통해서 하느님과 화해하는 것입니다. 필터를 청소한 온풍기가 따뜻하고 깨끗한 바람을 내보내듯이, 깨끗해진 우리의 영혼은 하느님과 소통하고, 열정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 우리는 묵시문학의 이야기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묵시문학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강한 조직과 나라일지라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하느님과 함께하지 않는다면 악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나약하고, 작은 나라일지라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 하느님과 함께한다면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니, 강가에 심어진 나무처럼 생기가 돋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신자분들을 만나면서 많은 묵상을 하게 됩니다. 자녀 문제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부부의 불화로 힘들고 어렵게 지내는 가정이 많았습니다. 신앙을 갖지 않았다면, 하느님을 알지 못했다면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문제들로 가슴 아파하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묵시문학은 이야기합니다. ‘이 모든 것들도 다 지나가리라.’ 결국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밝은 빛을 보리라고 말을 합니다. “인내로서 생명을 얻으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전에 읽었던 시가 생각납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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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21,12-19: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12절)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이 가까웠을 때, 이 모든 일에 앞서 박해를 겪는다고 하신다. 제자들은 박해를 당했고, 감옥에 갇히고 견디기 어려운 시련을 겪었다. 사람들은 제자들을 재판관에게 넘기고 임금들에게로 끌고 갔다. 교회사 안에서 교회는 계속 박해를 당해 왔다. 박해는 지금도 또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박해는 단순히 육체적으로 당하는 것만이 아니라, 현대에 만연되어있는 죽음의 문화 또한 박해의 일종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온전하게 건져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으리라고 하셨다.
죽음은 영혼에도 육신에도 올 수 있다. 영혼은 죽을 수 없지만, 하느님을 잃으면 죽을 수 있다. 영혼이 육신의 생명이듯 하느님은 영혼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육신의 생명인 영혼이 육신을 버리면 육신이 죽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영혼을 버리시면 그 영혼은 죽는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버리시지 않도록 하려면 하느님을 위해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그 영혼을 버리지 않으시고, 따라서 그 영혼은 죽지 않는다. 그래도 육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갖게 마련이다. 주님께서는 순교자들을 안심시키신다.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으리라고 보장해 주셨으니 불안해하지 말라고 하신다.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18절). 굳은 믿음을 청하도록 하여야겠다.
우리의 육신이 세상 끝 날에 다시 살아날 것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우리 가톨릭의 신앙이요 사도들의 신앙이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가벼이 보시지 않는 주님께서 우리를 가벼이 보시지 않는다. 그분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고자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시다. 그리고 돌아가심으로써 그 육신을 잠깐 내려놓으셨다가 다시 일으켜 세우신 분이시다. 이렇게 우리가 그분에게서 부활 신앙을 갖게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믿음을 가지고 따르는 이들의 머리카락 수효가 얼마인지까지도 관심을 가지고 무슨 말을 할까 까지도 일러주신다. 그러한 믿음은 시련과 갈등 없이 가질 수 없고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 영원한 생명을 가질 수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에게 굳은 신앙을 주시기를 청하면서 매일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의 의지를 굳게 해 주시도록 청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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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우리 바람과 기대에 어긋나는 말씀을 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합니까?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하느님의 자녀이자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사셨습니까?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지만 당신 자신을 한없이 낮추시어 비천한 인간이 되셨습니다. 다음 주일부터 교회는 대림 시기를 보내며 인간이 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겸손하신 육화, 곧 강생의 신비를 묵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삼 년의 공생활 동안 동고동락하였던 제자들의 발을 손수 닦아 주실 뿐 아니라 당신을 저주하고 침 뱉으며 못 박은 이들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당신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셨고, 생애 마지막에 이르러 사랑과 겸손의 절정을 보여 주셨습니다. 만일 십자가 희생과 죽음이 없었다면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영광으로 들어가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부활과 십자가는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우리도 그분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부활의 영광으로 들어가고자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이신 스승처럼, 우리도 눈에 보이지 않는 박해와 고통, 오해와 갈등, 미움과 원망을 참아 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 이유는 첫째, 이러한 시련을 통하여 우리 믿음은 단련을 받아 정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러한 역경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 십자가에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일치시켜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성실히 짊어진 뒤에야 비로소 우리에게 부활의 영광이 상급으로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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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박해>
“이 모든 일에 앞서,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2-19)
여기서 “내 이름 때문에”라는 말씀은, “나를 믿기 때문에”, 즉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는 이유로”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참 하느님이시며 참사람이신 분이고, 구세주로 오신 분”으로 믿는 것이 박해의 이유이고, 원인입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 사도의 다음 증언에 연결됩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여기서 ‘이름’은 그 이름의 소유자의 인격과 신원 자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의 ‘내 이름 때문에’는 ‘나 때문에’이고, 베드로 사도가 행한 증언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는 ‘사람들에게 계시된 분 가운데에서’이고,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고,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는 ‘그분밖에 없습니다.’입니다.>
예수님이 틀림없이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바로 그 믿음이 있기 때문에 신앙인들은 권력이 박해하든지, 가족이 박해하든지 간에 박해를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박해자들은 육신을 박해할 뿐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18절-19절) “박해할 것이다.”는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박해를 받을 수도 있다.”입니다. 이 말씀은, “반드시 박해를 받는다.”도 아니고, “박해를 받아야 한다.”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마태 10,23) 다른 고을로 피하라는 말씀은,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옮겨가라는 뜻입니다. 믿음을 지키고, 신앙생활을 계속하는 것이, 박해를 참고 견디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더 필요한 일입니다. <피할 수 없다면 박해를 참고 견뎌야 하고, 그러다가 순교를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가만히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즉 피할 수 있는데도 피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우리는 ‘박해’와 ‘십자가’를 구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신앙인은 각자의 삶에 주어지는 십자가를 거부하거나 피하면 안 됩니다. 박해를 피해서 다른 고을로 가는 것은, 신앙생활을 계속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사실 살던 곳을 떠나서 낯선 곳으로 옮겨가는 것도 고난과 시련이고,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성가정은 주님의 천사가 말한 대로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서 이집트로 피신했습니다.(마태 2,13-15)>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박해를 받는다면, 그것을 ‘신앙을 증언하는 기회’로 삼아라.”, 또는 “박해를 받더라도, 신앙을 증언하는 일을 멈추지 마라.”라는 뜻입니다. ‘신앙의 증언’은 박해가 없는 평온한 때보다 박해와 시련과 고난을 겪을 때에 더 빛을 발하는 법입니다.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라는 말씀은 “인간적인(세속적인) 말재주로 신앙을 증언하려고 하지 마라.”라는 뜻입니다. 말을 잘한다고 해서 신앙의 증언을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올바르게 믿고, 믿는 대로 사는 사람이 신앙을 증언하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증언은 ‘말’이 아니라 ‘삶’으로 해야 합니다.>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라는 말씀은, 신앙인이 신앙을 증언하고 복음을 선포할 때 그 일을 도와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말씀은, 박해 자체를 막아주겠다는 약속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주신다고 자동적으로 받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받는 쪽에서 잘 받아야 합니다. 자신의 신앙에 대한 ‘강한 확신’과 박해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베드로 사도의 증언’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의 약속이 그대로 이루어졌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예수님과 함께 다니던 사람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병이 나은 사람이 사도들 곁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하였다.”(사도 4,13-14)
사도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그들의 증언이 인간적인(세속적인) 말재주나 지식으로 한 일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한 일이라는 것을, 즉 주님께서 도와주셔서 한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이야기의 앞부분에 “그때에 베드로가 성령으로 가득 차 그들에게 말하였다.”(사도 4,8)라는 말이 있습니다.> 박해자들이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한 것은, 베드로 사도가 일으킨 기적 때문만은 아니고, 사도들의 확신과 용기에 압도되어서, 인간적인 말재주나 지식으로는 사도들을 상대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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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베트남의 순교성인들을 기리는 오늘 미사의 말씀은 믿음을 촉구하십니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의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루카 21,13-14)
에수님께서 제자들이 앞으로 겪게 될 박해 상황을 감추지 않고 설명하십니다. 회당과 감옥에 넘겨지고 끌려갈 것이며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죽임을 당하게 될 수도 있다고요.
이때 제자들이 명심할 점은 미리 인간적으로 뭔가를 하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증언의 기회에 자기 언어로 섣부르고 장황한 변론을 준비하기보다, 바로 그 순간 주님께서 담아 주실 그분의 말씀을 기다리라는 뜻일 겁니다. 그런데 즉흥보다 사전 준비에 철저한 성향이라면 다소 긴장이 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제 이 문제는 성향의 문제에서 믿음의 문제로 넘어갑니다.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8-19) 박해와 죽음 이야기까지 나왔는데도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거라 하시니 모순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머리카락"이라는 말을 쓰실 때는, 우리 힘으로 희거나 검게 할 수 없는 하느님 주권을 의미하고(마태 5,36 참조), 또 이미 아버지께서 우리 머리카락까지 다 세두실 만큼 우리가 그분께 귀하고 사랑스런 존재임을 가리킬 때입니다.(마태 10,30 참조) 설령 육체적으로 고통과 시련을 겪게 되더라도, 주님을 믿음으로써 온전히 구원되리라는 뜻입니다.
제1독서는 어제 등장했던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의 아들 벨사차르 임금 때의 일화입니다. "하느님께서 임금님 나라의 날수를 헤아리시어 이 나라를 끝내셨다는 뜻입니다. …… 임금님을 저울에 달아 보니 무게가 모자란다는 뜻입니다. ... 임금님의 나라가 둘로 갈라져서, 메디아인들과 페르시아인들에게 주어졌다는 뜻입니다."(다니엘 에언서 5,26-28)
다니엘은 적대국에 끌려간 유배자 중 하나입니다. 아무리 지혜가 출중하고 신통력이 있어도 목숨과 안위를 부지하기 위해서는 할 말, 안 할 말은 가려야 하는 처지지요.
하지만 다니엘은 주님의 집 기물로 술을 마시고 피조물을 신으로 찬양하던 임금에게 하느님께서 내리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풀이해 줍니다. 난데없이 글씨가 나타난 이유는 벨사차르 임금이 인간의 목숨을 손에 잡고 계시며 모든 길을 쥐고 계신 하느님을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덧붙이면서요.
다니엘은 임금에게 하느님께서 이 나라를 끝내셔서 메디아인들과 페르시아인들에게 넘어갈 것이라고, 또 임금은 구원받기에 모자란다고 숨김없이 아룁니다. 다니엘은 독서를 듣는 우리가 가슴 졸일지언정,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하느님께서 떠올려 주신 말씀을 숨기거나 감추지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 속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라시는 바가 다니엘 예언자의 태도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 담대함과 용기는 언변과 지혜를 주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의 크기이고 신뢰의 무게겠지요. 이 믿음과 신뢰가 충실함으로 표현되는 것일 테고요.
사랑하는 벗님! 우리 각자가 지닌 믿음의 무게를 살피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아직 오지도 않은 일을 미리 앞당겨 두려워하지 말기를, 그리고 권력이나 재산, 신분 등의 인간적 자원에서가 아니라 바로 그 믿음 덕분에 담대하고 용기 있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고 살아가길 바라십니다.
주님께서 사람과 사건, 말씀과 자연으로 우리 각자에게 써 보내시는 권고에 늘 깨어 있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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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신 담화, 곧 종말에 대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경각심을 일으켜줍니다.
먼저 박해와 박해 가운데에 있을 증언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그러나 언변과 지혜를 내가 주겠다.”(루카 21,12-15)
박해가 오히려 당신을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라고 깨우치십니다. 곧 박해를 당하게 되면 오히려 하느님의 능력과 현존을 체험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보호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눌변인 모세의 입과 함께 계셨듯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탈출기 4,11-12.15-16).
그러니 박해를 통하여 오히려 우리는 신앙이 굳세어지고 새로워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위기의 순간은 가장 좋은 기회의 순간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7-18)
이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미움이나 배척에서 벗어나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미움과 배척을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곧 미움과 박해를 벗어나게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보호해주고 지켜주실 것이니 인내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는 미움 받거나 배척받게 되면 힘들어 합니다. 고난과 시련, 어려움이나 귀에 거슬리는 말이나 힘든 것은 피하고, 편하고 좋고 즐거운 것, 듣기 좋은 말에 더 맛들이고 쉽게 기울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려움과 인내를 통하여, 구세주와 협력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신기하게도 어려움과 인내에는 고통을 변화시켜 하느님과의 만남이 되게 하는 묘한 이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고난을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라고 말합니다. 곧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필리피서 1,19)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9)
성 베네딕도 역시 ‘인내’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통로요,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는 한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의 수난에 인내로써 한몫 끼어 그분 나라의 동거인이 되도록 하자.”라고 말합니다.(수도규칙 머리말 50)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받을 것입니다.”(필리피서 3,10 / 로마서 8,17)
<오늘의 샘 기도>
주님!
고난과 시련이 당신을 증언할 기회가 되게 하소서.
그 속에서 당신의 능력과 현존을 체험하게 하소서.
오히려 굳세어지고 새로워지게 하소서.
바로 그 순간이 위기의 순간이 아니라 기회의 순간이 되게 하소서.
그 어떤 미움도 배척도 당신과 함께 받고 당신의 영광도 함께 누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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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사람은 어려움을 당했을 때 진면목을 알게 됩니다. 그때야말로 그 사람의 크기를 볼 수 있습니다. 어려움을 처리하는 과정 안에서 진실한 모습을 보게 되고 하느님의 사람인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에게 선을 이룰 수 있게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처지, 상황에서도 선을 지향하는 사람은 곧 하느님의 사람이요,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의 눈에 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직자인 저도 일상생활 안에서 하느님의 사람이 아닌 상태로 지낼 때가 종종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마 누군가 제 속을 알면 큰 실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 때문에 박해와 비난을 받았습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주님을 따라야 하지만 연약한 인간의 모습은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미리 당신의 제자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십니다.
‘박해를 당하고 감옥에 갇히게 되고… 그때야말로 너희가 나의 복음을 증언할 기회이다...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루카21,12-15) 박해는 그리스도를 증언할 기회라고 했지만 어디 그것이 말 같이 쉬운 일입니까? 일상 안에서도 변명과 합리화시키려고 하는 마음이 얼마나 많은데 말입니다.
감옥에 갇혀서 소신을 지킨다는 것은 믿음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믿는 사람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루카 12,12)
믿음을 지닌 제자들은 인간적인 말재주와 인간적인 지혜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과 지혜로 말하였습니다. 사도행전 4장13절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최고 의회에서 증언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의회 의원들은“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10절에도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이는데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최고 의회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모두 스테파노를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사도행전 6,15).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간직하고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로움인지를 체험하려면 주님의 말씀대로 최선을 다해 실천해야 합니다. 혹 지금 힘들더라도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6).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위안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어려울 때 진정한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저런 소리와 압력이 오더라도 흔들리지 않길 기도합니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야고1,12)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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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마태오 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받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광야에 왜 가셨을까요? 마귀가 유혹해서 가신 것일까요? 아니면 세상의 유혹을 이길 수 있다는 본보기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당신의 의지로 가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당신 의지로 가셨을 것 같지만, 마태오 복음 4장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예수님께서 직접 당신 의지를 세워 광야에 가신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로 가신 것이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원해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루시도록 내어 맡기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께서 이루시도록 자신을 이렇게 내어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찾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렇게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찾아 나선다면 하느님 자리는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유혹을 받는 광야에 간다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쁜 것이 되는 것은 유혹에 빠졌을 때이고, 유혹을 이겨냈을 때는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됩니다. 가장 큰 기쁨의 순간이 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신 것이었습니다.
유혹의 순간이 올 때, 왜 이런 유혹을 주시냐고 울부짖어야 할까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기뻐해야 할 때였습니다. 이로써 하느님의 영광이 이 세상 안에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은 예수님처럼 하느님께 이루시도록 모두 내어 맡기실 때 가능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증언하고 예수님의 사명을 이어받은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박해와 고문, 재판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제자들을 그렇게 사랑한다고 하시면서, 왜 그런 힘든 시간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지 이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바로 제자들에게 유혹의 공간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직접 모범을 보여주셨듯이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루카 21,13)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은 곧 우리의 구원과 직결됩니다. 그래서 순간의 만족을 얻는 삶이 아닌, 영원한 만족을 가져올 수 있는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끝까지 이겨내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루카 21,1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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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살길을 거슬러>
루카 21,12-19 (재난의 시작)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살길을 거슬러>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루카 21,13)
미움이 살길일 때에
사랑으로 죽는 겁니다
가짐이 살길일 때에
비움으로 죽는 겁니다
보임이 살길일 때에
감춤으로 죽는 겁니다
높임이 살길일 때에
낮춤으로 죽는 겁니다
거짓이 살길일 때에
참됨으로 죽는 겁니다
가름이 살길일 때에
이음으로 죽는 겁니다
내침이 살길일 때에
품음으로 죽는 겁니다
누름이 살길일 때에
섬김으로 죽는 겁니다
저주가 살길일 때에
축복으로 죽는 겁니다
죽임이 살길일 때에
살림으로 죽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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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묵직한 묵상거리들>
어제 사람들에게 파멸의 시간이 와도 두려워하거나 속거나 따라가지 말라고 하신 주님께서 오늘은 제자들에게 박해받게 되면 오히려 증거의 기회로 삼으라고 하시고 그 과정에서 인내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보통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고 속거나 따라가지 않는 정도만 되도 되지만 제자들은 그것으론 부족하고 주님의 증거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묵상할 것을 갖습니다.
첫째는 기회와 관련한 묵상거리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기회를 잡지 못하고 놓치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기회를 잡더라도 고작 승진이나 출세의 기회나 잡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신자이며 제자인 우리는 다른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처럼 세속적인 기회가 아니라 당연히 영적인 기회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편으로는 주님을 증거 하는 기회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기회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기회란 주님을 위한 것이며 동시에 나를 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하나로 묶으면 우리가 증거 하는 것은, 우리가 믿는 주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게도 많은 사람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없고, 그래서 그들에겐 영원한 생명에 대한 기대도 관념도 없고, 그래서 이 세상 살다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인 삶을 삽니다. 그러니 기회를 잡더라도 세속적인 기회만 잡게 되겠지요.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강한 갈망이 없으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없어도 된다는 얘기가 되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 때문에 박해와 손해라는 기회비용을 치를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기회비용이라는 두 번째 묵상거리를 만나게 되는데 기회비용이란 애초에 경제적인 용어로서 시간, 돈, 능력 등 주어진 자원이 제한적인 상황에서 인간은 다양한 기회를 모두 선택할 수 없고 그래서 어떤 기회의 선택은 곧 나머지 기회들에 대한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그대로 적용하면 우리가 영원한 생명이나 하느님 나라와 같은 영적으로 큰 가치를 선택게 되면 이 세상의 가치를 포기하고 박해와 손해를 감수하는 기회비용을 치러야겠지요.
그런데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박해를
감수하는 기회비용뿐 아니라 박해를 감당하는 기회비용도 치러야 하는데 감당하는 기회비용을 다른 말로 하면 인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박해를 감수하는 것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면 감수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수한 것을 감당해야 하기에 다시 말해서 감수한 다음엔 그것을 인내해야 하기에 영원한 생명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내로서 생명을 얻어라.”라는
중요한 말씀을 오늘 마지막으로 하시는데 이것이
우리가 건너뛰지 말아야 할 세 번째 묵상거리입니다.
사실 박해가 아니더라도 약함과 병고를 인내해야 영원한 생명으로 넘어가게 됨을 나이 먹고 늙어갈수록 무겁게 묵상하는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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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12,19)
<피할 수 없는 고통!>
오늘 복음(루카21,12-19)은 '재난의 시작에 관한 말씀'입니다. 요즘 전례력으로 한 해의 끝자락에 와 있다보니, 계속해서 종말에 관한 복음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어제 복음은 '적그리스도 등장과 전쟁과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과 같은 일들이 바로 재난의 시작을 알리는 표징'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 모든 일에 앞서, 제자들이 먼저 박해를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3-15.19)
우리의 고통에 앞서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먼저 고통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이겨내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고통을 이기고 부활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인내로 고통을 견디어 내고 부활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겪는 그 어떠한 고통도 예수님께서 당하시고 견디어 내신 십자가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기에 우리는 그 고통을 이겨내고 부활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오늘 독서는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완전 멸망한 후에 다니엘은 동료 세 사람과 함께 바빌론으로 끌려갑니다. 다니엘은 유배지에서 '하느님의 영으로' 모든 고통을 이겨냅니다.
그리고 형안(炯眼)과 통찰력과 지혜로 바빌론 임금을 구원으로 인도하고, 마침내는 이스라엘을 '해방의 기쁨으로' 인도합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성령의 힘으로 견디어 내고 함께 부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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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HIajbnDEMC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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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 19)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지혜가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걱정하며
살아갑니다.
걱정과 불안을
주님과 나누면
걱정과 불안은
인내와 용기가
되고 지혜가
되어 있습니다.
생명을
얻게 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있기에
우리는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나아가야 할
생명의 방향을
아는 것이
종말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미움을 떼어내는
집착을 떼어내는
하느님 사랑에
우리는
집중할 뿐입니다.
미움과
박해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꿋꿋이
주님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주님의 길이
구원의 길입니다.
인내로써
구원을 이루시는
주님을 정녕
믿습니다.
우리는 늘
우리자신 때문에
걱정을 먹고
살지만
예수님께서는
인내로써
걱정을 뛰어넘는
구원의 진리를
걱정이 많은
우리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인내와 끈기가
우리를 살리는
삶의 지혜입니다.
근심과 걱정
삶의 조바심이
부질없음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걱정의 포로
미움의 노예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구원의
협력자들입니다.
걱정은
하느님의 지혜를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
하나하나를
되새기며
하느님을
향합니다.
하느님의 희망은
뒤를 돌아보는
집착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희망은
매 순간 베푸시고
지켜주시는
사랑과 자비를
되새기는
감사입니다.
인내는 감사를
향하고
생명은 구원을
향해 있습니다.
구원을 향하는
생명의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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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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