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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꽃 / 서대선
길거리
때 묻은 아이들
집으로 불러들여
잠자리 비워주고
밥그릇
고봉으로 얹어 주시던 아버지
기술 가르쳐
떠나보내며
뒤돌아보지 말라 당부하시던
아버지
박씨 하나
물고 오기는커녕
일자 소식 없는
머리털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것
아니라는 친척들의 지청구를
호박 구덩이 거름으로 묻던 아버지
세상 일 밀치고
어느 날 문득 찾은
내 아버지 빗돌 앞에
누군가
놓고 간
마른 꽃다발 하나.
꽃범벅 / 서상영(1957~ )
꽃 베던 아해가 키 높은 목련꽃 예닐곱 장 갖다가 민들레꽃 제비꽃 하얀 냉이꽃 한 바구니 모아다가 물 촉촉 묻혀서 울긋불긋 비벼서 꽃범벅, 둑에서 앓고 있는 백우(白牛)한테 내미니 독한 꽃내 눈 따가워 고개를 젓고
그 맛 좋은 칡순 때깔 나는 안들미 물오른 참쑥 키 크다란 미나리를 덩겅덩겅 뜯어서 파란 꽃떡 만들어서 쏘옥쏘옥 내미니 소가 히이- 우서서 받아먹어서 한 시루 두 시루 잘도 받아먹어서
아하, 햇살은 혓바닥이 무뎌질 만큼 따스웁더라
이해는 신기해서 눈물 나게 슬퍼서 하도 하늘 보며 초록웃음 웃고파서 붉게 피는 소가 못내 안타까워서 속털도 빗겨주고 눈도 닦아주고 얼굴만 하염없이 쓰다듬고 싶어서 깔끌한 혓바닥이 간지러워서
꽃과 같이 하르르 소에게 먹였더라
이 봄에 꽃들이 너무도 쓸쓸해지면
곁불 쬐러 나온 나비가 겁먹은 왈츠를 춘다
소는 제 안만 디려다보고 아릿아릿 아려서 시냇같이 줄줄 눈물만 흘려서 발굽 차고 꼬릴 들어 훌~훌~ 치달려서 철쭉송화 우거진 산에 숨어서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데 아하, 앞산에 봄이 오자 꽃부텀 진다
동편 뜰에 꽃을 풀어 / 서안나 (1965~ )
불타는 혀를 내밀어
우리는 사랑을 약조했다
사랑의 둘레는 축축하다
첫날에는 안개를 부르고
둘째 날
동편 뜰에 꽃을 풀어
축축한 홍매화 가지를
이승 밖으로 내밀기도 했다
셋째 날
세 번 절하고 세 번 운다
울어도 눈물이 흐르지 않을 때
살아 있어도 귀신이다
당신은 안아 줄 몸이 없는 정인(情人)
아픈 계절은 어떻게
꽃잎으로 깃드는지
사람이 사람에게
첫정으로 스며드는지
곰팡이 핀 눈동자
매화는 분홍빛 곡조로 핀다
꽃밭의 독백 / 서정주
노래가 낫기는 그중 나아도
구름까지 갔다간 되돌아오고
네 발굽을 쳐 달려간 말은 바닷가에 가 멎어버렸다
활로 잡은 산돼지, 매로 잡은 산새들에도
이제는 벌써 입맛을 잃었다
꽃아, 아침마다 개벽하는 꽃아
네가 좋기는 제일 좋아도
물 낯바닥에 얼굴이나 비취는
헤엄도 모르는 어린아이와 같이
나는 네 닫힌 문에 기대 섰을 뿐이다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벼락과 해일만이 길일지라도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같이 / 서정주
섭섭하게,
그러나
아조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蓮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1966년>
꽃병이라는 곳에 꽃을 한 무덤 꽂고 / 성미정
아직 도착하지 않은 나를
기다리며 꽃을 꽂았다
어떻게 꽂아야
질서가 있는지
어디를 잘라야
꽃들의 리듬을 볼 수 있는지
알 수 없어
어둠 속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꽂았다
물컹하거나 풋내가 나거나
비린내가
나는 꽃들을
이름은 모르지만
꽃인 것들을 꽂았다
꽃병이라는 곳에
꽃을 한 무덤 꽂고
죽어버린 날들보다 슬펐다
얼마나 자주 목도했던가
나의 죽음을
그렇다고 이 꽃들을
나에게 바칠 수는 없다
이제 조금 더 명랑해지기로 했고
잊고 있던 동화책들을
다시 펼치기로 했는데
옛날 옛날 나는
어느 동화 속 어두운 숲에
자라는 축축한 이끼
결코 날이 밝지 않을 것을
모르는 척
그저 계속해서 꽂는
허공의 손짓이었을 뿐
꽃을 찾다 / 성선경
암탉에게는 암탉의 벼슬이
수탉에게는 수탉의 벼슬이
후티 후티 후티티 후티티 티티
마당 언저리 맨드라미같이 어울렸다.
네게 벼슬을 주면 무슨 꽃을 피우겠니?
후티 후티 후티티 후티티 티티
맨드라미같이 대가리가 붉은 여름
너는 어디에서 꽃을 찾나?
스무 살 여드름 자국 같은 뾰두라지를
짜고 또 짜서 결국 벌겋게 달아오른
마당 언저리 맨드라미에게
후티 후티 후티티 후티티 티티
네게 벼슬을 주면 무슨 꽃을 피우겠니?
암탉에게는 암탉의 벼슬이
수탉에게는 수탉의 벼슬이
후티 후티 후티티 후티티 티티
벌겋게 달아오른 저 여름의 마당 언저리
지진처럼 꽃피다 사라진 (외 1편)
—숨은그림찾기
성은주
우린 서로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버려진 상처의 속도만 기억할 뿐
출발선에서 신발을 챙기고
오래된 지도를 꺼내 보았는데
발자국으로 표시된 자리마다 파도소리가 출렁인다
외로운 물고기들이 서로 몸 비빌 때
잃어버린 무늬가 떠오른다
지구 어딘가 찍힌 발자국으로
아무가 아무에게 아무를 아물게 하는 저녁
모퉁이는 잡히지 않고
낙서 가득한 얼굴들만 가득하다
읽어내지 못한 감정에
다시,
여긴,
외로움이다
손잡이 없는 문을 열 때마다
당신의 어딜 만져야 할지
어제부터 회전목마는 멈추지 않고
열쇠 구멍이 필요한 밤에 어깨만 커진다
때론 내가 아닌 다른 누구이고 싶을 때가 있다
종이에 소름이 돋아나면
지진처럼 개화(開花)는 균열이라서
잠시 흔들리는 통증을 벽화에 가둔다
붉은 등대의 충혈 된 눈알인 듯
마침표로 당신을 어디쯤 멈추게 할지
느낌표에서 물음표를 지나 서툴게 미끄러진다
헛발을 내딛게 되면
부끄럽게 헛기침이 나오니 조심해야 한다
동그라미로 감도는 미끈한 본능으로 구원받을 것
이미 멍든 무늬에
우리가 겹쳐 있는 줄 모르고
두리번거리다가 계절이 온다
꼬리를 감추지 못한 채 계절이 흩어진다
검은 꽃 / 손병걸
빛이 사라졌다
침대로 둘러싼 발소리
말끔히 빠져나간 병실
유리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찔러대도
열리지 않는 두 눈동자
나의 어둠이 단단했다
도무지 한 치 앞을 몰라
흰 지팡이 따라나선 길
이제는 끝이구나! 주저앉아 버렸을 때
코끝을 찌르는 독한 향기
얼떨결에 뻗은 손
손가락 끝에 닿는
가느다란 꽃대 끝 꽃 한 송이
어둠을 움켜쥔
뿌리의 힘!
수국꽃 /손순미
절 마당 수국꽃 비를 맞는다
수국꽃 위에만 도착하는 비
칠월의 긴 손가락이 수국의 창백한 뺨을 두드린다
비에다 제 뺨을 온전히 내어주고 있는 수국
눈물을 가두어둔 듯
비는 흘러내리지도 못하고 꽃잎에 갇혀 있다
수국이 울고 있다
벽에 이마를 대고 울고 싶은 사람을 위해
수국의 눈썹이 저렇게 떨리고 있다
눈물에 이르지 않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몸부림을 쳤나
쏟아지는 비에 수국은 파리하게 젖어간다
나는 저 어린 꽃에게 다가가 살며시 우산을 씌워주고 싶지만
방법이 없다
다들 화려한 꽃세상 같지만
어디선가 간장같이 짠 눈물을 흘리는 이가 있기 마련이다
눈물은 상처에 바치는 공양이다
비가 그치고
수국꽃에 연등처럼 불이 들어온다
점박이꽃 / 손진은
발을 헛디뎠을까
차가 향기의 벼락 속으로 뛰어든 걸까
지품에서 진보로 넘어가는 국도변에
만삭의 노루가 앉은 듯 누워 있다
금방 어린것이 나올 듯한 황갈색 배를 꿈틀거리며
기품 있는 목은 든 채
하트 모양의 발굽 향기를 찍으며
저 순한 어미는 알까
곧 어룽이는 빛살 속에 찬 기운이 섞이고
화사한 생을 거두어갈 것을
가장 먼저 알아볼 개미가 몰려들 것을
쿡쿡 독수리가 발톱으로 찔러볼 것을
귓불 도톰한 상수리 잎도 읽지 못하는
아직 구름이 놀고 있는 가랑가랑한 눈의 호수
아지랑이의 현기증 일으키는 젖은 코
저 일렁이는 꽃시간
아무것도 모르고 까치는 날아와
발끝에 향기 찍어 상수리나무 어깨로 날아간다
건듯거리는 바람이 왜 그래, 어깰 툭툭 치며
부신 햇살에 타는 털을 오래 만진다
저 빤히 쳐다보는 눈동자가 사라질 거라곤
곧 이곳을 방문할 죽음의 그림자도 생각 못할 것이다
생의 아른한 둘레가 한 획 쉼표로 편안해질
한 마리 순한 짐승이 만드는 눈의 경전 앞에
내가 지은 경계가 사정없이 무너진다
이제 곧 길 가던 농부가 저 꽃향기를 수습해갈 것이지만
저 곳의 햇살은 노루가 떴던 눈을 감는 속도로 저물어갈 것이다
둘레도 풍경도 될 수 없는 난
조각구름만도 못한 안부를 던져놓고 갈 뿐
꽃단추 / 손택수
내가 반하는 것들은 대개 단추가 많다
꼭꼭 채운 단추는 풀어보고 싶어지고
과하게 풀어진 단추는 다시
얌전하게 채워주고 싶어진다
참을성이 부족해서
난폭하게 질주하는 지퍼는 질색
감질이 나면 좀 어떤가
단추를 풀고 채우는 시간을 기다릴 줄 안다는 건
낮과 밤 사이에,
해와 달을
금단추 은단추처럼 달아줄 줄 안다는 것
무덤가에 찬바람 든다고, 꽃이 핀다
용케 제 구멍 위로 쑤욱 고개를 내민 민들레
지상과 지하, 틈이 벌어지지 않게
흔들리는 실뿌리 야무지게 채워놓았다
꽃들이 우리를 체포하던 날 / 손택수
쌍용차 희생자 스물네 분의 분향소가 있는 덕수궁 대한문 앞
식목일 새벽에 중구청이 분향소를 철거하더니
그 자리에 화단을 만들었다
사연도 모르고 마냥 해사하게 피어난 꽃들이라니
하긴, 방학 동안 철거용역 알바를 하고
학비를 마련하는 대학생들도 있다고 한다
졸업을 해도 취직은 되질 않고
대출 받은 학자금 이자 갚느라 결혼도 미루면서
신용불량자로 전락한 학생을 나도 안다
그래도 그렇지 한참 푸르를 나이에 철거용역이 뭔가
제 가난한 어미 같은 이의 집을 부수며 살아야 할 이유라는 게 뭔가
외면하다가도, 벗어날 수 없는 처지와 그 발버둥을 헤아리면
나는 함부로 돌멩일 던질 수가 없는데
아무래도 꽃의 죄까지 엄히 따져야 할 시대가 닥친 모양이다
오죽했으면, 치욕의 연대를 이해해야 할 시대가 와버린 모양이다
화단으로 들어가면 즉석에서 현장범으로 체포한다는 대한
펜스를 치고 철야경비까지 서는 문 앞에서
앙큼한 꽃 / 손택수 (1970~ )
이 골목에 부쩍
싸움이 는 건
평상이 사라지고 난 뒤부터다
평상 위에 지지배배 배를 깔고 누워
숙제를 하던 아이들과
부은 다리를 쉬어가곤 하던 보험 아줌마,
국수내기 민화투를 치던 할미들이 사라져버린 뒤부터다
평상이 있던 자리에 커다란 동백 화분이 꽃을 피웠다
평상 몰아내고 주차금지 앙큼한 꽃을 피웠다
찔레꽃과 나와 새 / 송과니
울려 퍼질 것이다. 저 공중이 찢어진다
하더라도 내 소리는
날개 젓고 저어 휘저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에 당도할 것이다.
가시 숲 속에 모여 윙윙거리는 찔레꽃잎 음표들 내 계음들. 그런데
내 소리가 아직
내 부리 벗어나지 못하였음인가. 저 새가 이 새 업어주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 목청 비틀어서라도
새벽이 나 들쳐 업고 내 노래까지 날게 할 것이다. 부르다 음표가 바닥날지라도
나는 부를 것이다.
내 소리가 무관심한 새벽의 목청을 비틀어 새벽종이 우는 그날,
온갖 슬픔이여, 나를 찔러오라.
그대의 지독한 가시로 나를 찔러오라.
그대가 나를 찔러주면
나는 꽃으로 피어날 것이다.
그대가 나를 더 지독하게 찔러주면
나는
가시를 아주 상냥하게 맞이한 꽃으로
그대 한가운데 피어날 것이다.
때문에,
저 새가 이 새 업어주지 않는 것인가.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냉혹하게 찔러오는 슬픔으로부터 날개 치며 떠올라 저 공중 젓고 휘젓는 한 곡의 소리 그
놀랍고 아름다운 노래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
내 계음은, 가시 숲으로부터 솟아올라 울려 퍼져나가는 찔레꽃잎 음표들이다.
번져가라, 나는 내가 가진 소리 전부를 튼다.
꽃이 필 때 / 송기원
지나온 어느 순간인들
꽃이 아닌 적이 있으랴.
어리석도다
내 눈이여.
삶의 굽이굽이, 오지게
흐드러진 꽃들을
단 한번도 보지 못하고
지나쳤으니.
꽃 진 뒤에도 나는 / 송영희
꽃 진 뒤에도 나는, 알지 못했네
그게 빨강인 줄을
막다름인 줄을,
마음인 줄을 몰랐네
나는 고달픈 내 무릎만을 사랑했네
새벽의 내 기도만을 사랑했네
나무들이여
찰랑찰랑 푸른 잎을 달고 있는 나무들이여
그 잎 다 떨군 나무들이여
한 잎의 눈뜸을
한 잎의 뒤척임을
한 잎의 시들음을
한 잎의 하늘을 다 품었던 나무들이여
나는 끝없이 미래만을 사랑했네
시를 쓰면서도 나는
사랑의 마음을 모르고 있었네
단 한 줄의 마음이 어떻게 내게 왔는지
어디서 오래 머물다 어떻게 모래가 되어 흘러갔는지
오직 나는 내 가여운 손만을 사랑하고 있었네
손을 따라 움직이는 내 마음만을 사랑하고 있었네
당신의 두 손만 간절히 그리워하고 있었네
아직 당신을 사랑하지 못하네
하얗게 슬프네
수국과 치자꽃 / 송 진 (1962~ )
두 개의 거울이지 커다란 얼굴과 작은 얼굴이 골목의 끝집마다 송아지와 낙타의 혹처럼 서 있지 미래의 조달청이라고 우리는 운을 떼며 조청을 그리워한 것처럼 바다에 들러붙었지 그렇다 치자 밑줄 그은 심장이 바다에 풍덩! 헤어지지 못할 거라는 예감은 쿠키의 맛처럼 제각각이어서 젖은 하늘빛 린넨 셔츠가 마르기 전에 서둘러 육체를 마쳤다 치자의 끝말은 치자리 수국의 끝말은 수구리 짙어진 하늘과 옅어진 등대 사이에서 면과 읍과 리를 그리워한 거지 사라진 희뿌연 낮달은 시계 반대 방향으로 보랏빛 비를 뿌렸지 다가오는 달빛은 인간의 뜨거운 손끝에 누런 화상의 자국마저 길가에 버려진 치자꽃의 리, 그렇다 치자 아니라고 치자 수국은 태양처럼 크고 둥글었지 방금 육체를 마친 얼굴처럼
찔레꽃 / 송찬호
그 해 봄 결혼식 날 아침 네가 집을 떠나면서 나보고 찔레나무숲에 가보라 하였다
나는 거울 앞에 앉아 한쪽 눈썹을 밀면서 그 눈썹 자리에 초승달이 돋을 때쯤이면 너를 잊을 수 있겠다 장담하였던 것인데,
읍내 예식장이 떠들썩했겠다 신부도 기쁜 눈물 흘렸겠다 나는 기어이 찔레나무숲으로 달려가 덤불 아래 엎어놓은 하얀 사기 사발 속 너의 편지를 읽긴 읽었던 것인데 차마 다 읽지는 못하였다
세월은 흘렀다 타관을 떠돌기 어언 이십 수년 삶이 그렇데 징소리 한 번에 화들짝 놀라 엉겁결에 무대에 뛰어오르는 거 어쩌다 고향 뒷산 그 옛 찔레나무 앞에 섰을 때 덤불 아래 그 흰 빛 사기 희미한데,
예나 지금이나 찔레꽃은 하얬어라 벙어리처럼 하얬어라 눈썹도 없는 것이 꼭 눈썹도 없는 것이 찔레나무 덤불 아래서 오월의 뱀이 울고 있다
냉이꽃 / 송찬호
박카스 빈 병은 냉이꽃을 사랑하였다
신다 버려진 슬리퍼 한 짝도 냉이꽃을 사랑하였다
금연으로 버림받은 담배 파이프도 그 낭만적 사랑을 냉이꽃 앞에 고백하였다
회색 늑대는 냉이꽃이 좋아 개종을 하였다 그래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긴 울음을 남기고 삼나무숲으로 되돌아갔다
나는 냉이꽃이 내게 사오라고 한 빗과 손거울을 아직 품에 간직하고 있다
자연에서 떠나온 날짜를 세어 본다
나는 아직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꽃에서 바람 불고 / 신대철
새를 부르고 열병과
광기를 부르는 꽃과 나무들
식물 원정 탐사대가
사막과 열대우림에서 납치한 희귀 식물들이
거대한 접시형 온실
인공 땅속에 뿌리 내린다.
나무 지지대에 기대어 조화 같은 꽃을 피운다.
배수펌프장 근처까지 걸어야
꽃에서 바람 불고
햇빛 쓸리고 흙내가 난다.
쐐기풀 옆 돌 그림자에는
우리에게서 점점 멀어진 풀들도 모여 있다.
조뱅이 질경이 개비름 지칭개 엉겅퀴 바랭이
쨍 머릿속을 울리는
얼음 갈라지는 소리도
그 여운 같은 우리도
돌과 풀 사이에 붙박인다, 들썩인다.
꽃으로 눈을 가린들 / 신덕룡
꽃그늘 아래 누드 화보라도 찍듯
광어 한 마리
홀라당 벌거벗고 무 채반 위에 누웠다.
햇볕과 바람과 야합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렇지 않다고
더 가리고 숨길 게 뭐 있겠냐고,
부끄러움도 혁명이라는 데
떨어진 꽃으로 눈을 가린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듯 누웠다.
상여꽃점 / 신미나
한 잎, 두 잎, 꽃잎 낱장 떼며 가네 너를 잃고 백치처럼 나는 가네 송홧가루 날리는 길 맨발로 걸어, 해붉은 길을 걸어
이 고개 넘으면 바람이 점지한 사내 하나 만나 죄를 보태도 좋을라나 철없이 철딱서니 없이 천하게 웃음 흘려도 너는 다시 못 올라나
사람아, 나는 입술이 까맣게 탄다 내 살로 태(胎)를 키워 네 피나 물려둘 것을 이 세월 늙어 내 눈에 꽃물 다 바래면 네 몸내를 잊으면
한 시절 약속 없이 어기고 지는 꽃낱이 섭섭만은 않을라나 손금 위를 비켜간 사내였어도
이윽고 흘러갔어도
* 2007 신춘문예 당선시집
칸나꽃 분서(焚書) / 신미나
절명을 꿈꾼들 저 꽃 같이는 심장을 내걸 수 없었네
계절은 매번 色 다른 변절을 꿈꾸어 왔으므로
이제 나를 거쳐 간 연애는 미신이 되었다
돌아본들 유산 후에 돋는 입덧 같은 것이었나
꽃 진 자리 火氣가 남아 피 더운 까닭은
용서하라, 눈 매워 혈서 한 잎 흘려 쓰지 못하는 것을
오로지 그대, 한 올 그림자마저 태우고 높이 떠나라
이 여름 다 가고 붉은 두근거림 마저 지면
당신 눈짓과 살내를 곁에 두고 오래 잊을 것이라
화대처럼 받아든 이 시간에 불붙이고
연기도 없이 紙燈 타는 소리를 나는 듣고 있을 것이라
그러나 석류꽃은 피고지고 / 신미나
풍문은 늘 대문 밖에서만 떠돌았다
삼복에 애 낳다 숨진 처녀애가 살았다는 집 담벼락
거기, 어금니 금가도록 아득바득 이 갈던 사랑이 있었나 끝내 숨 놓지 않으려는 핏발 터진 눈동자 있었나
알알이 탯줄 마른 애기들이 줄기 타고
살아서 돌아오는 대낮
천길 만길 무서운 하늘길이 있어, 산목숨 데려가는 소리가 있어
하늘이 데려가는 목숨은 어디로 가는가 혀를 차도 모를 일 귀가 넷이어도 들을 수 없는 일이라
짹짹 피는 저 꽃은 철없이 붉은 주둥이 벌려쌓는데
그 꽃도 나를 보았을까 / 신영배
아주 작은 꽃에겐 아주 작은 태양이 뜨고 아주 작은 달이 뜨고
쓰러진 그녀에게도
아주 작은 밤이 지나고 아주 작은 아침이 오고
버려진 개에게도
아주 작은 바퀴가 굴러가고 아주 작은 발이 지나가고
그녀와 개 사이에도
아주 작은 사람이 오고 아주 작은 사람이 가고
비 한 방울의 바다를 뒤집어쓰고
아주 작은 꽃에겐 아주 작은 파도
아주 작은 노래
아주 작은 말
해안도로를 따라
아주 작은 꽃에겐
아주 작은 흰색
길 끝의 소녀들
쓰러졌다 일어서면 흰색
소녀와 꽃의 사정 / 신영배
소녀가 그림자를 가지고 놀았다
소녀는 중얼거리고 그다음 사라졌다
계단은 아침에 짧아지고 저녁에 길어지네
소녀는 긴 계단을 밟고 내려갔다
문은 월요일에 짧아지고 화요일에 길어지네
소녀는 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꽃은 햇빛에 짧아지고 달빛에 길어지네
소녀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이유는
길고 긴 꽃 속을 걷고 있기 때문이었다
소녀는 달을 따라갔다
노란 돌을 주워 멀리 던졌다
강물이 노란 돌을 데려갔다
소녀는 강물을 따라갔다
먼 곳에는 아름다운 새가 있을까
새 모양의 귀를 달고
소녀는
길어지고 길어지고
달이 긴 소녀를 따라간다
강물이 길고 긴 소녀를 따라간다
소녀는 길고 긴 꽃 속을 걸었다
꽃이 계속 길어지는 이유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소녀 때문이었다
꽃들의 귀가 / 신용목
관이 이동한다 땅을 덮은 아스팔트를 따라
둥근 바퀴를 달린다
어디에 닿아도 무덤이므로
지구는 뜨거워지고 있다 풀잎도 지기 전에
먼저 뿌리를 태운다
어디를 가도 화장터이므로
모든 행성은 천국을 향해 돈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저곳에서 이곳으로
(누구도 태어난 곳에서 죽지 못한다)
나는 버스 안에 있다
이 별에서 왜 우리는 모두 같은 배역을 맡았을까
사각의 관 속에서도 나는 주인이지 못했다
나는 시간의 부장품이다
삶이 녹슬고 있다
꽃들이 딸꾹, / 신정민
엄마가 몰래 딸꾹, 꽃잎을 먹었지요 꽃들이 자꾸 피어
서 엄마는 딸꾹, 나 몰래 자꾸 꽃을 따 먹었지요 들키지 않
으려고 딸꾹, 꽃을 삼키는 바람에 딸꾹, 딸꾹질이 멈추지
않네요 꽃이 죽을까봐,
엄마가 딸꾹, 죽을까봐 나는 이미 닫힌 약국 문을 두드
려요 아홉 살 딸꾹, 나는 아직도 아홉 살 딸꾹, 딸꾹, 아무
리 두드려도 문 두드리는 소리가 딸꾹, 들리지 않아요 너
도 꽃 나도 꽃 꽃들에게 이름 붙이며 놀았는데,
그 겨울 칼바람이 딸꾹, 다시는 꽃 이름을 부르지 못하
게 하였지요 꽃을 키우는 엄마, 엄마의 딸꾹질이 무섭다
고 딸꾹, 꽃들에게 일렀지요 거짓말처럼 딸꾹, 엄마의 딸
꾹질은 꽃이 되었지요 세상은 온통 꽃무늬뿐이었지요 딸
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