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의병의 날을 기억하자
황원갑 (역사소설가)
호국의 달, 보은의 달 6월이다. 6월 1일은 임진왜란 때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가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킨 ‘의병(義兵)의 날’이다. 오는 20일(음력 5월 7일)은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초기에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옥포해전에서 왜선 26척을 격침시켜 바다에서 첫 승리를 거둔 날이다. 그날은 백성들 몰래 서울을 버리고 피란을 떠난 선조(宣祖)가 평양성에 들어간 날이기도 했다.
이보다 하루 전인 음력 5월 6일은 곽재우가 임진왜란 최초로 의병을 일으키고 기강전투에서 관군에 앞서 처음으로 승리를 거둔 날이다. 곽재우가 우리 역사상 최초의 민간유격대라고 할 수 있는 의병을 일으킨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8일째 되는 날이었다. 정부는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킨 그 해 1592년 5월 6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6월 1일을 국가기념일 '의병의 날'로 제정했다.
곽재우는 본명이나 아호 망우당(忘憂堂)보다 홍의장군이란 별호로 더욱 이름난 당대의 쾌남아였다. 그는 벼슬길을 외면한 채 초야에 묻혀 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 재산을 털어 의병을 모집했으며 뛰어난 전략과 빼어난 용병술, 출중한 리더십으로 상승불패의 신화를 남김으로써 '바다에는 이순신이 있었고 육지에는 곽재우가 있었다'는 전설을 낳았다.
곽재우가 기강전투에서 왜적을 통쾌하게 무찔렀다는 소식이 퍼져나가자 이웃 친구와 머슴 10여 명으로 출발한 그의 의병부대는 얼마 안 가서 2천 명을 헤아리는 대부대로 군세가 불어났다. 정암진전투는 홍의장군의 의병 활동 가운데 가장 빛나는 승리였다. 그해 6월 6일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휘하의 왜군 2만 대군이 의령을 점령하고 전라도로 진격하려고 정암진에 이르러 도하작전을 시도할 때 곽재우는 신출귀몰한 전략전술로 적군을 격퇴했다. 그 뒤 왜군은 홍의장군의 의병부대만 만나면 "신장(神將)이 나타났다!"면서 도망치기에 바빴다. 그는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때도 경상좌방어사로 창녕의 화왕산성을 지켜냈다.
그러나 곽재우는 임금이 내린 벼슬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버렸다는 '괘씸죄'에 걸려 2년간 전라도 영암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풀려났다. 선조(宣祖)는 그처럼 영악한 인물이었다. 곽재우가 벼슬을 끝내 마다한 것은 백해무익한 당쟁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어 헛된 죽음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또한 백성들에게 인기가 높은 김덕령(金德齡)을 죽이고 이순신마저 왕권의 잠재적 라이벌로 의식해 죽이려고 덤벼든 선조의 엽기적 성품을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의병은 싸울 뿐이지 뽐내지 않는다'며 필승의 전략으로 백전백승하던 유격전의 명장 곽재우는 만년을 자연 속에서 은둔하다가 1617년(광해군 9) 음력 4월 10일 세상을 뜨니 향년 66세였다.
의병은 '정의를 위해 일어난 군사'라는 뜻. 정규군이 아니라 백성이 자발적으로 일어난 군대다. 우리나라는 고조선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거의 끊임없이 외세의 침략을 받아왔고 이에 따라 의병의 역사도 오래됐다. 의병은 정규군이 없으니 국가도 믿을 게 아니고 내 힘으로 내 고을, 내 가족을 지키고자 일어났다. 우리 한민족이 숱한 위기에도 오랜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이들 의병의 고귀한 호국정신, 희생정신 덕분이다.
6ㆍ25전쟁 68주년, 광복 73주년을 맞건만 국민의 안보의식은 전보다 더욱 무뎌졌다. 북핵위기는 풀릴 줄 모른다. 남남간의 정쟁은 격화하고 국론 분열도 심화하는 양상이다. 어지럽기가 임진왜란 전과 다를 바 없다. 나라의 현실과 장래가 매우 걱정된다. 이런 때일수록 국론을 통일하고 적과 맞서 나라와 겨레를 내 힘으로 지키려는 의병정신을 되새기고 가다듬어야 마땅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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