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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글은 지장보살의 화현이신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 원문입니다.
우선 충무공이 지장보살의 화현이라는 말씀은 스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스님에게 조언을 해주시는 성중님께서 알려주신 내용.
사실 충무공에 대해서는 깊이 고민해보지 않으면
익히 알려진 사실 외엔 알 길이 없습니다.
스님도 부끄럽지만 충무공께서 노량해전을 마치고
지리산으로 들어가셔서 들어서자마자 천문이 열리시고
한 달의 선정 후에 함께했던 4분과 함께
가진 몸 그대로 하늘로 승천하셨다는 답을 듣고
환타지 소설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스님이 충무공에 대해 너무 모른거죠.
충무공이 지리산? 무슨 연관?
과거 난중일기를 봤지만.. 지금 같이 이런 기분으로 본건 아닙니다.
솔직히 뒷 부분은 못봤고요..
다만 예사롭지 않은점은 금방 캐취했습니다.
일기 쓰신 자체도 이상하시고..그 내용이 매우 독특...
자칫 이상하게 여겨질수도 있는 삶 그대로 기술.
효행이나 군인, 지휘관으로서의 모습은 당연하겠지만
매일매일 접하는 인생의 번뇌..
이건 자칫함 시비거리도 될 수 있었죠.
그런데 전투의 중요대목에서 점을 치시거나,
여러번 등장하는 선몽 이야긴 매우 이상한거에요.
그걸 주저함 없이 그대로 적어놓으셨습니다.
매우 이상하죠.
이렇게 성중님의 말씀이 처음엔 환타지 소설 같았지만..
당신이 백의종군시절 지리산 근처인 진주 수곡면에서 다시 기사회생하시고
그 전에 도원수 권율 거처에 대한 연락미비로 운봉까지 오셔서 하루 머무셨던 인연,
더구나 꿈에서 남원 까지 언급 되는 것을 보고
성중님의 답변이 결코 환타지 소설 수준이 아닌 것이라 여겼습니다.
평생 지리산과 인연이 무관하시던 어른이
갑자기 인생의 마지막(2년)을 앞두고 지리산과 인연이 매우 깊어지십니다.
거기다 무패의 대장군께서 노량해전에서 전사는 설득력이 매우 약하고
그당시 살아계셨고 은둔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부하 장졸들도 거의 사망시키지 않으시는 마당에 당사자가 전사?
말이 안되죠.
더구나 일부러 갑옷을 벗었다는 설까지. 이건 자살설.
더 웃기는 이야기죠.
당시 충무공과 아수라였던 선조와의 관계를 보면
전사, 은둔, 쿠데타 이 셋 중 하나로 선택하셨어야했습니다.
은둔이라면 지리산이 제일 유력하지요.
스님 같으면 쿠데타를 했을 겁니다.
당시 충무공에게 선조 같은거는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민족적 영웅상태.
실제로 충무공에게 가면 살 수 있다하여 백성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고 해요.
충무공께서는 난중일기에서 기이한 꿈을 꾸신게 자주 등장하는데
(모두 정확히 들어 맞습니다)
백의종군이던 정유년 5월 6일 이상한 꿈과 연관된 것을 알려드리려합니다.
이건 단순한 꿈이 아닙니다.
충무공과 난중일기를 볼 때 여러분들은 2가지를 염두에 두고 보셔야 해요.
충무공은 우선 지장보살(시바신)의 분신이시라는거.
그럼 이게 논리적으로 가능하냐?
그걸 또 못 믿는 사람이 있을까하여 지장본원경 2품 분신집회품을
원문과 함께 아래에 올려놨습니다.
지장보살께서는 분신 가능하고요... 숫자도 무수히 가능하다고 나와 있습니다.
지장보살은 곧 우주 최강 전투의 신 시바신이시라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으신 충무공의 그것과도 일치하죠.
충무공의 스타일이나 지장신앙의 기본 포맷도 같고요..
또 이글은 결코 유생들 나부랭이들 보라고 쓰신게 아닙니다.
증거 보여줄께요.
정조대왕은 충무공에 관한 글들을 편집하라 명하는데요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입니다.
1795년(정조 19)에 왕명으로 교서관(校書館)에 이를 관장할 국(局)을 설치하고,
충무공의 유고와 관계 문건을 망라해 규장각검서 유득공(柳得恭)과
규장각(奎章閣) 문신(文臣)인 윤행임(尹行恁) 등의 감독·지휘 아래 편집, 간행되었는데요.
여기서 무지막지한 칼질이 이루어졌습니다.
아랫들은 난중일기 원문인데요.
충무공전서에서는
"初六日丙申。晴。晩。綾城倅李繼命。亦起復之人。來見而歸。鄭元溟還自閑山。聞副察使出來左營。以病留調云。右水伯送簡而吊之。"
딸랑 이것으로 줄여놨습니다.
거의 미친것들이죠.
저건 충무공의 난중일기 핵심과는 거리가 먼 내용들입니다.
일기의 중요 내용이 모조리 빠져 있어요.
편집했던 지네 입맛에만 맞췄습니다.
하지만 이핸 합니다. 원래 저것들(유생)보라고 쓰신게 아니에요.
바로 스님, 우리 지장행자들 보라고 쓰신거라 우리는 원문을 그대로 봐야 합니다.
일기 내용을 살펴보죠.
이 일기의 꿈은 엄청난 비밀과 많은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물론 스님도 성중님께서 알려주셔서 알게 된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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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日丙申 晴 夢見兩亡兄 相扶哭痛 且言 襄事未營 千里從軍 誰其主之 痛哭柰何云
此 兩兄精靈 千里追蹤 憂悶至此 悲慟不已
又念南原監獲 是則 未知也 連日夢煩 是亡靈黙念深痛之至也
晨昏戀慟 淚凝成血 天胡漠漠 不我燭兮 何不速死也
晩綾城倅 李繼命亦起復之人 來見而歸 興陽奴禹老․音金․朴守每․趙澤與順花妻來現
李奇胤及夢生來到 宋廷立․宋得運亦來 卽歸
夕鄭元溟還自閑山 多言兇人所爲 又聞副察使出來左營 以病留調 右水伯送簡而弔之
(정유년) 5월 6일(병신) 맑음.
꿈에 돌아가신 두 분 형님을 만났는데, 서로 붙들고 울면서 하시는 말씀이,
“장사를 지내기 전에 천 리 밖으로 떠나와 군사에 종사하고 있으니,
대체 모든 일을 누가 주장해 한단 말이냐, 통곡한들 어찌하리” 하셨다.
이것은 두 형님의 혼령이 천 리 밖까지 따라 오셔서
근심하고 애달아함을 이렇게까지 하신 것이니 비통함을 금치 못하겠다.
또 남원의 추수 감독 일을 염려하시는데 그것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연일 꿈자리가 어지러운 것도 아마 형님들의 혼령이
그윽이 걱정하여 주는 탓이라 슬픔이 한결 더하다.
아침저녁으로 그립고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엉기어 피가 되건마는
아득한 저 하늘은 어째서 내 사정을 살펴 주지 못하는고.
왜 어서 죽지 않은지,
늦게 능성(綾城) 현감 이계명(李繼命)이 역시 상제 몸으로 기용된 사람인데 보러 왔다가 돌아갔다.
흥양(興陽)에 있는 종 우노음금(禹老音金),
박수매(朴守每), 조택(趙澤)과 순화(順花)의 처가 와서 인사했다.
이기윤(李寄胤)과 몽생(夢生)이 왔다. 송정립(宋廷立), 송득운(宋得運)도 왔다가 곧 돌아갔다.
저녁에 정원명(鄭元冥)이 한산(閑山)에서 돌아와서
흉한 자〔원균〕의 못된 짓을 많이 이야기하였다.
또 들으니, 부찰사(副察使)〔한효순〕가 좌수영으로부터 나와 병을 조리한다고 한다.
우수사〔이억기〕가 편지를 보내어 조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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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충무공께서 실제의 형님이라 이해했던 두 분은
성중님께서는 충무공의 형님들이 아니라하셨습니다.
성중님 말씀인 이게 맞죠. 꿈은 상징적인 것이고요..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게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가 꿈을 꾸지만 우리가 아는 대상이 나와서 무언가를 가르쳐준다?
이건 비현실적인 이야기에요.
물론 일부는 있을 수 있습니다.
주로 임종을 앞둔 이들에게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여요.
하지만 그 자체도 나 이제 죽는다..이런 식이 아니라..
대개는 상징적인 어떤 메세지를 전하죠.
그래서 여기에서 충무공(본인이 보살의 화현인줄 모른 상태)은
진짜 형님의 혼령이라 이해했지만.. 아니랍니다.
만약 형님의 혼령이라면 뜬금 없이
"又念南原監獲 是則 未知也"
(또 남원의 추수 감독 일을 염려하시는데 그것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이걸 말할 이유가 없죠.
서로 연관이 없잖아요.
충남 아산 출신인 혼령이 남원 가을 추수를 언급?
더 소름인 것은 이꿈을 꾸고 3개월 뒤(추석이 낀 8월) 남원성에서는 1만명이 몰살을 당한
정유재란 남원성전투, 아니 학살이 있었습니다.
딱 들어맞았죠.
이런걸 충무공의 형님들이??
그것도 왜군의 침입를 보면 지리산을 중심으로 좌우로 나누어
한꺼번에 쳐들어왔습니다.
이걸 어찌 충무공의 형님들이 알려줄 수 있었겠습니까.
성중님들께서는 충무공의 꿈에 나타나셔서
충무공의 기막힌 사연(백의종군, 모친상, 험난한 여정..)에 대해 안타까워하시고..
남원성의 비극을 알려주신 분들이
충무공보다 먼저 보살의 화현으로 나투셨던 분들이라하셨습니다.
다음글에서 무슨 사연인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이번글에서는 기초 자료를 보시고 전체 내용을 이해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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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
제二품.분신집회품(分身集會品)
-분신들이 모이다
爾時百千萬億不可思、不可議、不可量、不可說無量阿僧祇世界,所有地獄處,分身地藏菩薩,俱來集在忉利天宮。以如來神力故,各以方面,與諸得解脫從業道出者,亦各有千萬億那由他數,共持香華,來供養佛。
그때에 백천만억의 이루 생각 할 수 없고, 논할 수도 없으며, 헤아릴 수도 없고,
말로는 이루 다할 수 없는 한량없는 아승지세계에 있는 모든 지옥에 몸을 나투셨던
지장보살의 분신이 모두 도리천궁으로 모였으며,
또한 여래의 신통력으로 각 방면에서 해탈을 얻고 업도에서 나온 천만 억나유타 수의 무리들이
함께 향과 꽃을 가지고 와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다.
彼諸同來等輩,皆因地藏菩薩教化,永不退轉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是諸眾等,久遠劫來,流浪生死,六道受苦,暫無休息。以地藏菩薩廣大慈悲,深誓願故,各獲果證。既至忉利,心懷踴躍,瞻仰如來,目不暫捨。
이들은 모두가 지장보살의 교화로 인하여 영원토록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물러서지 아니하는 이들이며.
이들은 머나먼 겁으로 부터 내려오면서 생사물결에 빠져 육도를 쉴 새 없이 쫓아다니며.
갖은 고초를 잠시도 쉴 틈이 없이 받다가 지장보살의 광대한 자비와 깊은 서원의 힘 때문에 각기 도과를 획득하고,
이미 도리천궁에 이르매 마음이 아주 기뻐서 여래를 우러러보며 잠시도 한눈을 팔지 않았다.
爾時,世尊舒金色臂,摩百千萬億不可思、不可議、不可量、不可說、無量阿僧祇世界諸分身地藏菩薩摩訶薩頂,而作是言:吾於五濁惡世,教化如是剛強眾生,令心調伏,捨邪歸正,十有一二,尚惡習在。吾亦分身千百億,廣設方便。或有利根,聞即信受;或有善果,勤勸成就;或有暗鈍,久化方歸;或有業重,不生敬仰。
그때 세존께서 금빛 팔을 펴시어 백천만억의 가히 생각 할 수 없고, 논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고,
말로는 이루 할 수도 없는 무량 아승지세계의 모든 화신 지장보살마하살의 이마를 어루만지시면서 이르시기를,
『내가 오탁악세(五濁惡世)에서 이와 같이 억세고 거치른 중생들을 교화하여
그들의 마음을 조복시켜 삿된 것을 버리고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였으나,
그 중 열 가운데 하나 둘은 아직도 나쁜 버릇에 빠져 있으므로
내가 또한 백천만억으로 분신을 나타내어 널리 방편을 베푸나니
근기가 수승한 자는 법을 들으면 곧 믿고 받으며,
혹 좋은 과보가 있는 자는 부지런히 하면 성취 되며,
혹 어둡고 둔한 이는 오래도록 교화를 거치면 비로소 돌아오는 자도 있으며,
혹은 업이 중하여 우러러 공경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 자도 있나니라.
如是等輩眾生,各各差別,分身度脫。或現男子身、或現女人身、或現天龍身、或現神鬼身、或現山林川原、河池泉井,利及於人,悉皆度脫。或現天帝身、或現梵王身、或現轉輪王身、或現居士身、或現國王身、或現宰輔身、或現官屬身、或現比丘、比丘尼、優婆塞、優婆夷身、乃至聲聞、羅漢、辟支佛、菩薩等身、而以化度。非但佛身,獨現其前。
이렇듯 중생의 무리는 각기 차별이 있으매, 분신을 나타내 제도하여 해탈 시키되
혹은 남자의 몸을 나투고, 혹은 여자의 몸을 나투며,
혹은 하늘과 용의 몸을 나투고, 혹은 귀신의 몸을 나투며,
혹은 산, 숲, 내, 강, 못, 샘, 우물을 나타내어서 사람에게 이롭게 하면서 모두 제도, 해탈하게 하며,
혹은 제석의 몸을, 혹은 범왕의 몸을, 혹은 전륜왕의 몸을,
혹은 거사의 몸을, 혹은 국왕의 몸을, 혹은 재상의 몸을, 혹은 관속의 몸을,
혹은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의 몸 내지는 성문, 나한, 벽지불, 보살의 몸을 나타내시어 교화하고 제도하나니,
비단 부처님의 몸으로만 나타내는 것이 아니니라.
汝觀吾累劫勤苦,度脫如是等難化剛強罪苦眾生。其有未調伏者,隨業報應。若墮惡趣,受大苦時,汝當憶念吾在忉利天宮,殷懃付囑。令娑婆世界,至彌勒出世已來眾生,悉使解脫,永離諸苦,遇佛授記。
내가 여러 겁을 두고 근고(勤苦)하여 이와 같은 교화하기 어려운 억세고 거치른 죄고 중생들을 제도 하는 것을 보고,
그 가운데 아직 조복 받지 못한 자가 있어서 업을 따라 과보를 받게 되어
만약 악도에 떨어져서 큰 괴로움을 받는 것을 보거든,
그대는 마땅히 내가 이 도리천궁에서 은근히 부촉한 것을 생각하고
사바세계에 미륵불이 출세하실 때까지 중생으로 하여금 영원히 악도에서 모든 고통을 여의어 해탈케 하여
부처님의 수기를 받게 하라.』
爾時,諸世界分身地藏菩薩,共復一形,涕淚哀戀,白其佛言:我從久遠劫來,蒙佛接引,使獲不可思議神力,具大智慧。我所分身,遍滿百千萬億恆河沙世界,每一世界化百千萬億身,每一身度百千萬億人,令歸敬三寶,永離生死,至涅槃樂。但於佛法中所為善事,一毛一渧,一沙一塵,或毫髮許,我漸度脫,使獲大利。唯願世尊,不以後世惡業眾生為慮。如是三白佛言:唯願世尊,不以後世惡業眾生為慮。
그때 모든 세계에 나타나셨던 지장보살의 분신이
다시 한 몸으로 되어 형상을 이루어 애절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제가 구원한 겁 이래로 부처님의 인도를 받아 가히 생각할 수 없는 신력을 얻고 갖추었사오나,
저는 저의 분신으로 하여금 백천만억 항하의 모래와 같은 세계에 두루하여서
한 세계마다 백천만억의 몸을 나투우고 한 화신이 백천만억 사람을 제도하여서 삼보께 귀의 하게 하며
영원히 생사를 여의고 열반락을 이르도록 하되,
다만 불법 가운데에서 착한 일만 한다면 그것이 한 터럭, 한 물방울, 한 모래알, 한 먼지 혹은 털끝만한 것이라고 하되
이미 제가 점차 교화하여 제도하고 큰 이익을 얻게 하오리다.
바라옵건대 세존이시여, 후세의 악업 중생 때문에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이와 같이 세 번 부처님께 말씀드리니
爾時,佛讚地藏菩薩言:善哉!善哉!吾助汝喜。汝能成就久遠劫來,發弘誓願,廣度將畢,即證菩提。
그때에 부처님께서 지장보살을 찬탄하셨다.
『착하고 착하다. 내가 그대를 도와서 기쁘게 하리라.
그대는 능히 구원겁으로 부터 내려오면서 세운 큰 서원을 성취하고
장차 널리 중생을 제도 한 연후에 곧 보리를 증득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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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50플러스포털 | [50+포탈]아비규환의 남원•황석산 전투 (50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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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기사)이 남원성전투를 잘 묘사하고 있어 올렸습니다.
왜군 좌군(소서행장)은 남원(남원성),
우군(가등청정)은 함양(황석상)으로 침입했습니다.
지리산을 가운데 두고 좌우로 놔뉘었습니다.
두 군데 모두 대학살.
아비규환의 남원·황석산 전투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게재하기로 한다.
저녁놀이 고와 보이지 않았다. 왜적에게 몸을 더럽히느니 자진하겠다고, 부녀자들이 줄지어 뛰어내려 핏빛이 되었다는 황석산 바위를 보고 온 탓이었다.
취재를 마치고 함양을 떠난 시간이 오후 7시였다. 남원성 전투 취재 때도 같은 시간이었다.
고속버스 차창에 타는 저녁놀이 가득 드리웠지만 여느 때처럼 가슴 뛰는 풍경이 아니었다. 어찌 피뿐이랴. 성안에 있던 군사와 백성이 모두 도륙당한 그 아비규환이 머릿속에 가득한데 붉은 빛이 아름답게 보이겠는가.
전투가 아니어도 그랬다. 왜군 종군승려 케이넨(慶念)의 <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에는 남원으로 쇄도하던 왜병들의 악귀 같은 만행이 사건기사처럼 기록돼 있다.
“너나없이, 남에게 뒤질세라 재보를 빼앗고 사람을 죽이며 서로 쟁탈하는 모습들,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는 기분이다.” (1597년 8월 4일)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쳐 죽인다. 그리고 산 사람은 쇠사슬로 꿴 대롱으로 목을 묶어서 끌고 간다. 어버이 되는 사람은 자식 걱정에 탄식하고, 자식은 부모를 찾아 헤매는 비참한 모습을 난생처음 보게 되었다.” (1597년 8월 6일)
이 모든 비극은 원균의 칠천량 패전에서 비롯되었다. 호랑이 같은 조선수군이 궤멸되어 남해안을 마음껏 휘젓고 다니게 된 왜군은 바로 전라도 공략에 나섰다. 임진년에 진주에서 참패하고 이순신에게 짓눌렸던 한풀이였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군을 주축으로 한 왜적우군 6만 명은 7월 25일 울산 서생포 등 각자의 주둔지에서 밀양-거창-안의를 지나 황석산에 이르렀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군이 주력인 좌군 5만 명은 28일 부산포 안골포 순천 등에서 하동-구례를 거쳐 남원으로 쳐 올라갔다. 수군 7000명도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 구례에서 좌군과 합류해 남원으로 쇄도했다.
남원성 전투와 만인의총
남원성 전투는 중과부적이었지만 명나라 총병 양원(楊元)의 용렬한 작전계획이 초래한 참화였다. 지키기 좋은 교룡산성을 버리고 평지성인 남원읍성에만 의지한 졸전이었다. 조선군의 건의대로 험준한 교룡산성에서 버텼다면 최소한 저항기간을 더 늘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사이 지원군이 오면 수성에 성공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구례와 곡성을 거쳐 오면서 마치 사냥하듯 사람을 죽이고 잡아가던 왜적 병력은 5만7000명이었다. 이에 맞서는 수비군은 양원이 거느린 명나라 병사 3000명에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이 이끄는 조선군은 1000명을 밑돌았다. 그것도 제 군사들은 다 도망치고 남의 군사를 끌어모은 오합지졸이었다. 여기에 읍민 6000명이 전투를 도왔다지만, 그래도 6대 1의 싸움이었다.
남원성은 높이 4m 둘레 3.4km에 불과한 읍성이었다. 이 작은 성을 5만7000명의 왜군이 겹겹이 둘러쌌다. 총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에(宇喜田秀家) 군 1만 명은 남쪽,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 군 1만4000명은 서쪽,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군 1만 명은 북쪽,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 군 1만3000명은 동쪽을 에워쌌다. 물 한 방울 샐 틈도 없는 완전 봉쇄였다.
개전 나흘 만에 낙성된 남원성 전투의 경과는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에 자세히 나와 있다. 조선 파진군(특공대)의 일원으로 명군에 파견되었던 김효겸(金孝謙)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와 유성룡에게 자초지종을 고한 것이다.
8월 13일 왜군 선봉대 100여 명이 성 밑에 접근해 조총을 쏘아댔다. 우리 군사들은 승자소포(勝字小炮)로 응전했지만 사정거리가 짧아 미치지 못했다. 왜적은 몇 명씩 패를 지어 출동했다가 화살을 피해 밭고랑에 흩어져 숨어 총을 쏘았다. 성 위의 우리군사 여럿이 쓰러졌다. 얼마 후 왜적 몇이 깃발을 들고 성 아래에 와서 큰 소리를 질렀다. 양원이 통역과 함께 병졸을 적진에 보냈는데, 그들이 받아온 문서는 선전포고인 약전서(約戰書)였다.
다음 날 왜군은 성을 3면에서 포위하고 우박처럼 총과 포를 쏘며 공격해왔다. 싸움이 벌어지기 전 양원은 성 밖에 빼곡히 들어찬 민가를 모두 태웠지만, 남은 흙벽과 돌담이 왜적의 방패가 되었다. 반면 성 위의 수비군은 적에게 노출되어 사상자가 속출했다.
15일 왜군은 볏단과 풀단을 무수히 만들어 밤 8시쯤 성 밖의 참호를 메우더니, 성 밑에도 쌓기 시작했다. 성보다 풀단이 높아지자 그것을 타고 넘어 성안으로 쳐들어왔다. 대혼란이 일어났다. 성안 여기저기에 불길이 치솟고 병사와 읍민들이 뒤엉켜 도망치고 숨기에 분주했다.
명나라 기병들은 말을 타고 달아나다 두 겹 세 겹 둘러싼 왜병의 총칼에 낙엽처럼 떨어져 비명을 질렀다. 양원은 호위대의 도움으로 위기를 돌파해 몇몇 수하와 함께 살아남아 제 나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탈영죄로 참수되었다. 명 조정은 그 수급을 한양으로 보내 조리돌림시켰다.
유성룡은 “왜적이 양원을 알아보고 짐짓 모른 척 빠져나가게 했다는 말이 있다”고 <징비록>에 썼다. 조경남의 <난중잡록(亂中雜錄)>에도 “양원이 왜적에게 성을 내주는 대신 목숨을 건졌다는 소문이 전해져 온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전투에서 전라병사 이복남을 비롯해 남원부사 임현(任鉉), 총병사후 정기원(鄭期遠), 별장 신호(申浩), 구례현감 이원춘(李原春) 등 9명의 장수가 분전 중 전사했다. 조명 양군 병사 4000명에 읍민 6000명 등 1만 명이 죽었다. 가망이 없게 되자 이복남은 탄약이 적군 수중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분전을 독려하다가 최후를 맞았다.
그의 아들 이성현(李聖賢)은 왜군에게 붙잡혀 끌려간 일본에 뿌리를 내렸다. 히데요시 고다이로(五大老)의 일원이었던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는 그에게 자기 이름의 ‘元’자를 넣어 ‘李家元宥’로 개명시켜 녹봉 100석의 관리직을 주었다. 일본 여자와 결혼해 3남4녀를 두었던 ‘李家’ 가문은 에도시대 조선 왕족의 지류로 인정받아 녹봉 500석을 받았다. 그 후예로는 1980년대 아사히신문(朝日新聞) 출판국장과 아시히학생신문사(朝日学生新聞社) 사장을 지낸 리노이에 마사후미(李家正文)가 유명하다. 그는 어려서 이왕가(李王家) 후손이라는 말을 듣고 자신의 뿌리 찾기 이야기를 책으로 써 화제가 되었는데, 1980년대에 한국에 와서 조상 묘에 참배했다.
케이넨은 전투가 끝난 8월 18일 일기에 “성안으로 진을 이동하다가 날이 밝아 주위를 돌아보니 길에 시체가 모래알처럼 널렸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었다”고 썼다. 왜병들은 시체에서 코를 잘라 항아리와 나무통에 넣고 소금에 절여 부산으로 보냈다. 포로로 잡혀 일본에 끌려갔던 강항(姜沆)의 <간양록>에는 이때 일본에 보낸 코 상자의 높이가 “구릉을 이루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만일 교룡산성에 의지했다면 어땠을까. 수비군 위치가 높고 공격군이 아래였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5월 10일 남원에 부임한 양원은 왜군의 공격에 대비한다고 교룡산성 안 민가를 모두 불태웠다. 백성을 읍성 안으로 모아 항전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남원부사 임현은 “천험의 요새인 교룡산성을 지키지 않으면 왜적의 근거지가 됩니다. 다른 고을 백성을 거기에 들여 지킵시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양원은 칠천량 패전을 입에 담으며 “멍청하고 겁이 많은 그대 나라 사람들이 적을 보고 또 자멸하면 어쩔 텐가?” 하면서 교룡산성을 버리고 말았다.
피란지에서 돌아온 백성들은 사방에서 썩어가는 시신을 한곳에 모아 묻고 만인의총이라 불렀다. 시내에 있던 의총은 서원철폐령과 일제의 탄압 등으로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다가, 1980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져 격식 있는 예우를 받게 되었다. 왕릉에 비교될 만큼 큰 유택을 갖게 되었고 국가사적지 지위까지 얻었다.
만인의총을 둘러보고 관리소 직원에게 물으니 걸어서도 갈 만하다기에 교룡산성을 찾아 나섰다. 의총 왼쪽으로 보이는 고속도로 뒤편이 교룡산(蛟龍山)이라 했다. 빠른 걸음으로 한 시간 가까이 걸어 산 중턱 선국사 입구 산성 문에 당도했다.
가파른 경사에 자연 지형을 최대한 이용해 쌓은 성벽이 옛 모습 그대로였고, 성문은 아담하지만 아름다운 홍예문이었다. 임진년 진주성 싸움처럼 험한 산성을 등지고 군민이 일체가 되어 돌을 굴리고 끓는 물을 퍼부어가며 항전했다면, 그토록 허망하게 낙성되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굳어졌다.
▲남원 교룡산성
▲남원 만인의 총(우)
황석산성 전투와 백성들의 수난
황석산성 전투 기록은 남원처럼 자세하지 않다. <징비록>에는 왜군이 움직이자 “도원수를 비롯한 모든 장병들이 왜적을 피하기만 했다”라고 적혀 있다. 전주를 목표로 서진하는 길목의 목민관들에게는 “각자 알아서 흩어져 피란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영·호남 경계선에 있는 황석산에는 함양, 안음(안의), 거창, 합천, 김해, 초계, 삼가 등 7개 고을 피란민이 몰려들었다. 줄잡아 7000명이 넘었으리라.
“안음 현감 곽준(郭䞭)이 황석산성으로 들어가자 김해부사 백사림(白士霖)도 들어갔다. 그가 무인이라고 모든 사람들이 든든히 여겼다. 그런데 왜적에게 공격을 당한 지 하루 만에 그가 도망치자 먼저 군사가 무너졌다”고 <징비록>은 기록하고 있다.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에는 곽준 일가의 의연한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남문으로 적이 쳐들어오자 곽준은 밤낮으로 독전했다. 울면서 계책을 청하는 아들과 사위에게 준은 이곳이 내 죽을 곳인데 무슨 계책이 있겠느냐면서 태연히 호상(胡床)에 앉아 죽임을 당했다. 두 아들(履祥, 履厚)이 시체를 부둥켜안고 왜적을 꾸짖으니 적이 함께 죽였다.” 그의 딸은 아버지가 죽고 남편(柳文虎)마저 적에게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목을 매 자진했다.
<난중잡록> 등 다른 기록에도 백사림의 행태가 고발되었다. 사태가 위급함을 알고 어머니와 두 첩을 줄에 매달아 밖으로 내려보내고 도망쳤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본 측 기록에도 나온다. 근세 일본의 베스트셀러 <에혼 다이코기(繪本太閤記)>에는 백사림이 성문으로 도망쳐 나오는 그림과 함께, 그 일이 소상히 적혀 있다. 전투 상황에 대해서는 “일본병(日本兵)이 성안에 난입하니 베어지고 넘어진 조선 병사들의 피가 성안에 가득 넘쳐났다”라고 묘사되어 있다. 함양군수를 지낸 조종도(趙宗道)는 성문으로 들이치는 일본 세와 불을 뿜으며 싸웠으나 성문이 열린 것을 알고 자기 처자를 끌어내 한칼에 베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말이 전해온다. 그가 산성에 들어오기 전에 지었다는 시 한 편은 <징비록>에 실려 있다.
崆峒山外生猶喜(공동산* 밖이라면 사는 게 외려 기쁘련만)
巡遠城中死亦榮( 순원성* 안에서 죽는 게 또한 영광스러워)
*공동산과 순원성은 파천과 순절의 고사를 지닌 중국의 산
우리 측 기록에는 황석산 전사자가 군민 500명 정도로 돼 있다. 그러나 향토사학계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 7개 고을 백성이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피란해온 산성에 군민이 500명밖에 안 되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10년 넘게 관련 자료를 수집해 <황석산성전투와 임진 대전쟁>을 출간한 박선호 황석역사연구소장은 “황석산 전투는 하룻밤 전투로 조선군 500명이 죽고 왜병은 하나도 죽지 않은 이상한 전투가 아니라, 왜군 7만5000명을 상대로 5일간 치열하게 싸워 왜군을 궤멸 상태로 빠트린 전투였다”라고 저서에서 주장했다. 7개 고을에서 모여든 의병과 백성 7000명이 아녀자들까지 물과 기름을 끓이고, 노인과 아이들은 돌을 나르고 굴린 의로운 전투였다는 것이다.
우리 군민의 피해가 7000명에 이르고, 전투가 끝나고 전주에 입성한 우군 병력이 2만7000명으로 줄어든 것으로 보아 그들의 인명피해가 엄청났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는 일본 측 기록으로도 뒷받침된다. 8월 17일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를 비롯한 적장 6명이 공동으로 작성하여 히데요시에게 보고한 <주인장(朱印狀)> 내용은 이렇다. “8월 16일 조선군을 크게 꾸짖고 공격하여 산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성안에서 조선군 수급 353급을 베고, 골짜기에서 추가로 수천 명을 죽였습니다.” 성 바깥 골짜기에 피신한 백성들까지 다 죽인 것으로 볼 수 있는 문서다.
곽준 조종도 등 순절자 위패를 모신 황암사(黃巖祠)는 일제 때 폐사되었다가 2001년 함양군 서하면 황산리 황석산 기슭에 재건되었다. 홍살문 너머로 출입문이 서 있고 그 안에 사당, 그리고 그 안쪽에 석재로 감싼 커다란 봉분이 외로이 누워 있다. 사당을 찾는 이보다 그 옆 청소년수련원을 드나드는 발길이 많은 것은 황석산 전설마저 잊힌 탓이리라.
반대로 황석산은 등산객 발길이 잦은 곳이다. 전국 100대 명산에 이름을 올린 탓이겠으나, 백두대간 덕유산과 통하는 육십령과 맞닿아 있어 산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황암사에서 남강 상류 계곡을 따라 오르다 우전마을 입구에서 ‘정상 5.7km’ 이정표를 따라가면 2시간 반이면 당도할 수 있다. 해발 1000m가 넘는 능선부에 옛 성터가 비교적 잘 보전되어 있고, 무너진 곳은 근년에 다시 쌓아 온전한 험지 산성 모습을 지녔다.
산을 오르면서 남부여대 피란길에 나섰을 백성들의 수난이 떠올라 세월의 간격을 실감했다. 어찌 남부여대뿐이었겠는가. 솥단지와 이부자리에 된장독까지 끌고 오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간단한 행장의 배낭 무게도 벅차 가파른 오르막길을 쉬고 또 쉬어 올랐는데, 노약자와 부녀자들 고통이 오죽했을까. 아무도 살아남지 못해 원혼들이 구천을 맴돌고 있지는 않을까….
육십령 고개를 넘고 장수와 진안을 거쳐 전주에 당도한 우군은 남원성을 유린하고 임실을 거쳐 올라온 좌군과 세를 합쳐 전주 공략에 나선다. 그러나 공략이라 할 것도 없는 무혈입성이었다. 동남 양쪽에서 10만 대군이 닥쳐온다는 소식에 전주성내는 패닉 상태가 되었다. 명군 유격장 진우충(陳愚衷)이 수비군 병력을 이끌고 도망치자, 백성들은 돌팔매에 고기떼 흩어지듯 산지사방 흩어져 성안이 텅 비었던 것이다. 왜군은 그렇게 허무하게 전주를 손에 넣었다. 임진년부터 군량 걱정을 해결하려고 그렇게도 노리던 호남 땅이었다.
▲황석산전투 순절자 사당 황암사
문창재(文昌宰) 언론인
1946년 강원 정선 출생. 서울 양정고, 고려대 국문과, 한양대 대학원 졸. 한국일보 도쿄특파원, 사회부장, 논설실장 역임. 저서로 <역사는 하늘보다 무섭다>, <나는 전범이 아니다>, <증언-바다만 아는 6·25 전쟁비화>, <동경 특파원 보고서> 등이 있다.
글 문창재 언론인(前 한국일보 논설실장) mcj462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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