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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글이 있어 퍼왔네요.과연 이분 글이 맞는 말인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댓글로 달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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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의 무기(無記)를 [진아]로 돌려놓는 교학의 교묘함
[근본불교(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 제법무아) 입장에서 비판]
- 이중표의 아함의 중도체계중에서
이중표저 아함의 중도체계라는 책을 읽으면서 초기불교 부처님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부분이
매우 많음을 느꼈습니다.
저자가 수행이라는 바탕에서 글을 쓴 것이 아니라 대승적 교학의 입장에서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풀어나갔기에 이러한 문제가 발생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리하는 과정에서 아함의 중도체계에서 그대로 인용한 글은 검은 색으로 표시하였고 저자인
이중표가 본문에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기 위하여 인용한 경전은 파란색 글씨로 표시하였으며 글을 읽으면서 논리의 모순이며 초기불교의 가르침과는 어긋난다고 느껴지는 부분은 빨간색 글씨로 표시하였습니다.
읽으시는데 도움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의 생각을 정리한 것은 초록색으로 표시하였습니다.
이중표 저 <아함의 중도체계 29쪽-35쪽중에서 발췌>
- 한편 형이상학적 문제가 우리의 인식이나 경험의 영역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불타는 이를 배척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같은 견해는 無記를 회의론이나 불가지론의 표현으로 이해한 것인데, 불타는 당시의 회의론자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나는 모든 견해가 나에게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
“모든 견해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그대의 견해도 그대를 만족시키지 못하는가?”
“만약 나의 견해가 나에게 만족스럽다면 나의 견해 역시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겠나이다.”
이 경에서 불타는 회의론 자체가 모순된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같이 회의론의 모순을 자각하고 있는 불타가 불가지론의 입장에서 無記의 태도를 취했다고 보는 견해는 납득하기 어렵다.
독일의 불교학자 H.Oldenberg는 이들 문제는 대답되어서도 안되고, 대답될 수도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아의 문제에 대한 불타의 無記에 대해 “자아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하는 물음을 회피함으로써 불교가 지향하는 바의 대답이 주어지고 있다.
불교의 대답은 자아는 없다는 것이며, 이와 상응하는 것으로서...
열반은 모든 것이 멸해버린 허무한 상태라는 것이다.” 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것은 불교를 허무주의로 이해한 것이다.
불교가 허무주의라는 오해는 당시에도 있었다.
그러나 불타의 제자들은 결코 허무주의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음을 잡아함경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우리는 사문 □□이 중생을 단멸, 파괴한다고 들었는데 그런 가르침이 있는가? ”
나는 그렇게 알고 있지 않다.
세존께서 가르치신 말씀이 중생을 단멸, 파괴하여 아무것도 없게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세존께서는 모든 중생들이 잘못 생각하여 ‘我가 있다’고 한다고 말씀하셨으며, 세존께서는 그 ‘있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我’를 단멸하라고 말씀하셨다.“
< 잡아함경(966)>
외도뿐만 아니라 당시의 제자 가운데도 불교를 허무주의로 오해한 사람이 있었음을 잡아함(104경)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내가 부처님께서 설한 법을 이해한 바로는 번뇌가 다한 아라한은 죽으면 아무 것도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을 한 비구는 그 이름이 □□□인데 그는 불타와 동료들의 꾸지람을 듣고 불타로부터 무아에 대한 설법을 들은 후에 스스로 자신의 생각을 뉘우치고 있다.
이와 같이 불타는 허무주의를 용납하지 않고 있으며, 불타가 설한 無我는 결코 自我의 부정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我의 有無에 대한 불타의 無記가 자아는 없다는 결론을 지향하고 있으며, 열반이란 허무한 상태라는 주장은 불교에 대한 커다란 오해인 것이다.
불타의 無記를 형이상학의 폐기로 이해하면서도 철학자체의 배척은 아니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칼루파나는 불타의 無記를 논리실증주의의 형이상학 비판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불타가 비판한 형이상학은
첫째, 이들 이론이 경험적 근거가 없이 아프리로리한 추론에 근거하고 있으며
둘째, 형이상학자들은 그가 알고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직접적인 인식이 없는 상태에서 미리 인식의 어떤 대상은 무엇과 같아야 한다고 결정하려 했고
셋째, 형이상학적 진술은 단어의 무의미한 나열로서 문법에는 어긋나지 않지만 의미가 없는 문장이며
넷째, 이들은 일상 언어 사용의 피상적인 이해에 근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타는 이같은 비판적인 관점에서 無記의 태도를 취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불타의 無記는 사유의 변증법적인 사용에 집착하거나 언어적 관습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충고이며, 불타는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피하기 위해 때때로 실용주의나 적절함으로부터 논증을 이끌어내고 있다고 하고 있다.
그의 주장과 같이 불타가 경험적 실증을 중요시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불타의 無記가 형이상학의 폐기에 목적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속단으로 생각된다.
불타는 자신이 발견한 연기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여래가 세상에 나오든 나오지 않든 법계는 상주하며, 여래는 이 법을 자각하여 등정각을 이루어 중생들을 위해 분별하여 연설하고 개발하여 현시하나니라.“
주지하듯이 형이상학은 언제나 초월의 계기를 내포한다.
즉 초경험적 대상을 다루는 학문이다.
그런데 불타가 깨달은 법계가 상주한다는 사실은 결코 경험적으로 인식한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경험은 유한하기 때문에 상주한다는 사실은 인식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상주하는 법계를 자각하여 그것을 현시한 것이 연기법이라면 연기법은 일종의 형이상학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무기는 형이상학의 폐기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그릇된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책을 읽은 나의 독후감>
온갖 현학적인 언설을 비벼다가 썰을 풀고 있지만 결론은 이중표는 연기법을 모른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연기법이 현실에서 결코 확인되어질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법이라니.,
이중표교수는 저 모든 현학적인 언설들 다 치우고 오직 부처의 이 한마디만 가지고 화두로 삼아서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이것 하나 해결하려고 매달려 보는 것이 자기자신에게도 만인에게도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연기를 보는 자 법을 보는 자이며 법을 보는 자 나를 보는 자이다..
내 법은 현실에서 확인되는 법이다."
<계속하여 아함의 중도체계 중에서 인용>
2) 적극적인 해석
불타의 무기가 형이상학에 대한 무관심이나 불가지론의 표현이 아니라는 견해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중관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견해이다.
Jaideva Singh은 불타의 무기가 용수의 변증법의 근원이 되었으며, 용수는 불타의 무기를 심사숙고한 결과 무기는 실체가 사유를 초월해 있기 때문에 취해진 태도라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주장한다.
Th. Stcherbatsky는 불타의 무기는, 베단따학자들이 그들의 불이적 브라마의 초월적 성격을 확신시키고자 할 때 침묵으로 대답한 것과 같은 맥락에 있으며, 절대자는 말할 수 없고, 규정할 수 없기 때문에 취해진 태도라고 보고 있다.
이들과 같은 맥락에서 불타의 무기를 중관학의 전조로 보고, 이를 세심하게 연구한 사람은 T.R.V. Murti라고 생각된다.
그에 의하면, 무기에 관련된 문제들은 사자택일의 형식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칸트의 이율배반이나 중관학의 四句와 유사점이 있으며, 불타가 이들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단정한 것은 이들 모순이 경험의 차원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끝없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며, 불타는 한 차원 높은 입장으로 올라가 이 문제를 해결했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변증법이 생겼는데, 서구에서 공식화된 그와 비슷한 어떤 변증법보다 훨씬 일찍 불타는 변증법을 발견했으며, 그는 매우 높은 철학적 의식에 도달해서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상적 언어로는 무제약적인 것을 규정하거나 서술할 수 없는데 독단론자들은 항상 초월적인 것을 경험적인 것과 혼동했으며, 불타는 실재는 사유를 초월해 있다는 것을 체득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기의 태도를 취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상과 같은 고찰의 결과 다음과 같이 결론짓고 있다.
그는 당시의 철학적 사색에 정통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자신 훌륭한 형이상학자였다.
그는 예리한 분석으로 이성의 독단적 진행을 초월하여 그것을 폐기하는 위치에 도달했다.
사변적 형이상학에 대한 불타의 폐기는 의도적이며 지속적이었다.
불타에게는 비판주의 그 자체가 철학인 것이다.
무기를 중관학과의 관계에서 이해한 이상의 견해는 몇가지 중요한 의미를 밝히고 있다.
무기가 중관학의 기원이 된다는 지적이나, 이성의 독단적 진행을 초월하여 그것을 폐기하는 경지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는 지적은 탁견이라 할 수 있다.
이후의 고찰에서 드러나겠지만 불타의 중도는 모순된 사유를 초월한 입장이다.
따라서 모순된 명제에 대한 불타의 무기는 중도의 입장에서 취해진 태도라 할 수 있고, 중도를 핵심으로 하는 중관 사상이 무기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무기가 불이론적 베단따의 입장과 같이 어떤 궁극적인 실체의 초월적 성격을 표현한 것이라는 주장은 불타의 無我說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견해는 무기의 문제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중관학 내지 불교를 크게 왜곡할 소지가 있다.
만약 무기가 베단따와 동일한 입장에서 취해진 것이라면 불교와 베단따 철학은 궁극적으로 동일한 사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Murti는 중관학, 유식학, Vadanta Absolutism사이에는 용어의 차이가 있을 뿐 실질적인 차이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같은 견해는 무기의 근본취지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불타는 베단따 학파에서처럼 이들 문제에 대하여 침묵으로 답한 것이 아니라, 이들 문제가 사견에서 비롯된 무의미한 것이라는 판단에서 무기의 태도를 보인 것이다.
따라서 이같은 불타의 무기가 , 높은 수준의 철학적 의식에서 취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침묵으로 답하는 베단따 철학과 동일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불타와 용수의 철학을 비판주의로 보는 것도 바른 견해라 할 수 없다.
불타가 무기를 통해 무의미한 사견을 의도적이고 지속적으로 파기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견의 파기에 그치지 않고 중도라는 철학적 입장을 통해 연기법이라는 진리를 설하고 있다.
불타는 침묵을 통한 비판 그 자체를 자신의 철학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연기설을 자신의 철학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타가 무기의 태도를 취했다는 사실만으로 불타의 철학을 비판주의나 변증법이라고 보는 견해는 불교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용수의 중론이 불타의 무기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歸敬?에서 밝히고 있듯이 용수는 사견의 파기가 연기설을 근거로 이루어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용수의 중론은 중도와 연기설의 진리성을 천명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지 변증법적 체계를 수립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중관학을 비판주의나 변증법적 철학으로 이해하는 것도 바른 이해라 할 수 없다.
...중략....
<243쪽>
3.자아의 문제
사실판단의 대상이건 가치판단의 대상이건 우리의 외부에 어떤 존재가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모순이고 허구라면 우리는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자아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같은 우리의 기대는 불타의 無我說앞에서 다시 좌절된다.
주지하듯이 불타는 외부세계의 존재만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 존재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아의 유무를 묻는 외도에게 무기의 태도를 보이고 있는 불타를 보게 된다.
그렇다면 無我說의 진의는 어디에 있을까?
필자는 불타가 자아를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아가 부정될 경우 불교는 심각한 난관에 봉착하기 때문이다.
만약 자아가 전적으로 부정된다면 자아를 물질의 우연한 결합으로 설명한 유물론자들이 도덕부정론에 귀착했듯이 불교의 모든 수행과 열반의 의미는 공허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혹자는 불타가 자아를 전적으로 부정하지 않았음을 윤회설에서 추론하기도 한다.
윤회의 주체로서의 자아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불타가 생각하고 있는 진아를 왜곡시킬 우려가 있다. ...중략....(???)
<나의 독후감>
이중표라는 인간의 적나라한 자기고백을 이런 글에서 그대로 읽을 수 있다.. 무아라면 수행은 무엇하러 하는가? 이런 고백이다.
수행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 조차 모르고 글을 써대고 부처법을 잔머리굴려 이해했다고 착각하고 있는 행태가 도처에서 발견되어진다.
자아가 전적으로 부정된다면 불교는 심각한 난관에 봉착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그의 말대로라면 부처는 자아를 부분적으로만 부정했다는 말인가?
부정하면 부정하는 거지 조금 남기고 부정하는 것도 있는가?
이런 글을 쓰고 있는 스스로의 자아취착을 조금이라도 돌아본다면 부처법을 고쳐서라도 자아를 남겨보고 싶은 자신의 발버둥을 볼 수 있으련만 그것이 어디 쉬운 일일 것인가?
원래 부처님법의 출발점이 자아취착 똑바로 보고 괴로움 똑바로 보는 일 아니겠는가?
<계속해서 아함의 중도체계 인용>
불타가 자아를 부정하지 않았다(???)고 해서 자아를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나의 독후감>이런 말장난이 이중표교수의 특기이다.
완전 애매모호 그자체..부처법을 가지고 놀고 있다..
만약 자아가 존재한다면 자아는 무엇일 것이다.
즉 물질적 존재이거나 정신적 존재이거나 물질과 정신이 결합한 존재이거나 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미 불타가 이같은 모든 존재를 허구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따라서 이같은 허구적인 개념으로 표현되는 것이 眞我라고 생각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불타가 생각한 眞我는 무엇일까?
우리는 이 질문이 잘못된 질문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자아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자아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물음과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아가 어떤 존재로 규정될 경우 우리의 삶은 무의미한 것이 된다.
즉 자아가 존재라면 영원한 존재이거나 일시적인 존재일텐데 만약 영원한 존재라면 죽을 수 없고 일시적인 존재라면 죽음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불타가 一異中道에서 설파했듯이 가치추구를 위한 어떤 행위도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아에 대해서는 어떻게 물어야 할까? ...중략...
<나의 독후감>
자아취착이 뭔지 모르니 자아가 뭔지 알 수가 없어서 온갖 잔머리를 다 굴리고 말돌리기 잔치를 벌리고 있다.
참으로 수행을 통하여 자기자신 안에서 자아에 대한 취착을 적나라하게 사고팔고의 일어남을 통하여 확인하지 못하는 자는 이런 말장난만 하면서 인생 종치게 됨을 이중표씨는 그대로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계속해서 아함의 중도체계 인용>
그는 자신이 물질과 정신(오온)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이 물음은 ‘이들 가운데 어떤 것이 참된 자아인가, 혹은 이들 이 외에 이들을 소유하고 있는 참된 자아가 따로 있는가? 라는 물음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
그리고 자아는 영원한 것인가?
일시적인 것인가?
자아는 본래 착한 것인가?
악한 것인가?
자아는 창조된 것인가?
진화한 것인가?
등등 자아의 특성을 상반되거나 모순된 명제들로 물어야 한다.....후략....
<이상 아함의 중도체계 에서 발췌함>
1) 붓다가 자아를 전적으로 부정하지 않았다는 이중표의 견해에 대하여
경전을 비추어 사고해본다.
붓다(佛陀)의 입장(立場)
부처님께서 마가다국 왕사성의 죽림정사에 계실 때, 어느 날 왓차곳따가 부처님에게 여쭈었다.
“고따마시여, 자아(我)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부처님께서 이 물음에 대하여 침묵(沈黙)했다.
“고따마시여, 자아(我)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부처님은 이번에도 침묵하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왓차곳따가 몇 번이고 같은 질문(質問)을 했는데도 부처님께서 여전히 침묵만을 지키고 있자그는 가버렸다.
그가 떠난 다음에 아난다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찌하여 왓차곳따의 질문에 대답(對答)이 없으셨습니까?
저 사람이 돌아다니면서 고따마에게 이런 질문을 했더니 대답하지 못하더라고 떠들고 다니지 않겠습니까?”
“아난다야, 만약 그가 자아(自我)가 있느냐고 물었을 때, 자아가 있다고 대답하면 그는 영혼불멸론자(靈魂不滅論者)로 치우칠 것이요, [상주론자 견해(상견)][진아윤회설][무아윤회설][업윤회설]
자아(自我)가 없느냐고 물었을 때, 자아가 없다고 대답하면 그는 영혼절멸론자(靈魂絶滅論者)로 치우치고 말 것이다. [단멸론자 견해(단견)]
(참고 : 단견과 무아론자의 견해는 다른 것임에 유의!
http://cafe.daum.net/bd-dm/Ffus/38)
아난다야, 자아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 그렇다고 말한다면 모든 것에는 고정(固定)된 불변(不變)의 실체(實體)가 없다[제법무아]는 나의 깨달음과 맞겠느냐?” [무아론자 견해(무아견, 중도연기론자)][윤회부정설][윤회왜곡설][윤회방편설]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자아(自我)가 없느냐고 물었을 때 자아가 없다고 내가 대답한다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왓차곳따는 더 당황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왓차곳따가 생각하기를 ‘나는 원래 자아를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더 이상 자아를 갖지 않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단멸론(단견)]
<대방등수다라왕경>
- 나의 제자들은 이 인연법과 연생법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보아 과거(過去)에 매달려‘내가 과거세(過去世)가 있었던가, 과거세가 없었던가, 내가 과거세에 어떤 중생이었는가’를 말하지 않고, 미래(未來)에 매달려‘내가 미래세(未來世)에 존재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을 것인가, 어떤 중생이 되어 어디로 갈 것인가’를 마음 속으로 의심(疑心)하지도 않고 그런 문제로 망설이지 않는다.
만약 사문이나 바라문이 범속(凡俗)한 소견(所見)을 일으키고 그 소견에 얽매어 자아가 실체로 존재한다는 망견(我見, 아상)에 얽매어 말하고, 실재(實在)로서 중생이 있다고 집착하는 망견(衆生見, 중생상)에 얽매어 말하며, 목숨을 실체로 보는 망견(壽命見, 수자상)에 얽매어 말하며, 길흉(吉凶)과 같은 망견(妄見)에 얽매여 말하는 것을 근본적(根本的)으로 끊어버려야 한다. <잡아함경>
2) 연기법이 형이상학적인 법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리하여 숙고한다.
이중표 교수는 수행을 통하여 연기를 자기자신 안에서 확인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부처법을 육신통으로만 확인할 수 있는 법으로 이분하는 외도의 사고를 지닌 사람이다..
자신이 빠져 있는 똥구덩이 속으로 수없이 많은 이들을 근본불교라는 미명하에 끌어들이고 있는 이중표 교수는 부처의 정법 앞에 참회해야 할 구업을 참으로 많이도 짓고 있다.
- 부처님께서 마가다국의 왕사성 죽림정사에 계실 때였다.
자이나교도인 사꿀루다인이 부처님에게 과거와 미래에 대한 문제를 질문하자 부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과거(過去)는 과거대로 내버려두고
미래(未來)는 미래대로 내버려두자.
내가 너에게 현실(現實)을 통해 법(法)을 설하겠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게 되고,<此有故彼有>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此起故彼起>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게 되고,<此無故彼無>
이것이 소멸하므로 저것이 소멸한다.<此滅故彼滅>
나의 제자들은 이러한 인과관계(因果關係)의 법에 철저(徹底)하고도 조직적(組織的)으로 마음을 기울인다.”
<잡아함경>
• 석가모니(釋迦牟尼)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경험(經驗)에 의해 확보되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인간의 운명(運命)을 좌우하는 어떤 초월적(超越的)인 존재(存在)의 힘을 믿고 그 힘을 숭배하거나 복종(服從)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 불교(佛敎)는 맹목적(盲目的)으로 믿고 매달리는 신앙(信仰)의 종교가 아니라
납득되었기 때문에 믿는 신해(信解)의 종교이며,
확신하기 때문에 행동에 옮기는 신행(信行)의 종교이다.
• 붓다(佛陀)는 ‘와서 믿으라’고 말하지 않고, ‘와서 보라’ 거나 누구라도 ‘와서 이 법(法)을 보라’ 고 말했다.
• 전적으로 전통(傳統)에 의지하는 것은 정당하게 선악(善惡)을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보고(報告) 혹은 바람을 타고 온 소문, 그리고 경전의 권위에 대한 의존도 마찬가지다.
논리적(論理的)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거나 그럴싸한 추론(推論)이 진실(眞實)한 것이 될 수도 없다.
생김새로 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 전제(前提)니까 이 경우에는 이게 옳을 듯해서 혹은 스승에 대한 존경심 등의 이유(理由)는 바르게 선악을 판단하는 준거(準據)가 되지 못한다.
• 선과 악을 판단(判斷)하고 결정(決定)하는데 전통(傳統), 보고(報告), 풍문(風聞), 경전(經典)의 권위(權威), 논리(論理), 추론(推論), 외관(外觀), 공준(公準), 적합성(適合性), 혹은 스승에 대한 존경심(尊敬心)에 전적으로 의존(依存)하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 올바른 이해(正見)는 두 가지 조건(條件)에 의해 성립(成立)된다.
첫째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들은 것과
둘째는 그렇게 받아들인 것을
연기(緣起)의 원리(原理)에 따라서 다시 숙고하는 것이다.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이 소멸한다.
장작이 없으면 장작불이 소멸한다.
육체(色)가 소멸하면 마음(識)도 소멸한다.
[갈대묶음경 참고 : 식과 명색의 관계 http://cafe.daum.net/bd-dm/AHnF/20]
무지와 탐욕, 자아에 대한 미련(12연기에 대한 3세양중인과론, 재생연결식 고집) 등으로
자아취착에 빠져 윤회론(힌두교적 윤회 개념) 운운하지 않고,
부처님의 근본사상인 제법무아(諸法無我) 사상에 충실하는 것이 부처님의 진정한 제자다!]
출처 : http://cafe.daum.net/realbuddhism/4Rmc/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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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초 10.10.18. 13:36
첫댓글 일단 연기법을 말하기 전에 고통을 멸하고 깨달음을 얻은 자가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인가 아니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소멸된 이인가, 의문이 듭니다.
분명 누군가 수행해서 증득하고 고통을 없애서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진리를 깨우친 것이지요.
그 깨우친 당사자, 깨우침을 얻은 주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면 무아라는 것이 주체자체도 없는 자아없음이겠지만 깨우친 이가 있다면 그 무아는 그 누구라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아마 그 깨우침이 있기 전과 동일한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깨우침이라는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부처님도 살아서 멸도를 이루시지 않았습니까?
무상, 고, 무아를 증득한 주체가 분명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이 소멸합니다.
장작이 없어지면 불이 꺼집니다.
식과 명색의 상호의존관계를 설명한 경전이라 출처까지 대놓았습니다.
여기서 식과 명색은 존재론적 의미가 아니지요.
이것은 아함중도에서 충분히 논의가 된 것입니다.
헌데 이것을 물질이 소멸하면 정신이 소멸한다는 식으로 해석을 하니,
그렇다면 식이 소멸하면 몸도 사라져야 하는 것도 성립되어야 하겠지요.
이게 말이 됩니까?
물질에 근거해서 정신이 발생하고
물질이 무너지면 정신도 사라진다는
유물론적 사고를 불교로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식은 연기한 현상을 존재로 대상화하여 이를 분별하면서
자신도 존재로 대상화하여 인식하는 의식입니다.
무명에 의해 유위를 조작하여 그것을 분별하는 것을 말하지요.
이 식은 명색을 항상 지향하고 있습니다. 명색을 벗어나지 못하는 의식입니다.
명색은 식에 의해 증장됩니다.
의식이 법을 대상으로 구성한 결과 나타난 법의 존재화된 모습입니다.
이 식과 명색은 서로 의지합니다.
식은 명색을 항상 지향하는 분별식이며 명색은 이 식에 의해 다시 구성, 강화, 증장됩니다.
이러한 연기관계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한 상태에서
단순히 식은 정신, 명색은 물질 이라 해석하면서
이런 엉터리 욕설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연기법이 무슨 단어를 순서대로 나열하고 그 중요한 단어에 붉은 색 입히면서
그 뜻을 본인 생각대로 해석한다고 설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리 공부 하지 않고 마구 다른 이를 비방하는 못된 버릇을 가진 사람들,
참 정신 차려야 할 것 같습니다.
악업 짓지 말기를 바랍니다.
윗에글 전부 퍼온글인가요.
제일 아랬쪽은 다른데서 붙인글인가요.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이 소멸한다.
장작이 없으면 장작불이 소멸한다.
육체(色)가 소멸하면 마음(識)도 소멸한다
저도 몰랐는데 확인해보니 원조는 본문 글 밑에 링크 한곳이 원조이고
말씀 하신 그 부분은 http://cafe.daum.net/bd-dm 에서 더 보태 적었네요.
날카로우십니다.
네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이 소멸한다 라는 부분 부터는 이글을 퍼온 그 카페에서 원본 뒤에 덧붙혀 놓은 것입니다.
1. 빨간글씨 색깔도 여러가지 사용해서 빨간글씨가 초기불교에 위배된다는 것이 어디까지인지 알수가 없네요.
글쓴이는 서두에서 [이중표저 아함의 중도체계라는 책을 읽으면서 초기불교 부처님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부분이
매우 많음을 ..] 라고 하면서 이 교수 책속의 글을 인용하며 초기불교와 어긋나는것은 빨간글씨를 사용한다고 말합니다.
이말은 이 교수 글 자체가 초기불교와 어긋나다고 생각될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구분해야 할것은 이교수가 인용한 철학자들의 생각을 적어논 부분은
당근 무기해석에 바르지 않다고 적은 것이므로
마치 이 교수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여질 가능성이 있으므로
조심해서 살펴야 하겠지요.
그리고 지적된 빨간 문구들의 저자 H.oldenberg, 불가지론자. 카루파하나
모두 쟁쟁한 철학자들입니다.
지적하신 분은 이 철학자글들이 논리모순이니 초기불교에 위배된다는데 어떻게 위배되는지 설명을 해야지
이렇게 지적만 하면 누가 이 지적을 보고 ' 아' 위배되는구나 생각하겠어요.
책임있는 설명이 있었으면 더 좋을 뻔 했네요.
또
현학 이라해서 책크해보니 현학이 아니라
철학자들이 말한 사실을 아주 잘 정리해 놓았던데
'현학' 이라는 걸 보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되셨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연기법이 형이상학이라 했다고
["연기를 보는 자 법을 보는 자이며 법을 보는 자 나를 보는 자이다..
내 법은 현실에서 확인되는 법이다."]
이렇게 현실에서 확인되는데 형이상학이라 하느냐 하시는데
이 분은 깨친 분이시군요.
그런데 깨치신 분치고는 너무 구린내 나는 언어가 많아
전 안믿을 랍니다.
'형이상학' 이란 말을 단단히 오해 하신 것같은데 연기법을 아는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초 경험적인 세계 아닙니까? 이 분은 이 교수 말귀를 못알아 들어서가 아니라
트집잡기로 작정한 것 이겠지요.
오늘은 이곳까지..
본문에 대한 비판이라고 올려진 글은 뭘 비판하는 것인지도 불분명하지요. 마치 A라는 글을 써놓고 엉뚱한 다른 소리를 늘어놓는 식입니다.
빨간 부분이 뭐가 어떻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해설한 부분은 하나도 없으니 말이죠.
2. 2번째 자아문제 대하여 보도록합니다.
윗글에는 '자아문제' 결론을 말하는 후반구가 적혀있지 않아
본문글이 왜 자아문제를 거론하는지 알수가 없습니다.
책을 펴보시면 알겠지만 '자아문제' 이글의 목적은
자아 아트만(我)를 거론하는 것이 아니라
'성불의 목적을 갖는 행위의 나'를 설명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책을 끝까지 안 읽어보았는지 '자아가 부정되지 않았다' 란
표현만 똑 띄어 '자아가 조금 만 부정 되느니 아니니 ' 하며
이 교수가 말하려는 것과 삼천리 밖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본문중 [주지하듯이 불타는 외부세계의 존재만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 존재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
라고 이 교수는 붓다가 자아를 부정하고 있다고 천명하면서
다시 [ 붓다가 자아를 전적으로 부정하지 않았다] 라고 말합니다.
이 교수는 한입가지고 두말 하는 걸까요? 아닙니다.
이교수는 자아를 전적으로 부정하지 않는다' 는 것에서 자아가 아트만 의미의 관점이 아니라는 것은
아래 윤회이야기를 보면 이해 할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자아는 전적으로 부정 되지 않는다 '란 뜻을
윤회주체로 자아'(아트만)로 본다면 그건 잘못된것이라고 말하기때문이지요.
이해가 되셨나요?
이 글 후반부에는 '자아는 무엇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활용하는가'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뜻은 아트만 관점이 아니라 행위하는 나 의 관점입니다.
제목에 [무기를 진아로 바꾸었다] 라고 비양거리는데 설명이 없어 왜 이러는지 확실히 모르겠으나
본문에서도 [불타의 무기는 중도의 입장에서 취해진 태도라 할 수 있고.] 라고 밝힙니다.
'자아가 전적으로 부정되지 않는다'를 이 교수가 '아트만이 실제한다'로 받아 드리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책을 정독하지 않은 결과라고 생각되네요.
요즘 초기불교에 대한 인식이 많이 호전되어 [12연기에 대한 3세양중인과론, 재생연결식 고집] 아비담마
비판하는 것을 많이 보게됩니다. 긍정적 현상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12연기 태생삼세양중인과에서는 식과 명색을 정신과 물질로 보고 있는데
식과명색은 정신물질이 아니라
갈애지요. 한편
태생삼세양중인과을 비판 하면서 식과 명색은 정신물질이라 하는데
과연 올바른 것일까요?
태생삼세양중인과를 비판하시는 분이 계시면 식과 명색을 정신물질이 아니라
'갈애' 임을 서툴러 알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