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마코스 윤리학』 제 1권
요약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 1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된 관심사는 인간에게 있어서 자연적인 것으로서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인 최고 좋음을 발견하고 분석하는 일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첫 번째 문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기예와 탐구, 또한 마찬가지로 모든 행위와 선택은 어떤 좋음을 목표로 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좋음을 모든 것이 추구하는 것이라고 옳게 규정해 왔다.”라고 말하며 최고 좋음의 존재에 관해 논증한다. 이 논증에서 아리스토텔레서는 다음과 같은 개념적인 논점을 형성한다. (1) 행위가 되는 어떤 것은, 행위자의 평가에 따르면, 좋거나 가치 있거나 보람이 되는 어떤 목표를 갖게 될 것이다. (2) 최고 좋음은 모든 인간 행동의 목표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최고 좋음은 우리가 그 자체를 위해서 추구하고 그것을 위해서 다른 모든 것들을 추구하는 좋음 또는 목표이다. 최고 좋음은 어떤 다음 목적을 위한 도구가 아닌 그 자신의 본질적으로 매력적인 특성들에 의해서 추구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최고 좋음의 명칭을 통상적으로 ‘행복'이라고 번역되는 ‘에우다이모니아'이다. 에우다이모니아는 상태가 아닌, 활동이고 우리가 행하는 어떳 것이며, 우리의 삶 전체에 적용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우다이모니아는 ‘잘 사는 것’과 ‘잘 행동하는 것’과 동의어라고 주장한다. 만일 우리가 인간 삶에서 최종 목적을 생각하고 있다면, 직관적으로 그것은 잘 살고 성공적으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소위 즐거움, 추구, 명예, 관조, 돈 벌기의 ‘삶들'이 우리의 모든 행동들의 최종 목적이 될 수 있는지 고찰한다. 그는 에우다이모니아를 즐거움과 동일시하는 것을 거부한다. 이런 삶은 동물들을 사육하는데 적합하다고 주장한다. 에우다이모니아의 최종 목표는 육체적으로 만족하는 삶이 아니고 생각한다. 또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우다이모니아를 명예 또는 존경심과 동일시하는 것을 잘못된 생각이라고 주장한다. 명예는 누군가에게 의존되어 수여되는 것인데, 에우다이모니아는 ‘그 자체로 고유한 어떤 것'이다. 또 사람들은 명예를 통해 사람들에게 존경받기를 추구하기에 명예는 최고 좋음이 될 수 없다. 최고 좋음은 그 자체로 우리가 원하는 것이지 다른 어떤 것을 위해서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에우다이모니아는 좋은 상태 또는 탁월성을 갖춘 상태로 구성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음의 형상’으로 관심을 전환한다. 플라톤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을 따르면 모든 좋은 것은 몇 가지 공통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아리스토텔레스는 부정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을 잘못 해석한 것처럼 보이는데, 다양한 범주의 다양한 속성들이 좋음의 형상의 공통적인 특성을 공유하지 않으므로 좋음의 형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석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을 잘못 해석한 것처럼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우다이모니아가 ‘가장 완전한 목적' 이고 ‘자족적인 것' 이라고 주장하며 개념적인 제한을 한다. ‘가장 완전한 목적'은 항상 그 자체를 위해서 추괴되며 결코 다른 어떤 것을 위해서 추구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자족적인 것'은 어떤 목적이 만일 그 자체만으로도 어떤 종류의 삶을 ‘선택할 만한 것'으로 만들고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도록’ 만든다면 ‘자족적'인 것이다. 그는 우리가 인간의 ‘기능(에르곤)”을 검토함으로써 에우다이모니아의 본성을 결정할 수 있다고 제안하며 다음과 같은 논증을 제시한다. (1) 만일 X가 그 ‘기능'을 잘 수행한다면, X는 좋다. (ii) 인간은 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iii) 인간의 고유한 에르곤은 영혼의 이성의 이성을 가진 부분의 활동이며 그 것은 이성을 가진 부분과 그것에 복종하는 부분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iv) 좋은 사람은 이성을 가진 영혼의 부분을 생애 전반에 걸쳐 잘 또는 훌륭하게 활용한다. 이 결론은 탁월성 또는 더욱 단순하게 탁월성을 갖춘 삶에 따라 이성을 지는 영혼의 부분의 활동이라고 해석 될 수 있다. 그렇다면 탁월성을 갖춘 삶이란 어떤 것일까? 탁월성의 활용에 의해서 우리의 삶이 형성되고 지시된다. 탁월성의 활용은 삶을 형성하는 행위들과 그 삶의 총체적인 목적과 모두 관련된다. 이 주장은 때때로 에우다이모니아를 ‘삶의 계획'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탁월성을 갖춘 사람은 최선의 선택지들을 행동할 것을 결정하며 그 선택지에 관한 결정은 삶 전체를 관통하는 어떤 개념을 언급하고 있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우다이모니아가 ‘외적인 좋음들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 쿠퍼(J. M. Cooper)는 ‘일차적 좋음’과 ‘이차적 좋음’이라는 용어를 유용하게 도입하고 있다. 일차적 좋음은 우리가 실제로 원하는 특수한 것들이다. 그러나 에우다이모니아는 일차적 좋음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런 일차적인 목적들의 획득을 위해서 질서정연한 계획을 실행하려는 시도’로 구성된 이차적 좋음이다. 이 해석에 따르면 탁월성을 갖춘 활동은 에우다이몬적 삶으로 이끌기 위한 외적인 좋음들의 올바른 관리를 담당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탁월성을 갖춘 활동의 삶은 오직 그 자체를 위해서 욕구된다고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우다이모니아에 관한 설명이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일상적인 직관적 통찰과 일치해야만 된다고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우다이몬적인 삶들의 원인을 고찰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배움과 습관을 통해서 에우다이몬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그는 역시 우연이 몇 가지 역할을 감당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사람의 우연적 사건들은 그의 에우다이모니아를 결정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에우다이모니아를 통제하는 것은 어떤 사람의 품성의 안정된 상태라고 간주되기 때문에, 에우다이몬적인 사람은 생애 전체를 걸쳐 탁월성을 활용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풍성이 탁월성을 갖춘 상태들을 소유하고 있다면, 살아가는 동안 그를 에우다이몬이라고 부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칭찬 받을 만한 것은 모든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것에 대해 특정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에 칭찬받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하지만 그는 에우다이모니아가 칭찬받을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에우다이모니아의 크기를 판단하는데 비교 대상이 되는 다른 어떤 것이 존재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우다이모니아는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것이기 때문에 비교가 불가능하게 된다.
나의 생각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따르면 최고 좋음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최고 좋음은 우리가 과연 도달할 수 있는 것일까? 최고 좋음은 전선(全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은 완벽히 선하지 않다. 또한 인간은 이성을 내재하고 있지만 완벽히 이성을 발휘하지 못한다. 내 생각에는 인간은 절대 완벽한 에우다이몬적인 삶을 살 수가 없다. 하지만 부분적으로 발휘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또 여기서 에우다이모니아는 그 자체로 완벽하기 때문에 부분이 나눠질 수 없다고 도출된다. 우리는 살면서 한 가지의 목표를 위해 살지 않는다. 나는 생존하기 위해 살며,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살며, 사랑 받기 위해 살며... 이런 삶을 계속 추구한다면 끝에는 교차점이 있을까? 하지만 7장에서 보면 에우다이모니아는 개개의 좋음을 질서정연하게 실행하려는 시도가 된다. 에우다이모니아는 다양한 좋음들의 집합이 아닌, 이 좋음들을 올바르게 작동시키는 원리가 될 까? 이 자체를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고 좋음이란 우리는 절대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우리가 주어진 삶을 충실히 한다면, 도달할 수도 있겠고,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어떤 한가지를 추구하는 삶을 반대한다. 그저 그 상황에 주어진 일을 최선을 다해 한다면 그것이 최고 좋음을 이룰지는 모를지언정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