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너머 남촌에는
김동환
<1>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 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꽃 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
밀 익는 오월이면 보리 내음새
어느 것 한 가진들 실어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 제 나는 좋데나.
<2>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저 하늘 저 빛깔이 저리 고울까
금잔디 너른 벌엔 호랑나비 떼
버들밭 실개천엔 종달새 노래
어느 것 한 가진들 들려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 제 나는 좋데나.
<3>
산 너머 남촌에는 배나무 있고
배나무꽃 아래엔 누가 섰다기,
그리운 생각에 영(嶺)에 오르니
구름에 가리어 아니 보이나
끊었다 이어 오는 가는 노래
바람을 타고서 고이 들리데.
-<조선문단>(1927)-
해 설
[개관 정리]
◆ 성격 : 낭만적, 향토적, 민요적
◆ 특성
① 향토적인 시어를 사용함.
② 동일한 시행을 반복하여 사용함.
③ 7 · 5조 3음보로 이루어져 민요풍의 느낌을 줌.
④ 다양한 감각적 이미지를 활용하여 이상향을 형상화함.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산 너머 남촌 → 이상향
* '남촌'의 의미 → 어떤 지명이라기보다는 시인이 그리워하는 이상향이다. 그러므로
해마다 봄이 오면 산 너머 남촌으로부터 봄바람에 섞여 진달래꽃, 구수한 보리 냄새가
실려 오고, 고운 봄 하늘에 호랑나비 떼가 날고 종달새 노래가 가득 들려오는 것이다.
작자는 마음속 깊숙이 '남촌'이라는 이상향을 행복의 터전으로 설정해 놓고 그 미지의
세계에 기대하는 모든 희망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시인은 망국의 한을 씻고
빼앗긴 국토를 되찾을 때 참다운 행복의 터전인 '남촌'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면서,
그 간절한 소망을 이 작품에 담았다고 할 수 있다.
* 산 너머 남촌에는 → 1연마다 반복되어 전체의 유기적 연관성을 강화함.
* 봄바람 → 그리움, 사랑의 감정
* 진달래 향기, 보리 내음새 → 후각적 이미지를 통해 아름다운 남촌의 모습을 형상화함
(대구법).
* 어느 것 한 가진들 실어 안 오리 → 봄 향기와 내음새에 대한 기대감(설의법)
* 나는 좋데나 → 화자의 감정이 직접적 표출됨.
* 호랑나비 떼, 종달새 노래 → 시각적, 청각적 이미지 활용(대구법)
* 배나무꽃 → 순수와 낭만의 이미지
* 섰다기 → '서 있다고 하기에=서 있다네'의 뜻으로 운율을 고려한 표현임.
* 구름→ '남촌'과 '그리운 이'를 보고자 하는 화자의 행동을 가로막는 장애물
* 구름에 가리어 아니 보이나 → 비관적 현실 인식
* 끊었다 이어 오는 가는 노래 → 들릴 듯 말 듯 들리는 그리움의 노래. 남촌을 향한
끝없는 소망으로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 가는 노래'는 아무리 어려워도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희망을 지키려는 화자의 의지를 나타냄.
◆ 제재 : 남촌
◆ 화자 : 남촌을 그리워 하는 사람
◆ 주제 : 순수하고 이상적인 세계에 대한 그리움
[시상의 흐름(짜임)]
◆ 1 : 남촌에 대한 동경 - 해마다 불어오는 봄바람
◆ 2 : 남촌에 대한 동경 - 새파란 하늘과 평화로운 정경
◆ 3 : 남촌과 그리운 사람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가 보지 못한 산 너머 남쪽 마을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을 자연 현상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산 너머 남촌은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곳이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남촌에 대한 동경은 커지고 상상은 더욱 더 자유로울 수 있다. '진달래 향기', '보리 내음새' 등의 후각적 이미지와 '호랑나비 떼', '종달새 노래'의 시각적, 청각적 이미지가 어우러지면서 그 그리움은 더욱 생생하게 깊어진다. 그리고 남촌에 대한 그 그리움은 곧 그곳에 사는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어지고, 화자는 배나무꽃 아래에 서 있는 것으로 상상되는 그 누군가를 보러 남촌이 보일 만한 언덕에까지 오른다. 하지만 누군가는 구름에 가리어 보이지 않음으로써 화자는 잠시 비관적 현실을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끊일 듯 이어지는 가는 목소리의 노래는 여전히 들린다고 하여 그 누군가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믿음을 드러내고 있다.
7 · 5조 3음보의 민요풍 리듬으로 이루어진 이 시는 노래로 만들어져 널리 불리고 있다. 이러한 형식상의 특징과 미지의 마을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이 어우러져 활달하면서도 정겨운 정서를 드러내고 있다. '남으로 오네', '좋대나', '섰다기' 등의 토속적인 어휘와 의도적인 줄임말은 자수율 조정을 위한 축약이기도 하지만, 화자의 애틋하고 수줍은 마음을 여운으로 표현하는 데 적절하게 사용되고 있다.
[작가소개]
김동환[金東煥]
아명 : 김삼룡 [金三龍]
창씨개명 : 시라야마 아오키 白山靑樹
호 : 파인 巴人, 취공 鷲公
본관 : 강릉 김씨
출생 : 1901년 9월 27일
조선 함경북도 경성군 오촌면 수송동
사망 : 1958년?
직업 : 시인
학력 : 경성보통학교 (졸업; 1909~13), 중동중학교 (졸업; 1916~21)
토요대학 (영어영문학과 / 중퇴)
부모 : 아버지 김석구, 어머니 마윤옥
형제 : 누나 2명, 여동생 1명, 남동생 2명
배우자 : 신원혜 (? ~ ?; 이혼), 최정희 (? ~ 1950년; 재혼)
자녀 : 3남 3녀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시인, 친일반민족행위자. 본관은 강릉(江陵), 호는 파인(巴人)·취공(鷲公).[2] 필명으로는 강북인(江北人)·초병정(草兵丁)·창랑객(滄浪客)·백산청수(白山淸樹)·김파인(金巴人)·파인생(巴人生)·목병정(木兵丁)·석병정(石兵丁). 아명은 삼룡(三龍).[3]
한국 최초의 서사시《국경의 밤》의 시인. 처음에는 신경향파에 가까운 시를 쓰기도 하였으나 점차 서정성에 기댄 시를 많이 썼다.
2. 생애[편집]
김동환은 1901년 9월 27일 함경북도 경성군 오촌면 수송동(현 경성군 승암노동자구)에서 아버지 김석구(金錫龜)와 어머니 마윤옥(馬允玉) 사이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9년 고향의 경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13년 3월 졸업했으며, 빈곤한 가계 탓에 중학교 진학은 하지 못하고 한동안 경성군청에 근무하였다.
1916년 경성부로 이주하여 중동중학교에 입학했으며 1921년 3월 졸업하였다. 곧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 토요대학 문화학과에 입학하여 재학하던 중 1923년 9월 관동 대지진이 있었는데, 이때 일본인의 조선인 혐오로 인한 관동대학살 및 수용소 수감을 피해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했다.
귀국 후 1924년부터 북선일일신문(北鮮日日新聞) 조선문판·동아일보·시대일보·조선일보 등 신문사에서 기자로 근무하였으며, 1926년 10월 14일 경성부 돈의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돈의동)으로 본적을 옮겼다. 1929년 6월에는 삼천리사(三千里社)를 설립하고 종합월간지 《삼천리(三千里)》를 창간해 1941년 12월까지 발행했으며, 자매지로 《만국부인(萬國婦人)》과《삼천리문학(三千里文學)》을 각각 1932년 10월, 1938년 1월에 발행했다. 1942년 3월에는 대동아사(大東亞社)를 설립하고 그해 5월 《대동아(大東亞)》를 창간했다. 《대동아》는 《삼천리》의 제목을 바꾼 잡지였으나 친일 색채가 농후했으며 1942년 7월호를 마지막으로 종간되었다.
이후, 1944년 7월까지 김동환의 잡지 발행 및 출판은 지속되었다. 8.15 광복 후 김동환은 조선문단의 대표적인 친일 인사로 지목되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를 받았는데, 이때 특기할 만한 점은, 그가 1948년 9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발족되자 스스로 친일 행위 사실을 인정하고 자수했다고 한다. 이광수나 최남선 같은 문단의 선배들이 치졸한 변명을 한 것과는 대조적이므로 높게 살 만하다. 또 해방 후 <꽃피는 한반도>라는 책에서 '반역의 죄인'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친일에 대해 사죄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1949년 8월 반민족행위자처벌법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그 직후인 7월 23일 납북되었으며 1956년 납북인사들로 구성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에 위임되었다가 1958년 노동자수용소로 추방되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여담[편집]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자식들은 대개 자신의 부모의 친일 행적을 옹호하고 두둔하는 경우가 많은데, 김동환의 셋째 아들 김영식은 그에 대한 각종 기록을 수집, 정리하고 문학적 성과를 조명하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의 친일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분명히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김영식은 3녀 1남을 두었다.
후처가 여류 소설가 최정희인데, 모윤숙, 노천명과 함께 대표적인 여류 문인계에서 친일파로 유명하다. 최정희가 친일파가 된 시기와 김동환이 친일파가 된 시기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이른지, 그리고 서로의 친일에 영향을 준 것인지 등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첫 부인 신원혜(申元惠, 1903년~1993년)와 3남 1녀를 두었고, 최정희(崔貞姬, 1906년~1990년)와의 소생으로는 소설가 김지원, 김채원 자매가 있다. 그리고 김채원의 아들, 즉 그의 외손자는 현재 배우로 활동 중인 백수장이다.
4. 작품[편집] : 국경의 밤, 산 너머 남촌에는
첫댓글 감사합니다
무공 선생님
댓글 주심에 고맙습니다.
오늘도 건필 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