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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우리는 동료 인간들의 추위와 굶주림, 결핍과 고통을 외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피정집을 운영하면서 여러 가지 신경 쓸 일이 참 많습니다. 그중에서 제가 가장 각별하게 신경을 쓰는 것은 피정 오신 분들이 내집처럼 편안하게 느끼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입니다.
영성 강의도 최선을 다해 준비합니다. 성찰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운영합니다. 마음의 짐을 훌훌 털어놓을 수 있도록 고백성사도 편안하게 보실수 있도록 배려합니다.
그런데 뭐니 뭐니 해도 중요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정성이 듬뿍 담긴 맛갈진 음식입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좋은 프로그램에 앞서 잘 드셔야, 그뒤로 모든 것이 술술 풀리며 불만이 줄어듭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도 같은 생각이셨을 것입니다. 며칠 동안 당신을 따라다니며 말씀을 듣는 군중이, 먹을 것이 다 떨어져 굶기 시작하자, 선포하시는 말씀도 잘 안먹히는 분위기를 파악하셨을 것입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십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마태 15,32)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향한 예수님의 측은지심과 연민의 마음이 크게 돋보이는 장면입니다. 말씀하시는 투가 마치 우리들의 어머니와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들의 어머니들, 어떻습니까? 어떻게 해서든 하나라도 더 먹이고 싶어 안달입니다. 정말이지 귀찮고 짜증이 날 정도로. 예수님의 마음도 우리들의 어머니 같으시니, 참으로 마음이 편안해지고 훈훈해집니다.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을 묵상하면서, 한 가지 든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만 그럴듯하게 하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구름 위에 떠 계시기만 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장밋빛 이상만 제시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의 육체적인 질병을 구체적인 치유 활동을 통해서 참으로 고쳐주셨습니다. 당신 자녀들의 육체적인 굶주림을 구체적인 방법을 통해 진실로 채워주셨습니다.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신 기적사화를 영적으로, 상징으로만 해석해서는 절대 안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육체적인 필요성을 눈여겨 보십니다. 우리 인간이 느끼는 고통을 당신도 느끼고 계십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간절히 바라고 계시는 바 한 가지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건강을 잘 유지하고, 굶주리지 않고, 고통받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동료 인간들의 추위와 굶주림, 결핍과 고통을 외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들이 영적으로는 물론 육적으로, 결국 전인적(全人的)으로 구원되도록 돕고, 그를 통해 천상 잔치에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동반해야 할 것입니다.
광야에서 일어난 빵을 많게 하신 이 기적은 모세가 광야에서 기적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인 만나 사건을 연상케 합니다. 여자들과 어린이들을 포함해서 4천 명의 장정들을 배불리 먹고도 남은 조각들이 일곱 바구니에 흘러넘쳤습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풍요로움, 즉 하늘나라의 풍요함을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기적이 완전무결한 기적이었음을 의미합니다. 빵을 많게 한 기적, 모든 군중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은 이 기적을 통해 우리는, 하늘나라의 풍요로움과 천상의 메시아 잔치를 미리 맛볼 수 있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선악과는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에 사용된다
오늘 봉헌에서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에서 당신을 따르던 이들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배고프게 돌려보내서 쓰러지는 일이 없도록 그들을 먹이려고 하십니다. 이를 위해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의 빵이 없었으면 기적을 하시지 않으셨을까요? 그분은 마치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시는 것처럼 그럴 능력이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도 무언가 요구하시는 이유를 알아야만 합니다.
중국 소설 『나는 남편을 파산시키려고 매일 열심히 일한다』는 자기 삶이 미리 정해졌다고 믿는 여성 린멍(Lin Meng)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부유하고 헌신적인 남자인 그녀의 남편은 더 큰 성공을 거둔 후 그녀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재혼하게 될 운명입니다. 린멍이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린멍은 그래서 남편의 사업을 망하게 하려고 결심합니다.
그녀는 남편의 돈으로 실패한 엔터테인먼트 프로젝트에 투자하고, 값비싼 직원을 고용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남편의 자원을 고갈시킬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은 당황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녀의 행동에 저항하거나 의문을 제기하는 대신 그녀의 새로운 노력과 꿈을 지원합니다. 남편을 파산시키기 위해 쉬지 않고 노력하는 동안 예상치 못한 성공이 뒤따릅니다. 그녀가 자금을 조달한 영화는 실패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대 히트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쇼를 위해 고용한 값비싼 유명인은 기록적인 시청률을 기록합니다.
그녀의 가장 무모한 사업 결정조차도 예상치 못한 이익을 가져옵니다. 그녀의 노력은 파멸을 초래하기는커녕 자신만의 제국을 건설하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자신을 운명의 희생자가 아니라 남편의 그늘을 넘어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를 형성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남편도 아내인 린멍을 더 존경하는 눈으로 바라보며 더욱 신뢰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그녀를 단순히 사랑하는 아내가 아니라 엄청난 힘과 비전을 지닌 파트너로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왜 요구하셨을까요? 단순히 당신에게 받은 것에 감사하기만을 위하셨을까요? 아닙니다. 본래 그들은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어야 했습니다. 그 일에 그들이 봉헌한 것이 쓰여 자신들도 하느님의 일에 합당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하느님도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저도 신학생 때 유학을 다녀오고는 공부가 쉽지 않음을 알고 신부가 되었을 때 다시 유학 가라고 하셨을 때는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느낍니다. 주교님이 저에게 있는 무언가를 요구하시는 이유는 상호 존중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내가 그분을 위해 아무것도 봉헌하지 않는다면 본당에 나가 본당신부를 하였어도 크게 고마워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물론 저 자신도 그분께 합당한 사제가 아니라고 여겨 적당히 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인간의 죄를 위해 모든 보속을 해야 더 완전하겠지만 예수님은 당신 혼자 모든 것을 이루길 원치 않으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명확하게 예수님의 보속에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꺼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 수난의 부족한 부분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골로 1,24)
저는 신자들에게 봉헌을 강조합니다. 그 이유는 그 봉헌된 것으로 신자들에게 다시 돌려줘 그것으로 선교할 자금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소공동체에 돌려줘 가정방문 할 때 선물을 사라고 하고 가두 선교할 때도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주라고 합니다. 그것들은 모두 봉사하는 그분들이 낸 교무금과 헌금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게 저는 신자들을 존경하게 되고 신자들도 본당 신부에 합당한 신자라는 자부심을 가지게 됩니다.
1849년 세관의 검사관으로 일하던 어떤 사람이 직장에서 해고당했습니다. 아내는 오히려 기뻐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당신이 좋아하는 문학을 본격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네요. 아마 이 해고가 당신에게 좋은 기회가 될 거예요.”
그리고 아내는 현금 뭉치가 든 작은 가방을 가져와 꺼내 놓으며 또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혹시나 해서 당신 봉급에서 지금까지 따로 마련해 놓았어요. 당신이 글을 쓸 동안 우리는 이 돈으로 살아갈 수 있을 거예요.”
그 남편의 이름은 너새니얼 호손이고 그가 그렇게 해서 쓴 소설이 유명한 ‘주홍글씨’입니다. ‘주홍글씨’나 ‘큰 바위 얼굴’과 같은 위대한 소설을 집필하게 된 것에 어떤 누구도 호손이 자기 능력만으로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영광은 아내와 함께 받아야 정당할 것입니다.
부부가 함께 무엇을 이루어냈을 때 그것이 누구의 공로인지 정확히 나눌 수 없습니다. 다만 두 사람이 함께 같은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부부가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태 15,29-37: 많은 병자를 낫게 하시고, 빵의 기적을 베푸심.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사람들이 다리 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장애인들과 말 못 하는 이들을 예수님께로 데려온다. 그분의 옷자락을 잡는 데 그치지 않고 그분의 발치에까지 온다. 그들은 신앙을 표현하고 있다. 다리를 저는데도 불구하고 산으로 애써 올라왔고, 산에 오른 다음에는 그분의 발치에 있기만을 바라고 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으로 치유된다. 사람들은 비록 외딴곳이었지만,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에 지칠 줄 몰랐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32절) 제자들이 사람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더라도, “이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이만 한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33절)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북돋우고 그들이 더욱 동정심을 느끼도록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34절) 물으신다.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주린 자를 먹여 주신다. 우리는 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자비, 불쌍히 여겨주시는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다. 이 차별 없고 순수한 사랑을 우리가 실천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변화뿐 아니라 세상의 변화도 이룰 수 있다.
복음은 이 기적 사화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엘리야나 엘리사보다도 더 훌륭한 분이심을 말하고 있다. 또한, 모세와 같은 예언자라는 사상도 들어있는 것 같다. 그 옛날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로 먹인 것처럼 예수께서는 외딴곳에서 백성을 먹이신다. 예수님은 기도하신 다음 빵을 나누어 주신다. 이제 우리는 이웃에게,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자비심을 갖고 우리와 같은 형제로 대해주는 그래서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몇 년 전, 우연히 길에서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습니다. 친구가 “와~ 정말 오랜만이다. 잘 지내지?”라고 묻습니다. 이 말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럼 잘 지내지. 너는 어때?”라고 말했습니다. 그 친구도 “나도 좋지. 너 좋아 보인다.”라고 인정해 주었고, 다음에 만나서 못 나눈 이야기를 나누자고 약속하면서 헤어졌습니다. 이 친구와의 만남 뒤에 그 짧은 대화가 계속 기억났습니다. ‘정말로 잘 지내고 있는가?’라는 물음 때문입니다.
사실 당시에 그렇게 잘 지내지 못할 때였습니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고, 또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심적으로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습관적으로 “잘 지낸다”라고 말했던 것은 과연 무엇일까 싶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약한 모습이 아닌 강한 모습만 보여주려는 마음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냥 습관적으로 나온 말일까요?
우리는 자기를 숨기려는 마음이 일차적인 것 같습니다. 특히 자기의 약하고 부족한 모습은 절대로 보여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허세로 가득 차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기를 숨길수록 힘들어지는 것은 나약한 ‘나’ 자신이었습니다.
사람에게 보여주기 싫은 모습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계심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나’를 고백하면서 그분께 위로받고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받아주시는 주님께 솔직하게 자기를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자리를 잡자 많은 군중이 몰려듭니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 불구자들, 말 못 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당시에는 상선벌악과 인과관계의 원칙을 내세워서 병을 죄의 결과로 보는 모습이 가득했습니다. 따라서 병이 있어도 숨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집 안에만 갇혀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 앞으로 다가옵니다. 주님께 굳은 믿음을 가지고 솔직하게 자기를 내려놓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말 못 하는 이들이 말하고 불구자들이 온전해지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눈먼 이들이 보게 됩니다.
이렇게 주님께 굳은 마음으로 솔직하게 자기를 내려놓는 사람이 커다란 은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으로 다가오는 사람을 그냥 되돌아가게 하지 않으십니다. 빵의 기적을 베풀어주십니다. 배고파서 되돌아가다가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를 것을 걱정하시면서 말이지요.
병의 치유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그 이상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굳은 믿음을 가지고 솔직하게 주님 앞에 자기를 내려놓아야만 했습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는 친해졌고 가까워졌고, 익숙해졌다. 그리고, 딱 그만큼 미안함은 사소해졌고 고마움은 흐릿해졌다(드라마 ‘응답하라 1994’).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그분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모든 민족들에게 덮인 덮개를 없애시리라.”(이사 25,7)
우리가 쓰고 있는
교만의 너울과
허영의 덮개를 치워주시는 분은
만군의 주님이시라네.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세상의 수치를
피해가게 해주시는 분도
주님이시며
우리의 영혼과 육신을
먹여 살리시는 분도
주님이시라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이 질문은 지금 나에게
그 빵이 될 수 있냐는 질문입니다.
강생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려면
빛이 세상을 계속 비추고
우리를 비추는 그 방향으로 우리는 나아가고
소금이 음식 안에서 녹아들어
교회가 부패하지 않고 살아있으며
누룩이 빵 반죽에 섞이고
그 빵이 부서지고 나뉘어질 때
비로소 교회는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고
그 교회 안에서 주님의 강생은
계속 이어지는 것입니다.
강생과 육화를 머리로가 아니라
삶으로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그게 진짜입니다.
영적 장애를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지금 나에게 빵이
얼마나 많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주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노력과 수고로움을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주님께 대한 갈망과 절박함으로
세상의 빵보다는
영적인 빵에 대한 내적 갈급함이
나에게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잔치를 베푸시고 그들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내신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25,6-10ㄱ
그날 6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7 그분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모든 민족들에게 덮인 덮개를 없애시리라.
8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정녕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9 그날에 이렇게들 말하리라.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주님이시다.
이분의 구원으로 우리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10 주님의 손이 이 산 위에 머무르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시고 빵을 많게 하셨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5,29-37
그때에 29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로 가셨다.
그리고 산에 오르시어 거기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30 그러자 많은 군중이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
그들을 그분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31 그리하여 말못하는 이들이 말을 하고 불구자들이 온전해지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눈먼 이들이 보게 되자,
군중이 이를 보고 놀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32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33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일 만한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4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시자,
그들이 “일곱 개가 있고 물고기도 조금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5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36 그리고 빵 일곱 개와 물고기들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37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