融合美學으로 書藝의 新境열기
-안홍표 작가의 작품세계-
정태수(한국서예사연구소장)
1. 융합으로 서예의 새길 열기
현대인은 삶의 영역에서 다양한 관점의 혼합과 융합으로 더욱 풍부하고 역동적인 트렌드를 만들어 낸다. 작가도 예외는 아니다. 이 역동적인 스펙트럼의 핵심 원동력 중 하나는 다양한 아이디어, 전통, 가치, 상징을 융합하여 새로운 트렌드를 탄생시킨다. 예술계에서는 수 세기에 걸쳐서 이러한 융합과정에서 새로운 움직임을 태동시켰고 예술 형식의 진화를 촉진하여 왔다.
서예의 경우, 청대 오창석이 석고문의 필의를 다양한 서체에 전이하여 간접적인 융합의 방향을 제시하였다면, 정섭은 여러 서체의 기법과 특성을 혼융한 직접적인 서체융합으로 새로운 예술적 표현을 탄생시킨 바 있다.
이렇게 예술적 스타일과 기법의 융합은 새로운 예술 형식의 창조를 가능하게 하여 혁신을 촉발하거나 지평을 넓혀왔다. 오늘날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의 조화를 통해 작가들은 감상자에게 신선한 감동을 선사하는 시도가 필요한 시대이다.
예컨대 서예의 작품창작에서 기계적으로 균형이나 대칭을 맞추려는 시메트리(symmetry)에서 벗어나 화(和)의 개념으로 점획의 균형, 조화, 통일을 모색하면 획일적이지 않은 다양한 결구와 장법을 확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내용과 형식의 조화를 도모하거나 장법과 결구 및 서체의 융합은 서예의 재생산 능력을 향상시켜 창의성의 영역에는 경계가 없음을 상기시킬 수 있다. 무엇보다 융합이란 단순한 뒤섞임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들 사이의 관계를 통해 개체적 단위의 특성을 극대화시켜 새로운 서예미학의 접점을 찾아내는 의미있는 일이다.
이러한 융합의 서예미학으로 서예의 새길을 열어 나가려는 작가가 운파 안홍표(이하 운파)이다. 그는 서예입문 40여 년에 경북을 대표하는 중견작가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는 작가이다. 서예 연륜 불혹, 인생연륜 이순에 이른 그의 작품을 접하면서 평소 그가 꿈꾸어 왔던 작가의 길과 창작관에 대해 보고 느낀대로 술회(述懷)해 본다.
2. 백리를 가려는 자는 구십리를 반으로 여긴다
서예의 맛! 먹물을 한껏 머금은 붓으로 순식간에 종이 위에 윤갈(潤渴)과 지속(遲速) 및 태세(太細)를 구현해 내는 운필의 묘경(妙境)을 모르고서는 서예의 진수를 얻었다고 할 수 없다. 묘경의 목전에 다다른 운파가 선보이는 이번 전시의 출품작을 일별해 보면 몇 가지로 특징을 분류할 수 있다.
먼저, 작품의 내면에 흐르는 작가의 심상과 글감의 섞임이 예사롭지 않은 점이다. 운파는 대학에서 한문교육을 전공하였고 교단에서 후학들에게 평생 한문을 가르쳤기 때문에 누구보다 한시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높다. 그가 선문(選文)한 싯귀나 문장을 보면 그의 마음이 어떻게 글감과 융합하여 지향점을 드러내는지 알 수 있다.
근작에서는 퇴직을 앞두고 자연, 회귀, 근본, 사랑 등 평생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본분에서 한 걸음 물러나서 세상을 관조하려는 그의 마음이 읽혀진다. 작품 <무심묵묵(無心黙黙)>을 보면, 최고운의 시 중에서 가려 쓴 “무심히 달빛을 바라보며[無心見月色]/묵묵히 앉아 돌아갈 줄 모르네[默默坐忘歸]”라는 싯귀에 취한 듯하다. 운파는 자연에 취하듯 학생들에게 매료되어 교직을 평생의 천직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이제까지 함께 해 왔던 학생들을 아쉬움 속에 남겨두고 도연명과 같이 홀연히 자연인으로 돌아가려는 채비를 하는듯하다. 작품을 보면, 세로 행을 의식하지 않고 들쑥날쑥하게 자유롭게 휘호하였고, 거침없는 운필로 숙련된 내공을 보여주면서 글감과 작품이 동화된 느낌을 자아낸다.
또 다른 작품을 보자. 『전국책(戰國策)』 진책(秦策)에 나오는 “백 리를 가는 사람은 구 십리를 반으로 한다[行百里者半於九十里]”는 글귀에서 마지막 마무리를 잘 하여 유종의 미를 거두겠다는 내용을 통해 작가의 각오가 엿보인다. 행초작품에서는 ‘반(半)’자를 가운데에 배치하여 남은 10리가 절반임을 되새겨 보려는 작가의 다짐이 읽혀진다. 그의 창작관은 100리길에서 50리가 아닌 90리를 절반으로 보려는 것으로 판단된다. 즉 작품제작은 반드시 신중하게 끝마무리를 잘 할 때 최선이 담긴다는 게 그의 작가의식으로 살펴진다.
게다가 전서로 쓴 작품 <동심(童心)>은 마음껏 뛰어노는 아이와 눈을 맞추려는 듯 세로로 긴 동(童)자의 왼쪽 상단 옆에 마음심(心)자를 붙여 썼다. 심(心)자의 아래 텅 빈 공간에 한글로 “순수함을 잃지 않은 마음”이라고 부연설명을 써 놓음으로써 작가 스스로 자신이 이제까지 학교현장에서 고수해왔던 마음가짐을 진솔하게 밝히고 있다. 문자의 분위기도 가식의 군더더기가 없이 아이들의 해맑은 미소처럼 청아하여 눈길을 거둘 수 없다.
다음, 작품의 내용과 문자의 형태미, 혹은 두 가지 이상의 서체미가 융합되어 시각적으로 상승효과를 낸다면 고차원의 서예미가 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서예작품을 감상 할 때 외적인 형태미가 먼저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즉, 움직임이 없는 듯 조용한 점획에서 비동하는 운필의 맛을 보고나면 적연부동(寂然不動)한 가운데서 뇌성벽력(雷聲霹靂)을 듣는 듯 하고, 차분하게 기세를 줄인 운필을 보고나면 눈 감고 줄 없는 거문고를 타는 듯한 분위기를 느끼게 된다. 이런 모든 운필효과나 서체미 융합이 바로 감상자의 심금을 울리는 서예미학적 성취임을 부인할 수 없을 터이다.
예컨대 소식(蘇軾)의 ‘증이방직탐매(贈李邦直探梅)’란 싯귀에 나오는 구절을 표현한 운파의 작품<심화애설(尋花愛雪)>을 보자. “꽃을 찾으려거든 목숨을 아끼지 말고, 눈을 사랑하였으면 얼어 죽을 각오를 하라[尋花不惜命 愛雪常忍凍]”는 구절에서 ‘애설(愛雪)’ 두 글자를 주제어와 같이 전서로 우측 상단에 크게 쓰고 좌측에는 8글자를 초서로 활달하게 휘호하여 서체융합을 도모하였다. 그런데 눈에 띄는 것은 전서로 쓴 ‘애설’도 행초의 운율로 휘호하여 작품 전반에 멈춰있는 정태미(靜態美)보다 움직임이 많은 동태미(動態美)가 두드러져 보이는 점이다. 행초서에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작가의 서예미감이 전서와 융합하여 새로운 풍격을 산생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아울러 당나라 한유의 “옛글을 본받되 그 정신을 본받아야지 그 표현을 본받아서는 안 된다[師其意不師其辭]”는 행초작품에서는 행서와 초서를 착종(錯綜)되게 휘호함으로써 거문고 현을 오가면서 연주하듯 운율에 맞춰 붓이 춤추고 있다. 형태미와 의경(意境)을 강조한 내용이 어울려 절묘하게 문질빈빈의 융합미가 발산되고 있다.
3. 자외구서(字外求書)의 신경(新境)
이렇게 행초서와 예서에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운파가 다양한 서체로 제작한 문자의 조형미를 융합한 작품들을 보노라면 작가의 창작의도에 동화되어 가슴이 따뜻해진다. 서예를 감상할 때 글자를 모르면 그냥 보이는 그대로 느끼면 되고, 글자를 알면 더 깊숙한 곳으로 생각의 추를 드리우고 여운을 퍼올리는 것도 하나의 감상법이다. 여기에 작가가 추구하는 맛과 그 작가만의 정체성까지 파악한다면 금상첨화일게다.
그러므로 자외구서(字外求書:글자 밖의 서예의 맛을 구함)를 추구하는 운파의 서예는 문장의 의미와 형태미의 조합, 내용과 어울리는 여러 서체와의 조합을 통해 서예의 신경(新境)을 열어가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는 문자가 지닌 추상의 개념을 확장하고, 서체 간, 혹은 서체와 재료 등과의 새로운 융합의 길을 찾고 시대미감을 수용하기 위해 영일(寧日)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기운생동’은 동아시아 서예미학의 최고의 가치기준이었다. 고대의 화려했던 서예의 외피를 걷어내고 이렇게 하나씩 시도해 나가다보면 현대인에게도 주목받는 무한한 신서예파동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평생의 동반자가 서예라는 운파의 예도에 행운이 있길 기원드린다.
2023. 7. 1.(679)
日損齋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