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독립국가를 약속한 카이로 회담
연합국의 조선 독립 약속은 어떤 상황에서 나온 것이었나?
제2차 세계대전 후 조선 독립에 대한 연합국의 약속은 1943년 11월의 카이로선언에서 출발했다. 그에 앞서 1941년 8월 영국과 미국이 작성한 대서양헌장에서 조선을 직접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민족자결주의를 옹호하는 연합국의 ‘원칙’을 천명함으로써 카이로선언의 배경이 되었다. 대서양헌장과 카이로선언이 나온 시점의 상황을 살펴봄으로써 헌장과 선언의 실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1941년 8월 14일 프린스 오브 웨일즈 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캐나다 뉴펀들랜드 섬의 플래신셔 만에 온 처칠 수상이 정박해 있던 미국 군함 오거스타 호로 옮겨 타 프랭클린 대통령과 만났다. 수상과 대통령으로서 첫 만남이었고 2년 전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첫 만남이기도 했다.
유럽을 휩쓰는 추축국의 위세 앞에 영국이 겨우겨우 버티고 있을 때였다. 독일이 그 동안 미뤄뒀던 소련 침공을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판단 아래 결행한 것이 달포 전의 일이었다. 소련은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 앞에 처참하게 밀리고 있었고, 영국에게는 의지할 만한 연합국이 없을 때였다. 미국은 영국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아직 참전하지 않고 있었다. 뉴펀들랜드 섬의 대서양회담은 영국이 미국의 참전을 간청하는 자리였다.
대서양헌장은 미국에 대한 영국의 항복문서였다. 피압박민족의 독립, 자원과 무역의 개방 등 연합국 전쟁 목적의 새로운 규정으로 영국이 식민제국으로서 기득권을 포기하는 고비였다. 미국 여론과 의회를 참전 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필요했던 영국의 양보였다. 옛 슈퍼파워 영국 대신 새 슈퍼파워 미국이 원하는 새로운 세계체제의 기본 원리가 대서양헌장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4개월 후 미국이 정식으로 참전했다. 참전의 직접 계기는 진주만 습격이었지만, 그 습격도 대서양헌장 발표 이후 미국의 영국 지원이 강화된 결과였다. 미국이 일본의 자원 획득 활동에 강한 압박을 가했기 때문에 미국과의 직접 대결을 회피하던 일본이 정면으로 달려들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2년 후 카이로회담과 테헤란회담이 열렸다. 소련과 미국의 참전 이후 추축국의 위세가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고 1943년 들어서는 연합국의 공세가 추축국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1943년 9월 이탈리아와의 정전협정은 연합국의 궁극적 승리를 점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 전쟁의 끝은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시점에서 미-영-중-소 연합국 정상회담이 열렸는데, 일본 문제를 다룬 11월의 카이로회담과는 일본과 교전하지 않고 있던 소련이 빠졌고, 독일 문제를 다룬 12월의 테헤란회담에는 중국이 빠졌다.
카이로회담의 조선 독립 약속에는 한편으로는 대서양헌장의 민족자결주의 실현이라는 뜻이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연합국의 전략적 의도가 담겨 있었다. 이탈리아 대부분 지역이 아직 독일군 장악 아래 있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의 추축국 이탈이 전세를 크게 유리하게 만들어준 최근의 경험이 있었다.
추축국의 내부 결속을 와해시키는 전략은 그 후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서도 성과를 거두는데, 조선 독립의 약속에는 같은 방식으로 일본제국의 결속력 약화를 노리는 목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