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윤의 미술치유] 위대한 짝다리 – 콘트라포스토(Contrapposto)
삶의 희로애락에 살짝 흐트러지는 그때
다비드상 미켈란젤로 1504년/thetrainline
20대 초반 군대에 막 입대했을 때, 신병이 하면 안 되는 세 가지 행동이 있었다. 입수 보행, 이빨 보이는 것 (웃는 것), 그리고 짝다리였다.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몰랐으나 이 행동을 하면 곧바로 ‘빠졌다’라는 핀잔을 듣곤 했다.
군기가 바짝 든 부동자세의 신병을 보면 고대 이집트 조각이 떠오른다. 이집트 예술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에는 강력한 원칙과 틀이 있었다. 당시 이집트 인들은 영원불멸한 내세를 꿈꾸었기에 미술에서 시각적 아름다움보단 완전한 도식과 형식에 몰두했다.
이집트 예술가들은 이름도 개성도 없이 정해진 룰을 충실히 따르기만 하면 되었다. 회화에서의 정면성의 원칙(눈과 가슴은 정면, 코와 발은 측면 묘사), 모눈종이에 갇힌 듯한 정적이고 수동적인 조각은 3천년 동안 큰 변화없이 절대 왕조 권력과 함께 유지된다.
기원전 5세기 시작된 혁명적 아름다움
이집트의 영향을 받은 그리스 조각은 기원전 5세기에 변혁을 꿈꾼다. 짝다리를 짚기 시작한 것이다. 이 포즈는 콘트라포스토(Contrapposto) 라 일컫는 미술사의 역사적 순간이다.
경직된 어깨와 허리의 평행이 주는 부자연스러운 대칭 대신 짝다리로 균형을 잡을 때 소위 S 라인이 생겨난다. 조각에 최초로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동작으로부터 역동성과 수줍음, 사랑과 용기, 유혹과 공포가 표현된다. 서양미술사에서 인간의 내면과 감정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얼굴의 표정이 아닌 짝다리로부터 시작된 무언의 몸짓을 통해서였다.
콘트라포스토는 그리스 조각의 특징인 드라마틱한 율동의 시발점이 되고 그리스 후기 헬레니즘 시대를 거쳐 훗날 르네상스 시대를 화려하게 수놓는다. 현대의 패션쇼에서도 이 짝다리의 아름다움은 여전히 유효하다.
틀에 갇힌 부동의 균형보다 역동적인 균형(dynamic balance)에서 신체의 아름다움은 빛을 발한다. 이성의 눈을 사로잡는 S자 몸매의 매력은 최근 심리학 연구에서도 증명되었다.
움직임은 리듬을 만들어내고 리듬은 생명을 나타낸다. 그리스 조각의 미학은 그 리듬이 만드는 인간의 자연스러움에 있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미술이 꿈꾼 영원불멸은 유한하며 찰나적인 움직임에 무관심할 수밖에 없었다.
고대 그리스 문화가 민주주의를 태동하고 중세 천년의 시간을 견디고 부활 – 르네상스(Renaissance) '다시(re)+태어남(naissance) - 하여 현재도 생명력을 갖는 이유는 이 짝다리와 무관하지 않다.
영원불멸의 꿈에서 벗어나 콘트라 포스트가 빚어내는 근육과 골격의 향연을 표현하는 예술가의 마음은 누구보다 현생을 찬양하고 긍정하지 않았을까. 클래식이 영원한 이유는 끊임없이 생동하는 삶의 아름다움이 시대를 넘어 인류의 공감을 얻어서가 아닐까.
멘카우레 (Menkaoure) 파라오의 조각상 기원전 2530년경/britannica
이집트인들의 내세와 영원, 불멸에 대한 강한 믿음은 특유의 찬란한 문화유산을 인류에게 안겨주었다. 그들에게 미술은 영원한 생명을 꿈꾸게 하고 짧고 허무한 삶을 잊게 하는 상징적 치유의 힘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죽은 자를 위한 예술’은 과거의 전설로 남아 우리는 박물관과 무덤을 통해서만 이집트의 옛꿈을 만날 것이다. 불멸의 영생을 꿈꾼 파라오의 미이라가 최초로 운송될 때 분류된 카테고리는 ‘건어물’이었다.
우리의 마음과 몸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인생의 갖가지 사건, 생각과 감정도 중력처럼 우리의 마음을 쉴 새 없이 끌어당긴다. 인간은 종잡을 수 없는 삶의 무대에서 퇴장하기 전까지 외줄을 탄다.
그러나 우리에겐 항상 균형을 잡으려는 마음 또한 존재한다. 어쩌면 우리 마음의 가장 아름다운 포즈도 긴장한 차려자세보단 삶의 희로애락에 살짝 흐트러지는 그때, 짝다리를 짚고 균형을 잡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순간에 나올지 모른다.
글 | 임성윤 교수
출처 : 마음건강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