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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2. 묵상글 ( 부활 제2주간 금요일. - 내가 아니어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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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2. 부활 제2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내가 아니어도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가말리엘은 사도들의 일을 그냥 내버려 두자고 합니다.
하지 말라는 데도 베드로와 사도들은 말을 듣지 않고 계속 복음을 선포하고,
많은 이들이 사도들을 따르자 이를 어떻게 할지 지도자들이 골머리를 앓는
상황에서 현명하고 존경받는 율법 학자 가말리엘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내버려 둔다는 것은 어떻게 되건 상관하지 않겠다는
한편으로는 방치의 의미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포기의 의미가 있습니다.
만약에 자식을 내버려 둔다면 그것은 자식을 사랑하고 존중함이 아니라
자식에 대한 사랑이 없거나 포기한 것 같은 느낌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자식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라고 충고해도 그러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내버려 두는 것이 사랑의 포기가 아닌가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때 저는 살짝 말을 바꿉니다.
내려놓으시라고.
이렇게 되면 자식을 내버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집착을 내려놓고,
나의 걱정을 내려놓고,
나의 요구를 내려놓고,
나의 고집을 내려놓고,
내 식(式) 대로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제 자식은 부모의 자식이 아닙니다.
자식의 인생은 자식이 살아가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하려고 붙잡고 있지 않은 겁니다.
Let them go.
그렇게 자식은 자식의 길을 가게 하는 겁니다.
이것이 현명한 인간의 길이라면
신앙의 길도 있습니다.
하느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나의 손에서 내려놓고 하느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어떻게든 하시게 하는 겁니다.
보잘것없는 나의 사랑과 능력으로 뭘 어떻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더 사랑하시고 더 능력이 있는 하느님께서 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보다 더 내 자식을 사랑하시는데 왜 내가 그렇게 걱정합니까?
하느님 자식인데 왜 내 자식이라고 생각하고 왜 그렇게 내어놓지 못합니까?
하느님 사랑과 능력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거나
하느님의 것을 내 것으로 소유하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많은 일도 그렇습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붙잡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내가 아니어도 할 사람이 많을 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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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2.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1코린 12장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체는 많지만 몸은 하나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이를 통해, 개인적으로 주어지는 모든 은사는 우선 공동체를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영적 체험을 했을 때, ‘공동체를 위해 하느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가?’라는 질문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어떤 자매님께서 자신의 신앙 체험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아주 신비로운 일입니다. 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이고 공동체성을 전혀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만나는 사람에게 모두 알리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공동체성보다는 자기를 알리려는 마음이 더 큰 것 같았습니다. 즉, 자신은 이렇게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놀라운 일이고 신비로운 일이지만, 이렇게 개인적인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병이 낫고, 마귀를 쫓아내고, 하느님의 천사가 나타나는 것 등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이미 요나의 기적보다 더 큰 표징은 없다고 말씀하셨듯이, 우리 마음의 변화 이상 큰 표징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관점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만을 믿으려고 합니다. 이를 통해 교만에 빠지게 되고, 마귀의 유혹을 받는 순간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신비는 모두 우리 공동체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공동체를 깨뜨리는 말과 행동을 하고 있다면, 하느님 신비에 반대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앙의 기준을 따져야 할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공동체성’입니다.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행하십니다.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통해서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은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습니다. 어떻습니까? 정말로 놀라운 기적이고 신비로운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이 기적만으로도 충분히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가 분명하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이런 움직임에 예수님의 반응은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그들이 당신이 보여주신 빵의 기적에서 의미하는 것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공동체를 위해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모두를 위해 내려질 때가 훨씬 많습니다. 그래서 늘 공동체를 강조하셨고, 공동체 안에서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공동체보다는 나만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데 집중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오히려 마귀의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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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을 할 수 있는 힘이 당신에게 있다(다윈 킹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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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2.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
<요한복음>에서는 기적 이야기를 “표징”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곧 오늘 이 이야기가 측은한 마음이 들어 자비를 베푸는 기적 이야기로가 아니라,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서 내어주는 “표징”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에서는 빵과 물고기를 제자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시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군중에게 나누어 주시면서”(요한 6,11) 당신 자신을 “빵을 주시는 분”으로 계시하시면서, 바로 당신 자신이 “생명의 빵”임을 표징으로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6,14)이심은 알아보지만, 여전히 “생명의 빵”으로 “자신을 내어주시는 분”으로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정치적, 민족적인 임금으로 삼고자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한 군중과 제자들을 피하여,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오늘 <복음>에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차이가 ‘모자람’과 ‘충만함’이라는 대조를 통해서 극렬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시험해보려고 필립보에게 물으셨습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
“빵”을 사야할 곳이 어디인지를 가르쳐주기 위함입니다. “빵”이신 당신 자신을 옆에 두고서 묻는 질문입니다. 곧 당신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시고자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질문은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일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서 빵을 구하고 있는가?
그런데 필립보는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질문과는 상관없이 양을 계산하고 ‘모자람’을 계산할 뿐, 빵을 사야 할 곳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안드레아도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고 말하지만, 역시 양을 계산하고 ‘모자람’뿐만 아니라 그것이 ‘소용없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는 그것을 “아이”가 가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가져서 부유하고 힘 있고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이가 아닌, 오히려 보호와 보살핌을 받아야 하고, 주는 것을 받아먹어야 하는 무능력하고 나약한 ‘아이’가 그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무력한 ‘아이’는 ‘예수님 자신’을 표상합니다. 사실, 그것은 제자들이 본 모자란 것이거나 소용없는 것이 아니라, ‘일곱 개’의 ‘충만함’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그야말로 모두가 먹고도 남는 “충만함”입니다. 남은 ‘열 두 광주리’는 ‘열두 지파’, ‘열 두 제자’에서 보듯이 하느님 백성 모두를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먹기에 충분한 빵이 이미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체성사의 “표징”을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빵”으로 건네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충만함’을, ‘사랑의 충만함’을 이미 얻습니다. 그러니, 그 안에서 감사와 찬양을 노래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나누어 질 때 우리는 진정 충만해 질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 6,9)
주님!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하찮게 여긴 저를 용서하소서.
비록 작은 것이라도 무가치하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이 저를 그러하듯, 값지고 소중하게 여기게 하소서.
가진 모든 것에 감사하게 하소서!
주님, 오늘 제 자신에 감사하고, 당신 사랑에 감사하고, 당신의 동행에 감사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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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2. 부활 제2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인간적인 계산을 내려놓아라
예수님께서는 많은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 보여 주신 표징은‘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이 먹고도 남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는 가능한 일입니다. 주님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먹고도 남았다’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면 이 이야기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먹고도 남았지만 결국은 때가 되면 또 배가 고플 것이고, 또 먹어야 하는데 그때마다 기적을 베풀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 안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필립보나 안드레아는 인간적인 계산에 밝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군중의 배고픔에 대해 걱정하실 때 필립보는“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안드레아는“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단순한 생각을 그대로 말한 것입니다. 계산이 밝아 주님의 능력은 생각하지 않았고 그분께서 지니신 권능을 몰라보았습니다.
주님의 권능을 믿을 것 같으면 ‘제가 가진 것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모두를 내놓으니, 나머지는 당신이 채워주십시오!’하면 됩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차고 넘치도록 베푸십니다. 예수님의 손 위에 모두를 내놓는 순간‘ 베풀면 베풀수록 베풀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하찮게 보일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에 대해 감사를 드렸고 나누었습니다. 필립보와 안드레아가 이백데나리온 이상의 세상적인 가치에 골몰해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논리로는 이해하지 못할 또 다른 세상의 가치를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손에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습니다. 주님께서는 차고 넘치도록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은총을 주시는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분으로부터 주어진 은총의 결과물에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막에서 당신을 따르던 군중의 배고픔을 면하게 하셨듯이 성체 안에서 계속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되십니다. 성체성사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선언하고 또한 부활을 선포합니다”(구엔 반 투안 주교). 빵의 기적은 미사 안에서 여전히 유효합니다.
“똥은 쌓아놓으면 냄새가 나지만 뿌려지면 거름이 됩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탈랜트, 시간, 재능, 물질 등 모두가 뿌려지면 선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찮고 의미 없어 보이는 것일지라도 먼저 주님께 감사를 드리고 내놓으면 풍요로워집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물질적인 결과물에 매여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라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것을 보면 그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습니다. 칭찬과 인정을 떠나셨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군중들을 피해 외로이 아버지 하느님 곁에 머물렀습니다. 예수님께서 홀로 있다는 것은 곧 ‘하느님 아버지와 같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늘 한적한 곳을 찾으시며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곧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계산을 모두 주님께 맡기고 그분의 권능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겨라.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잠언16,3).“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 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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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2.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91년 사제서품을 받고 33년이 지났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것들은 대부분 지금은 없거나, 다른 것들로 바꾸었습니다. 자동차는 르망, 엑셀, 아반테, 코란도, 소나타로 바뀌었습니다. 미국에 오면서 소나타는 필요한 분에게 주고 지금은 댈러스 한인 성당에서 마련해준 산타페를 타고 있습니다. 서품식에 축성 받았던 성작은 교구청에서 근무하면서 복음화 학교에 기증했습니다. 컴퓨터는 데스크 탑을 쓰다가, 2000년부터는 노트북으로 바꾸었습니다. 가볍고, 휴대하기에 편하기 때문에 노트북을 선호합니다. 지금은 노트북 3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제관에 하나는 집무실에 하나는 여행 갈 때 사용합니다. 노트북은 제게는 참 고마운 친구입니다. 생각을 정리할 수 있고, 정보를 검색할 수 있고, 강론을 준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핸드폰은 1995년부터 사용했습니다. 30년 동안 11개의 핸드폰을 사용했습니다. 책은 읽으면 원하는 사람에게 드리기도 하고, 대부분 놓고 왔습니다. 2번 이상 읽는 책은 성경 말고는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33년 동안 제 곁에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혹시 무엇인지 궁금하신가요? 서품식에서 입었던 ‘서품제의’입니다. 지금은 빛이 많이 바랬지만, ‘서품제의’ 만큼은 가지고 있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이 세상을 떠날 때 입고 갈 것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것들이 없거나 바뀌었듯이 저의 외모도 많이 변하였습니다. 예수님처럼 거룩하게 변모하면 좋겠지만 자연의 섭리에 따라서 조금씩 익어가고 있습니다. 염색을 했던 머리카락은 팬데믹을 지나면서 하얀 머리카락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백발의 머리카락이 자연스러워졌습니다. 2006년부터 안경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안경은 참 고마운 친구입니다. 흐릿하게 보이는 것들을 선명하게 볼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입니다. 33년 전의 모습을 앨범에서 보면 새 사제의 모습입니다. 열정과 패기는 있지만 멈춰야 할 때를 몰랐던 젊음이 보입니다. 지금 핸드폰에 저장된 모습을 보면 열정과 패기는 줄었지만 가야 할 때와 멈춰야 할 때를 구분하는 원숙함이 느껴집니다. 거룩한 변모는 아니지만 이 시간까지 이끌어 주신 주님의 은총과 사랑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33년 동안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혹시 무엇인지 궁금하신가요? 하느님께서 제게 숨을 불어 넣어주신 ‘마음’입니다. 때로는 유혹에 몹시 흔들리는 마음입니다. 욕심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려는 마음입니다. 물위를 걷던 베드로가 두려움 때문에 물속으로 빠져들었듯이, 두려움과 근심 때문에 지금의 기쁨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늘 그렇듯이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탁하며 나의 허물과 잘못까지도 품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오늘 백성에게 존경 받던 가말리엘이라는 율법학자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면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막을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면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막는 것은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도들은 하느님의 이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박해받는 것을 오히려 명예롭게 생각하고 기뻐하였습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라면 그 무엇도 막을 수 없으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하느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강력하게 다가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 질서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모든 이들의 욕망이라는 기름에 불을 붙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 욕망 때문에 전쟁과 폭력이 벌어지고, 그 욕망 때문에 더불어 살아가야 할 생명이 죽어가기도 합니다. 혹시 무엇인지 궁금하신가요? 저는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라고 생각합니다. 화려하고, 풍족하고, 원하는 것을 채울 수 있기에 영원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는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는 ‘좁은 문’은 아닙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두개의 깃발’을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깃발이고, 다른 하나는 사탄의 깃발입니다. 신앙인들은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은 나눔과 헌신입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은 겸손과 인내입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은 섬김과 상생입니다. 그 깃발 아래 있으면 보리떡 다섯 개로 5천명이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습니다. 사탄의 깃발아래 있으면 모두가 먹고도 충분히 남을 보리떡이 있어도 10억 명은 굶주림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깃발’아래 모이는 것입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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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2. 부활 제2주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은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많은 강론과 강의의 주재료로 사용됩니다. 그렇게 복음과 주님에 대한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자리 잡은 사람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눠주셨다.’라고 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다른 부분의 내용들에 비하면 그리 대수롭지 않은 대목이라 여길 수 있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 그것을 축성하며 기도하신 모습, 먹고 남은 열두 광주리, 사람들이 주님을 왕으로 모시려는 모습들…. 이런 부분들에 비하며 초라한 한 줄이 바로 원하는 대로 나눠주셨다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리 잡은 사람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눠주셨다는 대목은 참으로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자리 잡아야 합니다. 그분 앞에 자리 잡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실천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대로 주실 것입니다.
주님 앞에 자리 잡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는 등을 돌리고 있거나 마주 보고 있어도 다른 생각으로 그분의 말에 귀 기울이지 못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우리에게 물어보세요.
나는 정말 주님 앞에 자리 잡고 있는지 말입니다. 혹은 등 돌리거나, 다른 곳을 보거나, 보면서도 다른 생각으로 그분 말씀을 듣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주님 앞에 자리 잡으십시오. 그러면 원하는 대로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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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햇살
이른 아침
오늘은 유난히 아침 햇살이 밝습니다.
블라인드를 걷고
창을 열었습니다.
아직 찬 공기가 기다렸다는 듯이 밀고 들어옵니다.
빛과 함께 말입니다.
그 순간 보였습니다. 빛을 통해 보였습니다.
공기중에 떠 있는 먼지들이 보였습니다.
이전에도 이미 있었던 그 먼지가
빛이 비치는 순간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빛.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빛은
우리 주위에 있는, 우리가 보지 못한 먼지를 보게 합니다.
차고 신선한 공기와 함께 그 먼지를 날려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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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2.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분별력의 지혜
-자비와 지혜의 주님-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시편27,1)
예수님은 하느님의 화신이며 현존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자비하시고 지혜로우신 하느님의 모습이 환히 드러납니다. 시편성무일도시 시편136장 1-26절까지 매절 후렴마다 흥겹게 반복되는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라는 말마디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바로 이런 자비에서 자연스럽게 샘솟는 지혜요 자비와 지혜는 함께 갑니다. 새삼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하느님 자비와 지혜의 화신인 파스카 예수님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무엇보다 ‘분별력의 지혜’에서 주님의 지혜는 빛을 발합니다. 성 베네딕도 역시 분별력의 지혜를 모든 덕의 어머니라 칭하며 아빠스의 최고의 자질로 일컫고 있습니다. 아빠스뿐 아니라 공동체의 지도자는 물론 믿는 모든 이들에게 참 필수적 자질이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성규 64장에서는 베네딕도의 중용사상을 대표하는 분별력의 지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자기의 명령에 있어서는 용의주도하고 깊이 생각할 것이며, 그 명령이 하느님께 관계되는 일이든 아니면 세속에 관계되는 일이든, 분별있고 절도있어야 할 것이니, ‘만일 내가 내 양의 무리를 심하게 몰아 지치게 하면 모두 하루에 죽어 버릴 것이다’ 하신 성조 야곱의 분별력을 생각할 것이다.
이 밖에도, 모든 덕행들의 어머니인 분별력의 다른 증언들을 거울삼아, 모든 것을 절도있게 하여, 강한 사람은 갈구하는 바를 행하게 하고, 약한 사람은 물러나지 않게 할 것이다.”(성규64,17-19)
놀랍게도 1500년전 성 베네딕도의 분별력의 지혜에 관한 주옥같은 말씀입니다. 얼마나 디테일에 강한 중용의 지혜를 지닌 ‘분별력과 절도’의 장상이어야 하는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바로 이런 분별력의 지혜를 지닌 분이, 분별력의 대가가 우리 파스카의 예수님입니다.
오늘 복음의 오천명을 배불리 먹이신 빵의 기적을 통해, 성체성사가 얼마나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요 주님 자비와 지혜의 결정체인지 깨닫게 됩니다. 정말 성체성사의 은혜를 깊이 깨달아 갈수록 주님을 닮아 자비와 지혜의 인물이 될 것입니다.
오늘 성체성사를 상징하는 복음의 빵의 기적이야기중 두 대목에서 주님의 분별력의 지혜가 빛을 발합니다. 바로 지나쳐버리기 쉬운 한 작은 아이의 봉헌입니다. 시몬 베드로의 동생인 안드레아가 시큰둥하게 말할 때, 분별력의 지혜로 빛나는 주도면밀한 우리 주님이 이를 놓칠리 없습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태의 본질을 파악한 주님의 신속한 반응입니다.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말그대로 오병이어의 기적이요, 작은 아이의 전적 봉헌을 기초로 하여 일어난 기적입니다. 작은 아이의 나눔과 섬김의 전적 봉헌에 감동하신 주님이요 군중들이었을 것이고, 이에 감동하여 저마다 먹을 것을 지닌 이들이 부끄러움을 느껴 가진 것을 모두 봉헌하여 나눴을 것이니 바로 이것이 기적의 본질입니다.
사실 복음의 작은 아이처럼 자기가 지닌 모든 것을 나눠 섬길 때 세상에 굶주리는 이들은 모두 사라지는 기적이 발생할 것입니다. 새삼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가진 것을 모두 봉헌하는 아이의 나눔과 섬김의 자세로 미사에 참여해야 함을 배우고 깨닫습니다. 아마도 미사를 통해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최종 목표도 여기 나눔과 섬김에 있음을 봅니다. 또 하나 주님의 분별력의 지혜가 빛을 대하는 대목은 후반부에 나옵니다.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에 놀란 군중은 “이분이 세상에 오시기로한 예언자다” 착각하고 억지로 모셔다가 자기들의 임금으로 삼으려 합니다. 광야에서 유혹했던 악마의 재차 침입이요, 이들의 속셈을 간파한 주님은 이들의 환호와 욕망에 유혹되어 영합하지 않고 단호히 이들을 떠나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갑니다. 주님의 분별력의 지혜가 절정의 빛을 발합니다. 공성이불거(功成而弗居), 공을 이루었으면 그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는 노자의 지혜를 연상케 하는 대목입니다.
이런 분별력의 지혜는 제1독서 사도행전의 가말리엘에게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사도들의 용기있는 발언에 격분한 이들이 사도들을 죽이려 할 때, 바로 온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율법교사로서 가말리엘이라는 바리사이가 분연히 일어나서 개입합니다. 말그대로 명불허전(名不虛傳), 가말리엘은 분별력의 지혜를 발휘함으로 이들의 혼란을 잠재운채 참 평화롭게 끝냅니다.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이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은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얼마나 멋진 분별력의 지혜가 발휘된 처방의 조언인지요! 때로 확신이 서지 않을 때, 상황이 잘 파악되지 않을 때는 잠시 하느님께 맡기고 때를 기다리며 “1.건들이지 말고, 2.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공동생활의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아주 오래전 염추기경님이 여기서 피정할 때, “여기 있으니 건들이는 사람이 없어서 좋아, 그냥 내버려 두어 좋아...”하던 두 말마디를 잊지 못합니다.
‘정직은 최고의 정책’이요, ‘정직은 가장 오랜 간다’는 말마디 역시 정직이 지혜임을 말해 줍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지혜의 본질을 알려 줍니다.
“근본이 서면 사람이 모이고, 말단을 추구하면 사람은 흩어진다. 사람을 모으면 세상을 얻는다.”
다산의 말씀이요, 근본을 세우는 것이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덕은 근본이고 재물은 말단이다.”
대학에 나오는 말마디로, 덕을 추구함이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자비하시고 지혜로우신 분입니다. 하느님의 화신인 자비와 지혜의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자비하고 지혜로운 삶이요 날마다의 주님의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자비와 지혜의 사람으로, 분별력의 지혜를 지닌 사람으로 변모시켜 줍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시편27,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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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2.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벗님들 자리>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요한 6,10)
사랑하는
벗님들
곁에 있으니
내 안에
자리 잡게 해야지요
볼품없는
벗님들
곁에 있으니
나의 눈길 안에
자리 잡게 해야지요
비틀거리는
벗님들
곁에 있으니
나의 손길 안에
자리 잡게 해야지요
쓰러진
벗님들
곁에 있으니
나의 발길 안에
자리 잡게 해야지요
외로운
벗님들
곁에 있으니
나의 품 안에
자리 잡게 해야지요
죽어가는
벗님들
곁에 있으니
나의 삶 안에
자리 잡게 해야지요
사랑하는
벗님들
곁에 있으니
내 안에
자리 잡게 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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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2. 부활 제2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요한 6,5-6)
약한 믿음
약한 믿음은 가장 나쁜 병이며 가장 나쁜 악입니다. 하느님께서 행하시거나 약속하시는 일은 그냥 믿읍시다. 우리가 능력이 없어 어떤 일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일을 어떻게 이루시는지 알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을 하느님께 돌려서는 안 됩니다. …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은 연구가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히는 것입니다. 믿는 이는 칭찬받지만 의심하는 이는 죄가 없지 않습니다. 구원자께서도 이에 관해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지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요한 3,18).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5 만물이 존재의 평등을 공유하고 있다
이것은 “생명 자체의 힘”과 “만물에게 힘을 주는” 평등에 대한 탁월한 증언이다. 이 증언으로 엑카르트는 만물의 평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고 있다. 만물이 평등한 까닭은 그들이 하느님, 곧 존재의 신성한 원 안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엑카르트의 이 이야기를 한 젊은 목사와 함께 나눈 적이 있다. 그가 답례로 해 준 이야기는 이렇다: 그 부부는 살인 사건이 일어난 집을 아주 싼값에 장만했다고 한다. 그 집에 입주한 첫날 밤에 그들은 두려움과 기분 나쁜 느낌 때문에 방에서 잠을 청할 수 없었다. 마침내, 그들은 밖으로 나가 자신들의 어린 아기를 안고 와서 자신들 사이에 뉘었다. 그러고 나서야 그들은 그날 밤은 물론이고 그 이후로도 잠을 푹 잘 수 있었다. 아기가 그들과 그들의 새집에 복을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이토록 생명 자체는 고귀하고, 기쁨으로 가득 차 있고, 강력하다.(152)
✝️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요한 크리소스토모
세례는 새로운 창조
여러분은 이 사건이 참으로 하나의 새로운 창조인 것을 봅니까?
하느님의 은총은 이 사람들을 이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내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은총은 이들의 본질을 다르게 만들지는 않았지만 이들의 의지를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은총은 또한 영적인 눈으로 하여금 참된 실제를 바라보아 앞으로는 더 이상 심판대에 떨어지지 않도록 합니다. 마치 눈에서 가시를 뽑아낸 것처럼 이 세상을 바로 볼 수 있게 되어 올바른 것을 정확하게 바라봅니다. 은총은 추잡한 모습을 한 악을 버리고 아름답고 영광된 선을 바라보게 합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날마다 새로운 창조를 해 나가시는 것을 이해했습니까? 여러분은 자신이 살아온 일생동안 돌과 나무를 신으로 알고 기도하고 섬겨 왔던 사람들이 갑자기 변하여 돌을 돌로, 나무를 나무로 보게 되었고, 이제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창조주로 섬기면서 그분께만 기도하도록 변화시킨 분이 하느님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인지 말해주시겠습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참된 행위를 해 나가기로 작심하는 것이 어찌하여 새로운 창조인지 이제 이해하겠습니까? 저는 이미 오래 전에 세례를 받은 사람들과 이제 막 세례를 받은 여러분 모두가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을 경청하기를 바랍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2코린 5,17).
이전 것을 모두 잊어버립시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시민과 같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시다. 우리 안에 사시는 분의 품위에 맞도록 말하고 행동합시다.(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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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2. 부활 제2주간 금요일.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가말리엘은 당대 최고의 학자였습니다.
실제로 유다 라삐들의 문헌에서도 그는 당시 학파의 중심인물로 거론되고 있고, 바오로도 그에게서 공부한 것을 자랑스러워할 만큼(사도 22,3 참조) 뛰어난 학자였습니다.
그런 가말리엘이 경고합니다.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이 표현에서 그는 사람의 일과 하느님의 일을 구분합니다.
도대체 평범한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구분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이 그 답을 알려 줍니다.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는 군중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 많은 군중이 먹을 것을 어디에서 구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등장합니다.
누가 보아도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는 안드레아의 반문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연약하고 터무니없이 작은 것들, 그래서 남들에게 쉽게 무시당하고 간과되는 것들을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작은 것에서 시작하시어 거대한 결과를 이루시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일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독서에서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라고 합니다.
모욕당하고 이해받지 못하지만 묵묵히 일하는 것이 예수님의 방식이었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길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비로소 자신들도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과 그 방법에 가까워졌음을 깨닫고 기뻐합니다.
무시와 경멸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리 소모적인 체험만은 아닙니다.
작고 보잘것없으며 쉽게 무시되는 것들로써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하시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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