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90
11월30일[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연중 제34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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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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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kBxMIczz6A8
[서울대교구 고태경 마태오 신부님 집전(가락동 본당 보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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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고기보다 사람을 낚읍시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저를 불러주셨는데, 바닷가에 산다는 핑계로 너무 사람보다 고기를 더 많이 낚아 송구한 마음이 드는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원래 안드레아는 형 시몬과 함께 갈릴래아 호수를 배경으로 고기잡이를 하며 생계를 꾸려가던
전문직 어부였습니다. 그러나 안드레아는 여느 여부와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보통 어부들의 삶은 특별한 것이 없었습니다. 물때가 좋고 운이 좋아 고기가 많이 잡히면 그것을 팔아 한 며칠 신나게 놀기도 했겠지요. 안개라도 자욱이 끼여 조업이 불가능한 날은 삼삼오오 둘러앉아 술로 하루를 지냈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들, 마음에 들지 않는 정치지도자들 안주삼아 독주도 많이 마셨습니다.
그러나 안드레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의 내면은 영적생활을 향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의 피 안에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 모세와 다윗의 전통과 신앙이 힘차게 맴돌고 있었습니다. 그의 시선은 임박한 메시아의 도래에 초점이 맞춰져있었습니다.
안드레아는 자신의 신앙을 좀 더 성숙시켜나가려는 의지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영적생활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려는 의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런 안드레아 앞에 나타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입니다. 안드레아는 깊은 광야에서 자신의 내면을 열심히 갈고 닦던 세례자 요한의 모습에서 참 구도자로서의 모델을 찾았습니다.
안드레아는 세상 사람들 눈치 보지 않고, 그릇된 권력 앞에 혈혈단신으로 당당히 맞서던 세례자 요한을 자신의 정신적 지주, 멘토로 삼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때가 지나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가 도래하자 세례자 요한은 안드레아를 예수님께로 안내합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본 세례자 요한은 지체없이 안드레아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이는 이제 나의 때가 지나가고 예수님의 때가 도래했으니 저분을 따라가라는 표현이었습니다. 안드레아는 세례자 요한의 말을 듣고 지체없이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지도에 힘입어 영적인 눈이 이미 많이 트여있었던 안드레아는 즉시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확신합니다. 한 걸음에 자기 형 시몬을 찾아간 안드레아는 이렇게 외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이름 안드레아의 의미는 ‘사내다움’ 혹은 ‘용기’입니다. 용기 있게 세례자 요한을 스승으로 모셨던 안드레아, 사내답게 예수님을 따라나선 안드레아는 형 시몬과는 성격이 판이하였습니다.
단순하고, 과격하고, 급하고, 다혈질적이었던 형 시몬에 비해 안드레아는 성실하고 온건하며
신중한 성격의 인물이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안드레아는 그리스 북부 지방의 에피루스에서 선교하였습니다. 안드레아는 70년경 로마 황제 네로의 대대적인 박해 때 아카이아에서 체포되어 X자 형태의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안드레아는 자신이 매달릴 십자가로 X자형 십자가를 선택했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어로 X는
그리스도의 첫 글자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안드레아에 관해 정말 놀라운 이야기가 한 가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안드레아는 십자가에 매달린 이후 꽤 오랫동안 죽지 않고 매달려있었습니다.
이틀간 매달려있었는데, 그 순간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겠습니까? 그러나 안드레아는 십자가 위에서도 복음 선포 활동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십자가 주변에 둘러서있는 군중들을 향해 설교를 계속했답니다.
이를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었던 적대자들은 안드레아를 십자가에서 끌어내렸는데, 그 순간 하늘에서 한 줄기 강한 빛이 안드레아를 오랫동안 감쌌답니다. 그 강렬한 빛 한가운데 안드레아는 숨을 거두었다는군요.
임종하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사람 낚는 어부로 살고자 노력했던 안드레아, 그리스도의 향기였던 안드레아 사도의 삶과 신앙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 신앙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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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jZfiNNPHr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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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죽을 때 밝혀진다>
오늘은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성 안드레아는 서기 60년경 그리스 파트라스에서 엑스(X) 십자가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십자가에 못 박힐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통적인 십자가 대신에 X자 모양의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이 십자가는 ‘성 안드레아의 십자가’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의 순교 기록에 따르면 그는 못 박히지 않고 십자가에 묶여 며칠 동안 매달려 있었다고 합니다. 이 기간에 그는 주변에 모인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전파했습니다. 그러한 극한 상황에서도 그가 인내하고 계속해서 전파한 것은 그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헌신의 증거로 여겨집니다.
성 안드레아는 마치 다리와 같은 중간 역할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사도가 되어 형 베드로를 예수님께 인도하였습니다. 그리고 5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하실 때는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를 예수님께 인도하였습니다. 이를 한마디로 하면 ‘선교’라 할 수 있습니다.
선교는 자신 깊숙이 있는 하느님의 존재를 꺼내 보여 주어 그도 그분과 친교를 맺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꺼내주는 방식은 나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십자가의 죽음으로 아버지를 우리에게 소개해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아버지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볼 수 있었습니다.
영화 ‘히치’(2005)에서 윌 스미스는 뉴욕시의 전문 데이트 컨설턴트인 알렉스 히치의 역을 맡았습니다. 히치는 남성이 관심 있는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올바른 행동을 하도록 돕는 전문가입니다.
그의 최근 고객은 앨버트로 유명인 알레그라에 반했습니다. 앨버트를 돕는 동안 히치는 가십 칼럼니스트 사라를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알렉스는 전문가답게 사라를 꼬시고 사라는 쉽게 넘어옵니다. 그런데 사라는 자신의 칼럼에 쓰기 위해 신비한 데이트 컨설턴트를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앨버트는 히치의 조언으로 불가능할 것 같았던 알레그라와 데이트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라가 자신이 사귀게 된 히치가 여자 꼬시는 법을 알려주는 사람인 것을 알고는 크게 분노합니다. 그리고 이 사실이 알레그라의 귀에도 들어가 알렉스가 그 사람의 코치를 받고 자기에게 접근한 것을 알게 됩니다. 졸지에 알렉스와 앨버트는 여자들에게 차입니다.
앨버트는 이제 다음 단계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렉스에게 묻습니다. 자신의 진심을 믿어주지 않는 사라에게 화가 잔뜩 난 알렉스는 이제 끝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랑에 진심이었던 앨버트는 알렉스에게 결국엔 기술만 가르쳤지 진짜 사랑을 모르는 겁쟁이라고 말하고 알레그라를 찾아갑니다.
앨버트의 진심에 감동한 알렉스도 사라를 찾아가 용서를 청하고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러자 두 여자는 두 남자의 진심을 받아주어 두 커플이 동시에 결혼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알렉스는 사랑을 이뤄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리가 되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어야 할 때 그에게서는 자존심이 나왔지, 사랑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무엇이든 죽어갈 때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마음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기술이 아닙니다. 자신 안에 간직한 보석입니다.
보석함이 썩거나 불에 타면 무엇이 나올까요? 보석이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죽을 때에도 주님을 보여 주고 전할 수 있다면 그분이 나의 보석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가치를 아는 이에게 당신 자신을 내어주십니다. 그러니 성 안드레아처럼 죽을 때에도 주님을 전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평생 무엇을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기고 살아왔는지가 증명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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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우리말의 어원을 배우는 것은 유익하고 재미있습니다. ‘문지방에 앉지 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도 어려서 어른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유는 몰랐지만 어른들이 그렇게 말하니 따랐습니다. 며칠 전에 그 의미를 들었습니다. 문지방은 ‘경계선’이라고 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 선과 악의 경계, 빛과 어둠의 경계, 적과 친구의 경계, 안과 밖의 경계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 경계는 ‘금기’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낙원’을 주셨습니다. 그 낙원에는 하나의 금기가 있었습니다. ‘선악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다른 것들은 다 가져도 되지만 선악과는 만지거나,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떠나는 롯에게도 ‘뒤’를 돌아보지 말하고 하셨습니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면서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신학생 때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신학생들은 방학이 되기 전에 9일 동안 ‘오 예수’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라틴어로 된 노래입니다. 가사의 일부 중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신학생들은 혼돈의 경계에 있어서는 안 되고 질서의 경계 안에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신학생들은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신학생 때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오 예수’의 가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오 예수님, 내 사랑이신 예수님/ 나 당신을 온전히 사랑하오니/ 당신에서나 이 신학교에서나 떠나있지 않으렵니다./ 가장 사랑하올 예수님 우리를 지키고 보살펴 주십시오./ 신학교 밖에서 세속, 마귀, 육신이 흉악한 괴물처럼/ 우리를 공격하며 거룩한 이곳에서 끌어내리려 합니다./ 가장 사랑하올 예수님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살펴 주십시오./ 그러나 예수님, 당신께서는 저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대의 것들을 더욱 사랑한다면/ 그대는 나에게 합당하지 않고 내 제자가 아니리라./ 가장 사랑하올 예수님 우리를 지키고 보살펴 주십시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진실히 너희에게 말하노니 아무도 하늘나라의 사람이 아니니라./ 가장 사랑하올 예수님 우리를 지키고 보살펴 주십시오./ 또한 그대들은 불리움과 뽑히움을 확실하게 하도록 힘쓸 것이며/ 죄에서 떠나 있으라.” 사실 신학생 때는 이 노래의 가사를 깊이 묵상하지 않았습니다. 이 노래가 끝나면 신나는 방학이 기다리고 있다는 설렘과 기쁨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주님의 품에 확실하게 있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주님께서 정하신 ‘선’을 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오늘은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전임 서울대교구 교구장이셨던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님의 축일이기도 합니다. 저는 감사하게도 추기경님과 8년 동안 교구청에서 지낼 수 있었습니다. 추기경님은 소탈하시고, 검소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사제들의 이야기를 경청해 주셨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이 높은 산과 같았다면, 정진석 추기경님이 자상한 어머니 같았다면 염수정 추기경님은 언제나 푹 쉴 수 있는 동네의 느티나무 같았습니다. 추기경님과 많은 일화가 있지만 기억나는 것 하나만 나누고 싶습니다. 7층짜리 건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관리국장 신부님은 그 건물을 은퇴사제 숙소로 사용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청소년 국장 신부님은 청년사목 사제들의 숙소로 사용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성소국장이었던 저는 예비 신학생들 위한 기숙사로 사용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추기경님과 산보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저는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추기경님! 그 건물을 과거의 사목을 위해 투자하실 건지요? 추기경님! 그 건물을 현재를 위한 사목에 투자하실 건지요? 추기경님! 그 건물을 미래를 위한 사목에 투자하시겠습니까?” 추기경님께서는 저의 이야기를 경청해 주셨고, 그 건물은 예비 신학생들을 위한 기숙사가 되었습니다. 그 건물은 예비 신학생들을 위한 못자리가 되었고, 그 학생들이 교구의 사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라고 하셨습니다. 첫 번째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혼돈의 선에서 질서의 선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물도 버리고, 배도 버리고, 가족들도 뒤로한 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들 또한 혼돈의 선을 넘어 주님의 품으로 넘어가면 좋겠습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 갰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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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4,18-22: 즉시 그물을 버리고 그분을 따랐다.
안드레아는 남성적이라는 뜻으로 친절하고 항상 준비되어 있고 열린 마음을 가진, 열심한 사람으로 나타난다. 전승에 의하면 안드레아 사도는 자신의 사도직을 그리스와 소아시아에서 폈다고 전하고 있다. 전승에 의하면 사도는 소위 성 안드레아의 십자가라는 X형으로 된 십자가 위에서 Patrasso에서 순교하였다고 한다. 바오로 6세 교황은 성 베드로 성당에 보관되어 있던 안드레아 사도의 유해를 동방 교회에 되돌려 주었고, 후에 Patrasso로 옮겼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고 계시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자마자 곧바로 그물을 버렸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즉각적인 순종을 바라신다. 그러면 이 가난한 두 어부가 버렸으면 무엇을 얼마나 많이 버렸겠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사람의 재산보다도 그 마음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사람은 많은 것을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와 안드레아가 탐내는 마음과 무엇을 소유하려는 마음을 버렸을 때, 그들은 많은 것을 버린 것이다. 그 버림을 얼마나 큰마음으로 이루었느냐이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19절). 이 말씀을 따라 어부들은 하늘의 아버지를 얻기 위해 세상의 아버지를 떠났다. 세속적인 낚시에서 거룩한 낚시로 바뀌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물고기를 낚듯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깊은 오류의 바다에서 사람들을 낚도록 부르셨다. 그리고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세상,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며 누구에게도 안전하지 않은 세상에서 그들이 하느님 말씀의 그물로 사람을 잡도록 사도로 삼으셨다.
사도들은 즉시 그물을 버리고 주님을 따름으로써 주님의 제자로서 살면서 결국은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20)하고 자신 있게 말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른 사람들의 복음선포는 은총 체험을 통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들은 한창 일하던 중이었지만, 미루거나 꾸물거리지 않았다.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20.22절) 하느님의 뜻 앞에는 한 치도 망설임을 허용하지 않으시는 모습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는 어떻게 응답을 드리며 살고 있는지, 듣기는 하면서도 실천을 올바로 하면서 그분을 따르는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우리도 지금, 이 순간에 하느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우리의 생각과 고정관념을 모두 버리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자꾸 뒤를 돌아다보는 생활을 하지나 않는지 살펴보고 주님 앞에 나의 자세를 올바로 가져야 할 것이다. 좀 더 우리의 삶의 자세를 하느님 안에 이어가게 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기심, 교만 그리고 집착을 피하면서 주님의 부르심에 언제나 응답을 드리며 실천할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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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에 교회는 ‘믿음과 선포’의 의미를 묵상합니다. 마태오 복음서에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응답하는 장면이 간략히 소개되지만, 요한 복음서에서는 좀 더 자세히 설명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아가 먼저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형 베드로에게 와서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라고 전합니다(요한 1,40-41 참조). 안드레아는 세례자 요한의 믿음 선포로 예수님을 만난 뒤 그분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안드레아는 베드로에게 믿음을 전하며 주님을 믿도록 초대합니다.
한편 제1독서에서 바오로는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무엇을 믿으려면 먼저 믿음의 내용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무엇인지도 모른 채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것은 참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듣지 않고는 아무도 믿을 수 없는데, 선포의 대상은 늘 그리스도의 말씀인 복음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복음을 선포하고 믿음을 전할 때, 그리스도의 말씀을 선포하여야 할 사명이 주어집니다. 사사로운 자신의 생각이나 정치적 견해, 영화나 드라마 줄거리, 날씨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과 교회의 공적인 믿음의 내용을 전하는 것이 무엇보다 먼저입니다. 그런데 가장 탁월한 복음화의 방법은 일상 속 삶과 실천으로 솔선수범하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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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무엇을 찾느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마태 4,18-22)
“나를 따라오너라.”는 “나의 제자가 되어라.”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라는 말씀은, “내가 너희를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 ‘사도’로 삼겠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사람을 낚는다.”라는 말은, “물속에서 물 밖으로 사람을 꺼낸다.”, 즉 “죽음 속에 있는 사람들을 건져내서 그들에게 생명을 준다.”라는 뜻입니다. <제자로 부르신 사람들의 직업이 어부였기 때문에, 그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우선 먼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어야 하는데, 사도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이미 그분을 믿는 신앙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이며 사도가 될 사람들을 신앙인들 가운데에서 특별히 따로 뽑으셨고, 부르셨습니다.>
사도들이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자기 자신을 낚는 일’이었습니다. 사도들 자신들이 ‘구원받은 상태’가 되어 있어야, 또는 ‘구원의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어야’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활동 초기에 사도들을 가르치는 일에 집중하신 것은 그들을 훈련시키고 준비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도들이 본격적으로 사도로서 일하기 시작한 때는 ‘모든 것’을 배운 뒤에, 또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 승천을 체험하고 나서, 그리고 성령을 받은 다음부터입니다. 그 전까지는 훈련 기간, 또는 준비 기간이었습니다. 이 말은,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됩니다.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고 해서 곧바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훈련 기간과 준비 기간을 충분히 거쳐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이야기할 때, 나는 여러분을 영적이 아니라 육적인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젖만 먹였을 뿐 단단한 음식은 먹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지금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1코린 3,1-2)
신앙생활 기간이 길다고 자동적으로 성숙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각자 본인이 성숙해지려고 스스로 꾸준히 노력해야 합니다. 준비가 덜 된 사람이, 또는 교리 지식이 아직 부족한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무엇인가를 하려다가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오로 사도 자신의 경우를 보면,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곧바로 사도가 되어서 활동한 것이 아니라, 아라비아 사막에서 삼 년 동안 지낸 뒤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갈라 1,17) <그는 그 삼 년 동안, 기도하고 묵상하고 교리 공부를 하면서 지냈을 것입니다. 즉 사도로서 일할 준비를 했을 것입니다.>
‘첫 제자들이 부르심을 받은 이야기’는 요한복음 1장에 있는 이야기와 합해서 읽어야 합니다.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그곳에 다시 서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요한 1,35-40)
여기서 “무엇을 찾느냐?”라는 말씀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사도들이 이 질문에 직접 대답했다면, 그 대답은 “저희를 구원하실 메시아를 찾습니다.”, 또는 “구원을 찾습니다.”였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에게로 보낸 것은, 자신은 제자들이 원하는 ‘구원’을 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 표현하면, 세례자 요한에게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세례자 요한을 떠나서 예수님에게로 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와서 보아라.”라는 말씀과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라는 말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서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 전체를 보고 믿었음을 나타냅니다. <물론 그날 밤에 함께 묵으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 대화를 통해서, 또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예수님이 자기들이 찾던 메시아라고 믿었을 텐데, 그래도 역시 직접 체험한 ‘예수님의 삶’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희망’은 누구에게나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무엇을 찾는가?(원하는가?)에 따라서 인생의 방향이 바뀝니다. 지금 우리는(나는) 무엇을 찾고 있는가? 예수님께서 주시는 그것을 얻기를 정말로 희망하고 있는가? 희망한다면, 그것을 얻으려고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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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을 맞아 ‘믿음과 선포’라는 주제를 묵상합니다.>
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고 응답하는 장면이 소개되는데,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어부였습니다. 요한 복음서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아가 먼저 예수님을 만나고, 베드로에게 와서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라고 전합니다.(1,40-41 참조)
안드레아는 세례자 요한의 믿음 선포로 예수님을 만난 뒤 그분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안드레아는 베드로에게 믿음을 전하며 주님을 믿도록 초대합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무엇을 믿으려면 먼저 믿음의 내용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무엇인지 모르는 채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것은 참신앙이 아닙니다. 이처럼 듣지 않고서는 아무도 믿을 수 없는데, 선포의 내용은 늘 그리스도의 말씀인 복음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은 복음을 선포하고 믿음을 전할 때, 그리스도의 말씀을 선포해야 할 사명이 주어집니다. 사사로운 내 생각이나 견해가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과 교회 공동체의 공적인 믿음의 내용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믿음을 전해 준 신앙의 선조들에게 감사하며, 우리도 후손들에게 믿음을 전하고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런데 가장 탁월한 복음화의 방법은 삶과 실천으로 모범을 보이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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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은 교회 전례력으로 2019년 다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마침 성 안드레아 사도의 축일로 한 해를 마무리하게 되었네요. 파견과 선포로 이어지는 교회의 사명을 다시 한번 기억하며 새해를 맞이할 준비를 합시다.
오늘 복음의 부르심 기사는 참 담백합니다. 군더더기가 전혀 없이 간결한 언어로 이어집니다. 부르시는 분이나 부르심 받는 이들의 심리 묘사도 부연 설명도 없이 착착 진행됩니다. 너무 간결해 건조해 보이지만 덕분에 모호함 없이 명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시다가"(마태 4,18)
그러고 보니 예수님은 혼자셨네요. 오늘은 특히 호숫가를 지나시는 예수님이 "홀로"이셨음이 눈에, 그리고 가슴에 들어왔습니다. 그분은 세례를 받고 성령에 이끌려 들어간 광야에서 목숨을 건 단식 여정을 거치신 뒤 갈릴래아에서 전도를 시작하셨지요. 그렇게 얼마간 그분은 혼자셨을 겁니다.
성 삼위 하느님과 일치 안에 계시는 그분께는 홀로이심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비록 인성을 입으셨으나 홀로 충만하고 완전하신 분이니까요. 하지만 그 충만한 사랑을 나누고, 다가올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널리 선포하기 위해서 함께할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바로 오늘이 그 역사적 순간이지요.
"그들은 어부였다"(마태 4,18).
예수님께서 어망을 던지고 있는 두 사람을 보십니다. 어부들입니다. 다른 이들, 좀 더 학식 있는 세도가의 전도유망한 젊은이를 원하셨다면 성전이나 회당 근처에 가셨겠지요.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은 현장에서 땀 흘려 노동하며 일상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처럼 특별할 것 없이 일상 안에 움직이는 우리를 "보시고"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9)
예수님은 상대방의 일상성을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인정하고 존중하십니다. 어부들에게 '힘들게 그러고 살지 말고 다른 일을 하자'고 꾀시는 게 아니라, 어부로서 자질과 경험을 살려 진짜 어부로 함께하자고 손을 내미신 겁니다.
언젠가 낚시를 좋아하는 지인에게 "낚시는 운에 달렸는지 기술에 달렸는지" 물은 적이 있습니다. 내심, '물고기가 와야 미끼를 무는 거니까 순전히 운에 달린 게 아닐까' 선입견을 품고 물은 건데 의외의 답이 돌아왔습니다. 운도 필요하지만 결국은 기술이라고요. 다가감, 집중력, 인내, 아주 미세한 움직임도 알아차리는 섬세함과 민감함, 최적의 순간을 포착해 낚아챔, 밀고 당김, 힘 조절….
어부의 일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협력하는 모든 일과 노동에는 나름대로 영성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걸 발견하면 일상이 새롭고 경이로운 영성의 장이 되고, 간과하고 무시하면 지루하고 피곤한 소모적 일터일 뿐이겠지요.
"그물, 배, 아버지"(마태 4,20.22)
부르심을 받은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곧바로" 버린 목록입니다. "그물"은 생계 유지의 직접적 도구이고, "배"는 그보다 좀 더 규모 있고 다방면으로 활용할 수 있는 운송 수단도 되는데 둘 다 세상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가족을 부양하며 자기를 성장시키는데 필요한 자산들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혈연으로 묶인 일차적 가족관계입니다.
이 모두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은 세상 원리와 혈연에 집착하는 삶을 초월하겠다는 결단입니다. 지상 원리에 자신을 묶기보다 천상 원리에 속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하고요.
당시 한창 노동 중이던 그들이 그 순간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하느님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으로서의 정체성과 역사 인식을 소홀히 하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일 겁니다. 해방자 메시아의 출현과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열망하고 꿈꾸면서 일상에 충실히 몸담던 중이었을 겁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교회의 본질인 선교 사명의 원리를 들려줍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
먼저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로부터 파견되어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하느님의 뜻을 말씀과 행동으로 전하십니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선포는 듣는 이의 귀뿐만 아니라 마음도 울립니다. 가르침과 기적뿐 아니라, 그분의 수난과 죽음까지도 선포의 일환이었기 때문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5)
이 선포를 들은 이는 믿게 됩니다. 말씀이신 성자와 그분이 이루신 하느님 나라를 믿습니다.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로서 친히 희생되신 구원자 메시아이심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가 받아들인 말씀이 목 끝까지 차올라 이를 선포하러 달려나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온 존재로 들은 말씀이 그의 심장에서 타오르기 때문에 그를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로마 10,10)
그의 믿음과 고백이 울려퍼지면, 들은 누군가의 귀와 마음에서 또 다른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가 충실히 채워오던 일상의 자리에서 그 선포를 껴안고 믿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그 믿음을 고백하러 또 달려나갈 것입니다. 이렇듯 구원의 고리는 파견과 선포와 믿음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일상을 채워가는 가운데 믿고 듣고 파견되고 고백합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세례와 함께 성령의 인장을 받은 우리는 존재 전체로 그렇게 살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의 정체성과 실존을 무시하지 않고 함께 끌어안으셨기에, 우리는 온 존재로 주님께 받아들여졌고, 그래서 우리의 선포는 온 존재로 이루어집니다.
"말도 없고 이야기도 없으며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고 그 말은 땅끝까지 번져 나가네."(화답송)
그러니 말주변이 없다고 숫기가 없다고 움츠러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입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눈빛, 미소, 손짓, 말투, 움직임, 관심, 기도, 눈물과 한숨에서도 전달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을 맞아 주님의 충실한 제자이고 사도인 여러분을 축하합니다. 지난 한 해 수고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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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렛선교수도회 박재형 미카엘 신부님]
예수님을 따르는 이 여정을 끝까지 걷고 싶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마태오 복음 4장 18-22절)
<예수님을 따름>
“나를 따라오너라.”(마태 4,19) 하신 예수님의 초대에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이 제자로 따라나섭니다. 게다가 이전까지 생계 수단이었을 그물과 배는 물론 가족마저 버려두고 그분을 따릅니다. 이런 그들의 응답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도전과 영감을 줍니다. 하지만 이렇게 용감하게 예수님을 따라나섰다고 해서, 그 순간 모든 것이 다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베드로는 자기 안위를 염려한 나머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신했고(마태 26,69-75) 안드레아는 오천 명을 먹인 기적에 앞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무슨 소용이 있겠냐며 안 좋은 상황에 금세 실망하기도 했습니다.(요한 6,8-9)
또 제베대오의 아들들이었던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양 옆자리에 앉고 싶은 인간적인 야심을 드러내기도 했었지요(마르 10,37). 하지만 예수님과의 여정을 통해 이들은 교회의 반석으로, 순교자로, 마지막까지 십자가 아래에 서 있는 제자로 변모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같은 여정으로 초대받았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에 의지하여 매 순간 회개하고 주님을 따르는 그 여정 말입니다. 열두 사도 가운데 가장 먼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던 안드레아 사도의 전구를 청하며, 이 멋진 여정을 우리도 기쁘고 담대하게 걸어가기로 다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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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따름으로써 주님의 사람이 됩니다>
축일을 맞이한 분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리며 주님의 은총을 기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처음부터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른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기꺼이 따름으로써 큰 믿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온전히 따르려니까 자기의 모든 것을 버려야 했고 마침내 버림으로써 주님을 얻게 되었습니다.
익숙해진 자리를 떠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안주하지 않고 도전할 때 새로운 것을 얻게 됩니다. 새로운 삶의 시작은 단지 마음과 행동의 변화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주님을 따름으로써 이루어집니다.
과거에 매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때 할 새 일을 만날 수 있고 또 그 안에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마음의 문을 열면 주님은 거기 계십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시몬 베드로와 형제지간입니다. 특별히 요한과 길을 걷다가 예수님을 만난 일이 있는데 그는 곧장 집으로 달려가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1,41)하며 형에게 말하고, 형을 예수님께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에게도 소개하였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요한6,8-9)를 가진 아이를 예수님께 데려간 사람도 안드레아입니다. 그는 혼자만 메시아를 따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소개하는 열성을 보였습니다.
그는 보고 들은 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의 생활에 참여함으로써 삶의 쇄신과 회개를 가져오게 됩니다. 안드레아는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하신 주님의 말씀을 듣고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삶의 자리에서 우리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며 “나를 따라오너라” 하십니다. 따르고 안 따르고는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따르는 사람에게는 새 삶이 열려있습니다.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이 그물이나 배, 아니면 가족? 일지라도 단호하게 버리고 주님 안에 머물면 그 모든 것이 주님의 것으로 넘치도록 채워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의 나라를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먼저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따름으로서 완전한 주님의 사람이 됩니다.
일상 안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과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끊임없이 대립합니다. 그러나 그 선택에 따라서 주님의 제자가 되기도 하고 세상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버릴 것은 확실히 버릴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안드레아가 형에게 자기가 만난 주님을 알렸듯이 주님의 체험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하셨으니, 무엇보다도 모범과 행실로써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름으로써 믿음을 견고케 하듯이 믿음이 약한 이들이 우리를 보고믿음을 새롭게 할 수 있다면 주님께서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큰 나무는 잘 부러지지 않고 큰 강물은 소리를 내지 않으며 깊은 샘물은 마르지 않는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많은 사람이 모인답니다. 예수님이 크신 분이셨듯이, 모두가 큰사람 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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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하느님의 부르심에 우리는 응답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고 있을까요? 하느님의 부르심이 무엇인지도 몰라서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자기가 늘 하던 것의 범주 내에서만 우리는 기도합니다. 그러다 보니 그 범주에서 벗어나는 부르심을 받아들이기가 힘듭니다. 복음에서도 그런 장면이 나오지요. 부자 청년의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돈 많은 풍요라는 자기 범주 안에서 주님을 따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은 그렇지 않았지요. 주님께서는 자기 범주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즉, 자기가 늘 하던 범주라는 틀에서 벗어나야 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자기 범주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제대로 따를 수 있었습니다. 나보다 주님이 더 중요한 사람만이 제대로 응답할 수 있는 주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무조건 지키고 남는 여력으로만 주님의 부르심을 따르겠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의 부르심을 온전하게 따르는 것은 너무나 어렵고 힘든 것입니다.
자기에게 급한 어떤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도와주면 빠르게 일을 마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친한 친구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부탁했습니다. 자기의 모든 일을 제쳐두고 나의 어려움에 함께하는 친구가 좋습니까? 아니면 자기 일 먼저 하고 나서 여력이 되면 도와주겠다고 말하는 친구가 좋습니까? 이처럼 주님의 부르심에 우리는 과연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과연 나의 응답을 통해 주님과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오늘 우리는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을 지냅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베드로 사도의 동생으로, 복음에도 나오듯이 형 베드로와 함께 고기잡이하는 어부였습니다. 그날도 이 두 형제는 호수에서 어망을 던지고 있었지요.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9)
이번 달 초에 사목회장님을 새롭게 뽑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조언을 들어서 사목회장님 하시면 괜찮겠다고 생각되는 분에게 사목회장을 맡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솔직히 거절하시면 어떻게 설득할까도 고심했습니다. 하지만 저의 기우였습니다. 이분께서는 “네, 알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조금도 망설임 없이 그물을 버리고 따랐던 제자들의 모습에 주님께서도 얼마나 기쁘셨을까요? 지금도 우리에게는 그분의 부르심이 다양한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내 일이 먼저라고 하면서 그 부르심을 뒤로 미루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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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부르심과 따름>
마태오 4,18-22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부르심과 따름>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오 4,19)
있었던 나를
알고 계시거늘
있는 나를
바라보시며
있어야 할 나로
늘 부르시니
있었던 나에
부끄러워하거나
있는 나에
머물지 않고
있어야 할 나로
늘 따라 나서네
했던 나를
알고 계시거늘
하는 나를
바라보시며
해야 할 나로
늘 부르시니
했던 나에
부끄러워하거나
하는 나에
머물지 않고
해야 할 나로
늘 따라 나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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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4등 안드레아?>
공관복음에서 안드레아 사도는 저평가된 분입니다. 형 베드로는 주님 교회의 반석이 되었지만 그는 같이 첫 제자였으면서도 그리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지요.
그리고 주님의 중요한 순간들, 곧 타볼산의 거룩한 변모 때와 죽은 소녀를 살리실 때와 겟세마니에서 피땀 흘리며 기도하실 때 주님께서는 첫 제자들 가운데형 베드로와 제베데오의 두 아들은 동반하시고 안드레만 빼놓으셨지요.
그렇다면 그것은 안드레아가 4등 안드레아였다는 표시이거나 안드레아가 아예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는 표시가 아닐까요?
물론 주님께서 그러셨을 리 없을 테지만 그렇더라도 안드레아가 인간적으로는 자신만 주님 사랑 밖에 있다고 느끼지 않았을까요?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제베데오의 두 아들이 베드로를 제치고 주님 좌우에 앉으려고 하자 다른 제자들이 불쾌해했다고 하는데 이때 안드레아만 예외였을 리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주님 사랑에서 자기는 밀렸다고 인간적으로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공관복음의 안드레아는 존재감이 별로 없지만, 그러나 요한복음의 안드레아는 제법 중요한 존재입니다.
스승 세례자 요한과 함께 오실 메시아를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고, 지나가는 주님을 세례자 요한이 가리키며 메시아임을 알려주자 주님을 따라가 주님이 계신 곳을 보고는 형을 주님께 데려갑니다.
그러니까 안드레아는 제일 먼저 주님을 따른 존재요, 형을 주님께 인도하고 천거한 존재인데, 이런 면모는 요한복음에서 두 번 더 발견됩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주님을 찾아왔을 때 그들을 주님께 데려가고, 빵의 기적 때 오병이어를 가진 아이를 주님께 데려가 만나게 합니다.
그리고 이밖에는 요한복음에서도 안드레아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4등의 존재로 있고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는 존재인 것이 실은 안드레아가 자기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저는 오늘 이런 존재와 이런 사랑을 돋을새김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제가 이렇게 없는 듯 있는 사람이지 못하고, 존재감 없이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안드레아처럼 소리 없이 대단한 사랑을 하지 않고, 빈 깡통처럼 요란한 사랑을 제가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에 비해 존재와 존재가 만나게 하고, 사랑이 사랑을 만나게 하는 안드레아의 사랑은 얼마나 대단합니까?
아무튼, 4등으로라도 늘 주님과 함께 있는 것, 두드러진 활약은 못하더라도 사람들을 주님과 만나게 하는 것, 이것이 실은 겸손이 밑받침된 대단한 내공의 사랑이라는 것을 안드레아 사도를 통해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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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마태4,20)
<사도직 사명!>
오늘 복음(마태4,18-22)은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와 제베대오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9)
그러자 어부 네 사람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것도 추호의 머뭇거림도 없이, '곧바로' 자신들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그물과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예수님께서 '평범한 어부를'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나를' 부르십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베드로의 동생인 '안드레아 사도를 기억하는 축일'입니다.
사도(使徒)는 '어떤 임무를 부여받고 파견된 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사도에게 주어진 사명이 바로 '사람을 낚는 복음 선포의 사명'입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 사도직 사명에 충실하다가 예수님처럼 십자가 위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오늘 독서(로마10,9-18)는 '기쁜 소식(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발'인 '사도직 사명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다.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4-15.17)
이것이 바로 복음 선포의 사명이 주어진 이들이 갖추고 있어야 할 모습, 곧 내가 먼저 믿고, 내가 먼저 듣고, 내가 먼저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로마10,18)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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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vKeGZ6B4Q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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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마태 4, 20)
부르심이
곧 목적이
되고 따름이
곧 소명이
됩니다.
우리의
현실 안에서
살아 숨쉬는
생명의
복음을 듣습니다.
생명의 복음은
더 나은
행복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생명의
복음을 듣는
모든 순간이
은총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전의 삶과는
판이하게 다른
삶이 펼쳐집니다.
자기를 버리는
것이 자기를
살리는 삶입니다.
부르심과
따름의
본질이란
예수님과
함께하는
일상이
본질입니다.
만들어가시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간절하신 마음
큰 사랑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 큰 사랑에
보답하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의 진실되고
바른 마음입니다.
저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면서
하나의 길을
예수님과 함께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최고의 가치
절대적인
의미이며
가장 참된
생명의 길인
복음의 길을
우리는 걸어가고
있습니다.
성 안드레아의
따름은 우리의
따름이기도 합니다.
이미 가장 좋으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길에서
하느님과 함께
행복을 여는
기쁨의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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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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