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16일(금)
* 시작 기도
주님...
주께서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또한 그가 살아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계심과 같이 우리 역시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기며 살게 하소서(롬 6:10-11).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인데 어찌하여 나는 이리도 죄에 대하여 꿈틀대며 반응을 하는지 그저 이런 내가 너무나 미울 뿐입니다.
이런 나를 공의로 심판하여 지옥 한 가운데 던진다 한들 아무런 할 말이 없습니다.
주의 심판은 언제나 의로우며 옳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오니 이 하루도 주의 은혜로 나를 장악하여 주옵소서.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주님의 긍휼입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십자가의 보혈 아래 들어갑니다.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이렇게 나는 죽고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약할 때 강함되시는 주만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왕하 23:31-24:7
제목 : 여호아하스, 여호야김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31 여호와하스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23세라. 예루살렘에서 석 달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하무달이라. 립나 예레미야의 딸이더라.
32 여호아하스가 그의 조상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니
33 바로 느고가 그를 하맛 땅 립나에 가두어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지 못하게 하고 또 그 나라로 은 100달란트와 금 한 달란트를 벌금으로 내게 하고
34 바로 느고가 요시야의 아들 엘리아김을 그의 아버지 요시야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고 그의 이름을 고쳐 여호야김이라 하고 여호아하스는 애굽으로 잡아갔더니 그가 거기서 죽으니라.
35 여호야김이 은과 금을 바로에게 주니라. 그가 바로 느고의 명령대로 그에게 그 돈을 주기 위하여 나라에 부과하되 백성들 각 사람의 힘대로 액수를 정하고 은금을 징수하였더라.
36 여호야김이 왕이 될 때에 나이가 25세라. 예루살렘에서 11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스비다라. 루마 브다야의 딸이더라.
37 여호야김이 그의 조상들이 행한 모든 일을 따라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24:1 여호야김 시대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올라오매 여호야김이 3년간 섬기다가 돌아서 그를 배반하였더니
2 여호와께서 그의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갈대아의 부대와 아람의 부대와 모압의 부대와 암몬 자손의 부대를 여호야김에게로 보내 유다를 쳐 멸하려 하시니
3 이 일이 유다에 임함은 곧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들을 자기 앞에서 물리치고자 하심이니 이는 므낫세의 지은 모든 죄 때문이며
4 또 그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그의 피가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사하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시니라.
5 여호야김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6 여호야김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7 애굽 왕이 다시는 그 나라에서 나오지 못하였으니 이는 바벨론 왕이 애굽 강에서부터 유브라데 강까지 애굽 왕에게 속한 땅을 다 점령하였음이더라.
* 나의 묵상
요시야 왕은 오랜 가뭄 끝에 단비와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정말 시원하게 해 드린 왕이었으며 그 밑에서 자란 왕자들은 정말 복 받은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요시야 왕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며 나라를 통치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나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며 또한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할지를 배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을 평가하는 성경의 단 한 줄은 조상의 길을 따라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는 것이 전부다.
여호아하스가 그랬고, 여호야김이 그러했으며, 또한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가 그러했다.
여호아하스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붙드셨다’이다.
엘리야김의 뜻은 ‘여호와께서 세우신다’이나 그의 이름을 애굽 왕 바로 느고가 여호야김으로 바꿔버렸다.
요시야의 아들이자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의 본명은 맛다니야로써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의 선물’이다.
그런데 바벨론 왕이 그 이름을 시드기야로 바꾼 것이다.
이들의 아버지 요시야는 왕자들이 한결같이 여호와 하나님을 잘 섬기며 그분의 말씀에 쉐마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왕자들의 이름을 지었을 것이며 또한 그렇게 교육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또한 한결같이 아버지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들의 뜻대로 살다가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침략한 왕들의 뜻에 의해 이름까지 개명당하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물론 이처럼 유다가 멸망하게 된 데는 이들의 할아버지 므낫세의 영향이 크다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말씀과 훈육을 잘 받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쉐마를 했다면 적어도 그들 당대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쉐마하지 않는 불순종은 멸망을 앞당기는 단초임을 오늘 본문은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그 후로 단 한 번도 자신의 뜻대로 행하지 않고 오직 창세전 아버지에게서 보고 들은 것을 행하시고 또한 전하셨다.
(요 12:49-50)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
(요 6: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도 철저히 아버지의 뜻을 따라 복종하여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셨다.
(요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아들은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이후 이 땅에서만 아버지의 말씀에 복종하신 것이 아니다.
그는 창세전 만물 위의 세계에서도 아버지의 말씀에 복종하여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셨다.
(요 17: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아들은 아버지와 철저하게 복종과 사랑의 존재법으로 관계하시며 거하셨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무조건 받은 것이 아니라 복종하므로 사랑을 받으셨다.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창세전의 세계에서나 성육신 하신 이 땅에서의 삶에서나 모두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복종하여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신 것이다.
이 법칙은 영원한 불변의 진리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상위 권위에게는 복종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내가 상위권이가 되었을 때 받을 것은 무조건 받으려고 하는 악한 습성이 있다.
이것은 도둑놈 심보다.
세상에 존재하는 둘 이상의 공동체 안에는 반드시 권위와 질서가 있다.
이 권위와 질서 안에서 복종과 사랑의 존재법으로 관계할 때에만 義가 세워지고 그 의는 화평을 가져온다.
이 때 이루어지는 화평만이 진정한 평화인 것이다.
나는 이 땅의 상위 권위에 복종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최고의 권위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복종하지 않던 자였다.
부교역자로 사역하면서 나는 얼마나 자기주장의지에 빠져 있었는지 모른다.
사역을 잘 하고 그 열매가 많이 맺힌다는 그 이유로 나의 마음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었다.
그것은 철저히 내가 한 것이었다.
나이가 들어서 신학을 시작하였기 때문에 내가 교회에서 사역을 할 때 다른 부교역자들은 비록 나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신학교 선배들이요 또한 교회 사역의 선배들이다.
그런데 나는 그들을 항상 아래로 보았다.
물론 겉으로는 선배 대접을 했지만, 나의 속마음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내가 비록 신학은 늦게 했지만, 내가 사회에서 고생할 때 자기들은 온실의 화초처럼 대접받으면서 지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였다.
그리고 사역도 내가 잘 하고 사역의 열매도 내가 훨씬 많고 교회에서 인정도 내가 더 많이 받고 있잖아, 라는 생각이 항상 날 붙들었다.
이뿐 아니라 때로는 교회 안에서 최고 권위인 담임목사님도 무시할 때가 있었다.
설교가 길다고, 설교 할 때는 마치 국어선생 같다고, 추진력이 없다고 하면서 내 안에서 끊임없이 담임목사님을 향한 불평어린 마음들이 솟구쳐 나왔다.
나를 인정해주시는 담임목사님께 대하여 나는 딴 마음을 품고 마음으로 그를 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나의 모습은 주님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주님께서 세워주신 권위와 질서 앞에서 나는 나 잘난 맛으로 살았고 사역하고 행했던 것이다.
이런 나는 정말 죽기에만 합당한 자이다.
사역하면서 이런 일에 대하여 나의 마음이 좀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큰 문제라고 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사실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보신다.
수가성 여인에게 말씀하실 때도 사실과 진실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네가 사실 남편이 다섯이 있었고 지금도 하나가 있다. 그러나 네가 남편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진리(진실)다”(요 4:18).
아무리 내가, 생각하고 행하는 일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주님이 말씀하시는 진리가 아니면 그것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사실(the fact)은 볼 줄 알면서 진리(the truth)는 볼 줄 모르는 소경이었던 것이다.
육신의 눈은 떴으나 영적인 눈 곧 영안은 닫혀진 영적 소경에 다름 아니었다.
이는 결국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하는 것이요, 주님의 권위를 무시하는 처사이다.
이런 나에게 복음이 들어왔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상황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사실을 진리로 깨닫게 되었다.
내가 비록 손해를 볼지라도 그 손해는 하나님의 이끌어 가시는 보이지 않는 손길임을 알게 된 것이다.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 당하는 그 자리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
우리는 죽음을 비참함으로 여긴다.
그러나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은 스데반집사를 죽게 하는 것이었다.
그 하나님의 행동하심에 스데반이 순종할 때 그 자리에 아버지의 영광이 나타난 것이다.
복음을 통하여 생각의 주체가 ‘나’에서 ‘주님’으로 바뀌었다.
내게 고난이 올지라도 그 고난은 주님의 뜻을 이루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이제는 기쁨으로 그 고난을 수용한다.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키며 아들의 생명을 주어 신분을 바꿔버리는 능력이 있다.
마귀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바꾼다.
죄 짓는 것에서 짜릿함을 즐기던 자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며 쉐마하는 일에 참 기쁨을 누린다.
말씀을 멀리하던 자가 말씀을 사랑하여 가까이 한다.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여 영적 교제를 통하여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한다.
나에게는 여전히 세상의 온갖 정욕과 탐심이 나를 부르고 유혹한다.
루터가 말한 것처럼 새가 내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것은 내가 어찌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새가 내 머리에 앉아서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
거친 광야에서 살아내야 하는 것처럼 노마드처럼 오늘 나는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말씀으로 무장하여 영적 노마드로 나아간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나가는 내게 주의 영이 함께 하심을 믿는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주의 영으로 나를 붙들어 주심을 감사하나이다.
주를 찬양하는 내 영의 입술이 복되게 하소서.
벌거벗은 몸으로 왔으니 벌거벗은 자로 돌아가는 나를 주님의 품에서 순전하게 하소서.
세상에서 얻은 온갖 존재물들이 나를 포장하는 무화과 잎이 되어 참 내가 아닌 포장된 내가 되었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 모든 존재물을 벗나이다.
주님 안에서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순전한 아들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내 뜻이 아닌 주님의 뜻에 복종하여 주의 사랑 안에 거하는 아들이 되게 하소서.
나의 살점 하나, 세포 하나, 핏방울 한 방울이라도 주님의 뜻을 거역하며,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 있다면 잘라내 버리고, 쏟아 버리게 하소서.
오직 순종하여 주의 사랑 안에 거하는 순종쟁이가 되게 하소서.
말씀 안에서 주의 영광을 보나이다.
오늘 주님의 임재 가운데 주의 영광을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오나 높은 자리에 앉기보다 십자가 아래 서게 하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은혜의 자리에 머물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