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서울에서 6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나 이화고녀와 이화여전 문과,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미국 램버스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미국 스카릿 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를 졸업했으며, 미국 노스이스턴 대학과 워시본 대학, 코럴릿지배티스트대학, 일본 아오야마가쿠인대학 등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한여자청년단, 여성문제연구회, YWCA연합회, 한국여성단체협의회를 비롯해 많은 단체에서 가족법 개정 운동, 축첩 정치인 반대 운동, 혼인신고 하기 등의 여성운동 및 사회운동에 일생을 바쳐 일했다.
특히 여성 문제와 함께 아이들과 노인, 장애인 등 소외된 사람들이 겪는 빈곤과 인권 문제는 항상 그의 관심과 활동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왔다. 이런 노고를 바탕으로 한국 인권을 위한 북미연합 ‘1984년도 인권상’과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이 해의 탁월한 여성상’을 비롯하여 많은 상을 수상했다.
1952년 당시 여성계 지도자였던 황신덕·박순천·이태영과 함께 여성문제연구원을 창립했다. 고인은 이 연구원의 상임간사를 맡아 여성들의 인권을 지키고 지위를 높이는 일에 몰두했다. 여성문제연구원은 뒤에 여성문제연구회로 이름을 바꾸어 꾸준히 활동을 계속했고, 고인은 초대 회장 황신덕에 이어 1964년부터 1971년까지 2대 회장을 맡았다. 여성문제연구원이 시작한 남녀차별 철폐운동은 1989년 가족법 개정으로 이어졌다. 가족법 개정으로 여성은 남편이나 아들에 종속된 상태에서 벗어나 마침내 남성과 동등한 권리 주체가 됐다.
전쟁이 끝난 뒤 고인은 오래 꿈꾸었던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54년부터 4년 동안 미국 테네시주 램버스대학과 스캐릿대학에서 사회학 석사과정을 밟았다. 미국 감리교회의 장학금을 받았지만 생활비가 부족했던 고인은 방학 때면 공장에서 일하며 학비를 벌었다. 1958년 차별받는 흑인공동체 문제에 관한 현장연구로 석사학위를 받고 서른여섯에 귀국했다. 모교인 이화여대에서 사회학 강사 생활을 시작한 고인은 1958년 겨울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YWCA)연합회 총무로 발탁됐다. 이 단체의 총무로 있던 4년 동안 고인은 전국의 와이더블유시에이 조직을 돌면서 여성 권리 쟁취를 위한 운동의 선봉에 섰다.
고인의 투철한 남녀평등관은 정치인 김대중의 여성관을 바꾸는 데도 큰 기여를 했다. 김대중은 “내가 나름대로 페미니스트적인 관점과 행동을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내의 조언 덕이었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결혼 직후 대문 옆에 ‘이희호’·‘김대중’ 문패를 나란히 단 것도 아내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였음을 훗날 김대중의 고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첫댓글 글 잘 읽었어 고마워
존경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정말 멋지신 분.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여성 인권을 위한 투쟁에 앞장서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성 인권 신장 그리고 민주주의 정신을 본받겠습니다.
정말 시대를 살다 가신 분
명복을 빕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편히 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