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영은 택배상자에 적힌 이름을 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이내 보고 있던 상자를 보조석에 대충 던져놓고 차키를 꽂아 시동을 건다. 무릎위에 수첩을 펼쳐놓고 그 위에 적혀있는 번호를 눈으로 빠르게 훑는다. 핸드폰을 꺼내 빠르게 번호를 누른 뒤 왼쪽 턱과 어깨사이에 핸드폰을 받쳐놓고 운전대를 능숙하게 잡는 준영.
“아 네 택밴데요, 30분 있다가 도착할 거 같은데 집에 계세요?” ‘아뇨. 소화전에 넣어주세요’ “아 네 그럼 문자 보내주세요. 어떻게 보내야 되는지 아시죠?”
뚝- 순간 성의 없이 끊어져버린 전화에 기가 찬 얼굴의 준영이 핸드폰을 바라보며 궁시렁거렸다.
“아나.. 이 싸가지 없는 새끼가 매번 말할 때마다 지멋데로 끊고 지랄이야, 확”
띠링- 핸드폰에 주먹질을 하려던 찰나, 제 몸을 반짝이며 도착한 문자 하나.
[동신아파트 104동 1002호 이서진입니다. 제가 외출중이니 1002호 옆 소화전에 택배 넣어주세요. 택배사에 책임 안 묻겠습니다.]
“이 새끼 언제 한번 면상 마주치기만 해봐라 확 조져버릴라”
푹 눌러 쓰고 있던 모자를 보조석 택배상자 위로 던져버리는 준영. 운전석 창문을 내리고 스팀 받은 머리에 시원한 바람을 쏘인다. 신나는 음악이라도 들어야겠다 생각했는데 MP3베터리는 low라고 나와있고.. 라디오 주파수를 아무리 맞춰 봐도 영 신나는 스타일의 노래는 안 나오는지 한참을 돌려보다가 그냥 꺼버린다. 열린 창문 바깥으로 팔을 걸치고 길게 숨을 내쉬는 준영.
“이노무 신호는 매번 나 올 때 마다 빨간불이여 안 그래도 춘곤증 때문에 잠 와 죽겄는디”
하품을 늘어지게 하고 있는데 초록불로 바뀌는 신호. 오 이제 출발하자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전혀 꿈쩍도 안 하는 바로 앞 흰색 쏘나타 한대.
“뭐야 저건”
클락션을 빵빵- 터져라 눌러보지만 여전히 꿈쩍도 안 하는 흰색 쏘나타.
“이런 샹. 안 그래도 오늘 물건 밀려 죽겠는데 별 쓸데없는 곳에서 다 막히고 지랄이네.”
주먹으로 클락션을 신나게 내리치며 빵빵빵-!하니 그제서야 조금씩 나아가는 쏘나타. 준영은 '진작 그럴것이지'라고 중얼거리며 다시 엑셀을 밟으려는데 찔끔-가더니 제자리에 다시 멈춰버리는 쏘나타. 그 덕분에 준영의 트럭도 찔-끔 움직이다가 제 자리에 다시 멈춰서버린다.
“뭐야 저거 초보야?”
초보딱지도 없이 깨끗하기만 한 쏘나타가 찔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가 다시 그대로 멈춰서버린다. 준영이 답답해서 다시 클락션을 누르려는 찰나, 준영의 뒷차에서 먼저 미친듯이 울려대는 다른 차의 클락션. 금세 창문을 열고 직장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도로위에서 다 토하듯이 내뱉는 욕들에 순간 시끄러워진 도로. 백밀러로 바라보니 욕을 하던 차들이 끼어들기로 차선을 바꾸며 쏘나타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가는 것이 보인다.
“에이 샹”
준영도 차선을 바꾸려고 운전대를 잡으려는 찰나, 앞으로 찔끔찔끔 나아가던 쏘나타가 뜬금없이 자신의 트럭을 향해 후진하기 시작했다.
“어, 어??”
당황한 준영이 급히 백밀러를 통해 후방을 바라보며 차선을 바꿔 탄 차들 덕분에 비어있는 도로를 확인한다. 쏘나타와 부딪히지 않기 위해 일정간격을 두고 후진을 시도하는 준영. 준영이 탄 트럭이 후진하는 것을 보고 급 차선을 변경해 움직이는 차들이 창문을 내리고 하나같이 준영을 향해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야 이 개새끼야 거기서 후진을 하면 어떻게 해 죽고싶냐!!!” “운전 똑바로 해 이 개새끼야!!!”
내가 잘 못 한것도 아닌데...라면서도 왠지 눈치가 보여 고개를 낮춰 버리는 준영. 소란스러운 소음들과 함께 차들이 빠른 속도로 지나가버리고, 순간 조용해진 도로 위. 잠시 눈치 보다가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니 말썽을 피우던 초보 쏘나타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뭐지? 나 낚인건가...허탈함에 쌍시옷을 내뱉으며 생각나는 욕이란 욕은 다 지껄이던 준영. 보조석 서랍에서 담배갑을 꺼내 한개피를 물고 운전대를 움직이며 불을 찾는데...라이타가 없어졌다.
“에이썅. 마가 꼈네...마가꼈어”
담배를 잘근 깨물다가 보조석 의자에 푸 하고 뱉어버리는 준영. 뚫리는 신호를 따라 거침없이 차선을 바꿔가며 엄청난 속도로 달리기 시작한다.
“번호라도 외워둘걸 아 미친 개초보 쏘나타”
눈 앞에서 신호가 걸리자 급정거하는 준영의 트럭. 보조석에 아무렇게나 던져져있던 택배상자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 상자를 힐긋 바라보던 준영이 보조석으로 손을 뻗는다. 떨어진 상자를 주우......는줄 알았는데 보조석 서랍의 버튼을 누르는 준영. 그리곤 손을 길게 뻗어 이리저리 휘젓는다. 여러번 휘저어도 느껴지지않는 라이터의 촉감. 또 한번 18,18을 중얼거리며 다급해지는 준영의 손길. 얼마안가 바로 바뀌어버리는 눈 앞의 초록불 신호등.
“아 진짜!!!!!!!!”
서랍을 쾅!소리내며 닫아버리고 바로 차를 움직여 출발하는 준영. 그의 신발 옆에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는 빨간색 라이타가 구슬프다...
. . .
“택배요!”
덜컹- 열린 문 사이로 파마머리 아줌마가 슬리퍼를 신고 나온다. 문 앞에 덩그러니 택배상자를 놓고 뒷모습만 보이며 사라져가는 준영을 힐긋 보는 아주머니. 이내 택배상자를 집어들고 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궈버린다.
. . .
“이제 이서진 이 새끼꺼 하나 남았네 담배나 하나 피고 가야지”
몰고 있던 트럭을 동신아파트 놀이터 한쪽에 세워놓고 등 돌려 담배를 입에 무는 준영. 아까 발 옆에서 찾은 빨간 라이타가 어느새 손에 들려있다. 불을 붙이려는데 젊은 애기엄마로 보이는 여자 한명이 준영의 입에 물린 담배를 가로채며 쏘아붙인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돼죠. 여기 놀이터에 애들도 많고 이제 하교시간이라 아파트에 사람들도 북적북적한데” “네?”
당황한 준영이 까칠한 얼굴로 여자를 바라보자 잠시 움찔하더니 다시 두다다다 몰아붙이기 시작하는 여자.
“저기 노란색 어린이 보호구역 푯말 안 보여요?” “아..” “흡연해서 혼자 나쁘면 상관없는데 버젓이 애들 나돌아 다니는 곳까지 와서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 거잖아요 안 그래요?” “하..... 알겠어요.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제가 담배 피다 들킨 미성년자도 아니고, 지금 이러시는 건 좀 오바하시는 것 같은데요” “뭐라구요?” “됐고, 아무튼 여기서 안 피면 되는 거 아녜요.”
하루 종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별 같잖은 일들이 다 스팀 받게 하네 라고 중얼거리며 준영이 발길을 돌리려다 멈춘다. 그리곤 다시 뒤돌아서서 여자의 손에 들린 자신의 담배를 뺏어들고 눈을 힐긋 째린다. 흠짓 하며 놀라는 여자를 뒤로하고 입엔 여전히 18,18을 중얼거리며 차로 가 보조석 자리를 여는 준영.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는 상자 위에 빨간색 '취급금지'스티커가 붙어있는 걸 뒤늦게 발견하곤 순간 멈춘다. 잠시의 정적 끝에 상자를 조심스럽게 흔들어보는 준영. 다행히 깨진 유리 소리 같은 건 나지 않는다. 둔탁한 물건 하나가 상자 안에서 멀쩡히 돌아다니고 있는 느낌. 안심이다.
“식겁했네...안 그래도 운수 털리는 하루였는데 마지막 뒷처리까지 험해질 뻔 했어”
상자를 손에 들고 다시 보조석 키를 채워 잠구는 준영. 동신아파트 단지 안으로 걸어들어가 104동을 익숙하게 찾아 들어간다. 엘리베이터 안으로 걸어 들어가 맨 위에 있는 10층을 누르고 손으로 닫힘 버튼을 꾹꾹꾹 누른다. 담배를 못 펴 초조해진 준영이 이미 짧아져있는 손톱을 물어뜯는다. 빨리 소화전에 택배 던져주고 퇴근해서 집에 가 롤이나 한판 때려야겠다라고 생각하며 맘이 더 급해진다. 빨간 색 엘리베이터 숫자가 점점 올라가기 시작하고 10을 써보이고 멈추는 느낌이 들자마자 열림버튼을 꾹꾹꾹 누르는 준영. 문이 열리자마자 바깥으로 몸을 내밀어 오른손으로 엘리베이터의 내려가는 버튼을 누른다. 그렇게 엘리베이터가 내려가지 못 하도록 붙잡은 뒤, 왼손으로는 1002호 옆의 소화전 문을 익숙하게 열어 팔에 걸쳐놓았던 택배상자를 그 안으로 가볍게 던지려던 그 순간.
“택배 왜 이렇게 늦게와요?”
잠그지도 않고 기다렸는지 잠금장치 해제하는 소리도 없이 바로 열리는 1002호의 문에 순간 화들짝 놀라버린 준영. 이미 준영의 왼손을 떠나버린 취급금지 스티커가 붙은 택배상자는 소화전 안에 처참히 던져져버렸다. 순간 뒷목이 싸늘해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엄청나게 무안해져버린 준영. 순간 오른손으로 누르고 있던 엘리베이터 버튼을 놓쳐버린다. 뭐지. 왠 여자 ‘이서진’이랑 같이 사는 여잔가.... 아니 저 목소리 전화할 때 마다 받던 그 목소리 맞는데?
“.....저기 혹시... 그쪽이 이서진씨세요?” “네. 저 맞는데요.” “아...”
갑자기 머리가 혼란스러운 준영. 하긴 수십번이나 왔다갔다 한 집인데도 택배 주인 얼굴 제대로 한번 본 적이 없네 라고 생각한다. 준영의 눈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좀 짧은 커트머리이긴 하지만 하얀피부에 타이트한 흰티, 노란색 수면바지까지 입은......꽤 예쁜 여자다. 근데 뭐야. 나는 절대로 그 목소리가 여자라고는 단 한번도 상상 못 해봤는데 진짜 의외네
“저기 그럼... 매번 전화 받으시던 그 이서진씨가 그쪽 이서진씨 맞아요?” “네. 맞는데요.” “아 근데 왜 목소리가........남잔 줄 알았어요 진짜로” “담배 많이 펴서 그래요.”
응? 너무나도 털털한 여자의 태도에 순간 멍해진 준영의 얼굴. 가만히 서 있다가 뒤늦게 앗차하며 엘리베이터 숫자를 바라보는데 어느새 1층까지 내려가있다. 에이씨..를 중얼거리며 내려가는 버튼을 꾹 누르는 준영의 등 뒤로 들리는 낮은 저음의 서진의 목소리.
“그동안 몰랐는데 원래 소화전에 넣어달라고 하면 이렇게 막 함부로 던져놓고 가고 그러나보죠?” “아 그게... 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 “그리고 아까 택배 갖다 준다고 한 시간이 점심시간이었는데 지금 저녁시간 다 된 것 같은데요. 왜 이렇게 늦게 오신 거에요?” “아 그건 제가 잘 몰랐는데 알고 보니 어제 밀린 택배들이 많더라고요 그거 먼저 돌리고 오느라” “취급금지 스티커 있어도 이렇게 막 던지고.... 만약에 물건에 흠이라도 생겼으면 그쪽번호로 연락해서 청구하면 되는 거죠? 아 택배회사 홈페이지에 따로 항의글 올리고 전화로 따지면 되나?” “아니 저 사실은요 제가 지금은 그냥 알바하는 거거든요 전문 택배기사가 아니라서요 잘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18, 생긴건 이쁘장하게 생겨가지고 따지긴 졸라 잘 따지네 아 쪽팔려. 결국 고개 숙여 사과하고 마는 준영. 그런 준영을 건조한 표정으로 가만히 바라보다 택배 상자를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가 쾅 문을 닫아버리는 서진. 그녀의 집 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주먹 쥔 손을 문 앞에 내리치듯이 휘두르는 준영.
-그렇게 한다고 문이 부셔지겠어요?
인터폰 너머로 들려오는 서진의 목소리. 순간 헉 소리를 내며 주먹을 등 뒤로 감춰버리는 준영. 이내 엘리베이터가 도착한 소리가 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엘리베이터로 뛰어들어가 1층을 꾹 누른다음 닫힘 버튼을 꾹꾹꾹 누른다. 지잉-소리를 내며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살짝 풀려버린 다리. 한쪽 벽에 기대 서서 고개를 푹 숙이고 휘휘 내젓는다.
“아 쪽팔려 씨발!”
뭐 이딴 날이 다 있지 진짜 기분 졸라 구리네 샹 착하게 살라 해도 이노무 세상이 욕을 끊게 두질 않아. 1층에 도착하자마자 벌겋게 달아오른 귀를 두 손으로 잡고 트럭을 향해 뛰어가는 준영. 뛰어가다가 잠시 멈춰서서 서진이 살고있는 10층을 올려다본다. 그러다가 팔과 손으로 욕을 하는 포즈를 취하곤
“씨발 니 똥 굵다!”
라고 외치는데 순간 드르륵-하면서 열리는 10층의 창문. 또 한번 놀란 준영이 바로 고개 돌려 트럭을 향해 뛰어가버린다. 오늘 애들 좀 소집해서 쏘주나 한잔 해야겠다. 뭐 이딴 굴욕적인 그지 같은 날이 다 있어? 트럭에 열쇠를 꽂고 핸드폰을 눌러 단축번호4를 꾸욱 누르는 준영. 핸즈프리 이어폰을 왼쪽 귀에다 꽂고 차 시동을 걸어 재빠르게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며 통화를 한다.
첫댓글 잘보고 갑니다. 재수없는 하루군요^^
하하 술한잔하기 좋은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