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17일(토)
* 시작 기도
주님...
다윗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시기 1,000년 전에 이미 그의 메시야적 행위를 계시로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이렇게 온갖 고난을 겪으며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시 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믿음의 조상들이 그렇게 예수의 삶을 미리 살았다면 오늘 우리들 역시 믿음의 자녀로써 넉넉히 그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지고 십자가에 오르신 것처럼 우리도 그 십자가에 함께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죄인은 그 십자가를 멀리 한 자였음을 고백합니다.
어떠한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십자가 고난을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런 나는 죽기에만 합당한 자입니다.
주님은 이런 자를 불쌍히 여기셔서 아주 진멸하지 않으시고 공의에 합당한 징계로 나를 이끄셨습니다.
오늘도 그 징계와 함께 고난의 무덤에 있습니다.
그 자리를 부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주님과 함께 성소를 짓는 자리로 나아갈 수 있게 도우소서.
그 자리가 주님과 영적 교제가 있는 자리임을 믿습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님만이 나의 모든 것이오니 나를 성령으로 장악하여 주소서.
나의 의지는 썩을 것이오니 오직 주의 말씀 안에서 새롭게 하여 주소서.
살아 있고 항상 있는 주의 말씀만이 나를 생명으로 인도함을 믿습니다.
이 하루도 주님과 함께 연합하여 동행하는 날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왕하 24:8-20
제목 : 다 파괴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8 여호야긴이 왕이 될 때에 나이가 18세라. 예루살렘에서 석 달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느후스다요 예루살렘 엘라단의 딸이더라.
9 여호야긴이 그의 아버지의 모든 행위를 따라서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10 그 때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신복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그 성을 에워싸니라.
11 그의 신복들이 에워쌀 때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도 그 성에 이르니
12 유다의 왕 여호야긴이 그의 어머니와 신복과 지도자들과 내시들과 함께 바벨론 왕에게 나아가매 왕이 잡으니 때는 바벨론의 왕 여덟째 해이라.
13 그가 여호와의 성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 보물을 집어내고 또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이 만든 것 곧 여호와의 성전의 금 그릇을 다 파괴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14 그가 또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과 모든 지도자와 모든 용사 만 명과 모든 장인과 대장장이를 사로잡아 가매 비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었더라.
15 그가 여호야긴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왕의 어머니와 왕의 아내들과 내시들과 나라에 권세 있는 자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16 또 용사 7천 명과 장인과 대장장이 천 명 곧 용감하여 싸움을 할 만한 모든 자들을 바벨론 왕이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17 바벨론 왕이 또 여호야긴의 숙부 맛다니야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고 그의 이름을 시드기야라 하였더라.
18 시드기야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21세라. 예루살렘에서 11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하무달이요 립나인 예레미야의 딸이더라.
19 그가 여호야김의 모든 행위를 따라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지라.
20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를 진노하심이 그들을 그 앞에서 쫓아내실 때까지 이르렀더라.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을 배반하니라.
* 나의 묵상
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철저하고 신속하였다.
느부갓네살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자 여호야김을 이어 왕이 된 여호야긴은 그의 모친과 아내들과 모든 신하들을 데리고 와서 바벨론 왕을 맞았다.
하지만 바벨론 왕은 여호야긴을 사로잡고 예루살렘에 가난하고 비천한 자만 남기고 모든 자들을 바벨론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에 있는 모든 보물을 다 빼앗아 갔으며, 솔로몬이 만든 성전의 금 그릇을 다 깨뜨려버렸다.
그런데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바벨론 왕은 여호야긴 대신에 그의 삼촌 맛다니야를 왕으로 세우고 그의 이름을 시드기야로 고쳤다.
이는 그의 꼭두각시로 세우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시드기야는 곧바로 바벨론 왕을 배반하고 만다.
하나님의 심판은 옳다.
그저 단순히 옳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항상 옳으며 그 심판을 당하는 자들의 입을 통하여 ‘주의 심판은 옳습니다’라는 고백을 받기를 원하신다.
그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호야긴이나 시드기야나 이 당시 유다의 왕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의미를 몰라도 너무나 몰랐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진노 중에 왕이 된 시드기야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여호와 앞에서 여전히 악을 행하였던 것이다.
무엇보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그토록 부르짖으며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벨론 왕을 배반하는 등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기만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하나님의 뜻을 전혀 모르는 자였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니까 시드기야와 같이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삶을 살아온 것이다.
그동안 나는 내가 이 땅에서 잘 되고 건강하며 부자가 되어 잘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았다.
그래서 공부를 잘 해서 안 믿는 친구들에게 예수 믿는 자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세상적으로 성공하여 예수 믿는 자로서 불신자들에게 나의 성공을 보여주어 전도하려고 하였다.
나의 생각에 하나님의 뜻은 예수를 잘 믿으면 병도 안 걸리고 아무리 큰 불치병도 나을 거라고 생각하였다.
이처럼 나는 철저히 유대교적 사고를 가지고 예수를 믿었다.
유대교적 사고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무엇을 하든지 잘 되고, 건강하고, 부자로 살게 된다고 믿는 것이다.
이는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기다리지만 정치 군사 경제 등 모든 면에서 다윗과 같은 영광과 번영을 가져다주는 민속 메시야를 기다렸던 것이다.
이런 사고와 가치가 오늘날 나를 비롯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고스란히 스며들어와 있다.
지금도 이런 사고방식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지배하고 있으며 세상적인 성공이 곧 하나님을 잘 믿는 믿음의 결과로 받아들이고 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미국의 모 목사는 ‘긍정의 힘’이라는 책을 써서 일약 스타점에 오르기도 하지 않았는가?
성도들이 기도하는 것을 보면 대부분 자기 가족과 사업 그리고 건강을 위하여 기도한다.
옛날 한국에서 금요일 심야기도회 때를 보면 여실히 드러난다.
일반 기도제목을 가지고 기도할 때는 기도소리가 작다가도 자기 자녀들을 위한 기도를 하라고 하면 예배당이 떠나갈 듯이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모습을 본다.
이것은 비단 몇몇 교회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한국 교회의 일반화된 모습이다.
새벽기도로 유명한 서울 명성교회나 한국을 대표하는 사랑의 교회의 자랑하는 것을 보면 숫자를 자랑한다.
‘이번 새벽기도회에 3만 명이 모였다. 4만 명이 모였다.’는 식으로 말이다.
열심과 열정은 대단하지만, 3만 명이 모이든 4만 명이 모이든 아니면 3명이 모이든 4명이 모이든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일까?
숫자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전으로 살며, 공동체 성전을 이루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자랑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아니 그조차 자랑거리가 될 수는 없다.
그것 역시 내가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한 것이라면 얼마든지 자랑하겠지만 나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은 것밖에 없기 때문에 무엇도 자랑할 것이 없다.
사람 앞에서 자랑거리는 결국 욥의 소유물, 심지어 자식들까지 모두 사라진 것처럼 쇠락의 법칙에 의해 모두 소멸되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자랑거리는 영원에 속한 것이기에 쇠락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창세전 만물 위의 세계에서 이루어진다.
비록 만물 안, 곧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일일지라도 영원에 잇대어 영생의 삶을 사는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시간은 영원에 잇대어 있는 만물 위의 시간에 속하기 때문이다.
나는 2,000년대 초에 경남 김해에 교회를 개척하고 난 후에 숫자에 굉장히 민감했었다.
몇 명 되지 않는 숫자, 한 눈에 보면 알 수 있는 숫자도 부교역자에게 숫자를 세도록 했었다.
그 정도로 숫자에 매여 있었다.
무엇을 기도하든지, 그런 것은 별 상관이 없었다.
그저 기도의 자리에 많이 나오면 그만이었다.
그들이 신앙적,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하는 것보다 지금 모이는 그 자리에 몇 명이 나왔는지가 중요했고 가장 큰 관심사였다.
하나님의 관심사인 영생에는 별 관심이 없고 나의 만족을 채워주는 숫자에 나의 관심은 온통 쏠려 있었다.
그렇다고 숫자가 많아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런 나는 이제 복음으로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말씀묵상에 나의 온 힘을 기울인다.
이곳만이 내가 있어야 할 곳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곳에 있을 때만 숫자에 대하여 자유할 수가 있다.
이곳은 숫자의 개념이나 양의 개념이 아니라, 존재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곳이다.
존재로 오신 아들의 생명이 있는 곳이기에 그곳에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집채만한 파도가 와서 나의 소유를 다 쓸어간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면 그것은 언제나 옳다.
나는 죽을 것 같고,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때조차 영원한 기쁨과 소망이 있기에 늘 넉넉하다.
진짜 내가 숨을 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지라도 그곳만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자리이기에 가능하다.
그곳에 머무는 것은, 곧 아들이 십자가에 죽어 장사되신 무덤에 나도 함께 연합하여 장사됨을 의미한다.
주님의 십자가에 나도 함께 죽었다.
주님이 누워계신 무덤이 지금 내가 거해야 할 장소임을 안다.
그곳은 피해야 하는 곳도 아니고, 거부해야 할 곳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복의 장소다.
비록 고통스럽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자리이지만, 나 혼자 있으면 그 고통이 배가되나 주님과 함께 말씀 앞에 있으면 그 무덤은 넉넉히 고통을 삼킬 수 있는 성소로 변한다.
이제 나는 날마다 그 성소에 주님과 함께 머물 것이다.
아니 날마다 주님과 함께 머문다.
주님 없는 무덤은 고통 그 자체이나, 주님과 함께하는 무덤은 나의 성소요, 정말 편하게 숨을 쉴 수 있는 모태요 산실이다.
오늘도 그 주님을 찬양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의 죄는 억만금을 주고도 갚을 수 없으나 주님의 보혈의 능력은 그런 죄도 소멸시키셨습니다.
나의 허물은 무엇으로도 벗길 수 없으나 주님의 피, 보혈은 그 허물을 벗기고 세마포 옷, 그리스도의 옷이 되어 나를 덮었나이다.
나의 전부요 나의 생명이신 주님을 송축합니다.
당신만이 나를 수렁에서 건지실 수 있사오니 영원한 구원자가 되소서.
나의 주가 되시어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그 통치권으로 오늘을 살게 하소서.
이제는 당신의 생명을 가진 자 되어 그 통치권을 사용하게 하소서.
나는 주님의 신실한 종이 되어, 주와 복음을 위하여 살겠나이다.
오늘도 복음을 전하는 입술과 손 그리고 발이 되게 하소서.
주의 이름을 향기롭게 하는 도구로 사용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