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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님이 오십니다. 원문보기 글쓴이: 천국중개사
로마서 5장 3절~4절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줄 앎이로다"
오늘은 기도 가운데 연단에 대해서 성령님의 세미한 주관을 은혜로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는 연단은 왜 오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는, 머리로 아는 지식적인 믿음을 깨트리고자.
머리에서 마음으로 가는 길이 가장 멀다라는 세상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신앙안에서도 적용된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이제는 성경을 공부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쌓아가면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우리는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계명대로 살고자 한다면 당연히 성경을 알아야 할 것이고,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선하신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전도를 할라치면 응당 성경에 대해서 알아야 사람들에게 전해 줄 수 있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성경을 알아가다가 어느덧 자신도 모르게 믿음이 지식화 되어가고 틀이 되어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믿음이 지식화, 제도화, 의식화 되어갈때 그 영혼의 믿음생활은 외식으로 변질되어가고 종교행위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이러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교만해집니다. 성경지식에 대해서 왠만큼 꿰뚫고 있고 학식높은 분들의 각종 지식들도 섭렵하면서 자신이 듣고 배우는 이 지식이 가장 옳고 가장 진리에 가깝다라는 생각에 그 지식이 곧 믿음인 줄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시면, 이단 사이비 신도들을 보시면 알 겁니다. 이 분들은 성경말씀을 실천하는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이 분들의 관심은 오직 성경의 어떤 구절들에 대해서 그 해석을 알고 모르고 있느냐가 중요한 관건입니다.
그 해석을 알고 모르고가 바로 진리를 아느냐 모르냐의 잣대가 되는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 해석을 누가 가르쳐줬느냐. 바로 자신이 섬기는 그 목사. 소위 교주가 이제는 하나님과 자신을 연결해주는 중간 통로자가 되는 것입니다.
가끔 이단 사이비를 다니는 신도들과 길거리에서 우연찮게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이 분들의 초점은 예수님에게 있지 않습니다. 자신이 섬기는 목사(교주)에 있고 그 분이 하나님께로부터 내리받은 계시적 해석을 거창하게 입에 침이 마르도록 설명하면서 그 해석을 알고 있느냐 모르고 있느냐를 갖고서 복과 구원의 차원을 논합니다.
그런데, 이단 사이비가 아니더라도 신앙생활을 이렇게 해석에 치중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우리 어머니 시대에는 교회안에 의자도 없었습니다. 그저 방석하나 깔고 부르짖어 기도하고 눈물로 기도하고 힘차게 찬송하고 그랬습니다.
우리 어머니 시대의 신앙은 성경지식은 다소 부족하고 사회적 능력은 없었어도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고, 기도하면 응답받아가면서 간증으로 영광돌렸고 영혼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교회들이 그러하지 못합니다. 각종 프로그램이 기도를 앞서 있습니다. 각종 발도장과 얼굴도장이 말씀을 앞서 있습니다. 이제는 목사들도 "사"자 들어가는 지식계층이라고 해서 목사라는 직함을 이용해 입신양명해보려는 삯군 목사들도 부지기수로 배출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성경도 번역이 잘못되었다 하면서 히브리어, 헬라어 원어로 봐야 한다고 그 지식을 높이 자랑하고 해석에 치중합니다.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해서 그런 교회에 생명력이 있던가요. 기도와 찬송이 끊이지 않고 감사가 충만하던가요. 그렇게 많이들 헬라어, 히브리어 공부해서 원어로 성경을 해석하니 구구절절 읽을때마다 주님의 사랑으로 눈물이 쏟아져 나오던가요. 하나님 계명이 절로 지켜지던가요.
아니지요. 아니지요. 이젠 제발 정신을 차립시다. 그런 공부를 하지 말라가 아닙니다. 표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 1절에 "...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하였습니다.
세상에서도 보시면 지식이 많은 사람은 겉으로 볼때는 교양있고 착하고 겸손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무척이나 악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적으로는 완고하고 고집스러우며 강팍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신앙안에서도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지식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교만해지기 마련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자꾸 다른 이의 허물이 보이고 단점이 보이면서 판단을 하게 됩니다.
더욱이 자신은 성경지식으로 분별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옳다라고 생각하지 결코 지금의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외식적이고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는 보이지 않기에 종교생활와 외식으로 변질된 자아상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상한 심령을 토로하지 못하는 신앙생활은 많은 것들로 자신을 포장하게 됩니다. 먼저는 어떤 죄에 대해서 자신도 이기지 못하고 승리하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누군가가 그 죄를 지었다고 하면 괜시리 호들갑스러워집니다. 아니면 위로하는 척 너나 나나 똑같구나 생각하면서 안위받기도 하지요.
자신의 죄된 마음이나 믿음이 부족한 것, 머리오는 잔뜩 아는데 막상 실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자괴감을 봉사로 치장하고, 헌금으로 포장하고, 남을 정죄하는 것으로 치장하고, 의분으로 포장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연단을 하실 수 밖에 없습니다. 저 역시 머리속에 알고있는 성경지식을 갖고서 연단을 많이 받았습니다. 갑론을박이 되는 어떤 성경구절이 있으면 여기저기 찾아서 가장 신빙성있다라는 해석을 갖고 얼마나들 내 주장을 하였고 상대를 폄하하였는지요.
그중에서도 말라기에 나와있는 십일조 이야기입니다. 이 십일조 이야기를 히브리어 원본으로 본다면 분명 오늘날 성경번역은 다소 문제가 있기도 하고, 목사님들이 십일조를 갖고서 하나님을 시험해보라는 말씀도 잘못된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히브리어 원문 해석들이 인터넷에 나돌면서 많은 성도들이 똑똑해진 좋은 점들도 있지만 반면, 신앙생활은 더더욱 형편없어 지는 악영향도 분명 있습니다. 믿음이 여린 사람일수록 새로운 지식, 새로운 해석에 금방 마음이 돌아가고 그것이 자신의 이성과 지식에 맞는다면 하나님 보실때 합당한가 아닌가는 생각지 아니하고 자기 뜻을 대변해주는 새로운 지식과 해석에 치중하고 결정하는 것이지요.
오늘날 성경번역이 온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의 말씀대로 살아감에 있어서는 크게 지장도 없고 오류도 없는 것이 사실이라고 전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날 성경번역의 오류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이 땅에서 모성애를 통해서 조금은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어느 다큐를 보았는데요 나이가 55세인 아들인데 지적연령은 7세였습니다. 그는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아내 역시 정신지체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의 어머니는 무척이나 그 아들과 며느리를 사랑하는 것을 봅니다. 이젠 나이가 들어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잘 걷지 못하지만 늘 자식걱정과 그 사랑으로 마음이 꽉 차 있더군요.
보통네 다른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부족하고 힘없는 사람은 멀리하기 마련입니다.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 사람은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육의 속성입니다. 잘못한 것이 있으면 손가락질하고 비난하고 싶은 것이 육의 속성입니다.
그러나, 어머니만큼은 자기 자식을 손가락질 하지 않습니다. 행여나 자식이 어머니를 손가락질해도 어머니는 결코 그러하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남들이 자기 자식을 나쁘다, 멍청하다, 더럽다, 악하다 이야기해도 어머니만큼은 그 자식을 품에 안고 눈물로 감싸줍니다.
이는 어머니는 자식을 사랑으로 바라보지만, 남들은 지식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 말씀을 동일하게 보더라도 어떤 이는 지식으로 보는 이가 있고, 어떤 이는 사랑으로 보는 이가 있습니다.
지식으로 보는 이는 자기는 옳다 하여 자꾸 남을 판단하고 비난하고 시기하고 미워하면서도 자신의 악을 모릅니다. 자기 자신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와있는 말씀을 갖고 자신은 행동하고 생각한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자신이 악하다라는 것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바리새인이 이와 같았습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간다고 자부하는 그들은 병들고 힘든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고, 자신들은 십일조 드리며 이레에 이틀이나 금식하며 기도하는 거룩한 자들이라고 착각들 하였지요. 길거리에 누군가가 도적을 만나 쓰러진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나쁜짓을 많이 했으면 저런 화를 당하나 생각하며 피해가기도 하였지요.
그런데요, 성경지식을 잘못 생각하여서 화를 당하는 이들도 분명 있습니다. 어떤 자매는 신실하고 선교사가 꿈인 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주변에 불량 남학생을 전도한다는 믿음 하나로 그 남학생이 여관방으로 자신을 부르는데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실거야라는 믿음 하나로 방에 들어갔다가 목숨까지도 잃었지요.
그런 요구에는 응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리하면 괜시리 상대를 무시하는 것 같고 두려워서 믿음이 없어보이는 것 같아 그런 요구를 믿음이랍시고 응해주는 것은 실로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전 감히 말씀드립니다.
마음에서 믿어지는 믿음보다 머리로 아는 지식적인 믿음이 더 많을 수록 하나님께서는 연단을 하실 수 밖에 없습니다. 머리로만 알고 있는 성경지식, 머리로만 믿는 지식적인 믿음을 마음에서 믿어지는 영적인 살아있는 믿음으로 세워가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둘째로는, 온유한 마음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는 여러 이유중에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우리의 마음을 온유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령으로 온유한 마음이 될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고, 순종할 수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이 차단되고 버려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 성령님의 운행하심을 느끼게 되면 점점 마음속에 있는 염려와 근심, 강퍅함, 노여움, 각종 악한 속성들이 다스려지면서 마음이 부드럽게 온유해집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목사라해도 장로, 권사라해도 온유하지 못한 사람들을 많이들 봅니다. 여전히 옛구습의 자기 불같은 성격, 급한 성격, 완악한 성격, 강한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주님을 만난 은혜와 체험이 있다해도 그 이후로 하나님 말씀과 기도로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마음을 고쳐가는 마음의 할례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아무리 오랜 시간 교회를 다니고 성경지식에 해박해도 자신의 성격은 하나도 고쳐지지 않습니다. 기도를 해도 잘못된 방향과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기도를 오래 하시는 분들 역시 마음가짐 하나 고쳐지지 않습니다.
이런 분들은 연단을 받기 마련입니다. 연단을 통해 성령님의 부드러운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연단조차도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께서 주시는 연단을 받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번쯤은 자신의 성격을 돌아보십시요.
욱하는 성격.
급한 성격.
불같은 성격.
쉽게 삐지고 서운해하는 성격.
생각많은 성격.
예민한 성격.
남 말하기 좋아하는 성격.
비난하기 좋아하는 성격.
남 가르치고 지적해주는 것이 쉽게 나오는 성격.
이 모든 것들이 성령님의 손길로 치리되지 못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분명 이런 분들은 연단을 받아가는데요 그것이 연단인지 아닌지조차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가령, 누군가가 자신의 감정을 건드려서 욱하게 만들었다고 칩시다. 그것이 바로 성령님께서 너 자신을 좀 바라보라는 연단입니다. 그런데 그러기는커녕, 상대와 맞장구 치면서 같이 욱하는 사람들이 있고, 심지어는 여기저기 소문내면서 저 사람 아주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며 다니기도 하지요.
이런 사람들은 연단이 오래 갑니다. 아주 아주 오래 갑니다. 자신을 깨닫을때까지 그래서 자신을 내려놓을때까지. 자신이 악함을 인정할때까지 연단은 계속 갑니다. 주변에 악한 사람들이 있어서, 환경이 이래서 그런 상황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 문제가 있기에 연단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단을 통해 마음이 할례됩니다. 할례되는 만큼 마음이 성령으로 부드러워집니다. 온유해집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으로 인하여 마음이 요동하지 않습니다. 같이 불평하고 원망하지 않습니다. 악의 형통을 바라보면서 부러워하지도 않습니다.
가정안에서 아내나 남편이 행여나 자신을 보고 무섭다. 두렵다. 불편하다 한다면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완고한지 아셔야 합니다. 자식들이 같이 있는것을 싫어하고 왠지 피하려고 든다면, 회사에서도 동료들이 자신과 더불어 일하는 것이 무섭고 불편해서 피한다면 자신이 얼마나 의와 틀이 강한 사람인지 아셔야 합니다.
자신의 의와 틀이 깨져야 부드러운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기도가운데 찬송가운데 그리고 말씀묵상가운데 우리의 생각과 마음의 틀을 깨트려 가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기간 기도하고 교회다니고 직분도 높이 감당하는데 마음이 전혀 부드럽지 않다면 그는 신앙생활을 헛빵치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생활하는 것이요, 자기신념가운데 하는 것이요, 자기 의와 틀을 내세우는 신앙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은 행여나 직분이 높고 봉사가 많아도 구원을 받더라도 천국처소가 지극히 낮습니다. 이것도 구원을 받는다면 모를까 이런 신앙태도는 자칫 구원받기도 어려운 요소들이 있기도 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의 의와 틀을 깨트리시는 연단을 주변으로부터 주실때 감사로 받으시고 자신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이에게는 다툼의 연단으로,
어떤 이에게는 물질의 연단으로,
어떤 이에게는 건강의 연단으로,
어떤 이에게는 사업의 연단으로,
어떤 이에게는 마음의 연단으로,
기타등등 저마다의 공의에 맞게 하나님께서는 연단을 하실 것입니다. 이때 불평하고 원망하고 하나님을 피한다면 결코 복을 받지도 못할뿐더러 믿음조차 성장하지 못합니다.
감사!!! 감사로 이기셔야 합니다. 감사가 나오면 이길 수 있습니다. 감사가 나오면 승리하는 것입니다. 연단은 감사찬송만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길입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이것이 신앙입니다.
셋째로는,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오랜기간 비진리의 모습으로 자신을 만들어 왔습니다. 머리속에 갖고 있는 잘못된 지식들도 상당합니다. 그것이 옳다라고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성격이나 품성 또한 상당히 자기 의 가운데 만들어져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는 기똥차게 부르짖고 말씀도 참 많이 아는데 주님의 소양이 없는 분들이 무척이나 많습니다. 세상에서는 소위 배려와 교양이라고 하는데요.
주를 믿는 자녀들이 너무도 주님의 소양을 이루어가지 못하는 모습들이 많습니다.
주님의 소양은 그저 죽어지고 말 한마디 하지 말라라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피해만 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보 소리 들을만큼 웃고만 다니라는 것이 아닙니다.
몇가지만 간단히 이야기를 드리지요.
기도를 하다가도 전화가 울리면 전화를 큰소리로 받습니다. 남들 기도하고 있어도 개의치 않습니다. 교회안에서도 휴지를 아무렇게나 버립니다. 예배끝나고나면 예배실에 버려진 쓰레기들이 온갖 많습니다. 예배시간에 멀 그리 먹고 마시고 하면서 먹던음식과 쓰레기들은 치우지도 않고 쏙~ 나가버리는지요.
방석을 발로 질질 끌고 다니거나 확 내리치듯 방석을 내려놓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을 놀라게 하기도 합니다. 주변에 기도하는 사람이 있으면 걸음걸이나 방석을 내려놓는 것도 조심해야 하건만 그런거 없습니다. 문도 쾅쾅 닫고 나갑니다. 시간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항상 이유를 댑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는 과정중에 하나가 바로 주님의 소양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에서 주님의 소양을 배우지 못합니다. 그런 것을 가르쳐주는 교회가 없기도 합니다.
그저 열심히 봉사하고 목사님 말씀 잘 듣고 기도하고 충성하면 그뿐이지, 내 마음과 성격에 주님의 소양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거나 깨우쳐주는 교회가 적습니다.
그러니 교회안에서는 충성된 일꾼으로 인정받는다면서도 세상에 나가서는 손가락질 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교회안에서 윗분들에게는 인정받는 일꾼인데, 가정이나 아랫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사람이거나 완악한 사람으로 인정되기도 하지요.
물론, 우리가 사람의 판단과 인정에 연연할 것은 아니겠으나 행여나 그런 인정과 판단이 정말로 자신의 할례받지 못한 악한 품성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분명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는 것에 연단이 필요한 것은 , 우리는 연단을 통해 자기발견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연단을 통해 자기발견을 해가고 기도를 통해 자신을 토로하다보면 하나님께서는 하나하나 주님의 형상을 마음에 이루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 드리는 것은 , 주님의 의를 구해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형상을 이루어갈수록 기도의 응답도 빠른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장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주님의 의를 구해드리는 것은 바로 내 마음안에 주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요, 그 의를 이루는 것이라 함은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어떤 것인가.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성령의 9가지 열매입니다. 그런데 오랜기간 신앙을 해도 성령의 9가지 열매가 전혀 맺히지 않거나 한쪽으로만 치우친다면 그 또한 연단을 통해 바로 잡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한번쯤은 성령의 9가지 열매가 무엇인가 성경을 상고해보시면서 자신의 마음안에는 어떤 열매가 있고 있다면 어느정도 이루어가고 있는지 점검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떤 열매는 있는데 어떤 열매는 없는 경우도 있겠구여.
신앙의 초점 그리고 영분별 초석은 바로 이렇게 성령의 9가지 열매로 분별해 볼 수 있습니다. 먼가 환상을 보고 신비한 은사를 받아서 능력을 발휘하고 이름 석자만 들으면 예언을 쏟아내고 그런 것이 영분별이 아니라 얼마나 성령의 9가지 열매가 맺혀가고 있는가를 분별하는 것이 영분별의 초석이 되는 것입니다.
정리합니다. 연단을 소망을 이룹니다. 연단이 당장에는 슬퍼보이고 힘이 듭니다. 연단을 받으면서 기뻐하고 감사하는 일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선교회장도 하고 난 믿음이 좋다라고 주변으로부터 인정받았고 내 자신도 이 정도면 구원이지 머 내심 그랬던 적이 있었는데,
막상 연단이 내게 오니 각종 원망과 불평이 쏟아졌고 하나님에게 등돌리기도 했었습니다. 세상으로 피해서 쉬고싶었구여. 그러나, 시간이 지난뒤 그 때를 돌이켜보면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 연단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내 자신은 없었을 것이니까요.
연단을 받아보야 그 사람의 실제 믿음의 분량의 현주소를 알 수 있기도 합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연단이 이런 건줄 몰랐습니다. 연단이 내가 생각하는 시점이나 그러한 정도로 오는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절대 타협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생명의 주권과 연단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자신이 연단이 힘들다고 물려달라고 짧게 줄여달라고 해본들 그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연단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감사와 찬송으로 이겨야 할 영적 훈련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모두에게 적용됩니다. 지금도 연단을 받아가시는 분들이 있고 또 연단을 애써 악으로 인해 자초하는 분들도 있겠지요.
어찌되었든 주님을 바라보는 그 시선을 놓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연단을 통과 할 수 있습니다. 연단을 통과하고나면 주님은 그냥 넘어가시지 않습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과 위로로 우리의 마음을 이끌어주십니다. 연단이 클수록 복도 크고 위로도 큽니다. 연단속에서 우리는 소망과 감사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을 온전히 바라보는 것에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은 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첫댓글 오늘의 예수님을 믿는 교인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믿고 아멘은 하나 마음으로나 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는 멀어지는 생활을 함으로 영혼들이 병들어 고통하고 괴로워하는 심령들도 많은 현실이 되어간다(딛 1:1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