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萬有物의 心性이 동경하고 理想的으로 여기는 한 사람에 모습이요、人間의 心이 그 뭇 짐승 들의 心相과 똑같음인줄 누가 알 것인가? 소위 脫相을 뒤바뀌어 논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삿진리가 짐승은 짐승이고 사람은 사람노릇(역할 분담을 하게 하여 놨을 뿐이다. 짐승心相들을 이상인간 의 실현을 위하여 겉껍데기만 人間탈을 뒤집어 씌워 수련하게 하고 있는 것인지도 또 사악한 人性을 제어 * 하기 위하여 아님 사악한 人間의 넋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諸森羅象을 뒤집어 쓰게하여 苦行을 시키는 것 인지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저ㅡ동식물들이 필자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우리는 삿진리의 염원을 들어주는 위대한 고행자 너는 한낱 보잘것 없는 인간에 탈을 쓴 우리의 겉에 드러난 象中 사악한 것으로 관찰하는 것을 갖고 있는 心相形 너는 짐승 미물 생명이 다 할때까지 그껍질을 벗지 못할 것이다」
本性)은 以上과 같이 치우친 생각이나 억지로 뜯어 맞추고자 하는 생각에서 形成되는 것은 아니다.
곧 諸相이 本性一色相이라 하는 관점은 치우친 관점이란 뜻이다。삼라萬物은 제각기 타고난 本性이 따로 있는 法 ㆍ살면서 습성에 젖은 걸 본성이라 할순 없다. 어떠한본성이던지 필요에 의하여 양면성 등 다양성 을 띤다. 그것이 無生命物이라면 상대적이라 할 것이지만 유生命物이라면 저마다 삶을 영위한 수단으로 여러가지 性을 띄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생명 물 속엔 성품 이 유연하게 보이는 것도 있고 강폭 하게 보이는 것도 있는 것이다. 또 性의 노출된 형상이 화려하게 보이는 것도 있고 사납게 보이는 것도 있는 것이다. 또 환경에 따라 처지에 따라 이해득실에 따라 겉모양은 변한다. 이것은 도시 사람의 관점 으로 보는데서 그렇다는 것이지 各物마다 느끼는 관점은 相反되거나 差異가 있다 할 것이다. 선 녀나 천사나 요괴나 망나니 유령이나 하는 관점은 사람이 다분화하여 유추해서 느끼는 감의 관점이 그런 것이지 실제에 있어 저 생명물들 각자 자기표현이나 種을 보존키 위한 끊임없는 役事를 나타내고 있는 모습 인 것이다. 一例로 고양이를 볼진데 그 풍겨나오는 氣가 그런형상이 위풍스런 노인 할아버지의 형상 흰머리 혹대머리에다가 눈썹은흰게 劍眉에다 약간 끝이 올라갔고 흰수염이 보기 좋으며 두루마기나 도포같음을 걸쳤으며 자상스런 할머니처럼 보일수도 있다)이라면 이것은 보는이의 感이 그렇게 읽음 그렇게 되어진다는 논리이니 정신세계 머리에서 읽는 것을 제삼의 氣같은 전달자가 주위 모든이에게 이 사람이 지금 이렇게 읽고 있다는 것을 통역관처럼 전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그래서 그 物行이 이 사람의 읽음과 보조를 맞춰주는지도 모르는 것이다는 것이다。고양이는 그 성미나 하는 짓거리가 고약하여 영험하다하기도 하고 요망스럽다 하기도 함에 꺼림(禁忌=가로 질름)을 놓길 잘한다。물론 이것이 아무렇게나 하는 제행동짓거리라 할 것이나 사람이 보기엔 그렇다는 것이다。이럴때엔 佛號나 보살의 이름을 들먹거리든가 아님心의고개를 숙여 두손으로 싹싹빌어라 그뒷흐름의 作害가 덜심하리라 하는것은 마음의짐을 덜기 위한 사벽스런 의식행위가 될지 모른다.그러나 또한 이것은 정신세계에서 예전에 들어서 기억해 두었던 因識에 의해서 거부감을 나타낸것을 말한 것이니 어떠한 인식은 그 사람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상의 고양이 얘기는 정리때도 아직 계속 배우는 입장이라 未達이지만 그 前의 더 未達때의 얘기다 정리때 상념은 그 고양이가 가로질러 가는 것은 不祥한 꺼림을 놓는 것이 아니라 내게 向하는 많은 삼대 같은 무형에 사악한 기운을 걷어내밀어 치우듯 하는 것이다라고 상념이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길을 열어준다는 의미이다.이렇게 생각을 좋은관점으로 바꿔놓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그런데 사람들은 임시보는 관점이 正觀이라고 부정적인 面을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그래서 病은 순간적으로 일어나지만 그치유하는 기간은 길다는 것이니 이에 유추한다면 그릇된 관점이 쉬워서 먼저(先人見)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니 삿진리가 사람들이나 삼라의 마음을 정신覺을 치우몽매한 것으로 몰아서 세상을 제가 만들었다 하는 생각이 먼저들게 하여 삼라들의 각을 암울하게 하는 것이다.세상을 제가 창조했다하니 이렇게 치유하는 말이 억만갈래로 길어질 수밖에 더 있겠는가? 즉 세상은 누가 따로 있어 만든 것이 아니니 空相 저마다 자기표현이니 一言으로 다 말할수 없는 것이다.그래서 空相이라 하는 것이다.지금게 계속 이야기 하는 것도 다 이를 설명하기 위한 일과이니 그 억천만테로 돌아가면서 습성된 관점은 一朝에 改觀하기란 쉬운 作業이 아닌 것이라 할 것이다)
삿진리는 諸相의 行보다 한발 앞서간다 그러면서 諸相이 앞으로 行할 것을 미리 行하듯 그리(圖)는 것이다.
知彼知己 즉 저가 저런줄 내가 나인줄 알면 설령 진리가 한발 앞서 간다해도 무엇이 두렵고 어려우리
이미 그러함을 알진데 어떤 일이 닥친다해도 의연해지리로다。그런데 사람들은 이런줄 알면서도 불의의 습격처럼 당하듯하면 의연해지기에 앞서 속 후벼파는 쓰린 심정에 그 뭐라할까 어찌 화를 表出 할 줄 몰라 발작증세(오두방정을 떤다할까)를 일으켜 성질이 파르를 떤다한다。삿진리는 이런 모습을 보고 즐기기 위해 계속 농단에 덫을 놓고 있는지도 모른다。이리가도 금강산 저리가도 금강산行의 길이라는 것을 만들어 놓고 내가 이런 농단의 능력을 갖고 있다는 식으로 행하는 者에게 들켜 보이듯 (뭘 몰래하려다 틈새가 열려 발각되는것) 하는 것이다.그래서 이런 것을 미연에 防止하기 위하여 많은 억측의 관념을 그려놓고 삿진리가 그런걸 갖고(竹才想念) 희롱치 못하게 점점 궁도로 삿진리를 몰아 재키는 것이다。어떻게하는 저하는 行爲를 내다보듯해서 못된 行惡질을 비켜서 가 볼려고 하나 필자가 이 글을 쓰면 금새 뒷따라 읽듯 저가 훤히 미리 알고 있어 농단은 계속 되는 것이다. 여복하면 鬼才라고 귀신의 재주가 無量이라 어떻게는 한발 앞서 나가서 함정을 파 놓고 이것이 그대의 운명이다。반드시 빠져야 한다는듯이 제능력이 이렇다하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함인 것이다.그러면서 한다는 말 같은 표현의 감이 와 닿길 이렇게 하는 것은 내가 함정을 파는 것이 아니라 네운명대로 길을 여는 것이다 함인 것이다。「길은 무슨길」 속상하는 마음에 바가지를 내어던져 박살을 내어 성깔을 내듯 운명의 더러운 짓을 질타해 보지만 이 행동 또한 역시 운명이었구나 하는 것이다。그대의 억측관념은 또다른 삿진리를 불러다 쓰는 것이니 諸行事가 그대로 따라 오리라「하면된다」는 편액걸고 나는「안된다 안된다」부정하면 (이것은 왜 그렇게 부정하게 되는가? 마음놓고 있을 만한 확중적인 증거가(또는 비젼) 없기 때문이다.설령있다해도 그것의 卞數가 또 있을까 마음 놓고 전전긍긍 하는 것이다。이것이 여유롭지 못한 운명의 쫓김에 있는 것이다) 되는 것은 우연에 일치처럼 여기는 부정의 상념을 뚫고 일어서는 삿진리가 힘겹게 이룬 것이요 「그것봐라 안될 줄 알았다」
하고 안되는 것은 억측의 관념이 미래를 투시 예측의 적중이 된 것이 되어 또 하나의 삿된 이치를 이루어 「하면 된다」의 삿진리를 따라 잡은게 되는 것이다。억측관념은 行事前 萬有物의 들어 받침(주위 에워싼 實態와 心相에서 일어나는 현상)에서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예감 등) 일어나는 것이요 그냥 行事와 아무관련없는 想想과는 차원이 다르다。以上이 또한 하나로만 貫코자 하는 것이니 어리석다는 뜻이다. 모든게 어찌 그 방면 만일까이다。다른 척도나 논리가 무량이라 할 것이다.
一、삿진리를 삿되다고만 나무랄까? 다방면의 질서위계를 무너뜨리랴? 그렇게 된다면 진리라 하는 흐름이 서질않아 모든게 없어지리라 모든걸 없애는 목적을 두는 것이 진정코 사악한 다른 삿진리의 원일래기지 어디서나 벗어나고자 하는 이의 바람은 아닌 것이다.그저 제맘대로 하고 싶은게 本性이요 克己하여 本性을 제어하는 것이 異性이란 탈(脫)이다。리성의 관점은 이렇게도 둘수 있다.리성은 어디서 왔는가? 강력한 힘의 억눌림(억압)에서 왔다。그 힘은 곧 사악하기 이를데 없는 삿진리의 그럴듯한 명분과 합리화를 뒤집어 쓴 폭력에서 비롯됐다 할 것이다。진리라 하는 것은 그것만이라 하는 틀에서 벗어나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만이라고 강력히 고집하는 것은 저의 위계와 질서를 굳건히 하기 위해서다.그리하여 저잘낫다고 임금하기 위해서며 떠받듬(고임) 받기 위해서다。그러니 그에서 벗어난 立場에서 볼때엔 꼴불견일 수밖에 더 있겠는가? 삿진리 저의 行에서 벗어나면 저를 부정하고 무너뜨리고자 하는 등등 어떻게든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헐뜯어 깔아뭉갤가봐서이다.그러니 어리석다 할 수밖에 더 있겠는가? 물론 그러함도 개중엔 혹 있을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전부는 아닌 것이다。설령 깔아뭉게임 당해 잡초나미물이나 몽게 흙이나 진흙처럼된다한들 무슨 상관있으리실은 이상과 같은 것도 있어 잠자코 있는데…
무엇이 위대하고 고매하다고 콧대를 높이고 있는 것인가? 願(寃)의 덩이로써 크게 자랑할 것도 없으면서 물레테처럼 돌면서 하염없는 욕망의 불꽃을 뜨거운 태양처럼 이글거리고 있는 것이다。그 作爲의 먹이 되어 희생되는 삼라가 애처러울뿐이다. 슬기있는체 하는 개중의 삼라들은 스스로 일컬어 주제넘게도 성자의 버금가는냥 하고 그렇게 일컬어 주기를 기꺼워하고 또 식견이 많은 他삼라들을 그 성자들이라 하니 가소롭기 그지 없음이다。밥이고 음식이 되었다가 개밥에 도토리 꺼져라인줄 모르고 말이다(글 되어 돌아감이 어휘나 단어를 줏어다 붙치는 것이 고상과 下발을 넘나들고 주제를 잃은지 이미 오래인 것 같게 돌아간다)
그냥 가만히 있는데 누가 그 성자를 성자이라 하겠는가? 성자는 오직 가만히 있느니라 輕居치 말고 가만히 있을뿐이다. 무슨일이 일어나더라도 요지부동 인내(忍耐)하는 것처럼 하고 있으면 그 醒이라.
하지 않더라도 醒이리라
그된바(겉생김)로 노릇하는게 異性이다. 겉만 갖고 판단짓지 말라 하는 것은 겪어봐야 하는 것 알 수 없는 것、그렇기 때문에 心相에 여러가지 뒤바뀜 있다 하지 않았는가?) 사람은 사람노릇하고 萬有는 그 노릇하는게 진리界의 正常이다.(以上의 글들이 대단하게 정신의 혼란을 加重시키는 글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