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약하고 어리석하며 한 조각의 위엄조차 없더라도 살아남으려고 하는 힘만은 갖고 있다?이것이 희극의 핵심이다."
<바냐>와 상관없이 읽은 책에 나온 말인데, 뭔가 인상적이었고 이번에 새로 작품을 읽으면서 다시 생각났다. (일본어책에 나온 말을 번역한 것이라 문장이 매끄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당‘’) 어떻게 보면 아주 단순한 말이며, 동물적인 삶의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런데 이런 단순함에 도달하기가, 그것을 깨닫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다른 측면에서도 ‘단순함’을 체현하는 것은 쉽지 않는 것 같다. 글쓰기 방식 하나만 해도 그렇다. 난 오랫동안 형식적인 글만 쓰며 일본어적인 표현 방식을 버리라는 말을 들고 왔으니, ‘,’를 쓰는 것도 오랜만이다. 타이핑을 하기 시작하면, 여러 가지 형식에 대한 생각들이 떠오르고 그냥 단순하게 내 생각으로만 글을 썼을 때 내가 어떤 글을 쓰고 있었는지 생각 안 난다. 그나마 손 글씨로 쓰면 그런 심리적 속박이 없어지지만, 지금 쓰는 노트의 글들도 예전같이 않은 부분들이 많다. 물론 이런 점에 대해서는 장단점이 있지만, 뭔가 하나 기술을 얻은 대신에 아주 감각적으로 둔해진 기분이다. 골빈다는 뜻으로 단순해진 기분. “난 언젠가 자신의 감정을 소홀히 한 벌을 받을 것이다.” 이번 달 일본 갔다 왔을 때, 청소하다 우연히 발견한 노트에 써 있었다. 왜 쓴지는 생각 안 나고 아마 중학생 때쯤 쓴 거라 문장에 비해 상황이 심각하지 않았던 건 확실하기만, 하여간 뭔가 지금 읽어야 했기에 읽게 된 것 같았다.
그러니, 이번에 WS을 통해 ‘단순함’으로서의 ‘나’에 집중하며 세심하게 작품/인물에 다가가는 시간을 갖게 해주신 것은 너무 고맙고 아주 중요한 과정인 것 같다. 배우를 지향하는 사름뿐만 아니라, 인간성을 키우기 위한 과정으로서도.
월요일에 수업을 들으면서 그런 생각을 재차 하다보니까, 일회성의 예술로서의 연극에 대한 생각도 조금 달라졌다. 재현 불가능하며 현상과 결과로서의 ‘일회성’이 아니라, 그 안에 포함되는 다양하며 수많은 요소들과 그것의 상호작용. 나의 변화도 나의 ‘지금’도 물론 거기에 포함되어 있으며, 그러한 머리로만 이해했던 부분들을 지각하게 되니 새삼스럽게 놀랐다.
아무튼...내일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거의 개인 일기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공적인 의미부여를 하기 위해 덧붙여서 말하면, 위의 문장은 조셉 미커(Joseph.W.Meeker)가 1970년대에 쓴 『The comedy of survival: studies in Literary Ecology』에서 인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