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 겨울이든 그 겨울은 인간에게 어떤 그림자를 남긴다. 그림자가 길어지고 상념도 깊어진다. 그림자야 말로 인간에게 영혼의 표식이 아니겠는가.
그 그림자 하나 달고 산다. 때로는 길어지고 때로는 짧아지고 하는 그림자의 시간에서 인간은 그 자신의 생을 산다.
시인은 '드문 겨울'에서 어떤 기도를 듣는다. 그 여인을 쓰다듬어 주는 손길은 시인의 손길일 수도 있다. 그것이 마음의 결일 것이다. 여인의 울음은 시인의 울음일 수도 있다. 그것이 생의 그림자를 어루만져주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들 어떤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인가. 연화대에서 몸을 움직여 기어이 내려와 어깨를 어루만져 주는 손길을 바라지 않을 이가 누구일 것인가.
온 나라가 뒤숭숭하면 사람들은 '속날개까지 적신' 후 '생솔 태우는 노파의 젖은 눈 같은 체읍涕泣'을 흘리기 마련이다. 그것들은 모두 기도이다. 사람의 몸짓은 모두 기도이다. 생을 사는 이들의 기원은 '비 끝을 물고 일제히 처마 끝을 박'차 오르는 것에 있다.
시인은 관찰자 시점으로 모든 시를 관통하고 있지만, 모든 사물 안으로 스며있기도 하다. 대상인 동시에 행위자인 주체다. 시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시인 그 자신의 몸이다. 너와 나의 구별이 사라진 대상들은 모두 시인 그 자신이다. 그렇기에 그 연민은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 여기에는 어떤 자유가 있다. 모두 나인 것에 어찌 차별이 있겠는가. 모든 대상에 대한 해방은 그렇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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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문 겨울> _이호준_
그해는 겨우내 눈이 오지 않았습니다 대신
며칠씩 비가 내렸습니다
북쪽 어느 강마을은 얼음이 다 녹아서
오랫동안 준비한 겨울축제를 못 열게 됐다고
아우성이었습니다
온 나라가 뒤숭숭한 겨울이었습니다
팔작지붕 끝 풍경 소리도 흠뻑 적었습니다
석가세존 앞에 한 여자 엎드려 있었습니다
어깨 가득 울음을 매달고 있었습니다
전생 어느 아득한 곳을 울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 생에 박힌 옹이가 그리 서러워서
생솔 태우는 노파의 젖은 눈 같은 체읍涕泣
끝없이 흘러내리는 청동빚 시간이
뺨을 적시고 무픞 지나 바닥에 흥건했습니다
번개가 가끔 먹장구름을 반으로 갈랐지만
푸른 하늘은 아주 실종된 것 같았습니다
천둥소리 다시 산마루 넘는 순간
석가세존 옷자락 여미며 연화대에서 내려왔습니다
천천히 여인에게 다가가더니
허리 굽혀 떨리는 어깨에 손을 얹었습니다
울음 잦아들고 꽃살문 번해지고
사나흘 기왓장 두드니던 빗소리 뚝 그쳤습니다
속날개까지 적신 새 몇마리
비 끝을 물고 일제히 처마 끝을 박찼습니다
드물었던 겨울, 정오 무렵이었습니다
* 체읍涕泣 / 소리를 내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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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드문 겨울'을 몇 번을 읽어본 후에야 시의 마음에 닿은 듯했습니다. 그렇게 '드문 겨울'이 비로소 나에게 왔습니다. 그 느낌을 적어 보았습니다. 그냥 읽으면 별 의미 없는 묘사처럼 다가오지만 이내 반복적인 낭송을 통해 시는 어느 순간 빗장을 엽니다. 한 세계가 열립니다. 하나의 세계 안에 모든 세계가 담겨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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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준시집_사는거_그깟_도서출판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