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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S
기계가 먼지 크기로 줄어든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테세우스와 미로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얘기가 만약 마이크로 세계에서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미로를 개미도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작게 하고 테세우스도 작게 만들어서 ‘마이크로 테세우스’가 ‘마이크로 미로’를 빠져나오게 하면 어떨까?
마이크로 미로 속 마이크로 테세우스_ 이를 위해서는 먼저 마이크로 수준의 미로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미로를 구현하려면 MEMS 기술이 필요하다. 실제로, 지금의 MEMS 기술로도 폭이 수mm에서 수μm 정도 되는 매우 가는 통로(또는 유체 통로)를 만들 수 있다. 이 통로의 모양을 복잡하게 하면 미노스의 미로를 만들 수 있다. 그런 다음 ‘마이크로 테세우스’가 마이크로 미로에 들어가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한다.
장난에 불과할 것 같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지금의 공학자들은 매우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마이크로 테세우스’가 ‘마이크로 미로’에서 탈출할 방법에 대해 연구한 다음, 마이크로 미로를 설계하고 제작하며 마이크로 테세우스가 미로를 탈출하는 실험을 하는 것이다. 이는 필자가 이끄는 서울대 전기공학부 마이크로머신 연구실에서 대학 4학년 실험 프로젝트로 제공하는 주제 중 하나다.
이쯤에서 독자들은 MEMS 기술이란 대체 어떤 기술이기에 이처럼 허무맹랑한 얘기가 대학의 실험 프로젝트로 다루어지는지 자못 궁금할 것이다.
MEMS는 ‘Micro Electro Mechanical System’의 약자다. 우리 말로 길게 표현하면 ‘마이크로 전자기계 시스템’이 된다. 이 기술은 말 그대로 전자기계 소자를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마이크로 규모로 제작하는 기술을 일컫는다. MEMS 기술을 개략적으로 정의하면 ‘아주 작은 기계 구조물을 제작하는 모든 분야에 응용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이크로 세계의 소자 덕택으로 책 크기의 컴퓨터가 탄생했고 손바닥 안에 쏙 들어가는 휴대전화가 널리 쓰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20세기 후반의 마이크로 세계에서는 전기적으로 동작하는 회로소자들이 비약적으로 발전해 왔다. 그러나 21세기에는 회로소자와 함께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MEMS 소자들이 우리의 생활을 바꾸어 놓을 것이다.
MEMS 기술은 기존의 반도체 공정, 특히 집적회로 기술을 응용한 미세 가공 기술을 이용한다. 미세 가공 기술을 마이크로 단위의 초소형 센서나 구동기 및 전기 기계적 구조물을 제작하는 데 응용하고 있는 것이다. 미세 가공 기술로 제작된 미세 기계는 mm 이하의 크기거나 μm 이하의 정밀도를 구현할 수 있다.
MEMS 기술이 출현한 것은 1970년대, 반도체 제작 기술로 주변회로를 내장한 집적화된 센서를 개발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1980년대 초반에는 스프링, 외팔보(수영장의 스프링보드 같은 구조) 등의 미세 기계 요소들이 제작되었다. 1980년대 후반에는 마이크로 집게, 모터, 기어 등 기판에서 분리된 미세 구조물이 제작되었으며, 1990년대 이르러서는 센서, 논리회로 및 구동기가 집적된 형태로 발전됐다.
벌레보다 작은 MEMS 소자_ 옆의 사진은 미국 샌디아 국립연구소에서 제작한 마이크로 톱니바퀴의 모습을 전자현미경으로 찍은 것이다. 사진에서 보이는 톱니바퀴의 크기는 100~200μm로, 사람 머리카락 한 올 또는 두 올의 굵기에 해당한다. 이 정도로 작은 구조물을 자유로이 제작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여러 기기들을 만들 수 있다.
MEMS 기술의 장점은 초정밀 미세 가공을 통해 소형화, 고성능화, 다기능화, 집적화가 가능하며 안전성 및 신뢰성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일체화된 집적 시스템이 구현 가능하므로 조립 필요성이 감소되며, 한꺼번에 제작되므로 값싸게 양산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MEMS 기술은 정보통신, 자동차, 항공, 방위, 의료, 생명공학 등 다양한 산업 제품의 핵심기술로 부상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는 MEMS 기술로만 제작되어 응용되는 제품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하지만 MEMS 기술을 이용해서 제품의 기능을 향상시키거나 새로운 제품을 창출한 예는 많다. MEMS 기술은 다른 분야의 기술과 접목해 큰 상승효과를 낼 수 있는 핵심기술인 셈이다. 실제로 현재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가전기기 중에도 MEMS 기술로 제작한 소자를 사용하는 것이 있다. 그렇다면 MEMS 기술을 활용한 제품으로는 어떤 것이 있는지를 살펴보자.
우리집 안의 MEMS_ 잉크젯 프린터는 MEMS 소자를 이용한 대표적인 기기다. 잉크젯 프린터는 가격이 싸고 소형이며 유지가 간단하다는 것이 장점이다. 이런 이유로 잉크젯 프린터는 컴퓨터 기기를 가정으로 보급시킨 일등공신이 되었다.
잉크젯 프린터의 핵심기술은 잉크를 뿜어내는 헤드에 있다. 헤드에는 여러 개의 구멍이 있고, 이 구멍을 통해 잉크를 뿜어낸다. 어떤 구멍에서는 잉크를 뿜어내고 어떤 구멍에서는 뿜어내지 않는 방식으로 글씨를 점으로 구성한다. 따라서 작은 구멍으로 미세한 잉크 방울을 신호에 따라 가능한 빨리, 그러면서도 번지지 않게 뿜어내야 하는 것이 헤드 기술의 핵심이며, 이에 적합한 헤드를 만드는 데 MEMS 기술이 동원되고 있다.
헤드는 잉크를 뿜어내는 작은 구멍, 그 뒤에 있는 작은 잉크 보관방, 그리고 그 방에 장착된 히터나 구동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각각이 미세한 양의 잉크방울을 떨어뜨리기 위해서는 마이크로 단위로 기계전자 구조물을 제작하는 MEMS 기술이 필요하다.
대형 프로젝션 TV 속의 핵심소자도 MEMS 기술로 제작된 것이 많다. 프로젝션 방식의 대형 TV에는 수백만 개의 마이크로 거울들이 사용되는데, 이 거울도 MEMS 기술로 만든다. MEMS 기술로 너비가 16μm인 마이크로 거울을 줄을 맞춰 200만 개를 제작하고, 이 거울들을 TV 화상 신호에 따라 왼쪽 또는 오른쪽으로 기울인다. 왼쪽으로 기울이면 빛이 화면으로 반사되어 밝게 보이고, 오른쪽으로 기울이면 빛이 화면 밖으로 반사되어 어둡게 보인다. 그러면 흑백의 점이 만들어지고 이를 멀리서 보면 화상이 된다. 그리고 거울에 비추는 빛을 빨간 빛, 파란 빛, 녹색 빛으로 하고, 이들을 적당한 시간차를 두면서 달리 비추면 천연색 화면을 만들 수 있다. 이러한 마이크로 거울들을 이용하면 너비 2m 이상의 큰 화면을 만들 수 있으며, 가까운 미래에 영화관의 영사기가 이 방식으로 바뀔 전망이다.
휴대전화는 앞으로 MEMS 기술이 다양하게 적용될 대표적인 대상이다. 휴대전화에는 수많은 스위치가 사용되고 있다. 우리가 불을 켜고 끌 때 사용하는 전등 스위치와 마찬가지로 휴대전화에 쓰이는 수많은 스위치는 전기 신호를 전달하는 선을 끊어 놓고 있다가 원할 때 신호선이 연결되도록 도체를 이어서 전기 신호를 통과시킨다. 이런 스위치들이 앞으로는 MEMS 기술로 제작될 것이다.
휴대전화로 주고받는 정보의 양이 점점 커짐에 따라, 앞으로 휴대전화에는 현재보다 주파수가 높은 고주파가 사용될 전망이다. 이럴 경우 기존의 반도체 스위치보다 MEMS 스위치가 월등한 성능을 보이게 된다. 또한 스위치뿐 아니라 다른 전기전자 부품도 MEMS 기술로 제작할 수 있다면 휴대전화의 소형화와 다기능화도 훨씬 빠르게 이루어질 것이다.
칩 위의 실험실_ 많은 사람들이 ‘화학 실험실’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책상 위에 플라스크나 비커 등이 있고 이것을 어지럽게 연결하는 유리관이 있으며 알코올 램프로 가열해 김이 나고 화학 반응으로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장면을 떠올린다. 그런데 MEMS 소자를 사용한다면 화학 실험실도 이렇게 복잡할 필요가 없다.
MEMS 기술은 동전 크기의 실리콘 칩에 마이크로 밸브, 펌프, 유체 통로, 히터, 혼합기, 분리기 등을 만들 수 있게 해 준다. 그리고 이 칩에서 화학 반응, 분리, 정제, 분석, 측정 등 복잡한 화학 실험을 할 수 있다. 화학 실험실을 통째로 칩 위에 올려놓는 것이다. MEMS 기술로 칩 위의 실험실이 구현되면 반응 시간이 줄어들고 실험의 재현성과 편이성이 좋아져서 초보자도 쉽게 실험할 수 있게 된다.
실제로 우리 연구실에서 제작한 화학 실험실 칩과 컴퓨터를 연결한 시스템으로 실험을 했더니 종래의 방법으로 일주일 걸리던 실험 시간이 반나절로 줄어들었다. 그 반나절도 기계가 한 시간이고, 실험자가 한 일은 더 간단했다. 실험 전에 실험 방법을 컴퓨터에 입력하고 실행 키를 누르는 것으로 사람이 할 일이 끝났던 것이다. 그 후의 모든 과정, 즉 주어진 명령의 순서대로 펌프를 작동시키고 밸브를 여닫고 빛을 쪼이고 가열하는 등의 모든 일은 컴퓨터와 화학 실험실 칩이 알아서 처리한다. 이렇게 실험에 할애되는 노동 시간이 줄어들면 실험자는 더 많은 관련 정보를 더 모으고 다음 연구 계획을 짤 수가 있어, 연구의 효율성이 올라가게 된다.
새로운 것만이 세상을 바꾼다_ 이처럼 MEMS 기술은 불가능해 보였던 많은 일들을 가능하게 해 줌으로써 미래 사회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할 전망이다. 20만 원도 안 되는 가격에 컬러 프린터를 마련할 수 있게 된 것도, 2m도 넘는 화면을 밝은 방에서 볼 수 있게 되는 것도, 화학 실험실이 동전 크기의 칩 위로 옮겨가고 비행기에나 채용됐던 각속도 센서를 장난감에 장착할 수 있게 되는 것도 모두 MEMS 기술 덕택이다.
뿐만 아니라 MEMS 기술은 세상을 바꿀 새로운 것들을 만들 수 있다. 못 걷던 사람이 걷게 되고 안 들리던 사람이 듣게 되며, 자동차가 눈길에도 미끄러지지 않는 것은 물론, 어두운 밤에도 적외선 영상으로 길을 횡단하는 사람을 볼 수 있어 사고를 방지하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멀리 우주에서 오는 별빛을 깨끗이 볼 수 있어서 새로운 별을 발견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MEMS 기술이 이를 가능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이처럼 눈부신 미래를 선사해 줄 21세기 초소형 전자기계 시스템 제조기술인 MEMS는 아직 프론티어 산업에 속한다. 기업에서도 최근에서야 집중적으로 투자하기 시작하고 있는 형편이지만, 그런 만큼 아직은 개척되지 않아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높은 분야다. 도전 가치가 높은 만큼 성공한다면 보상도 크다. 미래의 주역이 되고 싶다면, 세상을 자신의 손으로 바꿔 보고 싶다면 MEMS 기술이 그 해답을 제공할 것이다.
_ 김용권·서울대 전기공학부 교수
P r o f I l e _
김용권 교수는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일본 도쿄대 전기공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일본 히타치제작소 중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했고, 1992년부터 서울대 전기컴퓨터공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현재 디스플레이, 자동차, 무선통신, 바이오 분야에 응용되는 MEMS 소자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