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실 CCTV, 국민 80%는 달아달라는데 의료계의 저항 통할까
CCTV 설치 법안 몇 년 째 발의→자동폐기 되풀이
의료계 "인권 침해 우려" vs 시민단체 "환자 권리"
이재명 "與, 반드시 처리를"…이달 안 처리될까
2016년 9월 8일 서울 강남의 한 성형병원에서 대리 수술로 숨진 고 권대희씨의 수술 모습으로, 성형 수술 직후 간호조무사가 홀로 지혈 조치하는 모습이 찍힌 폐쇄회로(CC)TV 장면. 권씨의 피로 시트(오른쪽 원)가 검붉게 물들었고, 경고 장치(왼쪽 원)에 불이 깜박이고 있다. 고 권대희씨 유족 제공·한국일보 자료사진
"더불어민주당 지도부에 '수술실 폐쇄회로(CC)TV 설치' 법안을 당론으로 채택해 주길 건의드린다. 이 사안이야말로 180석이란 절대다수 의석으로 강행 처리할 사안이다."
민주당 소속인 이재명 경기지사가 3일 페이스북에 이 같이 적었는데요. 친정 민주당에 특정 법안을 '왜 처리하지 않느냐'고 에둘러 지적한 게 이례적입니다. 야당과의 관계도 있는데 적극적으로 나서달라고 한 점도 눈에 띄고요.
이 지사가 수술실 CCTV 설치에 대해 강한 주장을 펴는 건 본인의 정책 트레이드마크이기도 하지만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인데요. 바로 국민 여론입니다. 이 지사가 "수술실 CCTV는 80~90%의 국민이 지지하는 법안"이라고 말한 것처럼 국민 다수가 압도적 지지를 보내는 정책입니다.
지난해 8월에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수술실 CCTV 설치 의무화를 촉구하는 청원 글이 올라왔고, 단숨에 정부 답변 요건인 20만 명이 동의했죠.
80%가 넘는 국민이 찬성하는 '수술실 CCTV 설치'
2018년 10월 12일 이재명 경기지사 주재로 수원시 경기도청 집무실에서 열린 경기의료원 수술실 폐쇄회로(CC)TV 설치 시범운영 관련 토론회 모습. 경기도 제공
실제 최근에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볼까요.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TBS 의뢰로 지난달 28·29일 전국 성인남녀 1,004명을 대상으로 수술실 CCTV 설치 의무화 찬반 조사를 한 결과(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 응답자의 80.1%가 찬성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반면 '반대한다'는 9.8%였는데, '잘 모르겠다'(10.1%)보다 적었습니다.
그런데 압도적으로 높은 찬성 여론에도 정작 국회는 지지부진한 논의를 수년째 이어가고 있습니다. 대한의사협회를 등에 진 의료계가 강하게 반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법 의료행위 탄로→국민적 공분→수술실 CCTV 설치 법안 발의→의료계 반대→법안 폐기'만 반복하고 있죠.
의료계는 의사들과 환자의 인권을 이유로 반대하는 반면, CCTV 설치를 찬성하는 쪽은 의료계의 기만행위를 더는 눈 뜨고 볼 수 없다며 맞서고 있습니다. 양쪽 모두 결판이 나지 않는 줄다리기만 계속하고 있는 셈이죠.
"신규 간호사 처음 배우는 일, 의사 ID로 처방 내는 방법'
국제 간호사의 날인 지난달 12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하이서울 유스호스텔 대강당에서 열린 2021년 한국간호사의 현실 불법의료행위 중단 촉구 보건의료노조 현장 좌담회에서 간호사들이 발언하고 있다. 뉴스1
그런데 수술실 CCTV 설치 문제는 최근 보건의료 노조의 양심 고백과 국민권익위원회의 여론조사가 맞물리며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보건의료노조는 지난달 12일 국제 간호사의 날을 맞아 불법 의료행위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이들은 대형병원일수록 수술실 내 불법 의료행위가 만연하다고 폭로했죠. PA(Physician Assistant·진료보조인력)가 수술실에서 심장 마사지를 하는 건 물론 복강 내 배액관 삽입, 담낭·위장 절제도 간호사의 역할이라고 했죠.
이들은 "신규 간호사가 들어오면 의사 아이디(ID)로 처방 내는 방법부터 가르친다", "간호사가 의사 대신 동맥 라인을 잡다 신경을 잘못 건드려 팔을 절단한 환자도 있었다" 등 수술실 실태를 밝혔습니다.
8년 전에도 '2·3차 병원 수술의 99%는 오더리가 한다'
한국일보 2018년 9월 8일 자에 실린 '의료기기 영업 사원의 대리 수술' 기사. 한국일보 자료사진
하지만 이들의 고백이 처음 있는 일이 아니라 씁쓸하게 하는데요. 수술실에서 일어나는 대표적 불법 의료행위인 대리 수술, 유령 수술, 수술실 내 성추행 문제는 이미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죠.
한국일보가 다룬 수술실 문제 기사만 보더라도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란 걸 알 수 있습니다.
2013년 3월 2일 자에는 경남 김해시 한 종합병원장이 하루 15건의 수술과 135건의 외래진료를 해 덜미가 잡혔다는 기사가 나갔습니다. 당시 노환규 의협 회장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2·3차 병원의 99%가 오더리(비의료인의 의료 행위)를 쓴다"는 댓글이 달리기도 했습니다.
한국일보 2013년 3월 2일 자에 실린 '2·3차 병원 99%, 오더리 활용' 기사. 한국일보 자료사진
2015년 12월 22일 자에는 대한성형외과의사회가 서울 강남의 한 성형외과의 유령 수술 피해자가 최대 20만 명이 넘는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한 내용이 실렸습니다. 유령 수술은 환자를 상담한 의사 대신 신참 의사가 대신 수술을 하는 행위입니다.
2018년 9월 7일 자에는 의료기기 영업사원에게 대리 수술을 시켜 환자가 뇌사상태에 빠지자 진료기록 등을 조작한 전문의와 간호사 등이 검거됐다는 기사가 나갔죠.
의료계 "환자·의사 인권, 소극적 의료 걱정된다"
한국일보 2019년 6월 24일 자에 실린 수술실 내 폐쇄회로(CC)TV 설치에 반대하는 의료계 입장을 다룬 기사. 한국일보 자료사진
불법 의료행위가 고질적 사회적 문제가 된 만큼 정치권도 제도 개선에 나설 수밖에 없는데요. 그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닙니다. 그런데 법안이 발의되는 족족 모두 자동폐기 수순을 밟았는데요. 20대 국회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김상희 국회부의장이 2016년 8월 당시 수술실에 CCTV를 설치해 수술 장면을 녹화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의료법 개정안'을 발의했습니다. 한 달 전 서울삼성병원의 대리 수술 행위가 적발된 게 계기였습니다.
CCTV 설치 의무화 법안은 19대 국회에서도 발의됐는데요. 당시 최동익 민주당 의원이 대표발의했지만, 역시 의료계의 반대로 자동폐기됐죠.
지난달 26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제1법안심사소위가 주최한 수술실 영상정보처리기기 설치 관련 의료법 일부개정법률안에 대한 공청회에 이나금 환자권익연구소장(앞줄 왼쪽부터), 오주형 대한병원협회 협력위원장, 안기종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대표, 김종민 대한의사협회 보험이사가 진술인으로 참석하고 있다. 뉴스1
의료계는 왜 이토록 반대하는 걸까요. 환자와 의사의 인권 침해 가능성을 가장 걱정합니다. 환자의 주요 부위가 찍히고 영상이 유출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죠. 의사들은 자신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한다며 반발하고 있습니다.
또 의료 행위 관련 분쟁이 늘어나고 이에 대응하고자 소극적 의료 행위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의사들은 지난달 26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서 열린 수술실 CCTV 설치 입법 관련 공청회에서 반대 입장을 명확히 했는데요. 다만 의료계가 국회 공청회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는 건 잘 없는 일인데, 그만큼 CCTV 설치에 대한 여론을 심상치 않게 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날 공청회에 의료계 대표로 참석한 김종민 대한의사협회 보험이사는 "간혹 일어나는 절도 행위를 예방하기 위해 찜질방이나 목욕탕에 CCTV를 설치하자고 한다면 다수가 반대할 것"이라며 "극도로 예민한 신체 부위가 노출되고 누군가에 의해 감시받는다는 건 사생활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반대다, 신뢰 회복에 대한 의지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저희는 CCTV로 이뤄낼 공익보다 더 많은 것을 잃을 것 같아 우려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오주형 대한병원협회 협력위원장은 "선진국에선 의무화 사례가 없는데, 대한민국 의료가 과연 CCTV 설치를 강제할 만큼 의료 후진국인가 하는 의문과 함께 의료인으로서 자괴감마저 든다"며 "CCTV 한 대로 의료 불법 행위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지나친 행정편의주의"라고 비판했습니다.
경기의료원장 "CCTV, 대리 수술·성범죄 예방 효과 강해"
2018년 9월 경기의료원 산하 안성병원의 수술실 내부에 설치된 폐쇄회로(CC)TV 녹화 모습. 경기도 제공
그렇다면 의료계의 주장처럼 수술실 내 CCTV는 사회적 혼란을 불러오게 될까요.
공청회에 참석했던 안기종 환자단체연합회 대표는 "의료사고 입증이 주목적은 아니다"라면서 "무자격 대리 수술이나 유령 수술, 성범죄 같은 걸 예방하는 것이 핵심"이라며 반박했습니다. 의사들의 방어적 진료 우려에 대해서도 불필요한 의료 분쟁이 줄어들 것이라고 했죠.
이미 2년 전 수술실 안에 CCTV를 설치한 경기의료원은 '기우'에 불과하다며 오히려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하는데요.
경기의료원 산하 6개 병원은 수술실마다 CCTV를 달았습니다. 수술 장면은 환자로부터 동의를 받은 뒤 녹화되고 음성은 녹음되지 않습니다. CCTV 설치 이후 전체 수술의 66%인 2,624건이 녹화됐는데, 의사들의 우려처럼 의료 분쟁은 없었다는 게 경기의료원의 설명입니다.
2018년 5월 부산의 한 병원에서 의료기기 영업사원에게 대리수술을 시키고 환자가 뇌사상태에 빠지자 진료기록 등을 조작한 전문의와 간호사 등이 검거된 가운데, 그해 5월 10일 사복 차림으로 수술장을 빠져나가는 전문의가 병원 내 폐쇄회로(CC)TV에 찍힌 모습. 연합뉴스
정일용 경기의료원장은 최근 한 언론 인터뷰에서 "의사들이 처음에는 CCTV를 인식했지만, 천장 모퉁이에 달아놓았기에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른다. 결과적으로 잘 적응하고 있다"며 "범죄에 해당하는 대리 수술이나 폭행, 성희롱, 성추행 이런 문제를 예방하는 측면이 강하다"고 평가했습니다.
각종 단체들도 속속 입장을 내며 CCTV 설치 의무화 추진에 힘을 싣고 있는데요. 한국소비자단체연합은 앞서 1일 입장문을 통해 관련 법안의 조속한 처리를 촉구했습니다. 이들은 "환자의 생명과 직결된 문제가 발생해 의료소비자들을 보호하고 최소한의 알권리 보호를 위해 반드시 법으로 보장돼야 한다"고 지적했죠.
2019년 5월 11월 국회 앞에서 수술실 폐쇄회로(CC)TV 법제화 촉구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이나금씨. 성형외과의 과실로 아들을 잃은 이씨는 "의료사고가 났을 때 진실을 밝히기 위해 CCTV는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환자단체연합회 제공·한국일보 자료사진
상황이 이렇자 국민권익위는 지난달 31일부터 수술실 CCTV 설치에 대한 국민의 찬반 의견 조사에 들어갔습니다. 권익위는 온라인 정책 참여 창구 '국민생각함'을 통해 2주 동안 찬반 의견을 받고 있습니다.
국회 보건복지위는 지금 민주당 의원들이 발의한 관련 법안을 심사 중인데요. 민주당은 다음 달 열리는 임시국회에서의 처리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다만 정부의 중재로 '수술실 입구 CCTV 설치 의무, 수술실 내부 선택적 설치'가 절충안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정치권이 이번만큼은 지지부진한 논의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까요?
※여론조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KSOI 홈페이지나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