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뿌리를 찾아주세요” 희망의 끈 이어줄 시민 제보 ‘간절’
해외입양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우리 아이들을 한국에서 떠나보낸 지 60여년이 흘렀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해외입양인들은 매년 모국을 방문해 가족을 찾고 있지만, 한국어도 서툰 그들이 흩어진 조각을 맞춰가며 자신의 뿌리를 찾기란 쉽지 않다.
2013년 11월, 본지를 통해 소개된 홍광명 씨 또한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가족을 찾기 위해 한국의 관공서와 입양기관을 찾았지만 부족한 자료 탓에 이렇다 할 정보를 얻지 못한 상황이다.
이에 홍씨는 파이낸셜뉴스와 경찰청182 실종아동찾기센터가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는 ‘잃어버린 가족 찾기’ 캠페인과 당시 영아원 소재지 지역신문인 본지에 사연을 접수했지만 이 역시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럼에도 홍씨는 양주영아원에 머물다 미국 및 유럽 가정에 입양된 8명의 해외입양인과 함께 ‘Korean Adoptees from Orphanage Yangju, Dongducen’을 Facebook에 만들어 정보를 교환하고 서로를 위로하면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양주영아원은 1963년 양주군 동두천읍 생연6리 397번지에서 애신재단이 운영하던 곳으로, 시설카드에 의하면 1972년 양주영아일시보호소로 이름이 바뀐 뒤 1976년 다른 이의 소유가 되면서 사회복지법인 협양원으로 개칭했다.
안타깝게도 그 이후의 자료는 동두천읍이 시로 승격되고 양주에서 보관하고 있던 자료를 이관 받는 과정에서 영아원 자료가 누락된 것으로 추정, 현재는 150여명의 입양인 중 3~40여명의 이름과 생년월일, 운이 좋으면 사진과 유기장소 등의 최소자료만 남아 있는 상태다.
그러나 발견 당시 대부분이 유기아동이었던 탓에 생년월일은 영아원에서 아동 신체발달에 따라 추정했으며, 이름 또한 영아원에서 작명한 것으로 실제 가족이 기억하고 있는 정보와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홍씨의 지인인 김진미 씨는 “그동안 희미하게 알고 있던 해외입양아들의 가족 찾기의 현실적 고충을 이해하게 돼 작게나마 힘을 보태고 있다”며 한국말을 모르는 이들을 대신해 한국에서 해당기관 및 언론사에 사연을 접수하는 등 가교역할을 하고 있다.
김씨 외에도 당시 양주영아원에서 자원봉사를 하던 미군 Larne이 도움을 주고 있지만, 주요 정보가 충분치 않아 시민들의 제보가 절실하다.
▲이복실
1972년 1월 29일 의정부시에서 발견된 후 양주영아원으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입양기관인 동방사회복지회와 Dillon International Inc를 통해 1974년 미국 네브레스카에 거주하는 백인부부에게 입양됐으며, 현재는 아리조나 챈들러에 거주하고 있다.
유년기 기억은 없으며, 의료문제로 생모를 찾고 있다.
▲이동순
1972년 11월 2일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서류에 의하면 1974년 1월 8일 오후 3시 10분경 양주영아원에서 발견됐다.
1975년 3월 1일 20여명의 영아원생들과 함께 입양을 위해 미국으로 향한 기록이 있으며 이때 이애숙, 이경순 씨와 함께 출국한 것으로 보인다.
특이사항으로 입양 당시 1년 반이나 큰 양 오빠보다 치아가 많아 추정생일보다 나이가 많을 가능성이 있다.
뉴욕 롱아일랜드에서 성장했으며, 12년 전 결혼해 2살 된 딸아이가 있고 현재는 회계사로 오렌지카운티에 거주하고 있다.
“친 가족에 대한 원망은 없습니다. 제가 어디서 왔고 제 삶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가족의 누구를 닮았는지, 제가 버려져야 했던 상황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이애숙
1973년 4월 1일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이애숙 씨는 의정부시 최앵철 씨 문전에서 발견돼 양주영아원으로 이송됐다.
1974년 미국 뉴욕으로 입양될 아이들을 호송하기 위해 방문한 미국인 양모에게 입양이 결정돼 1975년 3월 1일 미국에 도착했으나 폐결핵과 B형간염으로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다.
양모는 뉴욕 롱아일랜드 지역 가정과 양주영아원생 입양에 다리가 되는 역할을 했으며, 이씨 말고도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한국인 언니와 2명의 미국인 오빠를 입양했다.
이씨는 4년 전 결혼해 현재 코네티컷 뉴헤이븐에서 주얼리디자이너로 재직 중에 있다.
“40년간 거울을 보며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느낌으로 살아왔습니다. 내가 어디서 왔고 어디에 속해 있는지 궁금합니다. 친 가족이나 저에 대한 그 어떤 작은 정보라도 알고 싶습니다”
▲이경순
1973년 11월 20일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1975년 3월 1일 뉴욕 롱아일랜드로 입양됐다.
아일랜드계 미국인 가정에서 2명의 형제자매와 자랐으며 2003년 영국인과 결혼해 9살 아들, 3살 딸아이가 있고 현재는 변호사로 영국에서 살고 있다.
“항상 친엄마를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어디서 왔고, 어디에 속해 있는지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은 아마도 인간의 본성이겠죠”
▲김숙히
1965년 2월 출생한 김숙히 씨는 생후 3일 만에 동두천경찰서에서 발견돼 양주군 의뢰로 양주영아원에 입소했다.
1971년까지 영아원에 머물다가 미국 텍사스로 입양됐으며, 그 외의 기억 및 기록이 없어 제보가 절실한 상황이다.
현재는 결혼 후 텍사스에서 두 딸을 키우며 살고 있다.
▲양을순
1968년 10월 30일 의정부시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같은 해 11월 9일 양주영아원에서 발견됐다.
1969년 말 해외입양이 진행되면서 1970년 한국사회봉사회로 옮겨졌고, 같은 해 4월 28일 18개월 때 덴마크로 입양됐다.
30세 때부터 뿌리찾기를 시작해 2000년 여름 처음 한국을 방문, 양주영아원과 동일 재단이었던 동두천 애신보육원, 입양기관이었던 한국사회봉사회를 찾았으나 정보 부족으로 빈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희미하게나마 기억하고 있는 것은 엄마 등에 업혀 함께 도망치다보니 엄마가 옆에서 죽어있었으며, 막연하지만 그 지역 미군과 연계된 것으로 생각된다고 전했다.
기억의 정확성은 알 수 없지만 한국 방문 시 들렀던 동두천 캠프 케이시(Camp Casey)에서의 기억이 데자뷰(deja vu)를 강화했을 수도 있다고 추측하고 있다.
2006년 공교롭게도 1968~1970년 사이에 근무했던 미군 베테랑이 만든 웹사이트 사진을 통해 당시 캠프 케이시와 양주영아원이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 이와 관련된 정보를 찾고 있다.
현재는 결혼해 덴마크 콜딩에서 두 아이를 키우며 시의 기록보관서 책임자로 재직 중이다.
“가족의 끈끈한 혈육의 정을 느끼고 싶고, 무엇보다 가족에게 제가 잘 성장했다는 것을 알리고 싶습니다”
▲이애경
1973년 3월 1일 출생하자마자 영아원에 보내진 것으로 추정된다.
1975년 3월 뉴욕의 미국인 가정에 입양돼 양부모의 친아들 2명, 또 다른 한국인 입양 딸과 함께 성장했다.
지금은 결혼해서 두 아이를 키우며 뉴욕 퀸즈에서 사회복지사로 근무하고 있다.
“지금은 양부모님과 인연을 끊고 살지만 항상 친 가족에 대해 궁금했습니다. 제가 어디서 왔으며 어떤 가족에 속해 있는지 제 뿌리를 알게 된다면 두 아이의 엄마인 저와 우리 아이들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죠”
▲홍광명
1967년 4월 10일 동두천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1969년 3월 4일 양주영아원에 맡겨졌다.
같은 해 10월 한국사회봉사회에 입양희망등록이 됐으나 이듬해 8월까지 적임자가 나타나지 않아 해외입양대상으로 등록, 1970년 네덜란드로 입양됐다.
1970년 입양당시 키는 90cm, 몸무게 12kg이었으며, 이름과 생일은 40여년 전 양주영아원 관리자(곽손영)가 추정한 것이다.
자료출처 : 양주/동두천신문사 허은영기자
첫댓글 우리나라가 책임져야 합니다.
자위가 아닌 타의 의사로 입양된 우리나라 아들 딸들입니다.
이들을 관심갖고 보아주시고, 제보해주시기 바랍니다.
부끄러운일인데.. 지금이라도 정부의 책임있는 정책이 실행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