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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그간 주님께서 제게 베풀어주신 은혜와 축복은 얼마나 큰 것인지요?
요즘 저는 세상 부족하지만 교우들에게 성숙하고 균형 잡힌 성모 신심을 전하기 위해 나름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실 한국 가톨릭교회 교우들의 깊고 강한 성모 신심 앞에 놀랄 때도 많습니다.
성모님에 대한 사랑이 각별합니다. 전 세계 어떤 나라 신자들보다도 묵주기도를 많이 바칩니다. 레지오 마리에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각 본당에는 성모님을 총사령관으로 모신 레지오 단원들이 때로 기도 요원으로, 때로 봉사 부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성모 신심은 조금 성찰과 점검을 필요로 한다고 여겨집니다. 우리가 지니는 성모 신심이 때로 지나치게 개인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인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성모님을 바라볼 때, 신앙의 모델이나 우리 신앙 여정의 동반자로 보기보다 우리의 끝도 없는 바람을 들어주시는 기적의 요술 방망이로 여깁니다. 30년 전 지니고 있던 성모 신심이 조금도 성장하지 않고 아직도 그대로입니다.
성숙하고 균형잡힌 성모 신심을 지니기 위해서는 복음서 안에 등장하는 마리아를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분의 신앙은 성장에 성장을 거듭했으며, 마침내 신앙인으로서 가장 높은 경지에 도달하셨습니다.
우리는 카나 혼인 잔치의 어머니로서 당신 자녀들의 결핍과 고통을 절대로 나 몰라라 하지 않고 팔을 걷어붙이는 어머니, 이웃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어머니를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는 성금요일 골고타 언덕 십자가 아래서 끝까지 혼절하지 않고, 아들 예수님의 육체적 고통에 영신적으로 동참한 어머니, 자신에게 다가온 극심한 고통을 거부하지 않고, 그 고통에 담긴 참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자 노력했던 어머니를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는 구세주 하느님의 잉태라는 자신에게 다가온 너무나 놀라운 초대앞에, 다른 부르심 받은 사람들처럼 거절하거나 도망가지 않고 기꺼이 예라고 응답한 나자렛의 마리아를 바라봐야 합니다.
성숙하고 균형 잡힌 성모 신심의 소유자는 더이상 성모님께 이것 해주세요, 저것 해주세요, 라며 졸라대지 않습니다. 자신의 신앙 여정에 언제나 동반해주신 성모님의 도움에 깊이 감사하며, 이제는 내가 어머니께 무엇을 드릴까? 고민하는 그런 사람이 올바른 성모 신심 소유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비슷한 맥락의 말씀을 우리에게 건네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주님께서 제게 베풀어주신 은혜와 축복은 얼마나 큰 것인지 모릅니다. 남은 생애 동안은 더이상 이것 해주세요, 저것 해주세요, 라고 졸라대지 않을 작정입니다.
그 대신 내게 베푸신 그분의 크신 업적과 자비에 수시로 감사하면서, 아주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매일 그분께 한 가지씩 선물을 드리겠다고 약속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믿음만으로?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실천하지 않으면 믿음도 무너진다>
복음: 마태오 7,21.24-27
어제 꿈을 꾸었습니다. 축구선수 메시와 함께 산속 어딘가를 걷고 있었습니다. 즐거운 상태였습니다. 깊은 계곡물을 발견했고 각자 수영을 즐겼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들어갈 수 없는 깊은 물이었습니다. 두려움 없이 반대쪽까지 갔다가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가는 방향 쪽에서 뱀 두어 마리가 헤엄쳐서 오고 있었습니다. 피할 수는 없는 상황이고 해서 ‘그냥 지나쳐 가줘라!’하는 마음으로 그 옆으로 비켜섰습니다. 그러나 그 뱀들은 여지없이 저를 공격했습니다. 팔로 막아 팔을 두 군데 물렸습니다. ‘빨리 독을 빼내야겠다.’라고 생각하며 잠에서 깼습니다.
사제가 그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런 꿈을 꾸면 꿈 해석을 찾아봅니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어서, 꿈은 나의 무의식의 표현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그랬더니 뱀에 손을 물리는 것은 믿음이 부족하다고 나와 있었습니다.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지 못하고 무언가를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새해 첫날에는 저희가 주교좌 성당이라 주교님들과 교구청, 대리구청에서 사목하는 사제들이 모두 오니 좀 부담되는 날이기는 합니다. 그렇다고 그렇게 긴장되거나 하지는 않는데 ‘그것 때문인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하다 보니 깊은 계곡물도, 지나가는 뱀에 물리는 것도 예전보다는 덜 무서워하고 있었음을 발견했습니다. 물론 뱀에 물렸을 때는 두렵기도 하였지만, 심한 두려움은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아직 믿음이 많지 않고, 앞으로는 뱀에 물려도 죽지 않는 존재라는 믿음,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함을 배웠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어떻게 키워갈까요? 성경 읽고 성체 영하면 믿음이 증가할까요? 한계가 있습니다. 내가 그 믿음으로 살아내면서 그 믿음이 확고해지고 증가하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에도 계속 저의 서품성구인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합니다.”라는 말을 속으로 되뇝니다. 예수님의 따듯한 심장을 갖는 것이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성체를 영해서 내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게 되었다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실천에서 이 믿음이 증거되지 않으면 내가 완전히 그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계속 실천으로 믿음을 확고하게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신교에서 주장하듯 믿음만으로 구원된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것이 “주님, 주님!”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신앙입니다. 믿음과 실천은 손수레의 두 바퀴와 같습니다. 하나가 없으면 바퀴 빠진 손수레처럼 제자리걸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구약의 사울 왕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지만, 그의 불순종은 그의 기초가 취약함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의 위기감이 치솟자 자신이 제사를 지냈습니다. 주님을 부르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이는 ‘불순종의 행위’였습니다. 믿음은 있었으나 실천하지 않은 것입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왕직을 박탈당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은 위험이 닥치면 무너집니다. 믿음만을 강조하는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 전에 다른 성당의 어떤 신자분이 오셔서 면담을 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에게 할 이야기가 없느냐고 하셨습니다. 저는 모르는 분이라 없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거짓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교구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알려져 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분이 그렇게 유명할 증거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분은 미사 때 맨 앞에 앉고 기도도 오래 합니다. 그러나 행동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우리 성당에서는 어떤 봉사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내가 그분에게 아무 할 말도 없다는 것을 거짓말로 여기고는 그럼 자신도 할 얘기가 없다며 나가버리셨습니다. 본인이 먼저 면담하자고 해놓고.
그분은 적어도 아주 조금은 자신이 유명한 인물이라는 믿음이 저를 통해 줄어들게 되었을 것입니다. 행동이 없는 믿음은 그렇게 조금씩 허물어져 갑니다.
반면 성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나 코리텐 붐 여사를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님은 죽기 싫어하는 사람을 대신하여 자신이 죽어주겠다고 했습니다. 이는 보통 인간은 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그 행위를 통해 콜베 신부님은 당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힘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용서하기 싫은 원수를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용서할 때 무엇을 느꼈겠습니까?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힘을 느꼈습니다. 이렇게 믿음이 확고해집니다.
행동이 예수님처럼 되지 않으면 베드로는 결코 예수님처럼 완전하게 물 위를 걷지 못할 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물 위를 걸을 수 있겠어!’라고 의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배신하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며 당신처럼 물 위를 걷게 해 달라고 청할 수 있었을까요? 행동이 그리스도를 닮아있다고 스스로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청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 믿음도 죽게 됩니다.
믿음은 집과 같습니다. 행동은 집의 기초입니다. 행동이 없으면 믿음의 집은 모래 위에 지은 것처럼 고난이 닥쳐오면 허물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뜻에 대한 실천 의지가 확고하면 비로소 허물어지지 않는 믿음의 집이 지어질 수 있습니다. 비록 믿음이 작아도 성장시키고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행동이 기초고 믿음이 집임을 잊지 맙시다. 하느님은 믿음 안에 사시지만, 행동에 기반을 두지 않은 믿음의 집에는, 그 집이 얼마나 화려하건 간에 머무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실 때 몸은 믿음의 집이고 물은 그에 따른 행위입니다. 행위가 없는 자의 믿음은 결국 익사로 끝나고 맙니다. 이 말씀을 명심합시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태 7,21.24-27: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21절).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지금, 이 순간 하느님의 뜻을 행할 때 가능하다. 아버지의 뜻이 바로 아들의 뜻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먼 미래를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죽은 다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말씀은 현재의 삶에서부터 맺는 열매와 덕이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말씀의 열매와 덕은 삶의 어려움에 의해 쉽게 무너지지 않으며, 안정을 누리게 된다. 온전한 마음의 평화를 누리기 때문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25절) 비와 강물과 바람이라는 말로 인생의 온갖 상황, 삶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끔찍한 일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에 뿌리박은 사람은 이런 재앙 어느 것으로도 무너지지 않는다. 바위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바위는 예수님 자신이시다. 우리가 예수님께 기대고 굳건히 서 있는데 어떤 어려움이 우리를 넘어뜨릴 수 있겠는가! 그분과 그분의 가르침은 인간을 인생의 모든 파도 저 너머에 올려놓는다. 지혜로운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에 비유되고 있다.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은 그에게 힘을 주시는 그리스도(필리 4,13)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본성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어리석은 자가 된다.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우리가 항상 그분 안에 머물고 그분을 닮아가는 삶을 살며 우리 안에 주님을 탄생시키는 삶, 그래서 주님을 모시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어렸을 때 갖게 된 사제 성소는 본당에 계신 신부님을 보면서 생겼습니다. 본당 신자들과 함께하며 아이들과도 즐겁게 놀아주는 신부님을 보면서 저의 꿈은 ‘신부님’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저에게도 ‘신부’라는 호칭이 붙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제 생활을 25년 넘게 했지만, 저의 꿈을 키우게 했던 본당신부로는 겨우 만 5년을 넘겼을 뿐입니다. 특수사목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사제의 꿈을 키웠던 어렸을 때 보았던 본당신부가 그리웠습니다. 본당신부가 되어야 진정한 꿈을 이루고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책임과 의무가 가득한 특수사목의 삶보다는 신자들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본당신부가 되고 싶었습니다.
지금 오랜만에 본당신부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문득 과연 특수사목을 하고 있을 때보다 더 기쁘고 행복하게 사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봅니다. 답은 ‘아니오’였습니다. 신자들과 함께하는 삶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을 상대하다 보니 쉽지 않았습니다. 더 많은 것을 주고 싶지만, 오해와 반대를 받으면서 힘이 빠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느 신부가 했던 말이 정답이 아닐까도 생각됩니다.
“본당신부는 그냥 미사만 충실하면 돼.”
묵상 중에 큰 착각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사제는 기능직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어떤 자리에 머물러야 행복한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자체로 행복한 자리가 되어야 했습니다. 즉,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예수님 닮은 사제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하나만 기억하면 어떤 자리에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바로 주님 뜻을 따르는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은 잊어 버리고 대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자기 자리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라고 하십니다. 어렵고 힘들 때만 ‘주님, 주님!’하고 눈물 흘리며 외치는 모습으로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어떤 상황이든 상관없이 주님의 뜻을 실행하면서 주님과 함께하는 것 자체에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만이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자리든 상관없습니다. 딱 한 가지, 주님의 뜻을 실행하고 있느냐가 중요했습니다. 주님의 뜻을 실행하면서 주님 닮은 삶을 살아갈 때, 하늘 나라는 멀리에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군자는 홀로 있을 때 가장 신중하고 조심한다. : 신독(愼獨)(‘대학’, ‘중용’).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마태 7,25)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 이들의
믿음은
모래성처럼
세상의 비바람에
힘없이 무너지지만
아버지의 뜻을
진실로 실천하며 사는 이들의
믿음은
하느님의 집에
요긴하게 쓰이는
든든한
반석이 된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다는 것은
연탄처럼 자신을 태워 뜨겁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다른 사람들에게
기꺼이 한 장의 연탄이 되어 주는 것.
이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내가 뜨겁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뜨겁게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먼저 뜨거워야 합니다.
말로만 ‘주님, 주님!’하며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고 있지 않고
자기 뜻을 실행하고 있다면
그것은 진짜 연탄이 아닙니다.
진짜 연탄은 새하얗게
자신을 태운 사람이 진짜 연탄입니다.
그리고 불 속에서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태우는 삶을 살 때
비로소 진짜 연탄입니다.
반석 위에 꾸굿하게 서 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가치 위에 자신을 세워 둔 사람입니다.
말씀으로 뜨거운 성령의 불로
자신을 태울 줄 아는 사람입니다.
반면 모래 위에 서 있는 사람은
세상의 가치 속에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자기 말만 하고
세상의 말만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아버지의 뜻은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아름다운
실행입니다.
신앙의 밑바침은
언제나 구체적인
실행에 있습니다.
신앙인이 정말
신앙인다우려면
아는 것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삶이란 실행의
연속입니다.
삶의 여정은
실행의 여정입니다.
믿음과 실행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실행은 가장 아름다운
변화를 불러옵니다.
우리의 실행을 통해
하느님의 뜻은
드러나게 됩니다.
실행은 먼저
우리자신의
허물을 뉘우치고
고치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언제나
올바른 실행을 통해
깊어집니다.
이 대림시가
우리자신을 바치는
가장 아름다운 봉헌이
실행이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
그것은 실행입니다.
실행은
기다림입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거짓을 털어버리자!'
오늘 복음(마태7,21.24-27)은 '주님의 뜻을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거짓을 털어버리고, 참신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참신자는 기도와 삶이 하나가 되고, 하나가 되게하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참신자는 믿는 이들의 궁극적인 목적인 영원한 생명을 늘 바라보고, 그곳에 이르게 하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반면 거짓 신자는 머리와 입으로만 믿고, 성당 안에서만 "아멘!"이라고 하면서, 구체적인 삶으로는 믿지 않고, 삶의 자리에서는 "아멘!"이라고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이 선교 사명에 따라 우리는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과 행동으로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 적극적으로는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실현되지 않는 비구원의 상황 앞에서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것에 대한 기록인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불공정과 불의 앞에서 결코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서 애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직무 사제직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제의 길이 참으로 외롭고 힘듭니다.
이유는 사제가 보다 더 예수님의 삶을 닮지 못했기 때문이고, 예수님의 말을 전하는 사제에 대한 신자들의 태도 때문이기도 합니다. 신자들은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애쓰는 사제들을 지지해 주고, 사제들이 그 길을 흔들림 없이 잘 걸어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법과 경제 등 모든 면에서, 상식과 공정과 정의가 실현되는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함께 노력합시다!
복음말씀
제1독서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간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26,1-6
1 그날 유다 땅에서는 이러한 노래가 불리리라.
“우리에게는 견고한 성읍이 있네.
그분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려고 성벽과 보루를 세우셨네.
2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가게 너희는 성문들을 열어라.
3 한결같은 심성을 지닌 그들에게 당신께서 평화를, 평화를 베푸시니
그들이 당신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4 너희는 길이길이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 하느님은 영원한 반석이시다.
5 그분께서는 높은 곳의 주민들을 낮추시고 높은 도시를 헐어 버리셨으며
그것을 땅바닥에다 헐어 버리시어 먼지 위로 내던지셨다.
6 발이 그것을 짓밟는다.
빈곤한 이들의 발이, 힘없는 이들의 발길이 그것을 짓밟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7,21.24-2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1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24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25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26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27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