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 예수님!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제가 착각을 해서 오늘 보내야 하는 묵상(주일 분)을 어제 보내드렸습니다.
그래서 어제 보내드려야 하는 묵상(토요일 분)을 오늘 보내드립니다.
착오를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이제는 자주 그렇게 정신이 없습니다.
2018년 11월 3일 연중 30주간 토요일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1.7-11
1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
7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8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9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10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11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허리를 굽히고 사는 일
사람의 동작 중에서 가장 어려운 동작이 ‘허리를 굽히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농사를 지을 때는 거의 허리를 굽히는 일입니다. 특히 벼농사를 짓거나 밭농사를 지으면 대부분 허리를 굽혀서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농기계의 발명으로 허리 굽히는 일을 아주 줄여주었지만 내가 어려서 대부분의 농부들은 허리를 잘 펴고 살 수가 없었습니다. 논에서 일할 때 묘판을 손질하거나, 모내기를 하거나, 김매기를 하거나, 벼를 베거나 거의 허리를 구부리고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농부 중 대부분이 허리를 쓰지 못하고, 허리가 구부러져 아주 힘들어하고, 디스크나 척추협착증으로 고생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병원을 찾지도 못하고 허리를 90도로 구부리고 살면서도 그 힘든 일을 해 냈습니다.
그런데 허리를 구부리고 그렇게 힘들게 사는 분들은 대부분 겸손하고 말없이 일하고, 불평 없이 사신 분들이었습니다. 영화 ‘집으로’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지팡이를 짚고 까만 고무신을 신고 말을 하지 못하면서 외손자를 사랑하는 할머니와 같은 모습입니다. “허리를 구부리고 힘들게 살면서도 애기들을 데리고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해서 이런 옛날 얘기로 그분들을 칭송하는 말 만들기 놀이가 있습니다.
“예날 옛적, 갓날 갓적,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꼬부랑 살고 있었단다. 하루는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지팡이를 짚고, 꼬부랑 고개를 꼬부랑 꼬부랑 넘는데, 꼬부랑 강아지가 꼬부랑 꼬리를 꼬부랑꼬부랑 흔들면서 따라 오길래, 꼬부랑길로 돌아가니까, 꼬부랑 바위에 꼬부랑 토끼들이 모여와서 꼬부랑꼬부랑 춤을 추는데 꼬부랑 다람쥐가 꼬부랑꼬부랑 재주를 넘고, 꼬부랑 황새가 날아와 꼬부랑 나무에 앉아서 꼬부랑 목을 꼬부랑 빼고서 꼬부랑꼬부랑 노래를 하더란다. (계속 모든 사물에 ‘꼬부랑’이라는 말을 붙여서 얘기합니다.) 그래서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떡을 주니까 모두들 꼬부랑 떡을 아주 맛있게 먹었단다. 얘야, 내가 ‘꼬부랑’이라는 말을 몇 번 했는지 아니?”
‘꼬부랑’이라는 말을 몇 번 했다고 말하면 정답이 아닙니다. 꼬부랑 할머니 얘기는 무슨 말이든지 같다 붙이면 되는 말입니다. 아이들이 꼬부랑 할머니와 같이 모두에게 친숙하고, 모두에게 겸손한 삶을 가르쳐 주시는 어른들의 말씀입니다. 겸손한 삶을 살도록 꼬부랑 할머니와 지팡이를 등장시켜 겸손하게 고개 숙이고, 모든 사람들과 모든 사물에게 친숙하게 지내라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리고 일하면서 겸손하게 사는 사람들을 절대로 함부로 보지도 말고 대하지도 말라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어려서는 ‘꼬부랑’이라는 말이 몇 번 나왔는지를 세느라고 이 얘기를 들을 때에는 항상 긴장하고 손가락을 구부려 세고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맨 마지막에 질문한 ‘꼬부랑’이라는 말을 세어야 할 것인지, 세지 말아야 할 것인지 혼동이 되어서 언제나 틀렸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리사이들의 교만한 행태를 빗대어 잔치자리에 가서 맨 꼴찌에 앉으려는 것만 신경 쓰고 겸손하게 사는 것을 잊고 사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정말 필요한 것은 겸손하고 겸허한 삶입니다. 비록 다른 사람들의 멸시와 손가락질을 받을지라도 세상의 헛된 것에 욕심내지 않고 겸손하고 겸허하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겉으로 표현되는 것에 마음을 두지 말고, 진정으로 허리를 굽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성되고 겸허한 마음으로 실행하는 것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경영학에서 ‘등산경영’(登山經營)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경영자는 모름지기 등산을 하는 사람처럼 경영을 해야 한답니다. 산을 오를 때에는 높은 정상을 향하되 언제나 허리를 구부리고,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묵묵히 아래만 바라보고 걸어야 한답니다. 고개를 바짝 치켜들고 산 정상을 쳐다보며 높은 곳을 향하여 내달리면 절대로 정상에 오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경영자는 그렇게 처신하고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이상인 예수님을 향하여 마음으로는 새기되 언제나 겸손하고 겸허하게 자신을 낮추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유대인의 랍비인 벤 엘리젤에게 한 어린 제자가 물었다.
“선생님은 진리라는 것은 어디나 있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길바닥에 떨어져 있는 자갈처럼 흔해빠진 것입니까?”
“그래, 그래서 누구라도 주울 수가 있단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줍지 않는 것입니까?”
제자가 되물었다.
“진리라는 돌멩이를 줍기 위해서는 몸을 구부려야 하는데, 사람들은 진리를 줍기 위해 허리를 구부리려 하지 않는단다. 바로 이것이 문제이지.”
(최형락 엮음, 종교교육 예화 2)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겸손하게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선포하는 것이 사명으로 알고 살아야 합니다.
형제 여러분, 18 가식으로 하든 진실로 하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니,
나는 그 일로 기뻐합니다.
사실 나는 앞으로도 기뻐할 것입니다.
19 여러분의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도움으로
이 일이 나에게는 구원으로 끝나리라는 것을알기 때문입니다.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어떠한 경우에도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고,
언제나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21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22 그러나 내가 육신을 입고 살아야 한다면,
나에게는 그것도 보람된 일입니다.
그래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23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편이 훨씬 낫습니다.
24 그러나 내가 이 육신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합니다.
25 이러한 확신이 있기에,
여러분의 믿음이 깊어지고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내가 남아 여러분 모두의 곁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26 그리하여 내가 다시 여러분에게 가면,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자랑할 거리가 나 때문에 더욱 풍성해질 것입니다.
(필리피서 1,18ㄴ-26)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