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루가 1,39-56)
"Blessed are you among women, and blessed is the fruit of your womb.
말씀의 초대
요한 묵시록은 하느님의 계약 궤가 나타난 뒤 하늘에 큰 표징이 드러난 것을 전해 준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의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난 것이다. 또 다른 표징으로 하늘에 나타난 것은 크고 붉은 용이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에게서 되살아나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다고 고백한다. 죽음이 아담 한 사람을 통해 온 것처럼 부활도 그리스도 한 사람을 통해 왔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이다(제2독서). 성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신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성모님을 찬양하고, 성모님께서는 주님을 찬송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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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성모 승천 대축일이 우리 민족에게는 각별한 의미로 다가옵니다. 바로 이날 우리 민족이 일제의 강압에서 벗어나는 해방을 맞았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 교회는 어두운 식민지 시대 동안 성모님께서 끊임없이 우리 민족을 돌보셨으며 마침내 해방이라는 큰 선물을 주셨다고 믿었습니다. 한국 교회의 유달리 강한 성모님에 대한 신심과 공경은 이러한 민족적 차원의 체험과도 깊은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광복의 기쁨을 성모 승천 대축일에 맞은 것을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로서 이해하고 간직한 것은 우리 교회의 매우 귀중한 자산입니다. 교회가 시대의 모순과 사람들의 고통을 만날 때 그것을 회피하거나 세상의 힘과 논리에 따라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신앙을 실천하게 하는 영적인 원천을 이러한 체험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의 보호와 전구를 믿으며 주님의 길에 충실한 가운데 고난을 이겨 내리라는 희망을 갖는 교회는, 참으로 민족을 위한 빛과 소금이 됩니다. 성모 승천 대축일은 우리 민족에 대한 한국 교회의 소명을 기억하게 하는 날이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소명은 또한 성모님의 영광을 통하여 온 인류가 가지는 구원에 대한 보편적인 희망과 깊이 결속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젊은 여인의 성모님께서는 ‘성모의 노래’를 통해 세상의 권세가 주님 앞에서 패배하리라는 것을 힘차게 노래하십니다. 또한 제1독서에서는, 거대한 악의 세력이 호시탐탐 노린다 하더라도 여인에게서 태어난 아이가 세상을 궁극적 구원으로 이끄시리라는 것을 봅니다. 오늘 독서를 통하여 지금 여기에서 인간화와 인간 구원을 위해 민족의 아픔에 구체적으로 동참하는 것은, 보편 교회의 구원 소명에 참여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시대와 민족을 위한 교회의 사명을 깊이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구원의 역사에 참여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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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이라고 부릅니다. 어머니가 없다면 인류가 존속될 수 없을 정도로 어머니는 하느님의 손길과 같은 것입니다. ‘신은 모든 곳에 계실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어머니가 있기에 인류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입니다. 부모가 다 마찬가지이지만 특별히 모태로 나를 품어 주고 젖을 먹인 어머니를 통해 더 깊은 친밀감과 사랑받는 법을 배우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인으로서는 주름지고 볼품없는 얼굴을 한 참으로 평범한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어머니로 서 있을 때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유일한 인생의 스승이 됩니다. 세상 누구에게도 견줄 수 없이 소중하고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아름다운 얼굴입니다. 인간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어머니는 하느님의 손길이 되어 한 사람 한 사람을 보살펴 주시고 길러 주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이런 육친의 어머니를 넘어 어머니 성모님께서 계십니다. 초대 교회 때부터 성모님의 손길은 교회를 돌보시고 보호해 주셨습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가까이, 마치 우리 육친의 어머니를 부르듯, “어머니!” 하고 부르면 금방 우리 앞에 서 계시는 어머니이십니다. 날마다 우리는 시간을 내어 묵주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 기도 시간은 우리 마음속에 따뜻한 성모님의 마음을 새기는 순간이고, 이미 지상에서 성모님을 영적으로 깊이 만나는 시간입니다. 언젠가 홀로 받아들여야 할 죽음의 자리에서 우리는 “엄마!” 하고 어머니를 부르며 그 외롭고 둔탁한 죽음의 문턱을 넘어설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평소 하던 묵주 기도를 바치며 성모님의 품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성모님께서 승천하시어 당신의 아드님과 하나 되셨던 하늘의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우리도 다다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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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께서 승천하신 날입니다. 마리아께서는 곧바로 하늘로 들어 올림을 받아 하느님 나라로 가셨습니다. 마리아께서 구세주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되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면 오해입니다. 그것은 마리아의 삶을 잘 모르고 그분의 승천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리아께서는 천사가 예수님의 잉태를 예고할 때, 처녀인 자신의 처지를 포기하고 ‘주님의 여종’임을 솔직히 고백하십니다. 이로써 마리아께서는 이제 개별적 인간 마리아가 아니라, 주님의 여종으로서 철저하게 주님께 순종하면서 살아가십니다. 처녀인 마리아께서 주님의 거룩하신 어머니, 인류의 어머니로 불리게 되신 것은 주님의 은총이기도 하지만, 성모님의 신앙 고백적인 삶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곧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축복의 표지입니다. 마리아께서는 자신의 온 생애를 오로지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위하여 바치셨습니다. 그러한 성모님을 주님께서는 곧바로 하느님 나라로 들어 올려 주셨습니다. 우리 또한 성모님과 같은 삶을 산다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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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의 승천은 성모님께서 곧바로 천국에 가셨음을 의미합니다. 마리아께서는 그만한 삶을 사신 분이시기에 당연한 일입니다. 성모님의 생애를 평탄한 생애로만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요셉 성인과 아기 예수님께서 함께 사셨으니 아무런 문제도 없으셨을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가장 행복한 성가정을 이루셨으니 고통도 고뇌도 없고, 마음 상하는 일이나 말썽도 없으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랬을까요? 그건 아닐 것입니다. 성가정을 단순하게 아무런 문제도 없고 다툼도 없는 가정이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강한 개성과 고집을 지닌 분들이 사셨기에 어쩌면 남모르는 아픔이 더 많으셨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그분들은 자신의 뜻보다 하느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르며 사셨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성가정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성모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승천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산 사람에게 내려지는 축복의 예표입니다. 누구라도 그렇게 살면 주님께서 천국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성모님께서 함께 계신 초대 교회에는 하느님의 힘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곁에도 수많은 어머니들이 있습니다. 그들 모두 성모님을 닮아 또 다른 마리아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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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승천은 당신을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에 내맡기신 성모 마리아께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에 참여하셨음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예수님을 잉태하신 순간부터 이 세상 삶을 마칠 때까지, 하느님의 은총을 충만히 받은 분이심을 드러냅니다. 곧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께서 거룩하게 되셨고, 그 목표인 구원에 이르게 되셨음을 의미합니다. 성모 승천은 마리아를 위해서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근원적 구원은 모든 사람의 구원이요, 그 충만함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모 승천은 우리가 사도 신경을 통하여 고백하는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삶’의 신앙을 거듭 확인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곧 우리의 미래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내게 이루어지소서
-김대열신부-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루카1,45)
---------- “믿는다”는 말에 대해 생각해본다.
쉽게 쓰는 말이지만 결코 쉬운 말이 아니다.
삶에 필연적인 숱한 관계들 속에서 숱한 믿음을 저버리기도 하고 배신의 쓴 잔을 마시기도 한다. 저버리던 저버려지던 그것은 반드시 상처를 남긴다. 믿음을 주지 못하는 것도, 믿지 못하는 것도 아픔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의심과 불신으로 관계를 시작하고 만들어가야 하는 아픔. 상처 받지 않기 위해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누군가에게 믿음을 준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아파한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은 우리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사람과 사람 사이, 그 안에는 너무도 복잡한 세계가 있다. 그 어떤 약속이나 신의조차 깨어버릴 수 있는 우리의 약함은 우리를 늘 불안하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절대적인 믿음의 대상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인간적 약함을 뛰어넘는 믿음, 절대적 존재에 대한 믿음, 그 믿음을 신앙이라고 한다.
신앙은 우리 안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상처와 그 결과를 치유할 수 있는 힘에 대한 믿음이다. 그 힘은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을 믿고 있는가? 다른 것은 그렇다 치고, 그분의 사랑을 믿는가? 그래서 당신이 만나는 숱한 관계에 최선을 다해 신의를 지키려 하고 있는가? 다시 한 번 되돌아볼 일이다.
신앙은 우리에게 가장 큰 것만을 가지라 한다. 다른 것은 그 큰 것을 위해 작아져야 한다고 한다. 때로는 아예 버리라고까지 한다.
결국 선택이고 결단이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당신은 행복합니다.”
믿어야 한다. 적어도 그분의 말씀이 아름답고 옳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그분의 말씀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행동하는 신앙이 되고자 하는 삶이어야 한다.
성모님께서 보여주신 믿음이 예수님을 탄생시켰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 사랑의 소명과 승천의 영광>
-전삼용신부-
학교에서 집에 TV가 몇 대 있느냐, 차가 있는 사람 손들어 보아라, 부모의 직업이 무엇이냐는 둥의 설문조사를 받아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저의 아버지 직업은 미군부대에서 막일을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저는 처음 그 칸에 아버지가 일러주신 대로 말 뜻도 모른 채 ‘노가다’라고 써 냈습니다. 그랬더니 선생님이 웃으셨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창피해서였는지 그냥 ‘회사원’으로 썼습니다. 왜냐하면 막일꾼의 아들과 아이들이 놀아줄 것 같지 않아서입니다.
그러나 저와는 매우 다른 처지의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양옥집에 살면서 유치원을 다녀 이미 숫자와 한글을 섭렵한 아이들, 전기가 뭔지도 모르는 저에 비해서 텔레비전과 심지어는 차까지 있다는 아이들. 정말 저와는 다른 아이들이었습니다.
특히 한 아이는 코 질질 흘리는 나의 모습과는 다르게 공주처럼 예쁜 옷을 입고 깍두기공책에 한글을 예쁘게 쓰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 아이는 머슴과 같은 제가 감히 더럽힐까봐 옷자락도 만질 수 없는 공주님이었습니다. 물론 그 아이와는 친해지거나 말을 붙일 엄두도 낼 수 없었고 그렇게 초등학교가 지나버렸습니다.
관계란 두 사람이 서로에게 합당하다고 생각할 때 끝까지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열등감이 많은 여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 자존감이 약한 여자는 남자들과 오래 사귀지 못합니다. 나중에 남자에게 버림받을 두려움을 가지게 되어 자신이 먼저 남자를 밀쳐내기도 하는 것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자신이 합당하게 무엇을 받아야 하는지 잘 압니다.
어떤 자매님이 이런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수십 년 전에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실 때 그 자매는 부모를 모시랴 자녀를 돌보랴 밭에서 일하랴 많은 고생을 하고 있었답니다. 물론 이런 집안으로 이사 와서 이런 고생을 하니 남편을 비롯해 다 싫어졌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안타까워 남편은 세탁기나 전기밥솥이라도 사주고 싶었지만 아내는 그런 것이 다 무슨 필요가 있느냐며 거부하였습니다.
남편이 보기에 하도 안 돼서 몰래 세탁기를 사 놓고 하우스에서 일하고 있는 아내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세탁기를 사 놨다고 한 번 들어가서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왜 시키지 않은 일을 했느냐며 화를 내고 세탁기를 쳐다보지도 않고 밭으로 다시 일을 하러 나갔습니다. 일주일 동안이나 그 세탁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사람은 신기하게도 고생해야 합당하게 원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미워하기 위해 상대의 호의를 무시하기도 합니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살짝 세탁기를 쳐다보았고 버튼 하나로 세탁이 끝나고 탈수까지 되는 것을 보고는 ‘이렇게 편한 것을, 왜 진작 사용하지 않았을까?’하며 후회하였다고 합니다.
왜 그 때 그 자매는 남편의 호의를 받지 않으려 했을까요? 사실은 자신이 그런 것을 받을만하지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남편에 대한 미움을 가지고 있기에 남편이 주는 사랑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누구든 양심이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합당한 것을 받으려고 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마음엔 원망을 지니고 싶은데 감사가 들어오는 것을 허락할 수 없기에 축복도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란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을 합당하게 받을 수 있을 때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러기에 합당하다고 생각해도 우리가 그렇지 못하면 하늘나라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성모승천은 바로 성모님께서 하느님께로부터 영혼과 육체, 모두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에 합당하다는 축복을 성모님도 합당하게 받아들이는 순간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이런 축복을 감당할 능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위의 자매가 남편에게 그랬듯이, 우리도 하느님께 어느 정도는 원망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원망에서 감사로 가는 것이 승천입니다. 그래서 승천은 마지막 때가 아니라 바로 이 순간부터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분은 이미 하느님께로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승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을 찬미하지 않는다면 아직은 승천할 준비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분이 주시는 영광을 주실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분의 축복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 이것이 하늘나라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을까요? 바로 나에게 주어진 ‘소명’을 다 완수함으로써만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은 먼저 자기 스스로 무엇을 받기에 합당하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설득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가 자기에게 요구하는 소명을 이루어 냈을 때야만 그 사람과 관계를 이룰 수 있음을 스스로 이해시키게 됩니다.
사제가 되어 교의신학으로 바꾸고 처음부터 다시 하여 다 끝내고 비행기를 탈 때의 그 기분은 정말 하늘을 나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공부를 한 것이지만 하느님께 감사했고 보내주신 주교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처음엔 왜 이런 고생을 시키시느냐고 원망도 많이 했지만 끝내고 나니 감사한 마음이 올라왔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을 날게 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그것에 합당한 준비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그분이 주신 소명을 완수해야만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늘을 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모님이 그런 마음이신 것이고, 우리도 마지막 날에 성모님처럼 ‘아멘!’하며 하느님의 뜻을 완수했을 때 그런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밖엔 없습니다. 사랑은 자신을 제물로 십자가에 못 박아 상대를 위한 양식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자신을 불사르는 것입니다. 마치 물이 자신을 불사르면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오를 수 있는 것처럼 우리도 성령의 불로 우리를 태우지 않고서는 하늘로 오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소명이 그리스도의 소명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 십자가입니다. 김기희 선수는 올림픽 축구경기에서 단 4분을 뛰었습니다. 그래서 메달도 따고 군 입대도 면제 받았습니다. 아주 조금이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의 소명에 참여하지 않고서는 그분과 함께 나누는 영광도 감사도 없습니다. 나의 소명,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루라고 맡겨주신 나의 소명을 끝까지 이루는 것이 성모님의 승천에 참여하는 길인 것입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양승국신부-
<우리 안에 태어나시는 하느님>
하루하루를 끊임없는 도전과 새로운 영역의 개척, 그러기에 매일을 보람과 기쁨으로 꽉 찬 충만하고 행복한 인생을 엮어가는 한 지도자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가 지닌 원대한 비전과 탁월한 재능, 따뜻하고 겸손한 인간 됨됨이로 인해 수많은 지지자들이 따라다니고 있었는데,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한 그의 기여와 희생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부러운 시선으로 그 분의 삶을 바라보며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인간이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저렇게 높이 올라갈 수도 있구나, 한 인간이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면 저렇게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 말입니다.
그런데 인류 역사상 가장 높이 올라간 사람은 누구일까요?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서 가장 큰 진보를 이룬 분은 누굴까요? 그분은 다름 아닌 성모님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성모님은 우리에게 한 인간이 얼마나 변화될 수 있는지, 얼마나 성장을 거듭할 수 있는지, 인간이 얼마나 ‘하느님화’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잘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성모 승천 대축일은 우리 모두에게도 희망과 자극을 주는 축제입니다. 예수님의 잉태와 출산, 양육을 위한 성모님의 큰 희생과 노고도 대단한 것이지만, 우리가 좀 더 예의주시해야 할 부분은 성모님의 신앙여정입니다. 한 평생 다양한 위기와 고통, 큰 십자가와 험난한 가시밭길이 성모님 생애 내내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의 태도를 보십시오. 조금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머뭇거리지 않으셨습니다. 희미한 안개속의 위험한 길을 걸어 가시면서도 그 발걸음이 늘 당당했습니다. 천사를 통해 들려온 하느님의 약속을 마음에 새기고 매일 새롭게 결코 만만치 않은 신앙의 길을 기쁜 얼굴로 걸어가셨습니다.
성모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잉태하셨고, 사랑의 힘으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낳으셨습니다. 이제 성모님께 주어졌던 역할이 우리 모두에게 확대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 안에 예수님을 잉태하지 못한다면, 그 옛날 성모님의 아기 예수 잉태는 그저 오래 전 이야기일 뿐입니다. 오늘 우리 각자의 삶 안에서 아기 예수님의 잉태는 되풀이되어야 합니다.
나도 힘들지만 미혼모가 낳고 떠난 아기 한명을 입양하면 그것은 내가 아기 예수님을 낳는 일입니다. 우리 가족도 힘들지만 도움이 필요한 보육시설 아동들의 구체적 결핍을 채워주는 일은 어떤 면에서 내가 직접 또 다른 아기 예수님을 낳는 일입니다. 힘겹게 살아가는 이웃들의 필요에 응하는 일, 작지만 시간 내어주는 일은 또 다른 아기 예수님을 낳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어디 다른 하늘 아래서 멀리 계셔야 할 존재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 늘 새롭게 거듭 태어나셔야 할 존재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모두는 또 다른 성모님이 되어야 합니다.
성모님처럼 아쉽지만 또 다시 나를 떠나고, 안타깝지만 어제와 결별하고, 늘 새로운 여행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부단히 다시 태어나실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가슴 아프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성모님께 명확하게 선을 하나 그어드립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며 성모님을 칭송하는 사람들을 향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고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은 나자렛이라는 작은 울타리 안에 갇혀 계셔서는 안 될 분이십니다. 보다 큰 세상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을 향해, 보다 큰 사랑을 위해 계속 성장하고, 결국 하느님 아버지와 동일시되어야 할 크신 분이십니다.
우리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동반해주고 있는 형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내 소유, 내 부속품이 절대로 아닙니다. 언젠가 분명히 나를 떠날 것이고, 분명히 나를 능가할 것이고, 성장하고 또 성장해서 예수님처럼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여기는 믿음이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인간 존재라는 것 때로 한없이 부족하고 나약하지만, 때로 작은 울타리에 갇혀 괴로워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무한히 성장해나갈 수 있는 가능성으로 충만한 존재가 역시 인간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 에너지가 있음을, 성모님처럼 큰 도약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결국 우리 안에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늘 현존하고 계심을 굳게 믿길 바랍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
- 이연수-
루카 복음은 머리말에 이어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요셉과 마리아 부부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이들은 엘리사벳과 마리아입니다. 루카 복음서 저자는 아이를 낳고 기르는 전통적 역할에 초점을 맞추어 두 여성을 그리지만, 실제 관심사는 아이를 밴 두 어머니가 아니라 그들 배 속에 있는 아들들이죠. 세례자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럼에도, 두 여성은 루카 복음에 등장하는 다른 여성들보다 훨씬 더 영향력 있는 인물로 그려지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엘리사벳은 사라와 라헬, 한나처럼 아이를 못 낳는 여자였지만,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아이를 갖게 됩니다. 아이를 못 낳는 것이 여자의 흠으로만 여겨지던 시절. 그간의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을까요.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와 인사를 하자, 그녀는 성령으로 가득 차 마리아를 “내 주님의 어머니”(43절)로 선포합니다. 이는 마리아 배 속에 있는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선포하는 뜻이기도 하지요. ‘내 주님의 어머니’라는 선포는 루카 복음에 등장하는 한 여인의 입에서 나온, 처음이자 유일한 그리스도론적 고백이며 예언자의 예언이었습니다. 마리아는 믿음의 여인으로 그려집니다. 그녀가 행복한 것은 예수를 낳은 어머니여서가 아니라 예수를 낳으리라는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모범입니다.
믿는 이의 행복
-고성균 수사-
많은 병의 요인이 스트레스에 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습니다. 스트레스의 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과중한 업무, 관계에서의 마찰, 뜻하지 않는 일이 일어났거나 일어날 가능성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스트레스의 요인은 ‘불안’과 ‘걱정’이라는 마음 상태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뭔가 불안하고 걱정될 때 우리 몸은 긴장하고 이것이 반복될 때 병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활동도 합니다. 운동을 하고 노래를 부르고 사진도 찍습니다. 여가와 유흥의 발달도 스트레스를 해소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요구에서 시작됩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몸의 긴장을 풀거나 스트레스를 주는 상황을 잠시 잊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즐깁니다. 하지만 이 활동들 자체가 마음속의 불안과 걱정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합니다. ‘마음’에서 비롯된 것은 외적 활동이 아닌 ‘마음’으로 해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불안과 걱정을 제압합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아 불안이 몰려올 때, 잘 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한테는 힘이 있습니다. 사실 문제는 무엇을 믿느냐에 있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리라는 말씀을 믿음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셨고, 우리 미래의 예형으로 하늘에까지 오르셨습니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우리에게 약속된 구원의 말씀을 믿는다면, 우리 삶에 어떤 비극이 일어나더라도 불안해하거나 걱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의 끝은 구원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복과 불행을 넘어서는 행복
-김찬선신부-
이 소선 여사를 아시나요? 1970년 청계천 평화시장 피복 노동자들을 위해 분신한 전 태일 열사의 어머니시지요. 지금 82세이시고 지난 7월 18일 갑자기 쓰러진 뒤 27일째 혼수상태에 있습니다.
이분의 인생은 참으로 기구합니다. 세 살에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다 돌아가시고, 의붓아버지 밑에서 차별을 받으며 유년기를 살았습니다. 열여섯에 정신대에 끌려가 온갖 고생을 하다 해방을 맞아 결혼을 하였는데 남편의 사업실패로 전국을 떠돌며 다리 밑이나 남의 집 처마 밑에서도 자고, 남의 집 옷 가게에서 아기를 낳기도 하였습니다. 빚쟁이에 쫓기어 정신이상자가 되기도 하였으며 영양실조로 눈이 멀기도 하였습니다.
큰 아들, 전 태일이 성장하여 피복 노동자에 재단사까지 되어 이제 살게 되었다고 생각하였는데 22살의 그 아들이 분신하고 맙니다. 그 아들은 모질게도 어머니께 부탁을 합니다. “내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주세요.” 이때부터 어머니는 아들의 인생을 삽니다.
저는 이런 이 소선 여사의 삶이 Happy Ending이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성모 승천 축일에 왜 이분의 얘기를 하는 것일까요?
성모님의 삶을 닮은 이 소선 여사의 삶에서 성모님의 고단한 삶이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자식은 불쌍한 어머니를 땅에 묻고도 자신은 행복하게 살 수 있지만 어머니는 그럴 수 없습니다. 다른 자식들이 다 잘 되고 그래서 그들 때문에 흐뭇하고 행복할 때에도 한 편에는 늘 죽은 아들의 고통과 불행을 안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자식의 고통과 불행에 오불관언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어머니들의 어머니인 마리아는 어찌하셨겠습니까?
아들 예수의 죽음 뒤 마리아의 삶은 제자들과 함께 아들 예수의 뒤를 따르는 삶, 아들의 뜻을 이루는 삶이었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무엇을 할 때, 그것을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지요. 자식을 위한 것, 사랑 외에는 아무 것도 중요치 않고, 그래서 고려사항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자식을 위하는 一念, 이것이 자신의 행복과 불행마저 자신 안에서 밀어내고, 이것이 어머니의 행복입니다. 자신의 행복과 불행을 초월하는 행복인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어머니의 행복을 행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 누가 어머니의 불행을 불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끝까지 자식과 같이 가는 것뿐입니다. 이 세상에서뿐 아니라 영원까지. 영광뿐 아니라 고통까지. 고통뿐 아니라 영광까지.
마리아의 일생을 이런 것입니다. 마리아의 승천은 이런 것입니다.
깨진 항아리가 되지 않게 도와주세요 "
-홍승모신부-
오늘은 한국천주교회가 수호자로 모시고 있는 성모님 승천 대축일이며 또 우리 민족이 해방을 맞이한 날이기도 합니다. 이 뜻 깊은 날을 맞이해 성모님 은총과 축복이 모든 교우들의 가정에 가득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마리아의 노래' 서문은 주님 잉태 기별을 받은 순간부터 마리아가 경험한 신앙체험으로 시작합니다. 마리아는 주님을 찬송하는 이유가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8)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자신을 주님의 종으로 표현합니다. 마리아는 고통스런 종의 처지를 돌보시는 주님의 사랑에 감사드리고 있으며, 자신의 삶을 인도하시는 분이 누구신지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마리아는 과거의 삶을 딛고 일어나 미래의 희망을 고백합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8-49). 마리아는 자신만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그 행복이 모든 사람들에게 펼쳐지게 된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삶만 바라보는 이기적인 마음을 넘어서, 주님의 모든 백성과 구원의 역사를 함께 조명하고 있습니다. 주님 은총을 깨닫게 된 마리아는 지금 주님이 얼마나 위대한 사랑으로 당신 자녀들을 사랑해 주셨는지, 그 신비를 밝힙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1-53). 우리는 여기서 마리아가 깨달은 주님 마음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주님 마음이란 거룩하신 분으로만 여겨져, 우리와는 다르다고 생각했던 주님께서 당신 자녀들의 고통스런 처지를 결코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고통스럽고 낮은 모습으로 사셨지만, 주님께서 그분을 들어 높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모 승천의 진정한 의미일 것입니다. 요한 23세 교황님의 「영혼의 일기」에 이런 기도가 적혀있습니다. "오, 주님. 제가 물을 담아두지 못하는 깨진 항아리가 되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현세의 좋은 것들을 즐기느라 눈이 멀지 않게 하시고, 가난한 이들, 병자들과 고아들의 절박한 외침이 제 마음을 그냥 지나치지 않게 해주십시오." 깨진 항아리는 내면의 삶과 외면의 삶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고 봅니다. 깨진 항아리는 마음이 갈라져 자신의 실제 모습을 허황되게 평가해 진실에 눈멀게 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결정과 행동만이 옳다고 생각해서, 그러한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미워하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물을 담지 못하는 깨진 항아리가 된다면, 자신의 실제 모습을 외면하게 돼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눈을 가리게 될 것입니다. 온전한 사랑의 마음이 둘로 갈라졌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증언합니다. "어둠 속에서 빛이 비추어라 하고 이르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2코린 4,6-7). 항아리나 질그릇은 모두 깨지기 쉬운 것들입니다. 곧 우리의 영적 내면이 걸려 넘어지게 하는 세상의 유혹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깨지기 쉬운 항아리나 질그릇 속에 주님을 식별하는 빛을 주신 것입니다. 그 빛은 세상의 유혹을 이기고 생명의 원천이 되게 하는 주님의 놀라운 힘인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부서지기 쉬운 존재임을 아시면서도, 우리에게 희망의 빛을 주십니다. 성모님도 똑 같은 희망을 주십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모님께 간구하여 그 응답을 얻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모님이 인간적 고뇌와 고통을 갖고도 주님의 부르심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응답했다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신앙은 수동적 응답이 아니라,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하신 성모님처럼 능동적 응답이 필요한 것입니다. 삶에 어려운 시련이 닥치더라도 성모님께 기도하면 기대 이상의 것을 주십니다. 그러기에 성모님은 우리들의 어머니가 돼어려움과 시련에서 우리들을 보호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뜻깊은 성모 승천 대축일에 성모님께 기도드려봅니다. 천주의 성모여 당신의 보호에 우리를 맡기오니, 어려울 때에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지 마시고, 모든 위험에서 항상 우리를 구하소서. 영화롭고 복되신 동정녀여!
순종한 여인의 마지막은 영광
-손용환신부-
티치아노(Tiziano, 1488-1576)는 베네치아의 르네상스를 이끈 화가입니다. 그는 1516년에 산타 마리아 데이 프라리 성당의 제단화를 의뢰받았습니다. 그는 2년여에 걸쳐 생기 넘치는 색과 빛으로 〈성모 승천〉을 그렸습니다. 결국 이 작품은 1518년 5월 19일에 제막되었고, 그 결과 베네치아 최고의 화가로 등극했습니다. 비평가 루도비코 돌체(Ludovico Dolce, 1508-1568)는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이 작품에는 미켈란젤로의 위대함과 경이로움이 있고, 라파엘로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이 있으며, 자연의 진정한 색채가 있습니다.”
야코부스 데 보라지네(Jacobus de Voragine, 1228-1298)가 쓴 〈황금전설〉에는 마리아의 마지막 지상생활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무치는 마음이 마리아의 흉중을 사로잡습니다. 먼저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 생각 때문입니다. 그 순간 마리아는 천사를 목격했습니다. 천사는 손에 들고 있던 종려나무 가지를 마리아에게 건네줍니다. 임종의 순간이 다가온 것입니다. 마리아는 천사에게 두 가지를 부탁했습니다. 제자들을 보았으면 좋겠다는 소망과 사탄이 당신의 영혼에 근접하지 않도록 해 달라는 소망이 그것이었습니다. 그 소망대로 요한을 비롯하여 제자들이 구름을 타고 마리아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마리아는 죽었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몸과 영혼이 천사의 보호를 받으며 하늘나라로 올라갔습니다.”
티치아노는 그 광경을 관례적 표현방식으로 그렸습니다. 아래에는 열린 무덤과 제자들이 있고, 중앙에는 떠오르는 성모 마리아가 있으며, 위에는 열린 하늘이 있어 모든 천사들과 하느님이 계십니다. 그러나 금색과 붉은색으로 그린 충만한 화면은 티치아노만이 그릴 수 있는 색채의 향연입니다. 바로 이 화려한 색채를 통해 그는 천상의 아름다움을 표현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화려하고 밝은 금빛에 둘러싸여 승천하십니다. 크게 펼친 두 팔과 상기된 얼굴 표정은 승천의 기쁨을 대변합니다. 특히 성모의 베일과 옷은 아름다운 율동미를 보이며, 상승하는 순간의 역동성을 실감나게 해줍니다. 그분은 가난한 마음을 상징하는 청록색 베일과 하느님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상징하는 붉은색 옷을 입고 하늘로 오릅니다. 가난한 마음이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결합할 때, 천국 문이 열림을 말해주듯이 말입니다.
아기 천사들은 성모 마리아의 승천을 도우면서 송가를 부릅니다. 축복 속에서 마리아의 얼굴은 천상을 상징하는 원형의 중심에 있습니다. 천상에서는 하느님께서 두 팔을 벌려 마리아를 받아들이십니다. 그분은 사랑스런 눈빛으로 마리아를 응시하십니다. 천상은 모두 금빛 광휘에 싸여 있습니다. 금빛은 하느님의 영광을 더욱 빛내고 있습니다. 하느님 곁에서 대천사가 하늘의 여왕이 되실 마리아를 위해 왕관을 준비합니다. 하느님께 순종한 여인의 마지막이 영광인 게 모든 이에게 위안이 됩니다.
그림 하단은 지상인데 열두 사도가 보입니다. 이들의 몸짓은 성모 마리아를 우러르며, 그분은 따르겠다는 약속처럼 보입니다. 베드로는 무릎을 꿇고 성모 마리아를 바라보며 간절히 기도합니다. 요한은 어머니와의 이별을 슬퍼하듯 옷깃을 여미고 눈물을 글썽이며 그분을 바라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던 토마스는 손가락으로 그분을 가리키며 승천을 확인합니다. 어떤 사도는 두 팔을 크게 벌려 몸을 그분께로 향하고, 어떤 사도는 겉옷을 벗어젖히며 마리아의 뒤를 따르려고 합니다. 어떤 사도는 가슴에 두 손을 모으며 승천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어떤 사도는 자기를 위해 빌어달라며 그분을 향해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이것으로 제자들도 천국을 그리며 주님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그림은 기쁨과 환희에 찬 순간을 화려한 색채로 표현함에도 불구하고, 고요하고 차분한 명상적 분위기가 감돌고 있습니다. 천국을 그리는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주님께 드리는 감사
-상지종신부-
나를 완전하게 만드시어 내 안에 나를 홀로 머물게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나의 보잘것없음과 부족함 때문에 당신을 향해 나를 열게 하셨음에 주님, 당신께 감사를 드립니다. 더 가짐으로써 주어지는 곧 사라질 행복이 아니라, 더 사람다워짐으로써 얻게 되는 참행복을 알려 주셨기에 주님, 당신께 감사를 드립니다. 더 높은 곳을 좇는, 언제 추락할지 모르는 불안한 삶이 아니라, 낮은 곳에서 벗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평화로운 삶을 주셨기에 주님, 당신께 감사를 드립니다. 모든 이와 함께하는 생기 넘치는 어울림을 방해하는 교만한 인간적 지식이 아니라, 삶의 참의미와 길을 밝혀 주는 지혜로 끊임없이 채워 주시니 주님, 당신께 감사를 드립니다. 물질적 소유에 얽매어 삶을 메마르게 하지 않으며, 나눔으로써만 채워지는 삶의 참맛을 깨닫게 해 주시니 주님, 당신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의 이 감사가 내일도 모레도 이어져, 내 자그마한 삶 전체를 채울 수 있기를 희망하며, 당신의 아름답고 선한 뜻을 언제 어디서나 내 안에 간직하며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와 지혜를 청합니다. 아멘!
지상성을 떨치고 하늘에 오르다
-김찬선신부-
어제는 모 수녀원에 가서 고백성사를 주었습니다. 오늘이 성모 승천 대축일이기에 모든 수녀님께 성모 승천의 의미를 묵상하는 것을 보속으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저도 승천의 의미를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여러 가지로 승천의 의미를 볼 수 있겠지요.
昇天은 하늘로 오른다는 것인데 그것의 참 의미는 무엇입니까? 오르는 것이니 높아진다는 뜻입니까? 그런 의미가 있지요. 그런데 기어올라 높아지는 것입니까? 오냐오냐하니까 한 없이 기어오른다고 할 때의 그 기어오름입니까? 그런 오름이라면 천박하면서도 교만한 오름입니다. 천박하면서 교만하다고 하였는데 많은 경우 교만은 천박합니다. 자신의 사회적 낮음을 비참함으로 여기고 불행해하기 때문이고, 그래서 어떻게든지 높은 곳으로 오르려 하는 것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고귀한 사람은 교만하지 않고 오르려하지도 않지요. 자신의 낮음을 극복해야 할 비참한 처지로 생각지 않기 때문이요, 오히려 은총이 내려오는 복된 덕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복되게 낮은 자는 마리아처럼 스스로 오르지 않고 하느님으로부터 올림을 받습니다.
그러나 올림을 받아 올라가는 것도 높아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와가 뱀의 유혹에 의해 선악과를 따먹고 하느님처럼 높아지려고 했던 것과 다릅니다. 마리아가 뱀의 머리를 짓밟는다는 것의 의미는 끊임없이 머리를 쳐드는 이 교만을 짓밟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의 의미는 첫 째 지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올라감의 첫 번째 의미는 지상성의 초월입니다. 아니 지상성에 머물려는 육적인 안주를 초극하는 것입니다. 복음에서 보듯이 악령은 세상을 떠나는 것을 거부하고 심지어 돼지 안으로 들어가서라도 세상을 떠나려하지 않는데, 하늘로 오름은 바로 이런 지상성을 훨훨 털어버리고 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로 오름은 무엇보다도 하느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하늘로 오름은 아무 것도 없는 허공으로 오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無와 空을 존재와 집으로 삼으시지만 우리를 인격적으로 사랑하시는 그 하느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마리아에게는 이 인격적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오고 마리아는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따라 마침내 아버지이신 하느님께로 가는 것으로 이 사랑에 응답합니다. 이것이 우리 승천의 전형이요 모범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부터 끝까지 따르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과 수난과 부활의 그 사랑의 길을 마리아처럼 끝까지 가는 것을 이 축일에 마음에 새깁니다.
-이수철신부-
오늘은 우리의 어둡고 메마른 마음을
희망의 빛으로 환히 밝히는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답답하고 힘들수록
저절로 눈 들어 하늘을 바라보듯 희망의 빛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의 모친 마리아 하늘에 오르셨으니 우리 주께 조배 드리세.”
초대 송 후렴을 힘차게 부름으로
성모 승천 대축일을 시작한 여기 수도자들입니다.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성모님, 그대로 생생한 희망의 표지입니다.
하늘을 바라볼 때 마다 성모님의 승천을 묵상하면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힘겨운 세상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무한한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믿는 이들의 복된 미래를 미리 보여줍니다.
‘희망은 빛’이라는 사실을
얼마 전 어느 분을 문병 같다가 새삼 깊이 깨달았습니다.
입원 전에는 어둡던 얼굴에 눈빛, 힘없는 목소리였는데
입원 후에는 미소 띤 얼굴과 빛나는 눈,
윤택하고 생기 넘치는 목소리였습니다.
순간 ‘아, 희망은 빛이자 생명이구나.’ 깨달았습니다.
절망할 때는 저절로 어두워지는 얼굴에 눈빛, 힘없는 목소리였는데
희망을 가지니 빛나는 얼굴과 눈이요, 생기 넘치는 음성으로 변한 것입니다.
새삼 희망을 먹고 사는 영적존재인 사람임을 깨닫게 됩니다.
몸의 육신이 사람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희망의 성모님이셨습니다.
성모님은 말 그대로 희망의 사람이셨습니다.
희망은 빛이자 생명입니다.
하느님 역시 생명이자 빛입니다.
결국 희망의 하느님이라는 말씀입니다.
반대로 절망은 어둠이자 죽음입니다.
하느님은 희망의 샘, 생명의 샘입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두었을 때 좌절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처럼 절망 중에도 희망합니다.
아무리 의식주 생활 보장 되어 있어도 희망 없으면 지옥입니다.
곧 방황이요 죄악의 유혹에 떨어집니다.
우리를 끝없이 하늘을 향하게 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 향한 희망입니다.
평생 주님을 그리워하며 주님을 희망했던 성모님,
마침내 희망의 하느님을 상징하는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희망은 빛입니다.
빛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희망은 저절로 빛이신 하느님을 향하게 합니다.
희망할 때 빛이 비추고 주님 향한 길이 열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 영적도반을 찾아 나선 성모님의 모습이 생생한 증거입니다.
성령으로 가득 차,
주님의 마음을 그대로 성모님에게 전달하는 엘리사벳입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희망과 함께 가는 믿음입니다.
엘리사벳을 통한 주님의 말씀에 성모님은 용기백배했을 것이며
희망과 믿음 역시 더욱 견고해졌을 것입니다.
희망은 생명의 씨앗과 같습니다.
계속 성장해야 하는 우리의 희망입니다.
얼마 전 하우스 옆을 지나다
마침 가을 김장 배추 씨를 심는 형제들을 보았고 저도 한 판을 심었습니다.
겨자씨와도 같이 정말 작은 씨앗이었습니다.
이렇게 작은 씨가
어떻게 그렇게 큰 배추로 성장할 수 있는지 참 신기했습니다.
순간
‘아, 희망은, 믿음은, 사랑은 이 작은 씨앗과 같은 생명체구나.
결코 무생물체인 흙이나 돌이 아니구나.’
평범하나 새삼스런 깨달음이었습니다.
희망이 생명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날 때
우리 역시 성모님처럼 희망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찬미의 성모님이셨습니다.
생명의 씨앗과도 같은 믿음을, 희망을, 사랑을 키우는데
찬미기도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 성모님은 희망의 사람이자 찬미의 사람이었습니다.
찬미는 그대로 영혼의 호흡입니다.
찬미의 호흡 속에 살아나는 영혼, 육신입니다.
영적 도반 엘리사벳을 통한 주님의 격려에 고무된 성모마리아님은
찬미가로 화답합니다.
성모님은 물론 초대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이 불렀던
가난한 자들의 노래입니다.
얼마나 가난하고 약한 많은 이들이
성모님과 함께 이 찬미가를 바치며 위로와 힘을 얻는지요.
이 찬미가 안에 환히 들어나는 성모님의 신원이요
우리 믿는 이들의 신원입니다.
매일 저녁성무일도 때마다
성모님과 함께 바치는 이 기도가 찬미의 사람으로서
우리 수도자의 신원을 강화해줍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관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찬미의 고백이
우리를 성모님을 닮은 찬미의 사람, 주님의 사람으로 만듭니다.
끊임없는 찬미와 더불어
운명은 바뀌고 정화되고 치유되고 성화되는 우리들입니다.
공동 찬미의 토양에서만 내적으로 성장하는 믿음과 희망, 사랑입니다.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성모님, 희망의 표지이자 찬미의 표지입니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통해
우리는 알게 모르게 하늘에 계신 주님을 향해 업그레이드되어
아름답고 품위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니다.
승리의 성모님이셨습니다.
하늘에 올림 받으신 성모님, 바로 승리의 표지입니다.
오늘 찬미가와 1독서, 2독서는 승리의 표상으로 가득합니다.
성모님의 승리, 믿는 이들의 승리는
바로 그리스도의 승리, 하느님의 승리로 직결됩니다.
누가 하느님의 힘으로 영적전투를 수행하는 이들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승리자 성모님의 진면목이 다음 찬미가를 통해 눈부시게 들어납니다.
“동정녀 태양광채 옷 삼으시고 열 두별 머리위에 두르셨으며
저 달을 발판삼아 우뚝 서시니 당신의 높은 광채 찬란하도다.
죽음과 지옥권세 정복하시고 우리를 돌보시는 성모마리아
저 하늘 주님 곁에 앉아계시니 천지가 여왕으로 찬양드리네.”
승리자 성모님의 배경에 계신 그리스도요 하느님이심이
오늘 독서를 통해서도 잘 들어납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받습니다.
온갖 시련과 역경 후에
결국은 하느님의 승리로 끝나는 믿는 이들이 삶이요
이를 체험한 사도요한입니다.
“그 때에 나는 하늘에서 큰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제 우리 하느님의 구원과 권능과 나라와,
그분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다.’”
사도 바오로 역시 그리스도의 승리, 하느님의 승리를 장쾌하게 고백합니다.
“그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권세와 모든 권력과 권능을 파멸시키시고 나서,
나라를 하느님께 넘겨드릴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파멸되어야 하는 원수는 죽음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그의 발아래 굴복시키셨습니다.”
바로 성모님의 승천을 통해 그대로 실현된
그리스도의 승리, 하느님의 승리요 마지막으로 파멸된 원수인 죽음입니다.
성모님의 찬미가 역시 하느님의 승리, 가난한 자들의 승리를 기립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 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성모님은 그대로 교회의 모습입니다.
하여 자모이신 교회라 합니다.
희망의 성모님, 찬미의 성모님, 승리의 성모님이셨습니다.
폭력의 악순환입니다.
도저히 폭력으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악마의 무기인 폭력이 아닌
희망과 찬미로, 믿음과 사랑으로
평생 승리의 삶을 사신 성모님이셨고
마지막 승천이 결정적 승리를 표상합니다.
삶은 영적전쟁입니다.
성모님처럼 그리스도의 힘으로, 하느님의 힘으로 싸울 때
백전백승의 삶입니다.
패한 것 같으나 실상 승리의 삶입니다.
우리 역시 항구히 희망의 사람, 찬미의 사람으로 살아갈 때
영적승리의 삶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성모 승천 대축일 미사를 통해
요한복음을 빌어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bcd).
아멘.
어떤 사람이 상 위에 뚜껑으로 가려져 있는 항아리를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지나가는 사람 두 명에게 “이게 무엇이오!”하고 물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이 항아리를 자세히 살펴보더니만 대답합니다.
“청자 항아리군! 꽤 오래된 골동품이네요. 값이 제법 나가겠는데요?”
두 번째 사람은 항아리의 뚜껑을 열어서 속을 들여다보고 냄새도 맡아보고 또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을 맛도 봅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술이 담겨 있는 청자 항아리입니다.”
누가 더 그 항아리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야기했을까요? 당연히 두 번째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두 번째 사람의 모습보다는 첫 번째 사람과 같이 겉모습만 보고서 판단하고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이 방법이 훨씬 쉬우니까요. 그러나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속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앞서 항아리를 정확하게 이야기하기 위해 뚜껑을 열어 냄새도 맡아보고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을 맛도 보는 수고로움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삶을 정확하게 알 수 있게 해주는 수고로움을 피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수고로움을 너무나도 싫어하는 우리들입니다. 특히 사람에 대해서 그렇지요. 저 사람의 또 다른 모습은 보는 수고로움은 생략한 채 그냥 판단하고 단죄할 때가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주님의 자리는 사라지고 맙니다.
수고로움이 없는 행동은 제대로 바라볼 수 없는 것은 물론 자기 자신까지도 경직되게 만들어 아무것도 못하게 만듭니다. 제가 학창 시절에는 운동을 꽤 한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습니다. 축구, 야구, 농구, 족구, 탁구……. 어느 것 하나 못한다는 소리를 듣지 않았지요. 그런데 지난 본당 캠프 때 편을 갈라서 축구를 하면서 ‘예전의 날렵했던 나는 어디 갔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을 발에 제대로 맞출 수가 없는 것은 물론 조금만 뛰었는데도 숨이 목까지 차오르면서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신부가 된 후 축구를 한 적이 거의 없었고 그래서 이렇게 몸이 굳어 버린 것이지요.
사람들에 대한 사랑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사랑의 노력도 하지 않으면 이렇게 딱딱하게 굳어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약간의 수고로움은 경직된 나를 부드럽게 해주는 것은 물론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직접 보여주셨던 사랑의 실천을 할 수 있는 원천이 됩니다. 그 결과 이 세상 곳곳에 계시는 주님을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성모 승천 대축일을 맞이하면서, 성모님을 떠올려 봅니다. 성모님은 당신에게 주어진 수고로움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외아들을 잉태했음에도 불구하고 편한 길로 가려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 세상의 영광보다는 고통과 시련이 가득한 수고로움의 연속인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 결과 오늘 우리가 기념하듯 영광의 자리에 오르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내 앞에 놓인 수고로움을 피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 수고로움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면서 그 길을 힘차게 걸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으며, 사랑을 이 세상에 뿌리 내리도록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랑이 뿌리 내릴 때 우리 역시 성모님처럼 영광의 자리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신은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장영희).
열두 번째 선수 성모님
- 윤원진 신부-
“붉은 악마”를 아십니까. 우리나라 축구선수들이 국가대항 경기를 할 때마다 큰 소리로 응원하며 선수들에게 힘을 주는 응원팀입니다. 이들은 비록 선수처럼 공을 차지는 않지만, 경기장 밖에서 어느 선수 못지않게 함께 땀 흘리며 선수들과 호흡합니다. 혹시라도 선수가 실수할 때면 “괜찮아! 괜찮아!”라고 크게 외치며 위로하고, 골이 들어가게 되면 마치 자기들이 직접 차 넣은 것처럼 기뻐 뛰며 눈물까지 흘립니다. 누가 우리의 붉은 악마를 두고 “너희들은 직접 뛰는 선수가 아니니 축구하는 자리에 함께할 수 없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12번째 선수”로서 우리나라의 승리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누가 성모님에게 “직접 복음을 전한 사도가 아니니 공경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분명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 “보아라, 너의 어머니이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9,27).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에 함께 기뻐하고 같이 슬퍼하시면서 그들을 응원했던 분, 사도들의 어머니 성모님 없이 어찌 복음전파를 이야기하겠습니까.
행복하신 성모님?
-안소근 수녀-
오늘 복음에서는 두 번 성모님을 일컬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먼저는 엘리사벳이 성모님께 “행복하십니다.” 라고 말하고, 이에 응답하여 성모님이 “이제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모님의 삶은 행복하셨을까요? 오늘은 성모 승천 대축일을 지내지만, 꼭 한 달 후인 9월 15일에는 성모 통고 축일도 지내게 될 것입니다. 사실 천사가 찾아와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한 그 순간부터 성모님의 삶은 뒤흔들렸을 것이고, 무죄하게 사형선고를 받아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시신을 받아 안으신 때까지 그 고통은 이어졌을 것입니다. 이렇게 성모님의 고통이 예수님의 삶과 결부되어 있다면, 성모님의 행복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복이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있다는 믿음에 있었듯이, 성모님도 역시 당신 삶 안에 이해할 수 없고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모든 순간이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믿으셨기에 행복하셨던 것입니다. 그 행복을 완성하고 확인해 주는 순간이 성모 승천의 때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캄캄한 밤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도 믿음을 가지고 어둠 속으로 발길을 내디디셨던 성모님의 삶이 무의미하거나 부조리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 그분 삶의 마지막 순간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모님은 수난하고 죽으신 다음 부활하셨던 예수님의 길에 끝까지 동참하십니다.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 삶 안에서 불행하게 보이는 순간도, 우리가 길을 벗어나 방황하거나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받아들이기가 고통스러운 순간까지도 ‘전능하신 분이 큰일을 해주시는’순간임을 믿을 수 있다면, 우리도 하늘나라의 기쁨에 참여할 날을 바라보며 우리 자신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
-전삼용신부-
얼마 전에 어떤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오래 된 이야기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수십 년 전에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실 때 아내는 부모를 모시랴 자녀를 돌보랴 밭에서 일을 하랴 많은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안타까워 남편은 세탁기나 전기밥솥이라도 사주고 싶었지만 아내는 그런 것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며 거부하였습니다. 남편이 보기에 하도 안 돼서 몰래 세탁기를 사 놓고 하우스에서 일하고 있는 아내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세탁기를 사 놨다고 한 번 들어가서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왜 시키지 않은 일을 했느냐며 화를 내고 세탁기를 쳐다보지도 않고 밭으로 다시 일을 하러 나갔습니다. 집에 들어와서도 일주일 동안이나 그 세탁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살짝 세탁기를 보았고 버튼 하나로 세탁이 되고 탈수까지 되는 것을 보고는 ‘이렇게 편한 것을, 왜 진작 사용하지 않았을까?’하며 후회하였다고 합니다. 아마 시집살이가 힘들어서 남편까지도 원망스러웠고 그래서 남편이 주는 것까지도 받기 싫었던 것 같습니다.
받는 것도 사랑입니다. 남편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여자는 남자에게 감사할 일도 없고 사랑에 보답할 이유도 없어집니다. 여자는 남자가 주는 것을 받고 그렇게 다 주는 사람에게 자신을 주면서 서로 한 몸이 되는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받는 것은 주는 것 만큼 어렵습니다. 받는 만큼만 줄 수 있고 그 만큼만 둘의 사랑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부부는 하느님께서 묶어 주신 한 몸이고 그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한 몸이 되는 관계는 항상 주고받는 움직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먼저 남자가 주고 여자가 받습니다. 그리고 여자는 다시 남자에게 자신을 내어주며 일치의 신비를 이루어갑니다.
이 관계의 모델이 삼위일체입니다. 아버지는 남자로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통하여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아들에게 주십니다. 아들은 이런 아버지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드립니다. 다시 성령님을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혼인의 일치는 그래서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먼저 이해해야 하는 신비입니다.
성자는 이번엔 남자가 되셔서 삼위일체 신비를 받아야만 사는 여성성을 지닌 인간과 이루시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생명과 함께 영원성이 있는 거룩한 신성을 인간에게 내어주십니다. 이것이 곧 성체입니다. 인간은 그 성체를 모셔 그 분과 한 몸을 이루고 또 우리 자신을 그 분께 봉헌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이고 하느님나라입니다.
그러나 혼인의 신비도 구체적인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델에서 출발하였듯이, 하느님과 인간과의 일치도 구체적인 모델을 준비하셨습니다. 구체적이지 않으면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일치 모델을,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의 한 몸이 되는 혼인관계”로 삼으셨습니다. 이 두 분의 한 몸이 되는 혼인의 신비가 곧 그리스도와 교회의 일치 신비의 모델이고 우리 개인이 그리스도와 맺어가야 할 혼인의 모델입니다.
성부께서 사랑을 위하여 성자를 영원으로부터 나게 하셨듯이 성자에게서 역시 마리아가 나오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서 하와가 나왔듯이 성자에게서 마리아가 나신 것입니다. 인간에게서 나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원죄를 입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그 반대로 그리스도께서 마리아로부터 순결한 육체를 물려받으십니다. 왜냐하면 인류 구원을 위해서는 죄에 물들지 않은 순결한 제물이 필요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모님은 성자에게서 나와서 그 분과 한 몸이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성모님으로부터 육신을 취하셔서 성모님과 한 몸입니다. 우리가 모시는 성체의 출발은 결국 성모님입니다.
엘리사벳이 성모님의 인사를 듣고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무엇이라 했습니까?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성령으로 충만해서 부르짖는 소리는 개인의 생각이 아니고 진리의 성령님께서 직접 일러주시는 불변의 진리입니다. 즉,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성모님을 “내 주님의 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 성모님으로부터 아무것도 취하시지 않으셨다면 과연 ‘주님의 어머니’라 불리실 자격이 있으실까요?
엄마라 불리기 위해서 충족되어야 할 가장 큰 조건은 태중에서 키워주고 낳아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녀에게 자신을 나누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성자로부터 받은 당신 자신을 다시 성자께로 돌려드려 성자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 예수로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자신을 주면서 한 몸을 이루어 성모님이 교회의 구체적인 모델이 되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셨다는 뜻은 그분에게 당신의 염색체와 육체를 나누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모님께서 죄가 있으셨다면 예수님도 그 죄를 물려받고 태어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흠도 티도 없는 육체를 물려받으셨고 그 몸으로 승천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몸으로 하느님나라에서 살기에 전혀 문제가 없기 때문에 성모님으로부터 받은 몸을 가지고 아버지께 올라가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온전한 인간은 하느님 삼위일체의 모상을 닮아 “영, 영혼, 육체”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육체가 없는 인간은 온전한 인간이 아니고 육체까지 구원되지 않는다면 완전한 구원이 아닙니다.
성모님께서 주신 몸을 가지고 아드님이 하느님나라에 올라가셨다면 그 어머니께서 당신의 깨끗한 몸을 지니시고 하늘나라에서 살지 못하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성모님의 아드님이 승천하셨다는 말은 곧 그에게 당신 자신을 나누어주신 분도 승천하실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성모님의 아드님이라 불리신 예수님의 승천이 곧 성모님께서 승천하셔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역시 인간은 하느님의 삼위일체를 닮아 영과 영혼과 육체로 되어 있는데 우리의 행복이 영혼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육체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하느님나라에서의 행복도 영과 영혼과 육체가 모두 행복을 느껴야 완전한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육체로 고통을 받으셨기 때문에 당신의 육체도 천국의 행복을 나누어 받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모님께서도 당신의 육체로 구원사업에 동참하셨기 때문에 그분의 육체도 천상행복을 누려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인간도 지금의 죄 있는 육체가 썩어 없어질지라도 마지막 날에는 모든 육체들이 부활하여 자신의 육체를 지니고 그 육체와 함께 영원한 행복을 완벽하게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취하신 성모님의 육체는 죄로 물들지 않았기 때문에 땅으로 돌아갈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창조하시고 어디에 갔다 놓으셨습니까? 바로 에덴동산에 데려다 놓으셨습니다. 비록 에덴동산의 흙으로 만들지는 않으셨지만 죄로 물들지 않은 깨끗한 몸이었기 때문에 하느님나라에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육체에 죄가 들어옴으로써 아담과 하와는 더 이상 하느님나라에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곳에서 쫓겨났고 그의 후손들도 그들로부터 육체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죄로 물들어 태어나게 된 것이고 그것이 원죄입니다. 그리고 죄로 물들어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이 말씀은 아담(아담은 흙이란 뜻도 있지만 사람이란 뜻도 있습니다)이 죄를 지은 이후에 벌을 주시며 하시는 말씀입니다. 즉, 사람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죄의 결과이고 하느님의 벌입니다. 죄가 인간을 썩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3장 35절에서 바오로는 시편 16편 10절을 인용하면서 예수님께서 땅속에서 썩지 않고 부활하셔야 했던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이가 죽음의 나라를 아니 보게 하실 것입니다.”
새 번역에서는 ‘죽음의 나라’로 나와 있지만 원 희랍어로는 그렇게 번역되어서는 안 되고 ‘당신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이가 썩는 것을 보게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라고 번역해야 정확합니다. 왜냐하면 죄는 썩게 만들고 거룩함은 썩지 않게 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도 원죄가 있는 사람이었지만 불마차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불마차는 성령님을 의미합니다. 성령님의 마차에 탐으로써 그의 원죄까지도 모두 씻어진 것입니다. 하물며 원죄도 없어 성령님으로 처음부터 가득 차셔서 가브리엘 천사가 “은총(성령님)이 가득 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라고 인사하셨던 성모님께서야 하늘에 오르지 못하실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고 ‘주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뜻은 이미 하느님나라에 계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사시는데 이미 성모님과 함께 사시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이 계신 곳이 곧 하느님나라입니다. 예수님이 태중에 있는 동안에는 하느님나라에 있는 것이었고 성모님과 있을 때는 아버지와 성령님과 함께 하느님나라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성모님께 다가가는 것이 곧 그리스도께 다가가는 것이며, 성모님께 다가가는 것이 곧 삼위일체 하느님께 다가가는 것이며, 성모님께 다가가는 것이 곧 하느님나라에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남자인 아담은 제 부모를 떠나 인류와 혼인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마리아와만 온전히 한 몸이 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 분만이 하느님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순결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이 없으셨다면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하는 사랑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아담의 후손인 누구도 하느님 자신을 받아들일 만큼 순결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의 일치는 하느님이 영원하시기 때문에 영원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성모님의 일치도 영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모님은 당신의 온전한 육체까지도 하늘나라에서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고 계신 것입니다.
당연히 성모님은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와의 일치의 모델로 삼고 닮아야 할 우리의 참 어머니이십니다.
하늘로 불러올려질 희망 살기
-상지종신부-
오늘은 성모 승천 대축일이면서 광복절입니다. 오늘은 우리 민족 공동체 모두에게, 특별히 하느님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에게는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 날입니다.
성모님께서 영광스럽게 하늘로 불러 올라가심을 축하하는 오늘, 우리는 그저 성모님만을 바라보고 부러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역시 성모님처럼 하늘로 불러 올려질 것을 간절히 희망하게 됩니다. 사실 오늘은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통해 우리를 똑같이 초대하시는 날이며, 주님의 초대에 우리의 삶을 새롭게 맞추어보는 다짐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오늘 이 희망, 즉 하늘로 불려 올려질 것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희망이라는 것은 그것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 이들에게는 도달할 수 없는 하나의 꿈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향해 자신의 삶에서 최선의 응답을 하는 이들에게는 가장 확실한 약속이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희망을 산다"라는 말을 합니다. 희망은 먼 곳에 있는 목표가 아니라 우리 삶의 과정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이 희망의 산 증인을 만납니다. 성모 마리아가 그분이시죠. 그런데 이 희망은 주님과 주님의 뜻에 대한 확고한 믿음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천사가 예수님의 잉태 사실을 당신께 전하였을 때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응답하심으로서 희망의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혼인하지 않은 처녀가 아이를 낳을 때 돌에 맞아 죽어야만 했던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본다면, 성모님의 이러한 응답은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과 목숨을 내건 용기가 없이는 불가능했던 응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당신의 생명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신 성모님은 당신의 희망을 "마리아의 노래" 를 통해 아름답게 주님께 봉헌하고 계십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렙니다.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 일을 해 주신 덕분입니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대대로 자비를 베푸십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 보내셨습니다.
주님은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 자비를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베푸실 것입니다.
가난하고 보잘것없던 이스라엘의 한 여인, 생명까지도 주님께 온전히 내어놓았던 성모님의 희망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대신한 부귀영화가 아니라 가난하고 천대받는 이들이 주님의 은총 안에 머무는 것이 바로 성모님의 희망이었던 것입니다. 사회적, 종교적 위계질서가 명확했던 당시에 이러한 희망을 노래한다는 것은 가히 혁명적인 것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의지보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겼던 성모님의 용기와 고통받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담은 희망은 궁극적으로 죽음을 하느님에 의해 하늘로 부러 올려진ㄴ 영광으로 실현되었습니다.
하늘로 불러 올려진다는 것은 단지 우리가 죽고 난 후에 일어나는 기적같은 사건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고단한 삶 가운데서 주님과 함께 사는 기쁨을 누리며,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내려질 주님의 은총을 희망하며 살아갈 때, 우리가 주님의 자녀로 온전히 받아들여질 수 있으며, 바로 이렇게 받아들여짐으로써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늘로 불러 올려지는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부정과 불의가 만연한 오늘, 자유와 정의와 민주를 외치다 감옥에 갇힌 양심수들은 여전히 묶여있으면서, 부정부패의 주범들은 조건없이 풀려나는 이 시대에 인간적인 기쁨과 희망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삶의 기쁨과 희망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두운 이 세상 한 가운데서에 살아가면서도 기쁨과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니 기쁨과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에 만연한 부정과 불의를 거슬러 살아가는 우리를 어리석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작은 몸짓을 외면하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살아가는 것이 힘이 들고, 주님의 따르는 정의로운 삶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때가 성모님을 떠올려야 할 때입니다. 성모님의 용기있는 응답을 우리의 것으로 되새김해야 할 때입니다. 마리아의 노래를 우리의 노래로 삼아 힘차게 불러야 할 때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그저 믿으라니 믿었습니다>
-양승국신부-
오늘 복음에서 루가 복음사가는 잉태사건 이후 마리아가 처했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길을 떠나 걸음을 서둘러 즈가리야의 집으로 들어갔다."
"걸음을 서둘러"란 표현을 통해서 우리는 당시 마리아의 내적, 심리적인 상태가 얼마나 불안했겠는가에 대해서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당시 마리아가 처했던 현실은 참으로 암담했습니다. 한 가냘픈 소녀, 아직 정식으로 결혼도 하지 않은 소녀의 배가 점점 불러온다는 것, 참으로 당혹스런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그것에 대해 똑 부러지게 변명도 할 수도 없었습니다.
동네 공동 우물가에 모인 아낙네들은 모였다 하면 이 미혼모 마리아를 향해 갖은 상상과 험담을 계속했을 것입니다. 당시 마리아의 하루하 루가 얼마나 고통스런 나날이었겠는지 손에 잡힐 듯 합니다.
이렇게 마리아의 생애는 우리가 여러 상본을 통해서 보는 것처럼 처음부터 화려한 왕비의 생활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 무정하고 황량한 세계의 사막 한 가운데서 기진맥진하기도 했던 한 시골 처녀가 바로 마리아였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이 견뎌내기에 너무도 벅찼던 마리아는 사촌 엘리사벳이 사는 아인카림으로 떠나갑니다. 나자렛으로 부터 걸어서 사흘이나 걸리는 먼 여행이었지만, 점점 불러오는 배를 부여잡고, 이웃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마리아로부터 자초지종을 다 듣고 난 엘리사벳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십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 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천사 가브리엘로부터의 언약의 말씀은 들었지만 아무런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 듣지 못했던 마리아였기에 늘 긴가민가했었지요. 그런데 엘리사벳의 확증을 통해 마리아는 다시금 힘과 용기를 내게 됩니다.
마리아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구세주의 어머니가 됨으로 인해 자신에게 다가올 갖은 고통과 십자가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말씀에 자신의 전 존재를 걸었습니다.
하느님을 선포하는데 있어서 아무런 조건도 내걸지 않으십니다. 우리처럼 손익계산이나 걱정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일어서라" 하시면 일어섰고, "길을 떠나라" 하시면 길을 떠났습니다. "믿어라"고 하시니 그저 믿었습니다
믿는다는 것 우리가 알다시피 얼마나 어렵고 고된 일입니까? 마리아는 예수 잉태 사건을 통해 믿는다는 것은 일생일대를 건 하나의 투쟁이란 사실을 깨닫습니다.
믿음의 길이란 때로 피가 철철 흐르는 가시밭길을 통과해야 하는 아프고 쓰라린 길이라는 것을 인식해 나갑니다.
마리아에게 있어 혈육으로 예수를 낳기는 쉬웠을 것입니다. 산달이 되어 산고의 진통을 겪고 나면 어려움은 끝입니다.
그러나 신앙으로 예수를 낳는데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마리아가 신앙으로 예수를 낳는데는 베들레헴에서 갈바리아에 이르기까지 항상 예수를 품고 다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의 세월을 통해 마리아의 신앙은 크나큰 비약과 성장을 하게 됩니다. 그 고통의 세월을 통해 마리아는 어렴풋이 나마 자신을 도구로 이 세상을 구하시려는 하느님의 의도를 파악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쁘게 자신을 희생시킵니다. 보다 큰 일, 하느님의 일을 위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내어놓습니다. 여기에 바로 마리아의 위대성이 있습니다.
오늘 하루, 소박하면서도 충실한 믿음을 배경으로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다한 끝에 영광스럽게 하느님 나라에 올라가신 마리아를 바라보며 우리의 삶 역시 마리아처럼 하느님에게로 높이 들어올리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한 마리 연어처럼
-양승국신부-
모리스 웨스트는 ‘삶’이란 자신의 저서에서 요한 23세 교황님에 대해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시성(諡聖)하여 정식으로 교회달력에 실리는 성인(聖人)으로 만들고 싶겠지? 그러나 나는 그렇게 되지 않기를 소망한다. 나는 그분의 본모습 그대로, 정다운 분, 단순한 사제, 겸손한 사목자로 언제나 평범한 우리 가운데 남아계시기를 바란다. 그래서 부족한 우리들도 언젠가 그 편안한 교황님을 디딤돌 삼아 구원의 언덕으로 올라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요한 23세 교황님께서 서거하시기 며칠 전 쓰셨던 ‘영혼의 일기’에는 이런 기도가 적혀있었습니다.
“오, 주님
제가 물을 담아두지 못하는 ‘깨진 항아리’가 되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현세의 좋은 것들을 즐기느라 눈이 멀지 않게 하시고,
가난한 이들, 병자들과 고아들의 절박한 외침이
제 마음을 그냥 지나치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분을 잠시라도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요한 23세 교황님은 너무나 파격적인 교황님이셨답니다. 교황님 같지 않은 교황님, 편안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교황님,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교황님, 그래서 그 누구든 부담 없는 마음으로 다가설 수 있는 그런 교황님이셨습니다.
성모승천 대축일에 너무나 편안했던 요한 23세 교황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요?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성모님도 요한 23세 교황님 같은 분이 아니셨을까 생각합니다. 부족한 우리와는 너무나 까마득한 거리감이 있는 위엄과 영광, 성성(聖性)과 광채로 빛나는 그런 모습이기보다 다정다감한 시골 아주머니 같으신 분, 객지를 떠도는 아들 위해 늘 노심초사하시는 어머님 같은 모습을 지니신 분이리라 저는 확신합니다.
깨진 항아리가 되지 않기 위해 한 평생 조심조심 침묵과 기도 속에 살아가셨던 분,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을 위해 언제나 발 벗고 나서셨던 분, 따뜻한 인간미를 평생토록 간직하셨던 소박한 분이셨으리라 저는 믿습니다.
어떤 모임에서 한 자매님께서 이런 신앙 체험 나누기를 해주셨습니다.
“저는 매일 새벽 다섯 시에 눈을 뜹니다. 일어나는 즉시 성모상 앞 초에 불을 붙입니다. 그리고는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 한명 한명의 얼굴을 떠올립니다. 한 명당 묵주기도 다섯 단 씩 봉헌합니다. 모두 합해 한 시간 반 이상 걸리지만 정성을 다해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묵주기도를 시작한 후로 자녀들의 얼굴이 그렇게 예뻐 보일수가 없습니다.”
새벽마다 촛불을 켜고 지극정성으로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는 어머님, 사실 성모님 삶의 전부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처음 받던 날부터 성모님 특유의 ‘트레이드마크’인 ‘순종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남들은 자유를 좋아한다지만 나는 복종이 좋아요.”라고 고백했던 한용운 시인의 시구가 곧 성모님 한 평생 모토가 되었습니다.
보다 큰 뜻, 보다 거룩한 부르심, 보다 숭고한 계획에 복종하기 위해 성모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청춘, 나름대로의 계획, 인간적 욕심, 단란한 결혼생활...
그런 포기와 버림의 과정이 아무런 내적 갈등이나 고민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을까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성모님 내면 안에서는 자기 포기와 자기 극복을 위한 치열한 투쟁이 한 평생 계속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본성을 거스르기 위한 투쟁, 마치 한 마리 연어처럼 거센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기 위한 투쟁, 자기 자신이란 가장 큰 장애물을 넘어서기 위한 목숨 건 투쟁이 성모님 일생 동안 계속되었으리라 저는 믿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아프게 한다’는 책제목처럼, 가장 사랑했던 아들 예수님으로 인해 받으셨던 성모님의 상처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자신의 삶이 더 이상 자신의 삶이 아님을 파악하셨던 성모님, 때로 실망도 컸을 것입니다. 때로 생의 막다른 골목에 선 기분, 깊이를 알 수도 없는 큰 구덩이에 빠진 느낌도 받으셨을 것입니다.
보다 큰 것에 순종하는 겸손함 없이 얻어지는 참 행복, 참 깨달음, 대자유가 없음을 깨달으셨던 성모님은 마침내 하느님께 깨끗하게 백기를 드셨을 것입니다. 그런 험난한 과정 끝에 성모님의 신앙은 비약적인 성장을 시작했을 것입니다. 십자가상 예수님처럼 온전한 자기증여, 온전한 투신이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성모승천대축일은 교회와 전 인류가 그토록 바라던 최종적인 희망이 실현됨을 보여주는 축제일입니다. 성모승천은 인류 구원의 역사가 완성되었을 때 모든 사람들이 누리게 될 영광을 미리 보여주는 위로와 희망의 표지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성모승천대축일을 경축하는 모든 신앙인들은 오늘 자신의 처지가 아무리 실망스럽더라도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좌절이 클수록, 고통이 커질수록, 우리가 나아갈 길이자, 역할모델이신 성모님을 바라봐야할 것입니다.
삶의 방향을 온전히 아들 예수님께로만 향했던 성모님,
당신의 그 온전한 투신, 그 순수한 신뢰, 그 앞뒤재지 않는 믿음을
오늘 이토록 나약한 우리, 그래서 늘 흔들리는 우리에게 주시길 간청합니다.
어머니
-임문철 신부-
저희 어머니는 사제관에 좀처럼 오시질 않으십니다. 오시더라도 잠시 얼굴만 보고 그냥 가십니다. 행여나 아들 신부에게 누가 되지나 않을까 늘 조심하시지요. 신부가 되면 마음 고생이 끝나나 했더니, 신부가 되고 나니 더 바늘방석이라고 하는 다른 신부님 어머니의 말씀이 딱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 어머니를 뵈면 불효자가 된 것 같아 늘 죄송스럽기만 합니다. 어느 날 그런 어머니가 제게 조심스레 부탁을 하셨습니다. “아무개 자매에게 고맙다고 인사 좀 해라.” “아니, 왜요?” “그 자매가 이번에 큰 거 하나 들었는데, 그거 다 너 보고 한 거지, 나 보고 한 거냐?” 당시 저의 어머니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보험회사를 다니고 계셨는데, 그걸 안 어느 자매가 어머니에게 큰 보험 하나를 가입한 모양이었습니다. 아버님이 편찮으셨을 때, 어머니는 “누가 문안 왔더라. 누가 무얼 갖고 왔다” 하고 제게 일일이 보고를 하셨습니다. 다 저를 보고 한 것이니 제가 갚아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제관에 값비싼 선물을 놓고 간 분보다도 어머니에게 잘해드린 분이 더 고맙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오로지 아들 예수만을 마음에 품고 사셨던 성모님께서 이제 천국에서 영원한 영광을 누리시듯, 우리 어머니께도 호강 한번 시켜드려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알마` 의 승천
-전의이 수녀-
천대받고 버려진 이방인의 땅 갈릴래아, 나자렛 시골 마을의 처녀인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천사 가브리엘이 >튼4?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는 소식을 전한다. 마리아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응답한다. 마리아는 그 응답으로 이 세상에서 죽었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의 죽음을 통해 새로운 생명의 문을, 아담의 죄로 닫혀버린 에덴동산의 문을 열어주신다. 이는 하느님의 말씀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고 오로지 하느님의 뜻만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원한 새로운 하와 마리아의 응답으로 가능해진다. 자신을 온전히 바치기 위해 비워진 그릇을 하느님께서는 성령으로 감싸 안으신다. 하느님께서 간택하신 마리아는 ‘동정녀’로, 히브리말로는 ‘알마(hml[)’이다. 이 단어가 이사야서 7장 14절에서는 아하즈 왕의 부인을 지칭하는데, 그녀를 통해 하느님 뜻에 충실한 왕자가 태어날 것을 예고하였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 부분을 인용하여 동정녀 마리아한테서 구약의 성취인 메시아가 탄생한다고 예고하였다(1,23). 마리아는 진정 하느님께서 간택하신 ‘알마’이다. 오로지 하느님만을 위해 비워지고 바쳐진, 오직 하느님만을 담기를 열망한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말씀을 온몸으로 잉태한 알마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인사를 받았을 때 즉시 구약성경 안에 계시된 말씀으로 하느님을 찬양하고 메시아의 오심을 통해 자신 안에서 시작될 구원 역사를 찬양하였다. 그녀는 이 세상에 구세주를 낳아주었다. 요한 복음사가는 이렇게 말한다. ‘그분은 당신을 맞아들이는 이들, 곧 당신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능을 주셨다. 그러나 이들은 혈통에서나 육욕에서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다. 이제 우리도 마리아처럼 말씀을 잉태할 ‘알마’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에 거처하실 때’ 가능하다. ‘알마’가 된 사람은 모두 하느님께서 하늘나라로 불러올리신다. 구약의 에녹이 그랬고, 엘리야가 그랬고, 새로운 시대의 관문인 아버지께 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 예수님이 그러셨다. 그리고 하늘나라에 올라 천상 모후의 관을 쓰신 우리의 어머니가 그러셨고, 또 예수님을 쫓아 알마가 된 사도들이 그랬고, 이제 하느님의 알마가 되기를 갈망하는 우리들도 그렇게 하늘나라로 올라갈 것이다.
성모승천대축일
-홍승모 신부-
오늘 우리는 성모 승천 대축일 복음으로 ‘마리아의 노래’를 듣습니다. 라틴어로 마니피캇(Magnificat)이라 불리는 ‘마리아의 노래’는 구원의 역사를 요약해 놓은 찬미가입니다. 교회는 전례적으로 저녁 기도에 이 ‘마리아의 노래’를 바치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노래’ 첫째 부분은 하느님께서 이루신 구원에 대한 마리아의 개인적 감사의 노래를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루가 46-50절). 여기에는 하느님께 감사해야 하는 이유를 열거합니다(루가 48-49절). 둘째 부분은 하느님께서 마리아 안에서 이루신 구원이 하느님 백성 전체에 미치고 있다는 것을 찬양하고 있습니다(루가 51-56절).
마리아의 노래’에서 묵상할 것 중에 하나는, 마리아께서 깨달은 하느님을 향한 새로운 시각입니다. 새로운 시각이란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분으로만 여겨, 우리 인간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던 하느님께서 비천한 여종인 당신 자녀의 처지를 결코 버려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루가 1,48-49).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은 마음이 교만한 사람이 아닌 겸손한 사람에게만 해당합니다(루가 1,51). 우리가 마리아에게 배워야 할 신앙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마리아께서는 당신 자신을 비천하고 낮은 사람으로 처신한 것입니다(루가 1,48). 그러나 교만은 자기 자신의 실제 모습을 외면하게 하여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마음의 눈을 가리게 합니다. 교만은 자신의 실상을 허황되게 평가하고 진실에 눈멀게 합니다. 그래서 오직 자기 자신의 생각과 결정과 행동만이 옳고, 남들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증오하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마리아의 겸손한 신앙 안에서 하느님을 향한 새로운 마음의 눈을 떠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섬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스스로 낮추어 하느님의 권능에 복종하십시오. 때가 이르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온갖 근심 걱정을 송두리째 하느님께 맡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여러분을 돌보십니다”(1베드 5,5-7).
- 홍금표 신부-
오늘은 성모님이 지상 생애를 마친 후 육신과 영혼이 함께 천상영광으로 올려짐을 기념하는 승천 대축일입니다. 이 교리는 일찍부터 교회의 전승으로 받아들여지다가 1950년 믿을 교리로 선포된 교리입니다.
이 교리가 교회의 전승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신앙적 이유 때문입니다. 교회는 뛰어난 덕행으로 하늘나라에서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공적으로 인정한 사람들을 성인이라 표현하는데 성모님은 성인들 중의 으뜸 성인이요 신앙의 모범입니다. 때문에 성모님이 하늘나라에 계시다는 사실은 당연한 결과일 수밖에 없고, 승천이란 이러한 성모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의 극적인 표현입니다.
그러기에 성모승천이 우리 신앙인들에게 주는 교훈을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희망입니다. 인간의 몸을 지니신 성모님께서 하늘로 올림을 받았기에 우리도 하늘로 오를 수 있다는 표시요, 성모님처럼 우리도 하늘(구원)로 올림을 받을 수 있도록 성모님처럼 살아야 한다는 호소가 바로 이 사건의 의미입니다.
그러기에 성모승천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모든 것을 묵묵히 이겨나가신 성모님의 모습을 우리 삶속에서 본받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의 축일을 지내면서 오늘 복음과 연결하여 필자가 묵상하고자 하는 바는 신앙의 성장 과정입니다. 우리는 성모님에 대해 환상을 갖고 있기에 성모님은 처음부터 완성된 신앙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사람이라 생각하며 그분께 교훈을 얻기 보다는 부러워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면 성모님의 신앙은 처음부터 완성된 형태의 신앙이 아니라 갖가지 장애와 혼란을 극복하고 완성으로 나아간 신앙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그 일면을 복음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엘리사벳을 방문한 사건과 성모님의 노래로써 이 두 부분은 서로 상반되는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엘리사벳을 방문한 사건. 많은 이들은 엘리사벳 방문 사건을 엘리사벳을 도와주기 위한 방문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이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만 성서가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교훈은 아닙니다.
성서가 마리아의 선행을 강조하고자 했다면 마리아의 도움이 가장 필요할 때, 즉, 엘리사벳이 아기를 낳은 후에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도와주었어야 했는데 마리아는 아기를 낳기 직전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임신 후 여섯달이 되던 때 방문하여 세달을 머물다가 출산이 임박할 때 나자렛으로 돌아갑니다. 도와줌이 목적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동인데 말입니다. 이 사실은 방문의 목적이 출산을 돕기 위함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방문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 해답을 마리아에게 있어 엘리사벳의 잉태가 갖는 의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엘리사벳의 잉태는 천사가 마리아에게 준 상징입니다. 자신이 구세주의 어머니가 될 수도 있고, 처녀로서 임신할 수 있다는 증거가 아이를 못 낳는 늙은 여인 엘리사벳의 임신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 자신의 혼란스러운 마음, 흔들리는 신앙에 대한 증거를 찾고자 함이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라는 가장 위대한 신앙의 응답을 했음에도 마리아는 연약한 처녀였기에 양가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이 혼란스러운 마음에 해답을 얻고자 함이 바로 엘리사벳을 방문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리아의 신앙은 후반부에서는 극적으로 변화됩니다. 마리아의 노래(46절 이하부분)에 나타나는 마음입니다. 이 노래는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찬미가요 감사가입니다.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찬양할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의 사람으로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증거를 찾고자 하는 우리의 보통 마음과 같던 마리아의 신앙이 하느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신앙인의 모범이 되는 성숙한 신앙으로 변화되는데 성서는 이러한 극적인 반전에 가장 큰 역할을 엘리사벳 성녀의 마리아에 대한 찬양과 축복의 말에서 찾고 있습니다. (1, 42~46 참조).
지면상 서둘러 결론을 내려 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질 수밖에 없는 혼란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혼란이 나쁜 것이긴 해도 성모님처럼 답을 얻고자 한다면 혼란은 또 다른 성숙의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기억해야 할 점은 우리가 마리아의 신앙을 변화시킨 또 하나의 엘리사벳이 됨으로써 혼란을 겪고 있는 이 시대의 작은 마리아들이 위대한 신앙의 사람으로 변화하도록 칭찬과 격려, 축복의 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영봉 몬시뇰-
묵상 길잡이 이 축일은 지상생활을 마치신 성모님께서 영혼과 육신이 함께 하늘나라로 들려 높여졌음을 기념하는 축일이다. 4세기 이후 ‘복되신 동정녀 기념일’이 성모님의 죽음과 승천 축일로 받아들여졌으며, 7세기경에 서방교회에 전해졌고, 8세기에 8월 15일로 확정되었다. 1950년 비오 12세 교황은 교회의 오랜 전통으로 믿어오던 성모 승천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다. 성모님의 승천은 모든 이의 희망의 징표이며, 마지막 날의 완성을 미리 보여준다고 하겠다. 오늘은 성모님의 축일 가운데 가장 큰 축일이다.
1. 1950년 비오 12세 교황은 성모 승천을 ‘믿을 교리’로 선포함 우리는 일반적으로 교회가 어떤 교리를 ‘믿을 교리’로 선포했다고 하면 갑자기 교회가 그런 교리를 만들어 법을 선포하듯이 발표하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교회가 전통적으로 믿어오던 교리를 교회의 권위로 공적으로 확인했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성모 승천 교리도 마찬가지이다.
비오 12세 교황은 이 교리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면서 ‘사도 성 바오로’를 비롯한 여러 사도들의 믿음과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 제르마누스’ 등 수많은 교부들의 한결같은 믿음의 증거를 제시하였다. 말하자면 교회가 사도시대부터 교부들과 함께 믿어왔던 교리를 교황이 교회의 권위로서 공적으로 확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성모님의 승천은 그 믿음의 결과이다 성모 승천은 성모님께서 무덤의 부패를 겪지 않으시고 영혼과 육신이 함께 승천하셨음을 고백하는 교리이다. 그러면 교회는 왜 이 교리를 주저 없이 받아들였던가? 한마디로 성모님의 승천은, 세상 종말 곧 세상이 완성될 때에 모든 신앙인이 누리게 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들어가신 그 영원한 세계를 성모님께서 가장 먼저 누리게 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세상 종말의 본질은 흔히 생각하듯이 비극적인 파멸이나 재난이 아니라, 그 재난을 겪어낸 정화된 이들이 누릴 세상의 완성이 그 핵심이다.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향해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루가 1,45) 하고 말한다.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 하시며,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상황인데도 주님께 당신의 운명을 송두리째 맡기시고 전적인 신뢰를 드렸던 것이다. 마리아의 하느님께 대한 그 믿음은 변함이 없으셨다.
아들 예수님의 행동이 이해할 수 없었을 때에도, 아들이 수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고, 급기야 십자가의 형틀에 매달려 비참하게 죽게 되었을 때에도 마리아는 이해할 수 없는 주님의 계획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신 채 묵묵히 따르신 것이다. 참으로 마리아는 믿는 이들의 모범이셨다.
3. 마리아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가장 깊이 동참하신 분이시다 얼마 전에 ‘그리스도의 수난(Passion of Christ)’이라는 영화가 화제가 되었다. 예수님의 수난을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오랜 신앙생활을 한 신자들도 그 영화를 보고 예수님의 수난이 얼마나 혹독한 고통이었는지를 다시 깨달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신 다음에도 성모님의 고통은 끝없이 밀려왔음을 생생히 보여주었다.
흔히 우리는 “아들이 부모보다 먼저 죽으면, 부모는 그 아들을 자기 가슴에 묻는다.” 하고 말한다. 마리아야말로 십자가 아래서 사형수로서 가장 수치스럽고 비참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는 아들을 바라보셔야만 했다. 유명한 ‘피에타 상’은 십자가에서 내린 아들의 시신을 품에 안으신 마리아의 모습이다.
성모님의 가슴은 갈가리 찢기듯 얼마나 아팠을 것인가? 생각해 보면 마리아는 예수님보다 더 혹독한 고통을 겪었을 수도 있다. 예수님의 고통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심으로써 끝이 났다고 할 수 있지만 마리아의 고통은 그때부터 더욱 크게 밀려오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박해받는 사도들과 함께 지내신 성모님은 그 뒤에도 줄곧 쫓기는 사도들과 함께하셔야만 했다. 이렇게 성모님의 생애는 참으로 고통으로 점철된 일생이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성모님보다 주님의 수난에 더 깊이 동참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모든 믿는 이의 모범일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가장 깊이 동참하신 마리아께서 예수님의 구원 공로를 가장 먼저 입고, 그분의 부활의 영광을 가장 먼저 체험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마리아는 우리 신앙인이 가야 할 길을 앞서가신 분이며, 우리의 희망을 놀랍게 실현하신 분이라고 할 수 있다.
마리아는 우리 모두의 모범이며 선구자이시기에, 성모님의 승천은 단순히 마리아 개인의 영광이라기보다 마리아처럼 신앙의 길을 가고 있는 우리 모두의 기쁨이며 희망이라 할 수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교회는 마리아에게 ‘교회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그렇다. 마리아는 하느님 백성(곧 교회)의 어머니이시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백성이 가야 할 길을 당신 친히 먼저 가시고 또 우리도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전구해 주시고 돌보아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도 날마다 그분의 믿음의 길을 묵묵히 따라가면 마리아께서 승천하셔서 누리고 있는 그 영광에 반드시 함께 참여하게 될 것이다.
새벽을 열며
제가 어렸을 때, 명절 때만 되면 저희 집에는 많은 손님들이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손님들이 때로는 선물도 들고 오셨는데, 그 선물 중에서 최고의 선물은 바로 ‘종합선물과자세트’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때만 해도 과자가 귀한 시절이었고, 그래서 먹고 싶은 과자도 얼마나 많았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종합선물과자세트에는 과자뿐만 아니라, 사탕, 영양갱, 젤리, 껌 등……. 그리고 운이 좋을 때에는 조그마한 장난감까지 이 선물세트 안에 들어있었으니, 이 선물세트가 들어오길 얼마나 기다렸을까요? 따라서 종합선물과자세트를 가지고 오시는 손님이 너무나 멋지고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었었지요.
하지만 이 종합선물과자세트의 포장을 뜯은 뒤에는 항상 아쉬움이 남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큰 종합선물박스인데, 그 안에 들은 내용물은 생각보다 너무나 적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과자는 그렇게 많지도 않았습니다. 절대로 돈 주고 사먹지 않는 과자가 그 종합선물세트 안에 들어있으니 실망도 컸지요.
어쩌면 우리들은 이런 종합선물과자세트만을 추구했었던 것은 아닐까요? 겉은 크고 화려해 보이지만 풀어 놓으면 별 것도 아닌데, 그렇게 겉으로만 그럴싸한 삶이 최고라는 어리석은 생각만 가졌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히려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과자 한 봉지에 더 큰 기쁨과 행복을 얻는 것처럼, 비록 겉으로는 초라하고 작아 보이지만 그것이 나를 이 세상에서 살게 하는 커다란 버팀목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종합선물과자세트를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단번에 겉만 크고 화려한 인생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단번에 주어진 인생이 나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줄까요? 오히려 더 큰 실망감으로 인해서 힘들지 않을까요?
오늘은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바로 주님의 어머니이신 동정 마리아께서 하느님에게서 받으신 영광을 찬미하는 날입니다. 이런 성모님이 부럽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받아 승천까지 하셨으니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이러한 영광이 단 한 번의 결과로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잉태 순간부터 예수님의 죽음 때까지 성모님께서는 엄청난 고통을 당신의 가슴으로 안으셔야만 했습니다. 그러한 모든 고통과 시련 끝에 성모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부러움을 받을 수 있는 영광을 얻을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성모님의 삶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면서, 성모님과 같은 고통과 시련을 이겨낼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던져 봅니다. 그리고도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을까요? 그러한 순간에도 성모님처럼 하느님 아버지께 찬양과 기쁨의 찬미를 드릴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종합선물세트를 받을 수 있는 영광이 주어질 것입니다.
군것질을 하지 맙시다. 이빨 썩어요. ㅋㅋ
빠다킹신부
광복절의 어머니
-김광태 신부-
1945년 8월 15일. 아버지와 삼촌들은 징용에 끌려갔고, 어머니 혼자 눈먼 할아버지를 모시고 어렵게 살았습니다. 농사를 지으면 일본 사람들이 탈탈 털어가고, 대신 건네주는 콩 몇 되 받아서 겨우 연명하던 처지였습니다. 헛농사 짓는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왕성하게 자라는 피를 놓아둘 수가 없어서,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등에 업고 논에 나가 허기를 참으며 일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한낮의 열기에 지쳐갈 무렵, 동네에서 사람들이 뛰쳐나오며 만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중 잘 알던 사람 하나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소화(昭和, 당시 일본 천황)가 항복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얼떨결에 한 말씀. “워메, 그럼 이 쌀은 다 누가 가져간디야.” “가져가긴 누가 가져가. 다 당신네 거지.” 그것도 모르느냐는 투의 반응이 돌아왔습니다. 어렸을 적에 너무 자주 들어 그 전말을 아예 외우게 된 나의 어머니 이야기입니다. 권세에 짓눌리고, 굶주리면서 비참하게 살던 성경 속 이스라엘의 모습이 일제 하의 처지와 어쩜 그렇게 똑같은지 모르겠습니다. 온 이스라엘의 처지가 그랬기에 성모님의 노래 역시 현실을 도외시한 채 서정적인 분위기로 아름다움을 노래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놀라운 일을 체험하면서 억압당하는 백성과 함께 해원(解寃)의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모님을 생각하면 꼭 광복절의 우리 어머니가 떠오릅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김흥주 신부-
◆오늘은 우리 신앙과 구원의 모델이시며 희망이신 마리아께서 하늘로 들어높임을 받으신 성모 승천 대축일이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모습을 보여준 마리아를 통해 드러난 구원의 영광이 우리를 통해서도 드러나기를 간절히 희망하면서 어머니 마리아의 승천을 경축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이렇게 칭송한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천사 가브리엘의 방문을 받았을 때부터 마리아는 하느님의 엄청난 계획과 약속이 미천하기 그지없는 자신을 통해 이루어지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하였다. 이렇게 마리아는 오로지 주님께서 우리 인류에 대한 당신 구원 계획을 실현하실 수 있도록 철저한 믿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희생하셨기에 하늘에 올림을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마리아가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해서 부른 ‘마리아의 노래’에서 스스로를 “주님의 비천한 종”이라고 고백하면서 자신의 선택된 삶이 하느님의 은총 덕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한다. 그리고 지금 자기 영혼이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으로 충만해 있다는 것을 설레는 마음으로 노래하면서 우리를 그 기쁨에 초대하고 있다. 마리아의 노래처럼 이 세상에서 정말 행복한 사람은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분 섭리에 온 삶을 의탁하는 믿음을 지니며,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다. 마리아의 행복, 그것은 하느님의 뜻과 부르심에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하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은총인 것이다. 따라서 성모 승천 대축일은 우리에게도 커다란 위안과 희망을 안겨주는 날이다. 하느님은 아무리 보잘것없는 자라 할지라도 믿음 위에 굳건하게 서 있는 사람을 통하여 당신의 큰 능력을 드러내시고, 당신의 도구로 쓰시어 영광을 주신다는 사실을 성모 승천을 통해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성모 승천 대축일
- 김정호 신부-
우리는 흔히 남의 삶을 두고 평가할 때, 끊임없이 고생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사람을 두고는 불행하다고 말하고, 삶이 언제나 밝은 앞날을 바라보고 있다면 행복하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공경하며 축하하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삶을 평가하자면 아마도 두 번째의 경우처럼 아주 행복하신 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모님은 우리가 갖지 못한 특권을 많이 누리셨기 때문입니다. 우선 태어날 때부터 원죄에 물듦이 없으셨습니다. 또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더군다나 오늘 경축하는 바와 같이 하늘로 올림까지 받으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모님은 우리 평범한 인간이 하나도 누리지 못하는 특권을 혼자만 다 누린 분이고, 그래서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아가신 분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기회에 성모님의 삶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도록 그분이 받으신 특권이라는 것들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봅시다. 다시 말해서 성모님의 생애를 다른 눈으로 살펴보자는 말입니다.
아퀴나스의 토마스 성인께서는 인간의 삶을 두 가지의 말마디로 표현하였습니다. 하나는 ‘나옴’(exitus)라는 말마디이고 또 하나는 ‘되돌아감’(redditus)라는 말마디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창조를 통해 이 세상으로 나옵니다. 그리고는 장차 하느님께로 다시 돌아감으로써 한 개인의 역사를 끝냅니다. 즉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으로부터 나와서, 하느님을 위해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다, 하느님께로 되돌아갑니다. 여기에는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성모님의 삶도 바로 이러한 인생 여정 중의 하나입니다. 즉 성모님의 삶은 모든 인간이 걸어가게 되어 있는 길이고, 그 길을 미리 앞서서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성모님에게 베푸신 것들은 장차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즉 인류 전체에게 주실 은총을 미리 맛보게 해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 인류의 삶이 장차 완성될 모습을 성모님을 통해서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분의 삶은 특권을 통해서 혼자만 배타적으로 누린 삶이 아니라, 우리 역시 하느님으로부터 받게 될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 삶인 것입니다. 굳이 특권이라고 하자면 성모님께서 그것을 제일 먼저 받았다는 것이지, 우리는 전혀 받을 수 없는 것을 혼자만 받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따라서 성모님께서 하늘로 올림을 받으신 것도 오로지 성모님에게만 허용된 은총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각자에게도 장차 주어질 은총입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 모두에게 희망이 됩니다. 우리는 오늘 이 축제를 지내면서 우리가 지금 당하고 있는 비극적인 시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성모님께서 받으신 영광이 우리에게도 주어질 수 있다는 믿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런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전제 조건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느님께 의탁하려는 자세, 그분을 신뢰하는 마음,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태도 그 자체입니다. 성모님께서는 그런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이 말한 것처럼,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진정으로 믿고 주님께 의탁하고 그대로 따르신 분이 바로 성모님이십니다(루카 1, 45 참조).
성모승천대축일은 바로 우리 인류 전체가 완전하게 되는 마지막 날의 모습을 마음속에 새겨주는 축제입니다. 우리가 올바로 알아듣든 그릇되게 알아듣든 간에, 우리 인류에게는 하느님에 의해 들어 올려지는 새로운 역사가 다가온다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에 따라 지어내신 최대의 걸작품인 우리 인간이 멸망의 구렁텅이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결코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인류의 삶을 평가함에 있어서, 괜히 우리 자신이 인간적인 기준만 갖고 지나치게 냉혹하게 평가하고 심판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냉혹한 심판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여정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모님의 삶을 바라보면서, 믿음이 약한 모든 사람들에게, 걱정에 가득 싸인 모든 사람들에게, 나약해진 모든 사람들에게, 슬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외로운 모든 사람들에게, 인생의 쓴맛을 본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어떤 것인지를 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자렛 산골에서 자라난 한 순박한 처녀. 그 안에 기뻐 춤출 수 있는 창조가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 춤은 하늘나라에서 이미 시작된 것이고, 그것이 성모님에게 전해진 것이고, 장차 영원한 천상 잔치에서 우리가 추게 될 춤입니다. (*)
성모 승천 대 축일.
- 서공석 신부 -
오늘은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셨듯이 성모님도 그 생애의 종말에 하늘에 올림을 받으셨다는 것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승천은 우주가 세 층으로 이루어졌다고 믿던 시대에 사용되던 낱말입니다. 과거에는 하느님이 계시는 하늘, 우리가 사는 땅, 죽은 이들이 가는 지하 어둠의 나라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주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모 승천 축일을 성모님이 그 생애 종말에 하느님에게 가셨다는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의 믿음을 기억하는 축일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음 후 하느님 안에 살아계시듯이, 성모님도 죽음 후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신다는 믿음입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알리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복음서들이 마리아에 대해 언급할 때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우리의 구원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당신의 어머니와 제자를 보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보십시오.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보시오. 그대의 어머니이오.”(19,26-27). 요한복음서는 이 말씀으로 초기 제자들이 마리아를 소중히 생각하게 된 것은 예수님의 뜻을 따라 된 일이라고 말하고자 합니다. 아들은 어머니의 운명을 자기 것으로 하면서 어머니가 지닌 삶의 자세를 배우면서 성장합니다. 따라서 복음서들 안에 있는 성모님에 대한 이야기들은 신앙인인 우리의 운명과 우리에게 요구되는 삶의 자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신약성서에는 성모님에 대한 이야기가 많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은 ‘마리아는 길을 떠나,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가서...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고 말합니다.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한 생명이 태어날 것을 들은 성모님은 즉시 길을 떠나 역시 한 생명이 태어날 것을 기다리고 있는 엘리사벳을 찾아갔습니다. 마리아를 맞이한 엘리사벳은 말합니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자기와 이웃 안에 숨 쉬고 있는 하느님의 생명이 태어나 자기의 삶 안에 나타날 것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그 기다림은 기쁨이고 서로에게 하는 축복으로 표현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마리아의 노래’는 본시 예루살렘의 그리스도 공동체가 예배에서 사용하던 것입니다. 이 노래는 구약성서 구절들로 꾸며져 있습니다. 루가복음서는 그 노래를 채집하여 마리아가 한 노래로 오늘 복음에 담았습니다. 그 내용은 하느님의 자비는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권세 부리는 이와 부요한 이가 있고, 비천한 이와 굶주리는 이가 있지만, 하느님의 자비에 자기의 구원을 보는 사람은 자기 운명을 전혀 달리 본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이 세상의 모든 차별을 철폐하신다는 것입니다. 초기 신앙인들이 믿고 있던 바를 표현한 것입니다.
루가복음서는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의 탄생을 예고하자, 마리아가 “보십시오,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 바랍니다.”(루가 1,38)라는 말씀으로써 새 생명을 영접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신앙인은 이렇게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새 생명을 자기 안에 영접하고, 그것이 자기 삶의 의미가 될 것을 기대하며 삽니다.
요한복음서 2장에는 가나 촌의 혼인 잔치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모님은 이 잔치에서 물을 술로 바꿀 것을 예수님에게 암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어머니의 청을 받아들여 좋은 술을 공급하여 사람들을 기쁘게 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술 떨어진 잔치 집과 같이 따분한 유대교 안에서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 안에 희망을 두면서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와 사랑이라는 기쁨을 체험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교회도 복음서들의 이런 정신을 이어받아 그리스도 신앙인의 운명을 새롭게 말할 필요가 있을 때, 성모님에 대해 말합니다. 19세기 유럽 지식인 사회를 강타한 합리주의는 하느님이 이 세상의 일에 개입하실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인류역사 안에는 하느님의 계시도, 섭리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교회는 이런 주장에 맞서서 하느님이 인류역사 안에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신다고 말해야 했습니다. 교회는 1854년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기 위해 하느님의 특별한 배려로 원죄에 물듦이 없이 출생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교회가 말하고자 한 것은 하느님은 인류역사 안에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모승천 교리도 성모님이 하늘로 올라가시는 영광을 누리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1950년 11월 1일에 선포된 축일입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인류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치렀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으로 이루어진 유럽 사회는 인간의 미움과 잔혹함이 만든 폐허를 똑똑히 보았습니다. 인류가 자랑하던 과학과 산업의 발달은 인명 살상(殺傷)과 문명 파괴의 위력을 높였습니다. 독일의 그리스도인들이 힘을 합쳐서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하였습니다. 인간 생명의 존엄성은 사라졌고 인류는 쓰레기와 같이 비하되었습니다.
이런 파멸의 폐허 위에서, 유럽 교회는 인간의 존엄성을 새롭게 천명해야 했습니다. 인간의 미래는 하느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선포해야 했습니다. 성모님의 승천축일은 인간의 운명이 하느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오늘도 인간 생명을 쓰레기 취급하면서 살상을 시도하는 현장들은 있습니다. 각종 테러, 지속되는 전쟁들, 그리고 핵무기와 미사일의 개발 등이 있습니다. 현재 지구가 겪고 있는 환경오염도 인류의 불행한 미래를 예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들은 ‘마리아의 노래’는 자비의 노래입니다. 하느님의 자비 안에 희망을 두는 사람은 그 운명이 달라질 것이라는 노래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 안에 살려서 살자는 노래입니다. 성모님이 하느님 안에서 그 생애의 종말을 맞이하였듯이, 우리도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완성되는 삶을 살겠다는 노래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생애를 완성시키신다면, 우리는 지금부터 그분의 자비를 배워 실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비롭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안에 스며들면, 그 자비가 우리의 운명을 바꿀 것입니다. ◆
우리 희망의 표지인 성모 승천
1950년 11월 1일, 교황 비오 12세가 “원죄에 물들지 않고 평생 동정이신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지상의 생애를 마치신 뒤 영혼과 육신이 함께 천상의 영광에로 들어 올림 받으셨다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된 진리이다.”라고 선포함으로써 성모승천이 교회의 믿을 교리로 선포되었다. 성모님의 승천은 초 세기부터 신도들이 믿어왔던 믿음을 믿을 도리로 선포한 것이다. 4세기 말에 기록된 신약성서 외경에 이미 ‘성모의 죽음’ 또는 ‘성모의 장례식’이라는 제목으로 성모님께서 무덤으로 옮겨지던 중 육신이 살아나 승천하였다거나 돌아가신 3일 후에 부활했다는 기록이 있다. 교회는 3-4세기부터 ‘복되신 동정녀 기념일’에 성모승천을 기념했으며, 5세기 초에는 예루살렘 교회가 8월 15일에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로 공경하는 축일을 지내며 성모승천을 기념했다. 6세기경에 이르러 이 축일의 명칭을 ‘성모 안식 축일’로 변경하여, 성모님께서 하느님나라에 올림을 받아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있음을 기념했고, 8세기부터 그 명칭을 ‘마리아의 승천 축일’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 2차 바티칸공의회도 “티 없이 깨끗하신 동정녀께서 조금도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으며 지상 생활을 마치신 후에 영혼과 육신이 천상 영광으로 부르심을 받으시어, 주님으로부터 천지의 모후로 추대 받으셨다.”(교회 헌장 59항)고 성모승천 교리를 교회의 정통 교리로 재확인하고 있다.
교회가 성모승천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면서까지 성모님께 각별한 영예와 공경을 바치는 까닭은 먼저 성모님께서 구세사에서 누구도 할 수 없는 탁월한 역할을 수행하셨기 때문이다. 성모님은 처녀임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힘으로 아들을 낳게 되리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명하심으로써 구세주께서 강생하시는데 협력하셨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라고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명하시어 구원사업에 협력하신 것이다. “구원사업에 있어서 성모와 성자의 결합은 동정녀로서 그리스도를 잉태할 때부터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까지 드러난다.”(교리서 964항) 성모님은 주님과 함께 세상을 구원하시는 성부의 뜻에 적극 동참하신 것이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라고 하신 말씀에서 드러나듯이 성모님은 언제나 주님의 뜻에 일치하는 삶을 사시었다. 또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뜻에 철저히 따르고 순명하도록 우리를 이끄신다.
또한 성모님은 “성부의 뜻과 성자의 구속 사업과 성령의 모든 활동에 전적으로 따르고 참여함으로써 교회를 위하여 신앙과 사랑의 모범이 되셨다. 이로써 교회의 가장 뛰어나고 가장 독특한 지체가 되며 교회의 전형이 된다.”(교리서 967항) 성모님은 언제나 마음속에 주님을 담고 사신 분이셨다. 주님께서 탄생하실 때에 하늘의 천사들이 노래하고 목동들이 경배한 모든 것도 마음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셨다(루가 2,6-19).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율법학자와 토론하며 성전을 아버지의 집으로 부르신 것도 마음속 깊이 간직하셨다(루가 2,42-51). 성모님은 주님을 모시고 주님과 하나가 되어 사셨고, 그렇게 사는 삶이야말로 교회의 모범이요 전형이다.
나아가 성모 승천은 우리에게는 희망의 표지가 된다. 교황 바오로 6세는 1974년 발표한 ‘마리아 공경’에서 성모승천 대축일은 마리아의 완전하심과 복되심, 동정의 몸과 흠 없는 영혼이 누리시는 영광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완전히 닮으심을 기념하는 축제일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날은 교회와 전 인류에게 바라던 종국적인 희망이 실현됨을 보여주는 축일이라고 설명했다. 성모님께서 영혼과 육신이 승천하셨음을 선포함으로써 부활이란 영혼만의 부활이 아니라 현세에 살고 있는 ‘나’라는 온전한 인간의 부활임을 선포한 것이다. 즉 성모 승천은 인류 구원의 역사가 완성되었을 때 모든 사람들이 누리게 될 영광을 미리 보여주는 위로와 희망의 표지이다. 따라서 성모승천은 현세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며, 능동적인 삶과 복음화의 의무를 강조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성모 승천 대축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먼저 성모님을 삶의 모범으로 삼고 살아야 하겠다.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명함으로써 우리 안에 주님을 모시고, 주님과 하나 되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 하느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실천함으로써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꾼이 되어야 하겠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육신과 영혼이 부활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이 세상을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살도록 해야 하겠다. 그럼으로써 우리도 성모님처럼 승천의 영광에 동참하여 하느님 나라에 들 것을 굳게 믿으며 살아가야 하겠다.
† 나의 마니피캇
-박상대 신부-
오늘 우리가 지내는 ‘성모승천 대축일’은 주님성탄, 주님부활, 성령강림 대축일과 더불어 교회의 4대 의무 대축일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성모승천 대축일이 이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면서도 다른 세 가지 대축일과는 달리 많은 신자들에게 조금은 멀리, 그리고 낯설게 여겨지고 있다는 생각이 앞선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두 가지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째는 전자의 3대축일이 하느님 예수와 성령에 관한 대축일인 반면에 오늘의 대축일은 우리와 같은 인간 마리아에 관한 대축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모승천 대축일’을 정확히 표현하여 ‘성모몽소승천 대축일’이라고 한다. ‘성모몽소승천’이란 성모 마리아께서 지상에서의 삶을 마치신 후 그 육신과 영혼이 마리아의 자력으로써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하늘에 올려짐을 받았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주님성탄, 주님부활, 성령강림 대축일은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스스로 세상에 펼치신 인류구원사건인데 비하여 성모승천 대축일은 하느님께서 피조물인 인간 마리아에게 베푸신 최고의 은총을 기념하는 사건이다.
둘째는 오늘의 대축일이 3대 대축일과는 달리 성서상의 아무런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성모 마리아의 죽음이나 승천에 관한 기록은 성서(聖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거룩한 전통인 성전(聖傳)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마리아에 관한 축일은 동방교회에서부터 시작되는데, 4세기 중엽 ‘복되신 동정녀 기념일’을 제정하여 마리아의 죽음과 승천을 기념하였다. 이를 본받아 서방교회에서도 7세기초 로마의 황제 마우리씨오(582-602)가 ‘복되신 동정녀 기념일’을 8월 15일로 정하였다고 한다.
초대교회의 교부들에 의하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강림 후에 성모 마리아는 소아시아(현재의 터키)의 에페소 지방에서 요한 사도와 다른 몇몇 사도들과 함께 사시면서, 그곳의 신자들에게 당신 아들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나날이 덕행과 믿음에 온갖 정성을 다 기울이셨다고 한다. 당시 마리아의 소망은 단 한가지로서, 천국에서 당신 아들 예수를 다시 뵙는 것이었다.
성모 마리아는 15년 동안 이곳에서 사시다가 6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마리아가 임종할 그 때에 공교롭게도 부활하신 예수께서 처음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와 같이 토마 사도를 뺀 다른 모든 사도들이 모여 마리아의 임종을 지켜보았고, 돌아가신 후 무덤에 안치했다고 한다. 3일이 지난 후 마리아의 임종 소식을 들은 토마 사도가 급히 돌아와서, 성모 마리아께 마지막 인사라도 드려야한다면서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다른 사도들과 함께 무덤을 다시 열어 보았더니 마리아의 유해는 온데 간데 없었고 수의만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목격한 사도들은 마리아께서 돌아 가신지 3일 만에 부활하여 당신 아드님처럼 하늘에 오르셨다는 사실을 믿고, 이러한 영광을 마리아에게 베풀어주신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면서 이를 선포하기 시작하였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성모몽소승천은 초대 교회 때부터 사도들과 교부들, 그리고 많은 신자들이 믿어 왔던 은혜로운 신앙 조목으로서, 여러 차례 성모님의 발현과, 레지오마리에의 창설과 더불어 성모께 대한 공경과 신심에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해온 것이다.
1854년 12월 8일 교황 비오 9세(1846-1878)는 사도로부터 내려오는 전승에 힘입어 ‘성모 무염시태 교리’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다. 이는 천주의 어머니이시며 동정녀이신 마리아가 그의 양친 요아킴과 안나로부터 잉태되는 그 순간에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원죄에 물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온 신자들이 믿어야할 교리로 선포한 것이다.
나아가 1950년 11월 1일 교황 비오 12세(1939-1958)는 ‘가장 풍요로우신 하느님’이라는 사도헌장을 반포하여, 마리아가 죽은 후 하늘에 올림을 받았다는 교리를 믿어야할 신앙 교의로 선포하고 전통에 따라 8월 15일을 성모몽소승천 대축일로 정하였다. 이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께서 지상생활을 마치신 후 원죄의 결과가 가져다주는 죽음에 예속되지 아니하고,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셨다는 지극히 당연한 결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로써 전세계의 교회는 나자렛의 마리아가 하느님의 특은으로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함께 나누고 있음을 경축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마리아 보다 앞서 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승천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권능과 업적, 그리고 공로로써 부활 승천하셨지만, 마리아는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의하여 부활하시어 하늘에 오르시는 은혜를 받으신 것이다. 따라서 마리아의 부활과 승천은 마리아의 개인적인 영광일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모든 인간이 미구에 받게 될 부활과 승천의 원형이며 모델로서, 우리에게 약속된 영광이며 희망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오늘 우리가 기뻐하며 기념하는 대축일의 크나큰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오늘 성모승천 대축일은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한낱 인간인 마리아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틀어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받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영광이며, 은총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최대의 영광과 은총은 마리아 편에서 볼 때 거저 주어진 것이지만, 하느님 편에서 볼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마리아의 굳건한 믿음과 겸손이다. 인간의 눈에는 불가능하게 보였던 동정녀의 잉태였을망정 전능하신 하느님의 능력에 전적인 신뢰와 온전한 믿음을 걸었던 마리아의 태도가 구세주의 탄생을 가능케 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 구원 사업에 지대한 협조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마리아는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의 찬미를 받는다. 엘리사벳의 찬미에 이어서 하느님의 권능과 자비를 노래하는 마리아의 ‘마니피캇’에서 우리는 그분의 지극한 겸손을 알 수 있다. 주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만 해도 마음이 설레어 기뻐했던 마리아의 겸손, 자기에게 주어진 온갖 영광과 은총을 다시금 주 하느님께 돌리면서 모든 것이 다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주신 덕분이라고 말하시는 마리아의 겸손, 이는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할 덕행이 아니겠는가?
우리도 생활 속에서 나의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만 해도 마음이 기뻐 설레어지는가? 우리도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은혜와 은총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이 모든 영광을 하느님께 다시금 돌려 드리면서, 내가 하는 모든 일과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다 그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주신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의 대답이 ‘그렇습니다’ 라면, 우리도 틀림없이 성모 마리아 곁에 성큼 다가서 있을 것이며, 마리아의 마니피캇이 바로 우리의 마니피캇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의 광복절을 함께 경축하면서........◆
인사말을 들을 때에(루가 1,39-56)
-유 광수신부 -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에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자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 안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내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오늘 복음을 보면 기쁨이 약동하는 것을 느낀다. 인사를 하는 사람이나 인사를 받는 사람이나 모두가 기쁨의 소리를 전하고 기쁜 말로 응답한다. 그 기쁨이 점점 더 커져서 마리아는 마침내 기쁨에 찬 노래를 불렀다. 서로가 칭찬하는 말이요, 상대방에게 듣기 좋은 말이요, 하느님이 이루신 이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남이 들을 때에는 이해가 가지 않는 내용들이지만 그들은 서로 말이 통하고 또 그 말을 상대방이 이해해주고 받아주니까 더욱 신이 나서 이야기가 이어지고 나중에는 노래까지 부르게 된다. 이들이 주고받은 이야기들은 모두가 영적인 이야기로서 하느님에 관한 이야기며 하느님이 자기들 안에서 이루신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루가 복음은 이렇게 다른 복음과는 달리 기쁨을 전해주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그 기쁨이 점점 더 커나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 모든 복음이 다 기쁨을 전해 주는 복음서이지만 특별히 루까 복음은 복음을 통해서 기쁘게 사는 이들의 구체적인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그래서 처음부터 기쁨의 원천인 예수님의 탄생 예고와 그로 인해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 마리아의 노래, 즈카리야의 노래를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을 환호하는 천사들과 목자들의 기쁨을 전해주고 있다. 즉 기쁨의 메아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지고 있다. 특별히 처음 두 장에서 잘 나타난다. 즈카리야의 노래, 마리아의 노래, 시므온의 노래, 베틀레헴 동굴에서 울려퍼진 천사의 노래는 드디어 예수님께서 등장하심으로써 구원이 도래한 사건을 노래하는 환희와 찬미와 감사의 표현들이다. 루가 복음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 사도들이 성전으로 돌아와 자기 눈으로 보아 온 바를 두고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드리는 장면에서 끝을 맺는다. 따라서 루가 복음의 특성은 교회내에서 복음선포의 직무와 봉사와 직책을 수행하는 선교사들을 어떻게 교육시킬 것인가? 이런 질문에 해답을 주는 복음서이다. 즉 우리가 체험한 예수님을 어떻게 다른 이들에게 전할 것인가를 교육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복음 선포의 대표적인 모델이 마리아에게서 찾아 볼 수 있겠다. 엘리사벳의 인사를 받고 마리아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 한다."고 노래불렀다. 복음 선포자의 영혼은 무엇보다도 주님을 찬양하는 영혼이어야 한다. 그리고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자이어야 한다.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영혼은 참으로 복된 영혼이고 아름다운 영혼이다. 그리고 건강한 영혼이요, 구원된 영혼이다. 지금 나의 영혼의 상태는 어떠한가? 주님을 찬양하고 있는가?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는가? 나의 영혼도 주님을 찬양하고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그런 영혼이 될 수 있을까? 그 비결이 무엇일까?
우리는 여기에서 마리아의 영혼이 어떻게 주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 할 수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 그래야 나의 영혼도 주님을 찬양할 수 있고 즐거워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마리아는 "내 영혼이, 내 마음이"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마리아의 영혼과 마음은 주님을 찬양하고 즐거워하는 주체이다. 마리아의 영혼과 마음의 상태는 늘 주님을 찬양하고 있고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마리아의 영혼과 마음의 상태이라는 것이다.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마리아는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 보셨기 때문입니다."라는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주어가 나에서 주님으로 바뀐다. 즉 이제부터 마리아에게 역사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마리아가 주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주님께서 자신에게 해 주신 일들이 너무나 놀랍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마리아 자신에게 이토록 큰 일들을 이루어 주셨기 때문에 주님을 찬양하고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라고 그 이유를 밝히신다. 그래서 마리아의 노래는 자신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마리아게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오직 주님을 찬양하고 구원자 하느님을 즐거워한다는 것 뿐이고 나머지는 전부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마리아에게 해 주신 놀라운 일들을 열거한 것이다.
우리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고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려면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놀라운 일들을 발견할 때 가능하다. 즉 주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들에 대해서 볼 수 있을 때 우리의 영혼도 주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고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찬양할 수밖에 없고 즐거워 할 수밖에 없다. 놀라운 선물을 받고 기뻐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오래 전에 모 수녀원에서 년피정을 지도한 적이 있었다. 마지막날 마리아의 노래에 대해서 강의를 한 후 수녀님들에게 각자 자기의 마니피깟을 써서 찬미가를 불러 보자고 하였다. 수녀님들은 자기 안에서 이루신 주님의 놀라운 이들을 적어 한 사람씩 자신의 마니피깟을 불렀다. 정말 아름다웠다. 정말 수녀님들의 영혼은 주님을 찬양하고 있었고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 하였다.
우리의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지 못하고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지 못하는 이유는 전능하신 주님께서 자기 자신에게 해 주신 놀라운 일들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 영혼이 놀라운 일이 없는데 찬양하겠는가? 주님께서 구체적으로 왜 나의 구원자이신지를 알지 못하는데 그리고 나의 구원자이시라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데 즐거워할 수 있겠는가? 기쁨과 찬양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다. 어떤 놀라운 것을 체험하였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하느님이 마리아에게 큰 일을 하셨다면 나에게도 분명 큰 일을 하셨을 것이다. 그 동안 우리가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신 일들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데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발견하지 못한 것이지 주님께서 이루신 일들이 없기 때문에 발견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 안에 이루신 일들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면서 나의 마니피깟을 만들어서 주님께 불러 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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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