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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3. 묵상글 ( 부활 제2주간 토요일. - 완벽한 공동체는 없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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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3. 부활 제2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완벽한 공동체는 없다.
“그 무렵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트리게 되었다.”
완벽한 공동체는 없다.
이것이 오늘 묵상의 주제입니다.
무소유와 공동소유의 그 완벽할 것 같은
초대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불평이 터져 나오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완벽한 공동체는 없습니다.
완벽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불완전한 사람들로 공동체가 이루어지니
공동체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사는 곳은 어디서나 갈등과 분열과 불평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숙하고 훌륭한 공동체는 아무 문제가 없는 완벽한 공동체가 아니라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문제점을 해결하는 능력입니다.
회복력이나 복원력 같은 것이 얼마나 있는가 그겁니다.
사실 미성숙한 공동체는 문제가 생기면 서로를 파괴하고 구성원들이
공동체에서 이탈하고 결국 공동체가 쪼개지는 것으로 끝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초대 교회 공동체는 이 면에서 성숙하고 훌륭하고,
모든 것을 공동체에 내놓았던 처음보다 더 성숙하고 훌륭합니다.
잠시 혼란이 있었다가 다시
기도하는 공동체,
일치하는 공동체,
선교하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각자 자기 하느님께 기도하는 공동체가 무슨 성숙한 공동체입니까?
같이 기도하지만 일치하지 못하는 공동체가 무슨 성숙한 공동체입니까?
선교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문제없이 산다면 그것이 무슨 성숙한 공동체입니까?
그런데 오늘 초대 교회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렇게 결정을 내립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우리의 교회 공동체, 수도회 공동체, 재속 프란치스코회 공동체 평의원들도
오늘 사도행전의 일곱 부제를 본받아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이기를 기도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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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3. 부활 제2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지난 달이었을 것입니다. 태국과 우리나라의 월드컵 예선 축구 경기를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3:0의 승리였습니다. 1차전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해서 불안하다고 언론에서 말했지만, 2차전에는 3:0의 완승을 했습니다. 특히 마지막 세 번째 골에서 가슴이 울컥했습니다. 압도적인 승리 때문이 아닙니다. 또 이제 이겼다는 안도감에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이 골을 넣은 선수 때문이었습니다.
그 선수의 이름은 박진섭입니다. 이 선수는 작년 12월에 태극마크를 처음 달았습니다. 하지만 오랜 무명의 시간을 보냈었지요. 실업팀, 그것도 2부리그에서 축구를 시작했고, ‘K리그1’까지 도달하는데 자그마치 6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프로구단에 들어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지만 생생하게 꿈을 꾸면 이뤄진다는 믿음으로 달려왔습니다. 모두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그가 골을 넣고 환하게 웃는 모습에 저 역시 큰 기쁨을 얻습니다. 희망을 잃지 않고 열심히 자기 자리를 지킨 이의 웃음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좌절, 절망이 우리의 단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희망이란 단어를 품고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를 떠올려야 합니다. 그 희망이 지금과 다른 또 다른 삶을 살게 해줄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죄 중에 있다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으로 다시 힘차게 사는 용기가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저녁때, 제자들이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지요. 그런데 큰 바람이 불어 물결이 높게 이는 것이 아닙니까? 어둠 속에서 작은 배를 탄 채 거센 바람과 높은 물결을 뚫고서 건너편에 가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때 어둠을 뚫고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서 두려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예수님 말씀따라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두려움을 이겨내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바로 주님을 모시려고 했을 때만 가능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으려고 할 때,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습니다. 아직 배 안에 모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목적지에 이릅니다.
주님과 함께하려는 마음만으로도 우리는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문제의 해결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멀리하고 잊어버린다면, 두려움 안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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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마담 드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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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3. 부활 제2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나다. 두려워할 것 없다.”(요한 6,20)
오늘 <복음>은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시는 장면입니다. (앞 장면인 ‘5천명을 먹이신 이야기’가 출애굽의 만나의 기적을 떠올리게 한다면, ‘풍랑이 이는 호수를 건넌 이야기’는 홍해를 건넌 사건을 기억하게 해 줍니다. 또한 ‘5천명을 먹인 이야기’가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미리 보여준다면, ‘풍랑이 이는 호수를 건넌 이야기’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보여줍니다. 곧 “믿음”으로 우리의 목적지인 하늘나라,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됨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을 떠나온 제자들의 ‘호수’에는 어둠이 짙습니다. 거센 바람이 불고 물결이 사납습니다. 배는 이미 뭍에서 10여리쯤 떨어졌고 호수는 이미 어두워졌는데, 큰 바람이 불어 물결이 높이 일었습니다. 두려움과 고통, 절망과 죽음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서 배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셨습니다.
<욥기>에서 하느님을 일컬어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는 이”(욥 9,8)라고 하셨듯이,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시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바다는 밟혀졌기에, <요한 묵시록>의 “새 하늘 새 땅”(21,1)에서 ‘새 바다’는 볼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당신을 보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나다. 두려워할 것 없다.”(요한 6,20)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탈출기>(3,14)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나다”라고 계시하셨듯이,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구원하는 하느님이다”라고 당신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그때에야, 제자들은 눈이 열리고 예수님을 배 안으로 맞아들이려고 하였지만, 배는 “어느새”(6,21) 이미 그들의 목적지에 가 닿았습니다. 곧 배가 뭍에 가까이 왔기 때문에 가 닿은 것이 아니라, 호수 한복판에서 풍랑에 시달리던 배가 제자들이 믿음으로 받아들이자 “어느새” 목적지인 가파르나움에 도착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짧은 장면 안에서 세 번에 걸쳐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곧 물 위를 걸으심으로 권능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이요, “나다”라고 당신 자신을 스스로 계시하시는 하느님이요, 풍랑 속의 배를 “즉시” 뭍에 이르게 하시는 구원자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삶은 오늘도 풍랑과 어둠의 바다를 건너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분께서 우리를 무사히 건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우리는 이미 이 ‘건너감’, ‘지나감’이라는 파스카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 어떤 풍랑과 좌절 속에서도 언제나 돛대를 높이 세워, 성령의 바람을 타고 나아가야 할 일입니다. 흔들리지 않고는 나아갈 수 없음을 알기에, 아니 흔들릴 때라야 오히려 앞으로 나아감을 알기에, 흔들림 속에서 주님께 믿음으로 의탁하고 성령의 바람을 타고 나아가야 할 일입니다. 곧 고통과 좌절에서도 언제나 “믿음”과 “기쁨”을 간직하며,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20)
주님!
오늘도 끊임없이 항해 하게 하소서.
항구에 평온히 정박해 있기보다
어두움을 헤치고 풍랑을 뚫고 가게 하소서.
비록 흔들릴지라도 앞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흔들림 속에서 믿음과 의탁을 배우게 하소서.
하오니, 주님,
성령의 바람을 태워 제가 가야할 곳으로 저를 인도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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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3. 부활 제2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나를 지켜줄 후원자가 있다면 행복합니다. 그러나 드러내 놓지 않고 남모르게 후원하는 이도 있습니다. 후원받는 이들은 누가 후원하였든 든든한 그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쁨을 간직할 수 있고 하고자 하는 일을 마음껏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마음껏 노력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늘 지켜주고 바라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그것은 신나는 일이고 힘이 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후원자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실망하거나 좌절할 이유는 없습니다.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산에 올라가시어 기도하셨는데 어둠이 짙어졌을 때 큰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어 배에 있는 제자들에게로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6,20).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습니다”(요한6,21).
여기서 어둠은 세상의 빛(요한8,12)이신 예수님 없이는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배가 원하던 곳에 닿았다는 것은 자연의 힘, 파괴하는 힘이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 행위를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모든 방해물과 모든 거리를 넘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람의 위력, 그 어떤 혼돈의 소용돌이에 아랑곳하지 않으십니다. 바람에 휘둘리고, 물결에 흔들리는 것은 바로 우리이고, 그로 인한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인생 항로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기치 않은 바람과 물결의 위기 상황을 당할 때 주님이 어디 계시냐고 투덜댑니다. 위기에 처하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안에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하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 앞에서는 어떤 바람이나 물결도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사실, 문제는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은총의 기회입니다. 시험은 좋은 것입니다. 부족한 것을 채울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예수님만을 의지하며 갈망한다면 우리는 평정을 되찾을 것이며 어느새 가려던 곳에 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하려고 해도 걸림돌이 많습니다. 내가 순수한 마음으로 하려고 해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지금 당장 희생하고 베푸는 것이 손해 보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하느님을 몰랐더라면 더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포기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반드시 주님께서 넘치도록 갚아주신다는 것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종이든 자유인이든 저마다 좋은 일을 하면 주님께 상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두십시오”(에페6,8). 사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밑지고 손해 보고 불이익을 당할지라도 하느님을 선택하십시오. 희생은 주님 사랑의 표징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하시며 나를 지켜주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에 추호의 의심이 없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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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3. 부활 제2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프랑스와 한국의 중산층의 기준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프랑스는 다음과 같은 사람을 중산층이라고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1개 이상의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을 것, 직접 즐길 수 있는 스포츠 하나가 있을 것, 다를 줄 아는 악기 한 가지 있을 것, 남들과 다른 맛을 내는 요리 하나가 있을 것, 부정과 불의에 대해서 공정한 목소리를 내는 것, 약자를 도우며 봉사를 꾸준히 할 것” 그런가 하면 한국은 다음과 같은 사람을 중산층이라고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부채 없는 아파트 30평 이상 소유 할 것, 월 급여 500만 원 이상 일 것, 중형차를 소유 할 것, 통장 잔고 1억 이상 일 것, 해외여행 1년에 1회 이상 다니는 정도, 골프장이나 콘도 회원권 소유 할 것” 프랑스와 한국의 중산층에 대한 기준은 가치와 수치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존재와 소유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프랑스는 도덕적인 가치, 인격적인 가치를 기준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한국은 남들에게 보일 수 있는 재화와 소유를 기준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프랑스의 기준으로 볼 때, 비록 재화와 소유가 적더라도 도덕적으로, 인격적으로 부끄럽지 않다면 중산층일 수 있습니다. 한국의 기준으로 볼 때, 도덕적인 허물이 있더라도, 인격적으로 부끄러움이 있더라도 재화와 소유가 충분하다면 중산층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셨을 까요? 가난한 과부와 바리사이의 헌금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가난한 과부는 적은 헌금을 하였지만 정성을 다했고, 최선을 다했다고 하셨습니다. 바리사이는 많은 헌금을 하였지만 그것을 과시하였고, 그렇지 못한 사람을 비난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손을 들어 주셨습니다. 세리와 바리사이의 기도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세리는 겸손하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였습니다. 바리사이는 단식과 희생을 다했음을 기도하였습니다. 십일조를 내고, 율법을 잘 지켰다고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한 세리의 손을 들어 주셨습니다. 강도를 당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사제와 레위는 강도당한 사람이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돌보지 않았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 주었고, 여관으로 데려갔습니다. 비용이 들면 나중에 갚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손을 들어 주셨습니다. 백인대장과 이방인 여인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구원은 신분과 혈통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비록 이방인일지라도, 로마의 백인대장일지라도 굳센 믿음이 있다면 구원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정성껏 봉헌한다면, 우리가 진실하게 기도한다면, 우리가 어려운 이웃에게 손을 내민다면, 우리가 굳센 믿음을 가진다면 우리는 모두 신앙의 중산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의 상류층은 어떤 사람일까요? 세상의 상류층은 엄청난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상류층은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입니다.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닭이 울자 눈물을 흘렸던 베드로는 나약했지만 상류층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했던 바오로는 교회를 박해했지만 상류층입니다. 신앙의 상류층은 회개했음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자캐오는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빚진 것이 있다면 4곱절로 갚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집은 구원받았다.’라고 하셨습니다. 자캐오는 신앙의 상류층입니다. 신앙의 상류층은 세상의 것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라고 기도하였던 성모님은 신앙의 상류층입니다.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했지만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했던 요셉 성인은 신앙의 상류층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성인과 성녀들은 천상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그분들은 신앙의 상류층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세상의 것들을 포기할 수 있다면 우리는 신앙의 상류층이 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가진 것을 교회에 봉헌하였고, 필요한 것들만 받았습니다. 음식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궁핍한 사람도, 가난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사도들은 기도와 선교에 전념하였습니다. 나눔과 기도가 충만했던 초대교회는 신앙의 중산층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던 초대교회는 신앙의 상류층이었습니다. 오늘 하루, 신앙인으로서 나의 모습을 한번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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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3. 부활 제2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누구나 두려운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 두려움은 모든 사람에게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두려울 수 있습니다. 실패하는 것이 두려울 수도 있고, 변화가 두려울 수도 있습니다. 버림받는 것이 두려울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두려움을 적어내려 내려간다면 책 한 권을 쓰고도 모자랄 것입니다.
제자들도 두려워합니다. 풍랑을 두려워합니다. 어쩌면 풍랑이 아닌 검은 바다를 두려워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면에서는 모든 것을 잃는 것이 두려웠을지 모릅니다. 또 다른 면에서는 준비 없이 생을 마감하는 것이 두려웠을지 모릅니다.
제자들 앞에 다가왔던 두려움, 주님께서 두려워 말라고 했던 그 두려움은 참으로 다양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두려움들처럼 말입니다.
오늘 그런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두려워하지 마라
두려워하지 마라
그제야 제자들은 주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 합니다. 모셔 들이려는 순간 배는 이미 도착해 있었습니다.
우리의 두려움이 있는 곳에 주님을 모셔 들이면 좋겠습니다. 오늘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미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주님을 우리 두려움 한가운데로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두려움이라는 검푸른 절망의 한가운데 희망으로 빛나는 주님을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우리가 도착하고자 하는 곳에 가 닿아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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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소리
조리사 실기 시험을 준비할 때의 일입니다.
몇십 개의 레시피중 두 개가 실기 문제로 출제됩니다.
저는 비빔밥을 제일 어려워했습니다. (먹는 비빔밥은 좋아합니다.)
각종 재료를 정확한 치수로 써는 것도 어려웠지만
더 어려웠던 것은 냄비로 밥을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청포묵을 삶고 그다음 냄비 밥을 합니다. 밥을 하며 다른 재료를 손질합니다. 그런데 재료 손질에 정신 팔려 밥 되는 소리를 놓치면 밥은 타버리고 맙니다.
약불로 뜸이 들던 밥은 작은 소리를 냅니다. ‘탁, 탁, 타닥....’
이 소리를 들었다면 불을 꺼야 합니다. 만약 못 들으면 밥은 타고 맙니다. 비빔밥의 성패는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우리 마음속에서 작은 소리가 들립니다. 주님께서 진짜 괜찮냐고 말씀하시기도 하고 내 안에 내가 힘들다고, 아프다고 소리치기도 합니다. 그 소리를 듣지 못하면 우리 마음은 타고 맙니다. 너무 타버리면 되돌릴 수 없게 됩니다.
가끔은 주변의 소리를 잠재우세요. 그리고 내 안의 작은 소리에 집중해 주세요. 내 마음 타지 않게, 고슬고슬 예쁜 마음 유지할 수 있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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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3. 부활 제2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인생 항해 여정-
부활하신 주님 중심의 공동체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저희 위에 자애를 베푸소서.”(시편33,22)
오늘 화답송 시편도 은혜롭습니다. 새삼 부활하신 주님이 바로 우리 삶의 중심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오늘도 일어나 집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십자가의 예수님과 태극기 앞에서 만세칠창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작년 8.15일 광복절이후 계속되는 만세칠창의 기도입니다. 두팔을 번쩍 들으니 기도와 동시에 전신 운동도 됩니다.
때로 집무중에도, 또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어가기전에도 바치는 몸과 마음이 하나된 만세기도입니다. 이보다 유쾌하고 정신 번쩍 들게 하는 기도도 없습니다. 참 많이도 권하는 기도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성 요셉 수도원 만세!”
삼위일체 하느님 중심의 삶임을 새롭게 고백하는 만세칠창의 기도입니다. 제가 수도생활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35년동안 여기 수도원에 정주하면서 참 많이 했던 강론 주제가 주님은 우리 “삶의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삶의 중심을 잃었을 때 무질서에 방황과 혼란이요, 이보다 더 큰 재앙은 없습니다. 또 하나 2014년 산티아고 순례 여정후, 10년 동안 참 많이 사용한 강론 주제 말마디가 “삶의 여정”입니다. 오늘 말씀 묵상 및 우리 요셉 수도원을 생각하던중 떠오른 강론 주제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인생항해 여정”
“부활하신 주님 중심의 공동체”-
오늘 복음은 짧지만 참 은혜롭습니다. 인생항해 여정중인 주님의 제자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잠시 부활하신 주님이 부재할 때 어둠과 더불어 거세어지는 파도에 주님의 제자들은 두려움의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바로 인생항해 여정중의 제자공동체가 위기에 봉착했을 때 부활하신 주님의 개입입니다. 호수 위를 걸어 배에 오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발견하자 거센 파도와 더불어 더욱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오늘 복음의 중심 말마디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다!(I AM!)’ 바로 하느님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제가 40년전 이미 타계하신, 1970년대 한때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당시 해직된 연대 김동길 교수의 특강때 들은 이름입니다. 아버지가 밤늦게 귀가하여 문을 두드릴 때 “누구요?” 물을 때 “나다!” 대답하는 아버지이고, 이때 “나가 누구요!” 묻는 사람 없을 정도로 자명한 존재가 하느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바로 성 요셉 수도 공동체의 중심 자리, 십자로의 중심에 부활하신 예수님상 바로 아래 바위판에 새겨진 말마디입니다. 늘 거기 그 자리 공동체의 중심 자리에 머물러 찾아오는 손님들을 환대하며 위로와 격려하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나할 것 없이 다양한 두려움의 어둠에 포위되어,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다’ 하느님의 이름이자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영어 I AM에 보어 둘을 붙이면 하느님의 정체는, 예수님의 정체는 분명히 드러납니다.
“I AM with you”(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
“I AM for you”(나는 너희를 위해 있다)
나와 함께, 나를 위해 계신, 또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해 계신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주님과 함께 할 때 저절로 나오는 고백이 시편 23장 1절의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는 고백입니다. 말마디를 바꿔 “주님은 나의 목자, 두려울 것 없어라. 무서울 것 없어라. 불안할 것 없어라, 걱정할 것 없어라.” 모두 통합니다.
성서에도 참 많이 나오는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마디이며 무려 365회 나옵니다. 날마다 우리를 향해 “두려워하지 마라”는 주님의 말씀이 용기백배, 사기충천케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우리 인생항해 여정중의 중심에 모실 때 비로소 안정과 평화임을 다음 대목이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바로 인생항해 여정중 삶의 기적을 상징하는 은혜로운 대목입니다. 참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삶에 모실 때 이미 목적지에 도달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목적지를 앞당겨 미리 지금 여기서 목적지의 하늘나라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부활하신 주님을 중심에 모실 때는 언제나 오늘 지금 여기가 목적지에서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성 요셉 수도원이 1987년에 설립되어 올해 37년째 인생항해 여정중인데 뒤돌아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한 느낌이요 주님께서 늘 공동체의 중심에서 함께 해 주셨음을 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중심에 모시지 않아 세상 바다를 항해하다 폭풍에 파선되거나 조난당한 개인이나 공동체의 배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새삼 인생항해 여정중의 공동체에 부활하신 주님을 선장의 중심 자리에 모시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닫습니다. 바로 성 요셉 수도원의 십자로 중심 자리에 있는 부활하신 주님과 더불어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이 공동체를 보호해 주셨고 앞으로도 늘 보호래 주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제1독서의 말씀도 깊은 가르침과 깨우침을 줍니다. 그 잘 나가던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공동체가 흡사 인생항해여정중 내적분열로 난파될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나라든 가정이든 외적의 침입에 망하는 경우보다는 내적 분열이나 부패로 무너지는 경우가 태반인데, 바로 오늘 사도행전의 교회 공동체가 그러합니다. 그리스계 유다인들과 히브리계 유다인들 사이에 차별로 인해 발생한 내분입니다. 차별당하고 무시당하던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불평을 터 뜨리기 시작합니다.
바로 공동체가 내분과 분열로 파선될 위험에 처한 순간 사도들의 분별력의 지혜와 신속한 결단의 행위로, 또 적절한 역할 분담으로 공동체는 다시 원상복구되어 계속 항해 여정에 오를 수 있게 됩니다. 사도들의 빛나는 리더십이 공동체를 살렸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식탁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이 말에 온 공동체가 동의하였고, 사도들은 참 기민하게 그들을 안수합니다. 마치 마리아의 관상가들과 마르타의 활동가들이 조화와 균형을 이룬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이어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니 공동체가 성장과 성숙과 더불어 순탄대로 항해 여정에 오르게 됐음을 봅니다. 사도들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께서 인생 항해 여정중의 공동체의 중심에 확고하게 자리잡은 것이지요.
이래서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끊임없이 수도원의 중심인 이 거룩한 성전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중심에 모시고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기도를 바치는 인생 항해 여정중인 우리 성 요셉 수도공동체 형제들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내면의 두려움을 몰아내시고, 부활하신 주님 중심의 공동체를 날로 견고히 해 주시며, 성공적 인생 항해 여정을 살게 하십니다. 화답송 시편 고백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
죽음에서 그들의 목숨을 건지시고,
굶주릴 때 살리려 하심이네.”(시편33,18-1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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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3. 부활 제2주간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함께 길을 가다>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요한 6,21)
당신과 함께
제가
지금여기까지
저와 함께
당신께서
지금여기까지
당신과 함께
제가
앞으로 어딘가로
저와 함께
당신께서
앞으로 어딘가로
당신과 함께
제가
가려는 곳이
저와 함께
당신께서
가시려는 곳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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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3. 부활 제2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떠났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
그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요한 6,17-18)
폭풍이 불어올 때 예수님이 계시지 않으면 위험하다
배를 타고 떠날 때의 상황이 구원자를 찾는 제자들의 마음을 더욱 절박하게 만들었습니다. 파도치는 물결 위에 연기처럼 떠 있는 너무나도 캄캄한 밤은 그들을 불안하게 했고 도무지 배를 어디로 저어야 할지 모르게 만들었습니다.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는 소리와 함께 물결을 일으켜 머리 높이까지 파도가 치는 것도 큰 문제였습니다. 네, 상황이 이런데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고 요한은 기록합니다. 참으로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마당에 그리스도마저 계시지 않으니 그들의 두려움은 갈수록 커졌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는 사람들은 사나운 폭풍속에 있습니다. 그들은 그분에게서 고립되어 있거나 적어도그분이 계시지 않는 곳에 있는 듯 보입니다. 그분의 거룩한 법에서 떠났기 때문입니다. 죄 때문에 그들은 구원하실 수 있는 분에게서 떨어져 있습니다. 그런 영적 어둠 속에 있어 옴짝달싹할 수 없이 괴롭다면, 쾌락이라는 쓴 물에 잠겨 숨 막히게 답답하다면 예수님을 영접합시다. 그러면 죄로 인한 죽음과 위험에서 구원받을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5 만물이 존재의 평등을 공유하고 있다
우리가 다른 피조물을 평등하게 대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근원과 그들의 근원이 같기 때문이다. “모든 피조물을 낳을 때, 아버지께서는 나도 낳았다. 나는 모든 피조물과 함께 흘러 나왔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 안에 머물러 있다.” 우리의 뿌리나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우리의 공통 조상과 접촉을 유지하는 것이고 만물의 형제애와 접촉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모든 피조물과 똑같이 느끼고 인식한다.” 존재의 원 안에서, 중심점은 원둘레의 다른 모든 점과 같은 거리에 있다. 이 중심점이야말로 우리가 뛰어들어야 할 존재의 원초적 근원이다. 엑카르트는 인간 우월주의와 생물 우월주의를 배격한다. 그는 피조물 전체가 신적인 평등을 똑같이 나누고 있다고 생각한다. “피조물과 하느님은 평등하다. 실로 이 평등은 하느님이 자신을 비웠기에 기능해진 것이다." 엑카르트의 의식은 우주 자체에까지 손을 뻗는다. ”나는 천상의 존재들이 쉬지 않고 움직이면서 똑같은 목적을 추구한다고 말하고 싶다 ... 우주를 존재하게 하고, 우주를 보호하는 것이야말로 천상의 존재들이 부단히 움직이면서 추구하는 목적이다.“ 엑카르트는 별과 혹성들로부터 배울 것이 많다고 말한다.(153)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이슬람교의 유일신 신앙과 '믿음의 다섯 기둥'
이슬람의 ‘믿음의 다섯 기둥'
이 첫 번째 신앙 고백은 이슬람 신앙이라는 건축물을 떠받치는 다섯 기둥 중 한 기둥이라기보다는, 사실은 여타의 모든 기둥이 그 위에 서 있는 주춧돌 또는 지반이 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신앙 고백을 기초로하여 이슬람교의 다른 신앙 행위가 모두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 첫째 기둥이 든든히지 않으면 다른 모든 기둥은 무너지고 만다. 이 첫째 기본 신조 고백을 형식적으로 교리로서만 입으로 중얼거리는가 아니면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고백하는가에 따라서 진정한 무슬림과 사이비 무슬림,, 진정한 신앙인과 형식적 종교인, 구원받을 자와 심판받을 자가 판가름난다
이슬람 신앙의 다섯 기둥 중에 “<꾸란>이 알라의 말씀임을 믿는다”라는 경전의 신성성이나 절대 권위를 강조하는 별도의 신앙 기둥 항목으로 내세우지 않는 것은 매우 특이한 것이다. 가령 그리스도교나 불교에서는 경전의 절대적 중요성을 여러 가지 형태로 강조한다. 그에 비하면 이슬람교가 별도로 ‘경전의 신성성' 고백을 내세우지 않는 이유는 첫 번째 신앙 기둥인 기본 신조 고백을 진심과 순수한 믿음으로 믿으면서 심령에 각인하는 사람은, 자연히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의 절대성과 신성성을 믿게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로 이 첫 번째 신앙 기둥은 이슬람교에 귀의하는 모든 신도들이 삶을 ‘알라 중심적인 삶'이 되도록 변화시키는 큰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둘째 기둥인 ‘기도'(Salat)는 첫 번째 신앙 기둥인 기본신조 고백을 구체적인 몸과 마음의 통일된 전인 행위로 고백하는 신앙 행위다. 어느 종교인들 기도 생활을 중시히지 않을 리 없고, 신도에게 기도하기를 권장하지 않을 리 없겠지만, 이슬람교가 ‘기도'를 신앙의 다섯 기둥 속에 넣어 그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특이하다. 그 기도의 방식과 법도를 간결하면서도 일사불란하게 제정함으로써 12억 이슬람교도를 하나로 묶는 효과를 낳고 있다.(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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