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Ⅲ-19]마늘의 또다른 이야기
암癌과 싸우고 있는 ‘암투거사’친구에게 마늘을 보내며, 격려차 눈물로 쓴 글로 인해 며칠째 우울한데 도무지 헤어나올 방법이 없다. 50년도 더 넘은 절친(‘베프’라고 한다던가)이 어느 산 속에서 ‘나날이 죽어가고 있다’(배우자야 옆에 있지만, 결국은 ‘혼자’가 아니던가)는 생각을 하면 어찌 속이 편할 수 있으랴? 나를 아는 지인들도 조금은 감정이입이 될 터.
하여, 여담이지만, 마늘에 대한 엉뚱한 단상을 쓰려고 한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올라설 때, 나는 무척 병약했다. 병약한 까닭을 생각해보면 이렇다. 6학년때 열 달간 ‘바둑 독선생’을 모시고 집에서 하루 2시간씩 과외를 받았다. 강의료는 한 달 3만원이었던 듯(당시 80kg 쌀 한 가마값). 아버지는 바둑신동으로 소문난 넷째아들을 ‘바둑 꿈나무’로 키울 생각이셨던 것같다. 그 결과, 실력이 다달이 부쩍부쩍 늘어 1천개도 넘은 정석定石을 다 꿴 듯하고, 복기復碁도 쉽게 할 수 있었다. 당시 전주에서는 내 또래로 나만한 실력자는 ‘1도’ 없었다. 기료棋料가 25원, 하교 후 아무 기원이나 들르면 무료통과. 원장이 두세 점을 놓고 가르쳐달라고 했다. 그러다 서울 중학교(바둑으로 유명한 충암중) 진출을 놓고, 6학년 겨울방학때 형과 함께 상경, 한국기원(종로구 관철동)을 찾았다. 지금이야 금세 찾겠지만, 반나절을 헤매 찾은 기원에는 내 또래 바둑신동들이 즐비했다. 나는 가히 우물안 개구리였던 것. 한국의 고수 프로5단에게 2판을 내리 깨지자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때 이후 바둑만 생각하면 어지럽고 머리가 아팠다. 할머니는 나의 병을 낫게 하려고 온갖 단방약 처방을 했다. 개구리 뒷다리를 무수히 삶아먹이고, 들깨를 후라이판에 익혀 손바닥 한웅큼씩 씹어먹게 했다. 압권은 마늘을 통째 부엌 아궁이에서 절반쯤 구워 ‘질리게’ 먹도록 한 것. 오죽했으면 할머니가 부르기만 하면 도망을 다녔을까. 다행히 두통과 어지럼증은 가라앉었으나 바둑은 영영 ‘안녕’을 했다. 바둑을 생각하거나 두려고 하면 그 증상이 다시 도졌으므로. 그런데, 그때 장복한 마늘과 들깨 그리고 개구리 뒷다리 덕분인지 튼튼한 몸이 되었다. 효과(효능)는 군대시절도 그랬지만, 결혼한 이후 톡톡히 나타났다. 오죽하면 옆지기에게 “우리 할머니께 고마워해야 한다”는 농담을 했을까? 하하.
그런데 나로선 당연히 불행한 일로, 옆지기는 신체적 교감을 싫어해 나를 내내 안절부절못하게 했다. 현모양처의 표상이라고 진심으로 말하지만, 결혼생활(부부생활) 중에 가장 큰 불만사항이 되기도 했다. 그렇다고 단 한번도 곁눈을 판 적은 없었다. 다만, 늘 확인한 것이지만, 마늘만한 강장제(초정력제)는 없다는 것은 셀프 증거할 수 있었다. 지금이야 6학년 진입 이후 아무 소용이 없지만, 마늘은 그런 효과가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마늘이 ‘암투거사’친구에겐 거의 유일한 먹거리가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더구나 혈당과 콜레스테롤 수치를 약화시키는데(당뇨환자가 되어 고정적으로 약을 먹은지 15년이 됐다) 효과적이라니, 이제부터는 장복을 해야겠다. 실제로 내가 심어 농약 한번 안치고 가꾼 마늘이 아니던가. 영락없이 효과가 눈에 보는 듯 나타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부기: 암투거사의 인간적인 건승을 간절히 바라는 까닭은 또 있다. 2022년 11월 13일은 할머니와 어머니를 여윈 날을 제외하곤 내 삶에 가장 슬픈 날이었다. 귀농한 이래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서로 의지하던 친구가 졸지에 세상을 뜬 것이다. 새삼 그때 쓴 눈물의 조사와 몇 달 후 쓴 추모사를 찾아 읽은 까닭이다. 그런 일만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앞서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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