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91
12월1일[연중 제34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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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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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www.youtube.com/watch?v=tkLkHdX3irU
[서울대교구 한승진 베드로 신부님 집전(청소년국 학교사목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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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모두는 주님 정원 속 한 그루 푸르른 올리브 나무입니다!>
수녀원에 도착했을 무렵, 무성했던 단풍잎이, 우수수 떨어져 바닥에 쌓이고, 나무들은 그야말로 나목(裸木)으로 변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목, 다시 말해서 잎이 다 떨어져서 가지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 나무를 바라보며 서글퍼하거나 우울해합니다. 아, 이렇게 또 다시 계절이 가는구나. 이렇게 내 인생도 저물어가고 소멸되어 가는구나.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그런 마음을 먹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주님 정원 안에 머무는 한, 나는 영원한 청춘이라는 진리, 주님께서 내 안에 굳건히 자리하시는 한, 나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시들지 않는 한 그루 푸르른 올리브 나무 같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예수님 가르침의 특징은 다른 스승들과는 차별화가 되었는데, 다른 무엇에 앞서 쉬웠습니다. 다양한 비유나 예화를 들어 말씀하셨는가 하면, 백성들이 살아가는 환경이나 그들이 매일 목격하는 자연 현상들을 자주 활용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무화과나무는 포도나무와 더불어 근동 지방의 주요 나무 중에 하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 잎이 돋고 지는 것을 통해 종말, 주님의 날을 잘 준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저 역시 시골에 살면서 주변 자연 현상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실생활에 적극 활용하는 편입니다. 개구리가 합창하면 곧 비가 오겠구나, 하며 이런저런 대비를 합니다. 아침 해무가 자욱하면 날이 낮에는 햇빛이 창창하고 덥겠구나, 생각합니다.
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은 물고기들도 불안해져 입질을 제대로 하지 않으니, 애써 출조를 하지 않습니다. 폭우가 내려 흙탕물이 바다로 유입되면 아무리 물때가 좋더라도 돌게나 골뱅이들이 모래 깊이깊이 숨어버리니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자연의 징조에 대해서는 정확하고 치밀하게 관찰하고 대비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주님의 날에 대한 준비는 소홀한 저를 향한 예수님 말씀이 날카롭습니다.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루카 복음 21장 29~31절)
그날이 가까이 다가오는 표징들을 확인할 때마다 우리 삶을 다시 한번 정리정돈해야 하겠습니다.
결코 원치 않았던 고통이나 시련이 다가올 때, 병고나 사건 앞에, 왜 이런 일이 내게 다가오는가? 하느님이 어떻게 내게 이러실 수 있나, 따지고 원망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보내시는 또 다른 하나의 부르심이라 여기고, 너그럽고 관대한 마음으로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현실을 바라봐야겠습니다. 주님의 날을 보다 잘 준비하라는 신호로 여겨야겠습니다.
지상의 일만 생각하지 말고, 천상의 일도 생각해야겠습니다. 세속적인 것은 조금씩 줄이고, 천상의 것들, 정신적인 것들, 영적인 것들을 늘려가야겠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새로운 삶의 방식과 생활양식을 갖추도록 준비해야겠습니다.
우리 인간이 행하는 모든 것은 유한하고 제한적인 것이지만, 주님과 주님의 말씀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지속될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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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x2eBAh65X4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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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가 찾아오는 공식>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멸망하게 될 무서운 징조들을 다 말씀하신 다음 이렇게 마무리하십니다.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는 자연에서 계절이 변화되는 법칙이 있는 것처럼 마지막 때도 마치 수학 공식처럼 그대로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뒤이어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하느님의 나라는 반드시 공식처럼 내 주위에 믿고 희망할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 비로소 찾아온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각자에게도 오시기 때문에 이렇게 마무리하십니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 왕으로 지배하시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행복의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우리가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고 그분께 완전히 순종할 때만 이뤄집니다. 하지만 이 세상엔 우리가 기대할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런 것을 통해 자기 힘으로 행복을 추구합니다. 이런 것들이 모조리 사라져 내 힘으로는 단 1%도 행복을 증진시킬 수 없는 처지가 되었을 때, 그리고 나의 믿음과 희망이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에만 의존하게 될 때 하느님 나라가 임하십니다.
저도 신학교 입학했을 때 행복할 줄 알았지만, 행복함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단식하며 저를 극한으로 몰아붙였습니다. 배고프니까 비로소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내 힘이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나를 행복하게 해 달라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이때 성체에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행복으로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아직 그분을 그때처럼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를 저는 압니다. 저 자신과 세상을 더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지 못하고 내가 믿는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저 자신을 그만큼 완전히 죽일 자신이 없어서 나를 종말로 몰아붙이지 못하기에 하늘 나라를 맛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는 나의 완전한 종말 뒤에 옵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공식입니다.
작년 『역행자』란 책을 쓴 ‘자청’이란 청년이 있습니다. 이미 130명의 직원을 두고 한 달에 몇억씩 벌며 작년 책 판매 수입을 전액 기부하였습니다. 아마 50억 가까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렸을 때부터 못생겼고, 공부도 못했고, 돈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환경은 그에게 자신은 한 달에 150만 원도 벌지 못하며 결혼도 못하고 죽을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주었습니다. 여자는 쫓아다니면 도망쳤고 돈을 벌기 위해 영화관에서 일하기도 하였지만, 실수 연발이었습니다. 자살하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그에겐 그래도 희망이 있었습니다. 영화관에서 함께 일하던 어떤 누나가 그를 불쌍히 여겨 책을 좀 읽어보라고 권했던 것입니다. 책을 읽어본 적이 없고 게임에만 빠져있던 그였지만, 인간관계를 위해 대화법에 관한 책을 읽었습니다. 그 내용은 단순했습니다. 말하기보단 들어주고 상대의 말에 관심을 두라는 것입니다. 그 책대로 했더니 서서히 한 명씩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그는 깨닫습니다. ‘아, 모든 것에는 공식이 있구나!’
그래서 학교도 집어치우고 도서관에서 책만 읽습니다. 거기서 얻은 지식으로 무일푼으로 사업도 시작하고 지금의 자청이 된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저는 저 자신을 절대 믿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이 말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에겐 하느님 나라가 임할 수 없습니다. 이미 자신이 왕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공식처럼 우리 자신을 종말로 밀어붙여야 합니다. 그래야 참 자유와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김희아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망의 시간에 주님을 만났습니다. 절망의 나락에 있었지만, 하느님께 대한 희망은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이때 자신보다 그녀의 얼굴을 보시며 더 슬퍼하시는 그분을 만나고는 다시는 얼굴에 점이 사라지게 해 달라고 청하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는 ‘감사’만 있습니다. 내 힘으로 얻는 게 하나도 없음을 알 만큼 겸손해진 사람만이 누리는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왜 우리 스스로라도 우리 자신을 종말로 밀어붙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늘나라는 항상 희망을 품고 종말로 자신을 몰아붙이는 만큼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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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국에 와서 피정을 2번 하였습니다. 한번은 2020년 1월 뉴멕시코 갤럽에 있는 피정의 집에서 개인 피정을 하였습니다. 미국 생활을 잘 하고 싶었고, 저 자신을 돌아보고 싶었습니다. 수녀님께서 소개해 주셨고,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의욕적으로 신문사를 운영하려고 계획도 세웠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코로나 팬데믹이 생겼고, 계획한 것들을 뒤로 미루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지나갔고, 두 번째 피정은 2023년 11월 뉴저지 라크랜드에 있는 돈보스코 피정의 집에서 ‘요한복음의 여인들’이라는 주제로 피정하였습니다. 첫 번째 피정이 개인 자유 피정이었다면 두 번째 피정은 강사 신부님을 모시고 단체로 피정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을 만난 여인들을 주제로 신학적인, 영적인 강의를 해 주었습니다. 영적인 갈망이 있었던 65명의 피정 참가자는 모두 기쁜 마음으로 강의를 들었습니다. 피정은 신앙생활에 두 가지 면에서 도움을 줍니다. 하나는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돌아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살고 있다면 계속 갈 수 있도록 용기를 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멀어지고 있다면 다시 하느님의 뜻대로 살도록 회개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영적인 에너지를 채우는 것입니다. 자동차도 기름을 채워야 달릴 수 있고, 스마트폰도 충전해야 사용할 수 있듯이 신앙생활도 피정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담아야 흔들리지 않고 갈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을 만난 첫 번째 여인은 ‘성모님’입니다. 영화도 처음 시작이 재미있어야 끝까지 보고, 책도 처음 부분이 재미있어야 끝까지 읽게 됩니다. 복음서를 쓴 요한도 예수님을 만난 첫 번째 여인을 ‘성모님’으로 등장시켰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성모님은 사랑과 존경을 받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잉태하였고,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만났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하였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의 모범이었던 성모님은 ‘승천’했다는 신심이 있었습니다. 성모님과 예수님이 만난 장소는 ‘혼인 잔치’였습니다. 축제의 자리인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에게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말하였습니다. 일꾼들은 예수님께서 시키는 대로 물동이에 물을 가득 채웠고, 그것을 과방장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은, 본질이 아닙니다. 요한이 말하고 싶은 것은 ‘결합과 일치’였습니다. 포도주가 없다는 것은 완전성의 결핍을 의미합니다. 현재 이 상황이 구원의 은총이 결핍된 상태임을 나타냅니다. 메시아의 오심이 요구되는 상태입니다.
성모님은 신약의 새로운 하와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성모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분께서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실천하여라.” 예수님과 성모님의 공유는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성적으로는 납득이 안 되는 일입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일꾼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였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많은 신앙인이 이런 ‘믿음’을 갖지 못합니다. 마치 하느님을 ‘자판기’처럼 생각합니다. 나의 잣대로 믿음을 정하곤 합니다. 나의 입맛대로 믿음을 평가하기도 합니다. 나의 잣대와 입맛에 맞지 않으면 믿음까지도 버리려고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나의 뜻대로 평가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 표징에서 요한복음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이 글을 썼다.” 이것을 실천하면 물이 포도주가 됩니다. 존재가 변하게 됩니다.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됩니다. 사람도 그렇게 됩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표징에서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영광은 하느님의 현존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은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존재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하느님과 내가 일치되는 결합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서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그날 듣게 되는, 복음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면 좋습니다. 성모님은 이 신비를 드러내는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일꾼들의 모습을 지켜본 제자들은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하느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했는지요? 말씀으로 위로를 받으려고 합니다. 감동하려고 합니다. 기쁨과 재미를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을 받은 이들의 공통적인 반응은 ‘자선’입니다. 마태오 복음 25장의 심판의 기준도 ‘자선’입니다. 자선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면. 존재가 변합니다. 이 모든 과정이 성모님께서 보여 주신 모범. “그분이 말씀하는 것을 실천하여라.”에서 시작됩니다. 그날 복음 말씀을 그대로 실천해 보면 좋겠습니다. 들음은 가슴에 남아서 나를 행동하게 합니다. 이것이 들음입니다. 들음이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완전하게 바꾸어 주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습관을 지녀봅니다. 기억하고 가슴에 담으려고 하면 그 말씀이 살아납니다. 실천하게 되면 기쁨이 쌓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이 전해 주는 첫 번째 표징의 의미입니다. 사실 저는 첫 번째 표징을 좋아했습니다. 술을 좋아했기에 바이런의 시도 좋아했습니다. “물이 주인을 만나니 얼굴이 붉어지도다.” 그런데 새로운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성모님께 도움을 청하면 좋겠습니다.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도록 그렇게 해서 유혹을 이겨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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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21,29-33: 나무에 잎이 돋으면 여름이 다가온 것을 알듯이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29-31절) 하시고 예루살렘의 파멸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때를 미리 알아서 대비하라 하신다. 이 말씀은 우리가 많이 들어온 말씀으로 마지막 때가 언제인지 모르니 항상 깨어있으라는 말씀이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말씀을 들은 그 세대가 가기 전, 70년에 파괴되었지만, 예수님의 재림은 즉 성경이 전하는 세상의 종말은 아직 오지 않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시기의 징표는 알 수 있으나 그날은 하늘의 천사들도, 사람의 아들도 모르고 하늘에 계신 성부만이 아신다고 하였다.
이 세상 종말이라고 하는 것은 마태 25에서 말씀하시듯이 당신이 구원하신 온 세상을 성부께 바치는 날이며, 당신을 따른 모든 이들과 함께 새로운 축복의 영원한 나라로 들어가는 구원의 완성으로 나타나 있다. 우리가 여기서 신경을 써서 걱정해야 할 것은 세상의 종말이 언제 올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나 개인의 죽음, 나 자신의 심판과 종말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어떻게 종말에 대비하여야 할 것인가를 더 걱정하고 염려해야 한다. 그날이 언제 오더라도 그날을 맞이할 수 있도록 우리는 지금의 이 순간을 하느님의 자녀로서 충실히 살아야 한다. 이것이 종말론적인 삶이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대로 항상 깨어있는 삶이다.
그날은 공포와 기쁨, 영광이 세상에 함께 있던 것을 분명하게 둘로 가르시는 때인데, 그것은 그때만의 일이 아니라 지금의 삶의 태도와 계속 연결된 결과라는 것을 암시한다. 흥청대며 허송세월한다든지, 지금의 행동이 초래할 불행을 면하기 위해서는 그때가 언제인지는 분명히 모르나 번갯불처럼 닥쳐올 것이기 때문에 지금부터 항상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33절). 그 말씀이 이제 우리의 삶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말씀을 구체적으로 살아야 한다. 말씀을 삶으로써 우리의 삶을 언제나 종말론적인 삶으로 이어가도록 항상 깨어있는 우리 되도록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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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오늘 복음 말씀의 요지는 전조를 보고 다가올 일을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농부는 무화과나무에서 잎이 나오는 것을 보고 날씨가 곧 더워질 것을 알뿐더러, 언제쯤 무화과가 열리고 수확이 가능한지도 예측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오늘 복음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이 가까이 왔을 때, 땅에서 일어날 표징들(21,11 참조), 그리고 하늘과 바다에서 일어날 표징들을(21,25 참조)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무화과나무에 열린 잎사귀를 보듯 이러한 현상을 보게 되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하느님께서는 당신 나라가 충만히 완성되는 때를 아직 미루어 두고 계십니다. 아마도 하느님 나라의 행복에 더 많은 이를 참여시키시려는, 그분의 인내심 가득한 강한 구원 의지 때문이 아닐지 싶습니다. 그러나 종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언젠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늘과 땅에서 놀라운 표징들이 일어나기만을 기다리면 될까요?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바라는 신앙인들에게는 그러한 종말론적 조짐보다 더 확실한 표징이 이미 주어졌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구원의 표징이 된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이 세대 사람들’ 에게 구원의 표징이 되셨습니다(11,30 참조). 우리와 늘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예수님께서 바로, 마침내 올 하느님 나라를 보증하는 가장 확실한 표징이십니다.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11,32). 사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충만함에 이미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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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무화과나무의 교훈>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루카 21,29ㄴ-33)
당시 그 지역에서는 ‘여름’이 추수철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추수’는 ‘심판’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라는 말씀은, 종말과 심판의 날이 되면 누구든지 그날이 되었음을 저절로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저절로’라는 말은 누가 따로 가르쳐 주지 않아도 모든 사람이 알게 될 정도로 명확하고 생생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이러한 일들’은 좁은 뜻으로는, 이 말씀 앞에 있는 ‘우주적인 표징들’과 ‘예수님의 재림’을(루카 21,25-27) 가리키고, 넓은 뜻으로는 ‘종말 전의 재난들’을(루카 21,8-24) 가리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말은, “종말의 날이 시작되었다.”라는 뜻입니다. <가까이 왔다는 말은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표징들, 또는 재난들을 ‘언제’ 보게 될까? 그런 일은 ‘언제’ 일어날까? 이미 일어났고, 이미 보았습니다. 지난 이천 년 동안 인류는 수없이 많은 재난들을 겪었고, 오늘날에도 겪고 있습니다. 표징들도 마찬가지인데, ‘회개하라는 경고’로 해석할 수 있는 표징들을 수없이 많이 보았고, 지금도 보고 있습니다. ‘여름’은, 즉 ‘종말의 날’은 이미 시작되었고, 지금 우리는 ‘종말이 완성되는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라는 말씀은,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늦기 전에 당장 회개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이 바로 그때다.”라는 것을 자주 강조하셨습니다.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요한 4,2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요한 5,25) 사도 요한도 “자녀 여러분, 지금이 마지막 때입니다.”라고 말합니다.(1요한 2,18) ‘종말이 완성되는 날’은 언제인지 모르는 먼 훗날이 아니고, ‘이제 곧 닥칠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뒤로 이천 년이나 지났다는 이유로, 종말이나 재림에 관한 말씀을 아무 긴박감 없이, 그저 늘 듣는 의례적이고 상투적인 말씀으로만 생각하기가 쉬운데, 지나간 날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남아 있는 날들이 짧다는 뜻이 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주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라고 말합니다.(2베드 3,8) 이 말은 시편 90편 4절을 인용해서 한 말인데, 시편 90편은 ‘종말과 심판’을 묵상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는 시편입니다.
“당신께서는 인간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아, 돌아가라.’ 정녕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야경의 한때와도 같습니다. 당신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 그들은 아침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습니다.”(시편 90,3-5)
이 찬미가는, 시간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다는 것과 하느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인간은 허무하게 사라지는 먼지일 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천년, 이천 년은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시간입니다.> 여기서 ‘먼지, 아침잠, 풀’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에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이 먼지나 아침잠이나 풀처럼 허무하게 사라지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즉 인간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복음서에 있는 ‘종말과 심판’에 관한 예수님 말씀들은, “먼지처럼 허무하게 사라지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라.”라고 호소하시는 ‘사랑의 말씀들’입니다. <그 생명을 얻는 방법은 ‘믿음’과 ‘회개’입니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라는 말씀에서 ‘이 세대’는 그 당시의 세대가 아니라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 즉 우리를 가리킵니다. ‘모든 일’은 종말과 심판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종말과 심판의 날이 곧 닥친다는 뜻입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종말과 심판에 관한 말씀을 포함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러분은 썩어 없어지는 씨앗이 아니라 썩어 없어지지 않는 씨앗, 곧 살아 계시며 영원히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새로 태어났습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머물러 계신다.’ 바로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전해진 복음입니다.”(1베드 1,23-25)
믿기를 거부하는 자들과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종말과 심판의 날에 먼지처럼 허무하게 사라지겠지만, 믿고 회개한 사람들은 그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인은 종말, 재림, 심판이 하루라도 빨리 이루어지기를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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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우 사도 요한 신부님]
<징표를 식별하고 신성을 실현하라>
“므네, 트켈, 파르신.”
벨사차르 임금이 본 이 두려운 암호를 다니엘이 가볍게 해독했습니다. 그는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이 꾼 어마무시한 꿈을 명쾌하게 해몽하기도 했습니다. 가볍고 명쾌하게 해 내기는 했지만 실은 그 내용의 심각성 때문에 죽기를 각오했어야 했던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꿈의 해몽이건 암호의 해독이건 모두 숨겨진 뜻을 알아내는 일인데, 오늘 말씀은 인간의 현실 안에 숨은 뜻을 식별하라는 메시지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부들은 이 메시지를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라는 뜻으로 풀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이끄시는 방식이 징표를 드러내시는 것이기 때문에, 이 징표를 식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또 필요합니다.
만일 이 징표를 알아보지 못하면 눈을 가리고 길을 가는 것처럼이나 위험할 것입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나라든 교회든 마찬가지로 그러할 것입니다.
다니엘의 환시(다니엘 예언서 7,2ㄴ-14)는 가까운 미래에 그 당시 지중해 지역권에서 일어날 민족들의 운명을 내다본 식별 메시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일상의 자연적 징표를 보고 날씨와 기후를 식별함에 빗대어 당신께서 선포하신 일들 안에 숨어 있는 하느님 나라의 징표를 식별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온 누리에 다가올 하느님 나라의 징표는 신성을 드러냅니다. 신성을 담고 있는 징표는 다니엘이 그러했듯이 하느님의 지혜를 받아야만 알아볼 수 있고, 사도들이 그러했듯이 예수님의 신성에서 나오는 거룩한 기운을 받아야 실천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세상일들이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되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며, 신약성경은 예수님을 믿는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이 그분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 나라와 부활의 삶이 교회 안에서 계승되고 있다는 놀라운 현실을 세상과 후대에 널리 알리고자 힘쓴 기록입니다.
신구약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이를 기준으로 삼아 과거 역사의 기록 안에서나, 현재 사회적 상황에 대해서 드러나고 있는 징표들을 식별하는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지혜에 따라서 실천하는 데 필요한 신성의 거룩한 기운은 성체성사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징표를 식별하는 지혜와 신성을 실현할 수 있는 거룩한 기운을 주려 하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루카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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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변화 가운데서 영원하신 주님을 만나>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루카 21,33) 봄 가을이 따로 없는 팔레스티나에서는 나무에 잎이 돋우면 여름이 이미 다가온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성전파괴와 같은 큰 재난이 나타나면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 알아차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루카 21,29-31)
우리는 우주만물의 변화 속에서, 빛의 속도로 발달하는 생명공학을 비롯한 과학과 정보기술, 다양한 문화와 종교현상, 빈부격차의 심화, 급격한 의식의 변화를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변화와 발달의 끝이 어디일지 가늠하기 어려운 시대이지요. 이런 가운데서 우리는 이런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우주만물은 끊임없이 변하고 국가도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인간 또한 희로애락과 생노병사를 겪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있게 하는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그런데 변화를 들여다보면 선과 사랑과 의로움을 담고 하느님을 향하여 변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그와 정반대의 변화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변화와 사건을 통해 영원성을 드러내시지요.
우리는 시대의 징표를 읽어야 합니다. 변화나 사건을 보며 영원하신 하느님의 뜻을 읽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어떤 변화나 사건을 통해서도 늘 당신의 뜻을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심지어 악과 고통스런 사건들도 하느님 계획의 일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긍정적 변화든 부정적 변화든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읽을 수 있어야겠지요.
우리는 어떤 삶을 살다가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죽음을 맞을지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사랑이신 하느님의 원의와 손길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향해가는 긍정적인 변화라면 그 안에 담긴 사랑의 메시지를 읽고 은총의 선물에 감사하며 그것을 공유하고 되돌려야 할 것입니다.
반대로 하느님의 자비와 선을 거스르는 변화라면 그 지점이 바로 회개의 시발점이요 하느님을 향한 반환점이 되어야 함을 의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그럭저럭 문제없이 살아가는 '거짓 안정성' 안에 머무르곤 합니다. 넘어졌다 하여도 곧바로 그 잘못을 인정하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야겠지요.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과 반성, 그리고 시대징표를 읽어 변화 가운데서 변하지 않는 하느님의 영원성을 찾아 나가는 것이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이를 위해 절실히 요청되는 것은 '해체를 허용하는 용기'입니다. 불의와 잘못된 구조와 타협하지 않고 과감히 맞서 해체함으로써 사랑과 정의의 질서를 바로 세울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해묵은 습관과 굳어버린 사고의 틀을 미련 없이 해체할 수 있어야 하지요.
한낱 먼지에 지나지 않은 인간이 권력과 돈의 힘이 영원하리라 믿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영원하신 하느님을 믿는 우리는 그래서는 안되겠지요. 각종 사건들과 부정부패, 도덕적 타락, 비인간적 현실, 우상숭배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영원성을 발견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오늘도 거짓 안정성에서 벗어나 자신을 해체하여 하느님의 눈으로 만사만인을 바라보고, 시대징표를 읽어 하느님의 영원성을 살려나갔으면 합니다.
지금이 바로 고통과 시련과 슬픔 가운데서도 말씀을 실행하고 사랑의 질서를 세우기 위한 세상의 해체에 나서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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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혜안을 가진 이는 행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서 새로운 싹이 트면 계절의 변화를 느끼듯 세상의 여러 혼돈과 징표를 보거든 그것의 의미를 알아들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하나의 혼돈은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데 꼭 거쳐야 할 과정입니다. 하나의 풍파가 몰아치면 그것을 계기로 새로운 틀이 만들어집니다. 우리나라의 정치 현실을 보면 혼돈의 연속입니다. 기득권 유지만을 원하여 새로운 틀을 만들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혼돈과 어둠 속에서 움터 오르는 새 하늘, 새 땅의 창조와 광명을 내다보는 눈”(이현주 목사) 혜안을 가진 이는 행복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혼돈은 사라지고 하느님의 나라가 우뚝 선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또한 구원받을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 마음 설레게 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마음 한구석엔 두려움이 있습니다.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께서 ‘각자가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 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성직자나 수도자를 떠받쳐 위하고 거룩하게 보지만, 그들 또한 부끄러움이 있고 자비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신분을 떠나서 모두가 예수님을 닮아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부끄러움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은 언제나 살아있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들었으면 그에 걸맞은 삶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모든 것이 사라질지라도 가슴에 남는 말씀을 새기고 살며 전해야 합니다.
세상 것은 사라지지만 주님의 말씀을 차지한 사람은 영원합니다. 은혜를 풍요롭게 하는 것은 늘 담을 그릇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분명,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19,26) 하셨습니다.
우리가 일상 안에서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하면 뻔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면서도 걸려 넘어지고 나서야 후회하고 새로운 다짐과 시작을 합니다. 마지막 날이 언제, 어떻게 올 것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명한 것은 “그날이 오고 있다” 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아니 그날이 ‘오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 때에, ‘바로 지금’ 주님을 떳떳이 만날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어떤 이는 항상 자신만만했는데 예기치 못한 상태로 주님 앞에 서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우리의 삶의 주관자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 앞에서 언제나 그리고 지금 당당해야 합니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주님 말씀 안에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청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내 마음 안에서 주님의 말씀이 살아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가슴이 벅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당신 말씀은 제 발의 등불, 저의 길에 빛”(시편 119,105)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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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성당 아이들을 보며 저를 많이 반성합니다. 아이들은 작은 것도 소홀히 보지 않습니다. 저를 유심히 바라보던 한 아이가 “왜 신부님은 흰머리가 많아요? 왜 이렇게 늙었어요?”라고 말합니다. 매일 보는 ‘저의 얼굴’이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나이를 어느 정도 먹었으니 흰 머리카락이 나는 것이고, 스스로 그렇게 늙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날 저녁 씻다가 아이의 말이 생각나서 저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봤습니다. 쭈글쭈글한 주름이 늙었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어린이는 모든 것을 경이로워하고 놀라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평범하고 무미건조하게 살아갑니다. 지극히 거룩한 것도 거룩하게 보지 못하고 그러려니 합니다.
어린이를 보며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를 다시 배웁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일화가 떠올려집니다. 운동을 너무나 좋아하셨던 교황님께서는 교황님이 되신 후에 운동을 할 수 없어서 너무 힘드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겨울에 몰래 비서 몬시뇰님과 함께 스키장이 간 것입니다. 스키 고글이 있기에 그 누구도 알아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고글 안에 습기가 차서 교황님께서는 잠시 벗었습니다.
바로 그때 교황님의 얼굴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 순간 한 아이가 보고서, “아~~ 교황님이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옆에 있던 부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황님 닮은 사람이겠지. 교황님께서 여기 계실 리가 없잖아?”
어린이가 진리에 더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가 어린이 곁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날을 미리 알려 주는 표징들을 제대로 봐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가 잎이 돋자마자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되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문제는 가까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입니다. 마치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대홍수를 알지 못했던 것처럼,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것을 알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이와 같이 작은 것도 소홀히 보지 않는 시선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것 안에 담긴 하느님의 손길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마지막 날에 후회하지 않게 됩니다. 마지막 날에 큰 기쁨을 안고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주님 말씀에 더욱 충실하면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으며, 동시에 하느님 나라 안에 들어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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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 늘 희망으로 앞서나가네>
루카 21,29-33 (무화과나무의 교훈)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 늘 희망으로 앞서나가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루카 21,31)
한밤 너머 새벽이니
나 늘 희망으로
앞서나가네
겨울 너머 봄이니
나 늘 희망으로
앞서나가네
홀로 너머 함께이니
나 늘 희망으로
앞서나가네
무관심 너머 사랑이니
나 늘 희망으로
앞서나가네
굴종 너머 자유이니
나 늘 희망으로
앞서나가네
압제 너머 해방이니
나 늘 희망으로
앞서나가네
끝 너머 처음이니
나 늘 희망으로
앞서나가네
찰나 너머 영원이니
나 늘 희망으로
앞서나가네
우상 너머 하느님이니
나 늘 희망으로
앞서나가네
십자가 너머 부활이니
나 늘 희망으로
앞서나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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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라질 때가 나타나실 때>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늘과 땅이 사라질 때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올 때라는 것을 알라는 오늘 주님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많은 사람이 이것을 모르고,
신앙인 가운데서도 이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저는 이런 얘기를 자주 합니다. 무엇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신앙이 없는 사람의 경우,
-자기가 능력이 없거나 자기가 잘못해서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거나
-자기에게 탓을 돌리기 싫으면 다른 사람에게 탓을 돌리거나
-나의 잘못도 너의 잘못도 아니라면 운이 없어서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이라면 내 뜻대로 안 될 때 그것이 하느님 뜻이거나 거기에 하느님의 뜻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하늘과 땅이 사라질 때 그때 거기에 하느님의 뜻이 없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고, 그때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그리고 늘 우리와 함께 계시고, 그러기에 우리가 사는 지금 여기에 함께 계시고, 지금 이 세상이 사라지더라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 세상이 사라지는 것이지 하느님이 사라지시는 것은 아닙니다. 내게는 이 세상이 있을 곳이 아니라 하느님이 있을 곳이고, 하느님도 나와 함께 계시지 나 없는 이 세상엔 계시지 않습니다.
그만큼 나 없는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고, 나 없는 세상에는 하느님도 아니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나에게서 사라질 때가 도리어 하느님께서 나에게 나타나실 때임을 오히려 알아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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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루카21,31)
<표징들!>
오늘 복음(루카21,29-33)은 '무화과나무의 교훈'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고 하시면서, 나무들에게서 일어나는 모습들을 통해 '물리적인 때'를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때(종말)'를 알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루카21,31)
'이러한 일들???'
우리는 이번 성서주간에 들려오는 복음을 통해 '이러한 일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전쟁과 기근, 분열, 큰 지진, 전염병 등과 같은 죽음의 문화'입니다.
오늘 복음은 '때가 차서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의 나라를 잘 준비해야 한다.'는 '독려의 말씀'이고, 또 한편 '잘 준비하고 있지 못하다.'는 '질책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자연의 피조물들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시간과 계절의 변화 등을 알리는 물리적인 때(크로노스)를 알 수 있습니다. 요즘은 우주로 쏘아 올린 과학위성 등이 전해주는 정보를 통해서 그 물리적인 때와 변화에 대한 정보를 더 정확하고 더 빠르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더 잘 준비하고 더 잘 대처합니다.
그렇게 하고 있는 것처럼 '하느님의 때'(종말)도 잘 준비하고 잘 대처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루카21,32-33)
예수님의 이 말씀이 섬뜻하게 다가옵니다. 12월의 첫날입니다. 날씨는 점점 더 추워지고 있습니다. 이러할 때 더 고통받는 이들은 가난한 이들, 곧 오갈데 없고 먹을 것이 없어서 힘들어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잘 기억하고, 이들에게 사랑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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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D5K8VK8Mm9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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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루카 21, 31)
차가운
12월의
첫날입니다.
하느님 말씀으로
큰 뜻을 다시
가슴에 새깁니다.
부질없는
교만과 고집의
잎들을
떨구어 냅니다.
계절의
변화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가까이 온
하느님의 나라를
우리들에게 따뜻이
알려주십니다.
계절이 우리와
함께하듯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이렇듯
시간은
정지되어
있지 않습니다.
지나가고
흘러갑니다.
대자연은
생명의 소리를
전하고
예수님께서는
사라지지 않을
생명의 말씀을
우리들에게
전하십니다.
말씀으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나무를 심는 것도
사람을 키우는 것도
오랜 정성과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한 일들입니다.
정성과
기다림으로
가까이 온
하느님 나라를
알아보고
맞아들여야 할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함께 다정하게
손을 맞잡고
살아가는 기쁨을
우리들에게
주십니다.
예수님의 삶
예수님의 마음에
자리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해 교만을
버리고 새롭게
살게 할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말씀에 뿌리를
내리는 삶이
하느님 나라의
시작입니다.
말씀의 자리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말씀과 실천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지켜내고 있는
소박한 이웃들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가까이 온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게 한
제 욕심과
변명과
자아도취의
잎들을 버립니다.
진실의 말씀을
따릅니다.
그 길만이
하느님의 나라를
맞이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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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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