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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찾으러 간다 / 장문석
꿀벌 한 마리
호박꽃 속에 들어 있다
꽃잎을 살그머니 오므린다
절체절명!
모르는 체 두 손 모아
법문을 외고 있다
호박꽃을
이리저리 휘두르다가
이윽한 후 펼쳐 보니
놀라워라, 그때껏
용맹정진
죽음마저 달콤한
―나, 지금 꽃 찾으러 간다
꽃이 무거운 꽃나무여 / 장석남
꽃이 무거워 가지가 휘는 작은 꽃나무여
첫꽃 핀 꽃사과여
그 꽃의 중량을 가늠해 보니
처음 업어보는 처녀의 무게만 하겠네
처음 배에 올려보는 女子의 희고 미끄러운 허벅지 무게만 하겠네
꽃이 무거워 가지가 휘는 작은 꽃나무여
꽃 떨구고 하늘로 솟을라나?
혼이 난 김에 아주 솟아갈라나?
숭굴숭굴한 자줏빛 꽃잎의 무게여
나의 몸살도 저를 닮아서
문고리를 채우네
검은 꽃 / 장석원
결국 여기에서 피어난다
우리의 형벌을 짊어지고 떠난 자들
망각에 깨물린 저들의 울음에 점령된다
몸이 찢어지자 필라멘트처럼 어제가 재연된다
그들은 스스로를 처단하여 구원을 실현했다
입 벌어져 있는
꽃들 학살 후의 시체들
누구인가 왜 이 어둠과 싸우고 있는가
한밤의 폭포처럼 찢어진 공간을 깁고 있는
검은 육체들 우리가 매장한 꽃
고통받는 자 앞에서 우는 자의 무릎 아래에서
부끄러움도 후회도 모르고 피어나는 꽃처럼
나는 왜 아플까 이곳은 어디일까
오늘 다시 어두워지고
더 아파진다 해도 나는 돌아설 수도
울 수도 주저앉을 수도 없다
저 깊은 곳의 붉은 울음 다시 내걸린다
하지의 태양이 내려온다
그들의 시신이 버려져 있다
사랑이 끝난 후에 세계는 패망한다
신념의 꽃 육체라는 거품
다시 시작하지 않겠다
꽃잎이 젖고 있다 그들은 곧 돌아올 것이다
바람 속에 그들의 얼굴이 가득하다
그 꽃 / 장옥관
그 꽃은 벼랑에 숨어 있었네.
천년이 지나도록 지지 않는 꽃이라네.
꽃과 잎은 두고 향기만 꺾어왔네.
그 옛날 천 송이 꽃
벼랑에서 뛰어내리며 남긴 향기라네.
암소 몰고 가던 노인이 꺾으려던
그 꽃은 아니라네.
그 향기 종소리로 몸 바꿔 강물 적시면
어둠이 노을을 불러와 손수건 적셨다네.
꽃과 잎은 두고 손수건만 얻어왔다네.
꺾어온 손수건 당신께 건네니
천년 동안 피고 진 종소리 얼굴에 번졌네.
그 얼굴 천년 전의 그 얼굴이었네.
벼랑에 숨은 꽃 이름은
고란(皐蘭)이라네.
꽃이 때린다 / 전동균 (1962~)
아파트 화단 앵두나무에
앵두꽃이 피었다
코로나를 뚫고
저가 피고 싶어서 피는 건 아니겠지만
나더러 보라고 피는 건 더더욱 아니겠지만
봄이 와서 앵두꽃은 피고
봄이 와서 머리가 더 허예진 사내가
어린아이처럼 그 꽃을 보는 것은
어딘가 다른 곳, 다른 시간 속에서
누군가와 함께 보는 것은
어쩐지 좀 미안하고 기쁜 일
쬐끄만 흰 꽃들은
편종 소리를 내며
나를 때린다
―제가 떠나가면 당신도, 세상의 누추도 사라질 거예요
고전적(古典的)인 속삭임의 꽃 1 / 전봉건
나와
당신의 손은
어디서고 만난다.
그렇게
당신이
원한다면,
어디고 없이
나는 내버려져 있는
이끼이고
돌멩이기도 하다.
천년을——.
그렇다,
당신의 손이
나에게 와 닿으면
오 천년도 일순이다.
벌써
당신은
나의 손아귀에 있다.
경주(慶州)의 어느 밭고랑 사이에서도,
당신은
어둠을 사르는 크낙한 번갯불이 된다
영원무변(永遠無變)한, 하늘의 푸름의 원소가 된다.
헤아릴 수 없는 죽음을 끼고 보듬고 언제나 언제까지나 흘러내리는 풍요한 강이 된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눈으로 넘쳐나는 뜨거운 것이 된다.
열의, 아니 백의, 천의 태양이 아로새겨진 이슬방울들이 되어 당신은 그러한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당신의 전신전령(全身全靈)에 이미 일제히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끝이 없는 젊음이란 것을 당신은 보았는가.
그 때의 당신은 뿌리에 달린 잎사귀,
잎사귀에 달린
열매, 열매에 달린 뿌리다.
이윽고 당신이 나의 손아귀에서,
어디고 없이 천년도 내버려질 이끼와 돌멩이 속에서, 천년을 울려 날 맑은 아름다운 피리 소리가 되는 것은…….
내가
당신의,
인간의,
찬란한 삶의 기쁨인 까닭이다.
천년도 먼 전날에 한 사람의 손이
어둠을 죽이고 죽음을 죽인 손자국.
나는 한 돌멩이에 새겨진
그 손자국이기도 한 것이다.
꽃의 체온 / 전비담
겨우내 엠뷸런스가 울어서 그 병원에는
곧 떨어질 이름들만 피었다
영안실로 가는 침대의 난간을 움켜쥐고
절뚝이며 따라가는 얼굴처럼
하얗게 질려서
기어코 봄날 초입에
한주먹 틀어막은 울음이
툭. 떨어진다
이제는 저 혼자 복도를 걸어 나갈 수 없는 것들이
군데군데 멍이 들거나 구멍이 뚫린 채로
하나씩 호명될 때마다
한 줌의 시든 수의로 기록되는,
목련! 하고 부르면
뚝.
뚝.
한 움큼의 하얀 종말이 뛰어내릴 때
찬란하게 하얀 것들에서는
포르말린의 체온이 풍긴다
꽃,
하고 입술 오므리면
죽음,
하고 휘어진 복도를
힘없이 돌아 나오는 메아리
건물 뒤편에서
시신을 말리는 냉각팬이
쉴 새 없이 돌아간다
누가 저걸
죽은 꽃들의 누적된
향이 앓는 소리라 했나
목련 피는 소리 갸르릉거리는 밤에는
죽은 내 친구가 입 안 가득
덜 삭은 생을 물고 양치하는 소리 들리지
하얀 꽃색 버려두고
꽃향이 자꾸 내 뒤를 밟는 건
일찍 떠나 비릿해진
꽃의 체온 때문.
상처에서 꽃이 핀다 /전 숙
모든 상처에서는 꽃이 핀다
유년의 상처에 꽃이 피어있다
무르팍을 으깬 돌멩이가 꽃잎으로 박혀있다
꽃잎을 누르면 검색창이 열리듯 상처의 기억이 열린다
밥 대신 누런 코를 들이마시던 아이의
허물어진 담벼락 같은 가난도 망초꽃으로 피어있다
고래가 죽을 때 핀다는 ‘붉은 장미’에는 가시가 없다
상처는 가시를 버리고 꽃의 길을 택했다
마지막 호흡에서 피어나는 붉디붉은 상처의 꽃
‘신은 살아있다’고
아우슈비츠 수용소 벽에 손톱으로 새긴
아리디 아린 상처의 꽃
상처가 꽃처럼 아름다운 것은 스스로 기억한
암각화이기 때문이다
결코 잊지 말라고
상처가 오체투지로 새긴
눈물의 전언이 꽃으로 피어난다
밟히고 밟힌 풀꽃의 눈망울을 들여다보라
매듭 매듭 저린 아픔과 상처의 기억이
다시는 밟히지 말라고
눈부처로 피어 있다.
꽃이 마르는 힘 / 전태련
막내는 수녀다
한번 들어가면 평생 그 울타리 안에서만 살아야 하는
부모의 장례식에도 참석 못하는 가르멜 봉쇄수녀
그녀의 옷은 마른 나뭇잎 빛깔이다
세상에는 피지 못하는 꽃인 양 스스로를 감금시키고
향기를 가둔 마법의 병 속에
열 몇 해를 잘 말리며 산다
깊은 산골,
세상이 알지 못하는 거기, 경북 상주시 내서면
모습 보이지 않는 신 앞에
맑은 술 한 동이로 자신을 익히며
기도의 향불 속에
잘 타는 마른 꽃다발로 산다
일 년에 두어 번 찾아가서 본다
꽃이 마르는 힘을
그 마른 꽃이 세상 한 귀퉁이 잡고 있는 것을
꽃못 / 정 겸
마룻대 상량문이 희미해진 봉선사* 운하당
대목장大木匠 정씨는 낡은 법당이나 요사채를 수선할 때마다
결 곧고 심지 굳은 나무못 만들었다
굵거나 가는, 길거나 짧은
나무못 수십 개가 가지런히 툇마루에서 햇볕 쬐고 있다
대들보와 서까래 사이가 느슨해져 틈 벌어졌다
나무와 나무 잇댄 자리 홈을 내어
다시는 인연의 끈 놓지 말라고
나무못으로 옭죄며 접합시켰다
맞대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세상
서로에게 아픔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같은 유전인자끼리 살을 섞어야
오래오래 버티며 살아갈 수 있다고 했다
‘화중생련火中生蓮’
연꽃 축제가 한창인 사찰 앞 연蓮밭
이곳은 향기와 소리, 바람마저 묵언이다
초록빛 못들이 들쭉날쭉 무수히 박혀있고
정두頂頭에는 꽃등 하나씩 매달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아프지 않게 이어주는 꽃못
하늘과 물과 땅을 단단히 묶어놓고 있다
* 남양주시 진접읍에 소재한 조계종 제25교구 본사.
저 꽃이 흡혈의 흔적이라면 / 정미정
물방울 톡톡 튀는
첫 몸을 빼앗긴 순간
육골은 마르기 시작했지
귓불에 목덜미에 젖무덤으로
시퍼런 이빨 자국 나기 전까지
내 몸엔
연어 거슬러 오르는 소리 들려왔었지
바알간 숯덩이처럼 알알이 익고 있었지
덴 듯 뜨거워서
몸뚱아리 자꾸 부풀어서
터진 풍선껌처럼 네 입술에 들러붙고 말았을 때
닿은 몸마다 돋아나는
연분홍 생식흡반
온 피가 한꺼번에 거꾸로 쏠리는
기막히게 오른 절정
나를 버려도 좋아
이대로 죽어도 좋아
살갗을 파고드는 붉은 꽃잎,
또옥 똑 꺾어
닦을수록 윤이 나는 기억에 담아 두겠어
네게 물린 기억으로
일체가 되어 버린
격렬한 그리움의 이빨 자국
푸들푸들 간지러움 도는 새살 내밀어
푸른 알을 자꾸 달아 보네
안절부절꽃 / 정복여
내 방에 동백이 오셨다고 전화를 한다
남쪽엔 벌써 피었다더라
그 옆에 철쭉도 오셨다 전화를 한다
요샌 아무 때나 철쭉은 피는데 뭐
꽃들이 서랍에서 스위치서 리모콘에서
저것 봐, 달그락 피어나는 싱크대
그랬으면 그랬지라는 말을
시큰둥한 자루에 꽁꽁 묶어넣으며
별일 없지?
세상은 바쁘다고 서둘러 전화를 끊는다
백성이 하나뿐인 나라
그가 바로 나인
단 한명의 백성을 위하여 여왕들은 그렇게 왔다 간다
꽃을 접는 잎 속에서 다시 일년치의 새 규율이 있다
지켜도 지켜도 아무도 모르는 생일처럼,
커튼이 베란다문이라도 열어두라 눈 흘긴다
짧은 바람이 여행객처럼 왔다 가지만
배낭이 그 시큰둥한 자루를 닮아 있다
늦도록 꽃 / 정끝별
앉았다 일어섰을 뿐인데
두근거리며 몸을 섞던 꽃들
맘껏 벌어져 사태 지고
잠결에 잠시 돌아누웠을 뿐인데
소금 베개에 묻어둔
봄 맘을 훔친
희디흰 꽃들 다 져버리겠네
가다가 뒤돌아보았을 뿐인데
떠가는 꽃잎이라
제 그늘만큼 봄빛을 떼어 가네
늦도록 새하얀 꽃잎이
이리 물에 떠서
꽃들의 만(灣) / 정끝별
첫꽃은 첫꽃의 의지대로
끝꽃은 끝꽃의 의무대로
꽃이란 미래의 기억이라서
지나가는 소음이라서
갓 돋은 잎을 내모는 바람의 궤도는
그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꽃이란 주르륵 미끄러지는 것
차가워지는 것 그리고 말라가는 것
오가는 추(錘)처럼 계절에 들고
스치는 시침과 분침처럼 계절을 나라했거늘
움켜쥐는 손아 지나가다오
온몸으로 피워낸 내 꽃 밖의 허공은
네 눈이 닿지 않는 곳이라서
아무것도 아닌 곳이라서
봄날에 겨워 나 툭 지거든
여름바다 한 그루 나 살던 뭍에 심어다오
나 묻힐 무덤에 가지 끝을 꽂아다오
캄캄했던 뿌리, 허공에 마저 피워낼 수 있도록
피고 또 지며 먼 길 달려왔으니
붉은 잎들아 일체로 흩어져다오
천 무더기를 피우고 뭉갰던 진흙꽃아
꽃들의 나발 / 정끝별
동네방네
낙하산처럼 부푸는
저 저 꽃들의 웃음소리는
지난겨울 오소리가 멱을 낚아챘던
닭목의 비명에서부터
덜컥 덫에 걸려 죽은 오소리 발목의 신음까지
땅에 묻힌
살들의 중음 탄식
빈 내장을 말린다
뿔이나 껍질 속 바람을 내보낸다
부풀어 오르는 구음들,
살가죽을 늘린다
정강이뼈를 뚫어 바람을 불어넣는다
발목에서부터 정수리까지
북받쳐 오르는
물관악기들의 한바탕 취주
플러그 뽑힌
기억의 소실점에서
꽃들의 손톱 발톱 머리카락 자라는 소리
환지통처럼 저릿한
늦봄 한철의 범음 범패
꺾인 꽃 / 정소슬
꺾인 꽃, 여기 있다
저기도 있다
자연 속에서 섭생해온 자생 꽃이 아닌
관상용으로 키운, 철두철미 사람 입맛에 맞춘 하우스 꽃이라지만
꽃은
꽃이다
이 꽃도 父가 있고 母가 있어 그 사랑으로 태어났을 거다 지대한 축복과 정성으로 자랐을 거다 채 꽃망울도 맺기 전 낯선 가위에 댕강 잘려야할 운명이라곤 꿈에도 모르고 컸을 거다 그래서 써늘한 가위가 그녀의 허리를 꺾고 있을 적에도 이름 대신 값으로 명찰이 붙여지는 좌판 위를 개처럼 끌려 다니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을 거다 현기증만 자욱한 좌판 위, 피곤한 기색이라도 보일라치면 사정없이 물이 뿌려지고 오로지 호가에만 관심을 둔 비정함 아래 눈길만 스쳐도 스마일 스마일하도록 철저하게 길들여져 비몽사몽 여기까지 팔려왔을 거다
지금, 발가벗겨진 나신으로
생애의 피곤을 화병에 담근
저 꽃,
투명 유리벽을 통해 드러난
저 어린 소녀의 아랫도리를 바라보며
대체 누가 미소짓고 있는가?
당신 잠 속으로 꽃을 물고 / 정수경
지퍼는 순서가 틀린 것에 반항하며 옷자락을 물고 있다.
시간이 녹아 흘러내린다.
저녁 목구멍이 햇빛을 삼키고
우울한 식탁에선 키 다른 젓가락들이 키를 맞추는 소리.
잠은 청할수록 불면의 뒤란에 양귀비를 키우고
시간의 벽 뒤에는 꽃뱀이 숨어 있어
고양이 방울이 피아노 줄 고르듯 암호를 딸랑거리면
꽃뱀은 양귀비꽃 한 송이 꺾어 들고 잠 속으로 들어온다.
지퍼 발자국에 모자를 벗어던진 빗방울
구름 속에서 발바닥이 간지러워 잠을 끌어다 덮을 때
불순한 꽃을 오려 만든 가면 쓰고
외진 밤, 붉은 심장을 부르며 새 떼가 날아간다.
구름무늬를 골라 딛는 당신 잠 속으로 또 다른 꽃을 물고.
꽃 속의 너트 / 정숙자
꽃 속에 너트가 있다(면
혹자는 못 믿을지도 몰라. 하지만 꽃 속엔 분명 너트가 있지. 그것도 아주아주 섬세하고 뜨겁고 총명한 너트가 말이야.)
난 평생토록 꽃 속의 너트를 봐 왔어(라고 말하면
혹자는 내 뇌를 의심하겠지. 하지만 나는 정신이상자가 아니고 꽃 속엔 분명 너트가 있어. 혹자는 혹 반박할까? '증거를 대 봐, 어서 대 보라고!' 거참 딱하구나. 그 묘한 걸 어떻게 대 볼 수 있담.)
꽃 속에 너트가 없다면 아예 꽃 자체가 없었을 것(이야!
힘껏 되받을 수밖에. 암튼 꽃 속엔 꽉꽉 조일 수 있는 너트가 파인 게 사실이야. 더더구나 너트는 알맞게 느긋이 또는 팍팍 풀 수도 있다니까.)
꽃봉오릴 봐 봐(요.
한 잎 한 잎 얼마나 단단히 조였는지. 햇살 한 올, 빗방울 하나, 바람 한 줄기, 먼 천둥소리와 구름의 이동, 별들의 애환까지도 다 모은 거야. 그리고 어느 날 은밀히 풀지.)
꽃 속의 너트를 본 이후(부터
'꽃이 피다'는 '꽃이 피-였다'예요. 어둠과 추위, 폭염과 물것 속에서도 정점을 빚어낸 탄력. 붉고 희고 노랗고 파란… 피의 승화를 꽃이라 해요. '꽃이 피다!' 그렇죠. 그래요. 그렇습니다.)
그늘을 지우는 꽃(을
신들이 켜 놓은 등불이라 부를까요? 꽃이 없다면 대낮일지라도 사뭇 침침할 겁니다. 바로 지금 한 송이 너트 안에 한 줄기 바람이 끼어드는군요. 아~ 얏~ 파도치는 황홀이 어제 없던 태양을 예인합니다.)
꽃과 버들이 노닌다 / 정 영
당신의 조각과 나를 어떻게든 연결해야만 하는 날들
구름색 옷을 걸쳐 입고 우린 늘 심장의 자리를 맞춰보지만
이미 어긋난 감정들은 바둑돌처럼 제자리에 놓이는 게 아니어서
당신은 달그락거리는 발굽을 내 입술에 맞춰보네
내 목덜미에 네 야윈 허리를 맞춰볼 때도 우린 취해 웃지
시들어가는 꽃잎을 떼어내며 사랑을 점칠 때도
우연에 기대어 잊혀지는 관계들을 증명하고 싶어 해
점점 뭉툭해지는 네 개의 발로 거리를 활보하며
괴물의 소리를 내며
몸에 실낱같은 고리들을 매달고 당신과 당신과 당신과 나를
끼워 맞추느라 밤거리를 떠돌다 새벽이 오면
우린 두 손에 꽉 끼는 구두를 신고 달리지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얼굴로
인간의 것도 짐승의 것도 아닌 몸으로
밤과 낮이 없는 숲을 꿈꾸며*
너도 나도 털이 자라는 몸
너도 나도 뼈가 퇴화 중인 몸
어쩌면 우린 모두 뿔을 가졌으니 완벽한 동체(同體)일지도 몰라!
우린 태어나면서부터 이렇게 공통점 찾기 놀이에 흠뻑 빠져 있지
그렇게 같은 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가는
흔연해서 서글픈 그런 날엔
꿈을 꾸지
달에서 날아온 화살이 우리를 하나로 관통하는
좀 덜 외롭게
————
* 파우누스 Faunus :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목신(牧神). 인간의 몸에 염소의 다리와 뿔을 가졌다.
울트라 마린, 푸른 꽃 / 정영숙
내 몸 안에는
마이크로폰을 지닌
마트로시카가 들어 있어
하루에도 수십 번
다른 음색의 선인장 꽃을 피운다
나무로 만든 꼬마 인형들을 하나씩 꺼내놓고
실로폰 채로 머리를 두들기면
아리조나 사막에서 보았던
줄기마다 색색의 꽃을 피우던 선인장
바람의 강도와 햇빛이 받는 각도에 따라
진분홍 조개빛, 연보라의 별빛, 울트라 마린의 바다빛
각기 다른 음색의 꽃을 피운다
하루에도 수십 번
그가 보내는 신호에 따라
각양각색의 빛깔로 피어나는
나의 마트로시카
바다 저편에 있는 그대여
이 뜨거운 여름 한낮
잔잔한 G음의 트레몰로로
내 흔들리는 머리를 연주해 주려무나
내 심장부에 있는
지중해 빛 닮은 울트라 마린
푸른 꽃으로 피워
그대 있는 곳으로 헤엄쳐 가리
오, 자귀꽃 / 정 온
살살 녹을 거라, 달달할 거라 생각한다면
혀끝 먼저 대 봐
촉촉 젖어드는 네 가슴
발랑발랑 심장 터질지 몰라
옥수수수염 될지도 몰라
반반한 햇살이 전부인 몸
오락가락 치근대는 빗줄기야
너무 쉽다고는 마
함부로 눕는다고는 마
보드라운 숨결에 네 목이 베일지도 몰라
애간장을 쥐고 천천히 핥을지도 몰라
한 사람만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
솜사탕처럼 녹아내린
담장과 어머니와 처녀의 경계
달달한 인생을
팽팽 도는 붉음을
—준비하시고 쏘세요
징그럽도록 달아오른 네 눈에
착 달라붙는 혀,
밤마다 푸른 비늘을 오므려 갈은 칼이지
몰랐지?
꽃이 아니라
뱀이라는
오, 작위 작위꽃
꽃, 가장 뜨거운 / 정일근
연이틀 영하 십도 이하로 밤 기온 뚝 떨어졌다
언 물 다시 얼어 얼음의 속살까지 빗살무늬로 터지고
입춘 앞두고 가슴 부푼 땅 대책 없이 얼어 버렸다
하루종일 기름보일러는 크렁크렁 돌거나
아궁이마다 장작불 활활 타오르며
사람의 이 방 저 방을 데울 때
은현리 덕산마을 회관 앞 잠든 부추밭 곁에
노란 민들레꽃 한 송이 활짝 피었다
민들레꽃 속에 무슨 보일러 돌고 있는지 몰라
꽃 속에 어떤 아궁이 있는지 몰라
오늘 은현리에서 가장 뜨거운 방은
노란 민들레꽃 속에 있다, 알고 보면
꽃보다 더 뜨거운 것은 어디 있으랴
내리는 눈 속에서 어는 얼음 속에서
추운 몸 지지고 싶은 펄펄 끓는 뜨거운 방은
저기 노란 민들레꽃에게 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 정지원
단 한 번일지라도
목숨과 바꿀 사랑을 배운 사람은
노래가 내밀던 손수건 한 장의
온기를 잊지 못하리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도
거기에서 비켜서지 않으며
어느 결에 반짝이는 꽃눈을 닫고
우렁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랑이야말로
짙푸른 숲이 되고 산이 되어
메아리로 남는다는 것을
강물 같은 노래를 품고 사는 사람은 알게 되리
내내 어두웠던 산들이 저녁이 되면
왜 강으로 스미어 꿈을 꾸다
밤이 길수록 말없이
서로를 쓰다듬으며 부둥켜안은 채
느긋하게 정들어 가는지를
누가 뭐래도 믿고 기다려주며
마지막까지 남아
다순 화음으로 어울리는 사람은 찾으리
무수한 가락이 흐르며 만든
노래가 우리를 지켜준다는 뜻을
비로소 꽃 / 정채원
꽃은 뒤에서 봐도 꽃이고 거울 속으로 몰래 훔쳐봐도 꽃이고 비대면으로 봐도 꽃이다. 밥을 먹다 봐도 꽃이고 말다툼을 하다 봐도 꽃이고 걸레질을 하다 봐도 꽃이다.
내려다 봐도 지고 있고 올려다 봐도 지고 있다. 코미디 쇼를 틀어놓고도 지고 있고 수염을 깎으면서도 지고 있고 자다 깨어 새벽까지 뒤척이면서도 지고 있다. 꽃을 버리면서 꽃은 꽃이 되고 있다.
우리집 신발장 옆에 놓인 꽃은 일 년 전에도 피어 있었고 어제도 피어 있었고 오늘도 피어 있다. 언제나 활짝 피어 있는 꽃은 꽃이 아니다. 질 줄도 모르는 건 꽃이 아니다.
나는 피었다가 기필코 지는 꽃을 사랑한다. 지는 모습을 감추지 못해 슬퍼하는 꽃을 오래 사랑한다. 지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꽃을 더 오래 사랑한다. 피기도 전에 져버린 꽃을 두고두고 잊지 못한다. 패색이 완연한 계절, 내 안에 너는 아직도 피어 있다. 비로소 꽃이 되었다, 서로에게.
폐허의 꽃 / 정철훈
하산에 들어서자 가는 곳마다 폐허였다
유리창 깨진 빈 아파트, 녹슨 발코니, 부서져 내린 외벽,
말라버린 타이어 화단, 끊어진 놀이터 그네, 휘어진 전봇대,
확장되는 적막 또 적막
폐허가 절망의 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으나
금세 고쳐 생각했다
폐허가 아니고 아직 건축 중인 꽃이라고
세상에 없는 꽃
눈보라 뚫고 피어나는 꽃
언덕 위에 올라서자 두만강 너머
북한 땅 은덕 어디쯤이 희미하게 보였다
저 너머가 나진-선봉이고 웅기항인데
그저 희미하고 희미할 뿐
크라스노-하산로를 따라 도착한 국경 검문소 부근
마른 풀들이 바람에 스칠 뿐
두 줄기 철로만 녹슬어 있고
더는 갈 수 없다
적막이 깊어지기 전
자동차 라디오에서 들려온 중국어 방송
훈춘이 가까우니 당연지사겠으나
노랫가락은 귀에 익은 조선족 가요였다
두만강이 지척인데 예서 끝이라니
북한-중국-러시아
세 젖꼭지를 빨며 흐르는 두만강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자괴감으로 돋는 소름
소름들을 모아 나도 하나의 젖꼭지를 가질 수 있기를
여기가 끝
여기가 시작
꽃의 최전선 / 정하해
여러 해 땅을 놓쳤던 것들
안으로 걸어 잠근 얼굴이 바짝 말랐다
죽은 행운목 뽑아내고
다른 화분도 몇 개 준비해 여물대로 여문 꽃씨 심었다
살아 나오지 않으면 그만이고
그러니까 꼬불꼬불 기어 나오는 불행으로부터의 기척
저 서러운 새끼들
봉숭아는 해가 오는 쪽으로 당장 달려 나가고
나팔 줄기는 아무 데나 붙을 작정으로
점점 험악하다
저들의 분주한 삶이 한바탕 휘몰아치겠다는 생각보다
슬금슬금 내 안에서 놀겠다는 살림살이가
어쩌면 족쇄
목숨을 저리 저장해 놓고 쓸 수 있다면
목숨의 부레를 채우기 위한 뜨거운 식사 자리 잠깐이면 되는 거다
멀리 떠나 있는 얼굴이 온다
꽃이 온다
잡히는 대로 선반에다 일목요연하게 살 한 점씩 걸어놓고
단시간 폭발시키는
그의 밖은 성한 데가 없다
흰 꽃 / 정한용
당신은 일곱 시면 돌아가죠
미궁으로 돌아서서
우주 허공 저쪽으로, 아득하지요
조금도 늦으면 안 되죠
시간의 거대한 문이 서서히 닫히면서
우리를 음흉하게 비웃고 있죠
비밀의 책에 이미 그렇게 적혀 있다고
계시된 각본이라고, 아니면
천공을 가르는 검은 강물이
당신과 나 사이에 놓인 길을 단호히 끊어버리듯
문제가 무엇인지, 답이 무언지
이미 우린 알고 있죠
당신은 일곱 시에 돌아가야 하죠
꿈길에라도 천리향처럼 퍼져
만 리 밖 당신 귓가에 작은 떨림으로 닿는다면
내 울음이 당신 뺨을 쓰다듬어
당신 환하게 빛난다면
거기, 그렇게 가만
가만히 있어도 좋겠지요, 당신 자리
어둠에서만 피어나는
한 송이 꽃이어도
꽃이 시드는 동안 / 정호승 (1950~ )
꽃이 시드는 동안 밥만 먹었어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꽃이 시드는 동안 돈만 벌었어요
번 돈을 가지고 은행으로 가서
그치지 않는 비가 그치길 기다리며
오늘의 사랑을 내일의 사랑으로 미루었어요
꽃이 시든 까닭을 문책하지는 마세요
이제 뼈만 남은 꽃이 곧 돌아가시겠지요
꽃이 돌아가시고 겨우내 내가 우는 동안
기다리지 않아도 당신만은 부디
봄이 되어주세요
꽃을 따르라 / 정호승 (1950~)
돈을 따르지 말고
꽃을 따르라
봄날에 피는 꽃을 따르지 말고
봄날에 지는 꽃을 따르라
벚꽃을 보라
눈보라처럼 휘날리는 꽃잎에
봄의 슬픔마저 찬란하지 않으냐
돈을 따르지 말고
지는 꽃을 따르라
사람은 지는 꽃을 따를 때
가장 아름답다
꽃 / 정호승
사람은 꽃을 꺾어도
꽃은 사람을 꺾지 않는다
사람은 꽃을 버려도
꽃은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영정 속으로 사람이 기어들어가
울고 있어도
꽃은 손수건을 꺼내
밤새도록
장례식장 영정의 눈물을 닦아준다
민지의 꽃 / 정희성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덜렁 집 한 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다섯 살배기 딸 민지
민지가 아침 일찍 눈을 비비고 일어나
말없이 손을 잡아끄는 것이었다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
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그건 잡초야, 라고 말하려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내 말은 때가 묻어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마디가
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나 하나 꽃 피어 / 조동화 (1949∼ )
나 하나 꽃 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느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 피고 나도 꽃 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나 하나 물들어
산이 달라지겠느냐고도
말하지 말아라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결국 온 산이 활활
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
일찍 피는 꽃들 / 조 은
일찍 맺힌 산당화 꽃망울을 보다가
신호등을 놓친다
해마다 이맘때면 나는 영화의원 앞
신호등을 제때 건너지 못한다
꽃망울을 터뜨리는
그 나무를 보고 있으면
어떤 기운에 취해
돌아갈 수 없는 곳까지 와버린 듯하다
언젠가는 찾아 헤맬 수많은 길들이
등 뒤에서 사라진 듯하다
서슴없이 등져버린 것들이
기억 속에서 앓고 있는 곳
꽃망울이 기포처럼 어린 나를 끓게 하던 곳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그 꽃나무 어딘가에 있는 듯
나는 신호등을 놓치며
자꾸 뒤를 돌아본다
메밀꽃이 인다는 말 / 조용미
메밀꽃이 인다는 말 아는지요
바닷가 사람들의 오랜 말로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을 어부들은 메밀꽃이라 부릅니다
흰 거품을 일으키는 물보라를 메밀꽃이 인다 하는데
그 꽃은 피는 게 아니라 이는 거예요
피는 꽃이 스러지는 꽃을 알 수 있을까요 지는 꽃이 일어나는 꽃을 숨쉴 수 있을까요
먼 파도에서 일어나는 물거품을 나도 이 순간부터 메밀꽃이라고 부르기로 합니다
잠에서 일어나고 연기가 일어나는,
먼지가 일어나고 두통이 일어나는,
아지랑이가 일어나고 혁명이 일어나는,
산불이 일어나고 지진이 일어나는,
불꽃이 일어나고 모래바람이 일어나는
일어나고 일어나 스러지고 또 스러져 다시 일어나는
그 꽃을 당신은 벌써 알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마음이 일어난다는 말은 어떤가요
메밀꽃처럼 흰 거품을 일으키며 솟구쳤다 스러지고 또 스러지는 는 이 마음 참 오래되었지요
메밀꽃이 또 인다고 당신께 소식 전하지는 못합니다
그저 메밀꽃이 피고 졌다 말할 밖에요
북쪽으로, 매서운 메밀꽃이 이는 한겨울의 바다로 가만히 당신을 보러갑니다
흰 꽃의 극락 / 조용미
泰山木에 꽃이 필 때,
그 향기는 죽은 아이의 혼백
病을 불러들이는 향기
꽃잎 한 조각 한 조각이 모두 향기의 덩어리인
태산목 커다란 흰 꽃이
극락처럼
피어날 때
그 그늘에서 한숨 잠을 자고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저 두근거리는 흰 빛의 커다란 꽃등이
병을 불러들인다
꽃봉오리가 붓끝을 닮은 木筆
북쪽으로 고개를 두는
北向花
나의 침대는 자주 북향이어서
칠성판이 아니어도
북쪽으로 반듯이 마음을 누인다
열매가 붉게 익을 때쯤, 두근거림이 잦아들 무렵
병도 당신도 함께 데리고 나가
야윈 풍경들을 살펴줄까
비닐꽃 / 조용환
시절 없이 피어 시절 없이
지지 않는 저 꽃은
맨 처음 국가를 세운 왕에게 바쳐야 한다
가가호호 아침저녁으로 숭배의 절을 올려야 한다
풍성한 햇빛으로 빛나는 공화국은 오늘도
단 하나의 꽃을 피우기 위해
불철주야 불을 피우나니, 어린 선민들은
불멸을 위해 복종해야 한다
번들번들한 하늘에 허옇게 질린 아이들과
미끈미끈한 벌판에 까맣게 그을린 새들이
까마득한 세계의 끝에서 돌아올지라도
찢기며 울부짖는 범인류적인 저 꽃에게
너희 가련한 신앙은 경건한 기도를 올려야 한다
오늘도 무궁을 향해 나부끼는
향기마저 잊은 노스탤지어를 위해
너희 충직한 가난으로는 무엇을 바칠 것이냐,
안녕을 물을 수 없는 번영의 날로 창대해지고
진공 포장된 숲에는 칼날 같은
선광의 화엄으로 만만세 영생토록 살 것이니,
꽃 없는 산천초목일지라도
시절 없이 저물지 않는
저 꽃의 영원을 물을 수는 없다
꽃나무 아래를 지나는 사람 / 조정인
나무는 해마다 혼신의 힘으로 저의 불을 꺼내네
이것은 실재와 비유 사이 오차가 없는 서술
벚꽃이 환하네, 흰 꽃등 아래엔 의자가 있고
등이 굽은 한 사람 앉았네
지난 결빙의 시간으로부터 틔어오던 흰 불빛이
어룽어룽 그 사람 여윈 등을 비추네
어깨에 옷자락에 발등에 꽃그림자 일렁이네
꽃 핀 나무 아래 한 사람 꽃불을 쬐네
뒷등이 환해지고 따스해지는 동안
헐벗은 그는 어디 갔을까
나무의 광도가 가장 높아진 계절
꽃을 쬐던 그가 이윽고 일어서 가네
벚꽃을 머리에 이고 오는 신 철쭉을 집어쓰고 오는 신
목련으로 배냇저고릴 지어입고 오는 젖내 나는 신
여럿이며 하나인 하나이며 여럿인 신들의
급진적 출현을 뒤로 하고
한 사람 가네, 천 년 동안을
떨어진 꽃 하나를 줍다 / 조창환 (1945~)
떨어진 꽃 하나를 주워 들여다본다
밟히지 않은 꽃잎 몇 개는 나긋나긋하다
꽃잎 하나를 따서 가만히 비벼보면
병아리 심장 같은 것이 팔딱팔딱 숨쉬는
소리 따뜻하고, 손가락 끄트머리가
아득하다 안개 속의 섬처럼, 혹은
호수에 잠긴 절 그림자처럼
떨어진 꽃 하나를 주워 들여다보는
아침 뜨락에 햇빛 가득하고
어디서 만년설 무너지는 소리
울린다 가을 잎들이
백지 같은 바람 속에서 마구 흔들리고
벌레들이 소스라친다
은제 꽃잔 / 주경림
오늘 밤, 첫눈으로 찾아온 당신,
창문을 열고 맞았지요
툭툭 털고 들어오세요
귀한 분께는 은제 술잔이 제격이에요
떨리는 제 손을 왼손으로 지그시 잡고
살며시 감국주를 따라요
은제 술잔 바닥에 새겨진 국화 꽃잎이
맑은 술 위에 사르르 펼쳐져요
서리에도 시들지 않았던 제 마음이에요
여린 꽃잎들이 행여 흩뜨려질라
선뜻 마시지 못했던 당신,
머뭇하는 사이에 꽃술 향기에 벌써 취했어요
꽃잎은 입술에 닿기도 전에 녹아버렸구요.
첫눈 내린 밤
눈물, 눈물만 남았어요.
꽃과 의미(意味) / 주문돈
(1)
두꺼비가 꽃비 속에 엎드려서
참회를 한다.
거침없이 꽃잎은 흘러내려 지옥의 살벌한 계절에서
따스운 것을 소생시킨다. 그 칠흑의 하늘에서는 정지했던 해가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찬란한 빛을 투사(投射)한다.
언제나 종말같은 진실한 빛깔로 살아나가는
꽃이어서
죽은 그 시체도 타는 것이구나.
(2)
꽃밭은
어느 큰 흐름의 단면(斷面).
하늘의 뭇 용태(容態)를 진술하고 있는
꽃들은 수런거리며 속삭이며
제각금 탑의 정부(頂部)를 이루어가고-.
휘어 휘어 뻗어간 꽃가지는 어느 바다에
적시우고 있는가.
아지랑이와도 같이 어른대고 무지개 빛으로 황홀해 보이는
맑은 것들이 뭉어리로 뭉어리로 엉키어 있는
꽃밭을 보노라니.
아 신라(新羅). 신라.
그 마음 위에 감돌던 꽃구름은 어디에 가 다시 구현될 날을
모색하며 있는가.
꽃은 조심스럽게
벼랑을 맞받으며 쉬임 없이 피고 영토를 확장하며 있다.
내년이면 나올 다른
꽃가지가 뻗어 적실 바다는
지금에도 기약(期約)으로 출렁이고 있다.
너울너울
화창히 떨어져 내린 꽃잎은 꽃보다 붉은
생명의 비인 부분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
* 195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꽃과 함께 식사 / 주용일
며칠 전 물가를 지나다가
좀 이르게 핀 쑥부쟁이 한 가지
죄스럽게 꺾어왔다
그 여자를 꺾은 손길처럼
외로움 때움에 내 손이 또 죄를 졌다
홀로 사는 식탁에 꽂아놓고
날마다 꽃과 함께 식사를 한다
안 피었던 꽃이 조금씩 피어나며
유리컵 속 물이 줄어드는
꽃들의 식사는 투명하다
둥글고 노란 꽃판도
보라색 꽃이파리도 맑아서 눈부시다
꽃이 식탁에 앉고서부터
나의 식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외로움으로 날카로워진 송곳니를
함부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꽃 핀 나무 아래 / 주원익(1980∼ )
우리가 마지막으로 내뱉어야 했던
관념의 오물들이 관념으로 뒹굴고 있다
흰빛, 부러진 나뭇가지 사이로
그것은 때때로 달아나고 미소 짓고 불을 가져온다
강물은 낮을 가로지르고 밤을 위해 잠들었다
돌무더기를 끌고 발자국을 지우며 물소리
들리지 않는 그곳으로 우리는 쓰러져야 했다
쓰여져야 한다 버려진 문장들은 구름의 뼈를 부수고
세상의 빈약한 나뭇가지를 부여잡을 것이다
들판을 거닐다가 굶주린 갈까마귀처럼
우리가 마지막으로 더럽혀야 했던 오지에서
꽃 핀 나무들이 자라나고 흰빛,
헤매고 충돌하는 유령의 관념들아
우리가 처음 버려져야 했던 우리처럼 떨어진다,
그곳으로 떨어지고 있다
해국, 꽃 편지 / 진 란
잠시 여기 꽃그늘에 앉아도 되겠습니까?
꽃빛이 너무 좋아도 눈물이 나는 걸까요?
당신을 더듬는 동안 내 손가락은 황홀하여서 어디 먼 곳을 날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잠시 어지럽던 동안 바닷물이 밀려오듯 눈물이 짭조름해졌습니다
우리가 자주 머물던 바다를 생각했습니다
그때 그 어깨에도 해풍이 머물고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갔던 게지요
그때 그 가슴에도 섬이 되었다가 섬이었다가 섬으로 멀어졌던 게지요
이렇게 좋은 풍경, 이렇게 좋은 시를 만나면
순간 돌부처 되어 숨이 막히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경이 되어버립니다
잠시 여기 꽃그늘에 앉아 편지를 씁니다
한때 꽃이 되었다가 꽃이었다가 꽃으로 져버린 그대
내년에도 다시 오마던 꽃은 그 꽃이 아닐 것이라고
우리의 기억은 늘 다르게 적히는 편지라고
꽃들에게 묻는다 / 채풍묵
가늘고 푸른 길을 가만히 더듬어 가면
그 길은 어디로나 줄기를 뻗어
길은 저리도 많은 거구나 알게 되더라
잡을 수 없는 꿈을 좇는 어떤 길은
하늘하늘 흔들리는 계단이파리를 딛고
낮은 하늘 아래 바람꽃으로 피고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어떤 길은
바람 속을 허허롭게 걸어 어느새
주점 앞에 이르면 술패랭이꽃으로 핀다
산책로를 따라 도는 발길에게 문득문득
그가 지나온 길을 묻다가
내가 지나온 길을 묻다가
꽃잔디 무성한 정원에 이르러 생각한다
순환할 수 없는 길을 가는 우리는
어떤 꽃으로 피어날 수 있을까
할 말을 묻은 채 세상을 지나는 길섶에
꽃이 피면, 말 못한 죄들이 꽃으로 피면
무슨 이름의 야생화가 되는 것일까
처음 만나는 꽃들에게 되물어 보며
내내 꽃이름만 하나씩 살펴보다가
꽃처럼 말을 감춘 아침고요 산책길
산수유꽃 / 최광임(1967~ )
넓은 냄비에 카레를 끓인다
불꽃의 정점에서 꽃이 핀다
굴참나무 아래 쪽빛 드는 구릉 사이
타닥타닥 산수유꽃 피어나듯
약한 불꽃 가장자리에서부터 오르는 기포
철판도 더 뜨거운 한 쪽이 있다니,
나도 그대 앞에선 뜨거운 꽃이지 않던가
세상은 자꾸 배면을 더 할애하지만
억척스레 빛을 끌어다 덮고 열리는 몸
불판 중앙으로 냄비의 위치를 바꿔놓는다
한동안 노란 속살까지 차오르는 뜨거움
누구의 한때도 뜨겁지 않는 삶은 없다
봄날의 빛이 또 산란한다
유독 내 가슴이 먼저 가 닿는 곳
까르르르르
산수유꽃같이 끓어오르는
나를 저어다오
악의 꽃 / 최금진
할머니무덤 이장하다가 보았다
꽃과 나무들이 육식성이라는 것 강아지처럼 귀여운
솜털의 뿌리가 무덤을 향해 입을 내밀며 쪽쪽
빨아대는 소리가 들렸다 할머니
흐물흐물한 몸에서 손톱과 발톱과 머리털을 뻗어
관을 후벼파고 기어나왔다
할머니, 하얗게 피어난 꽃이었다
구덩이 속에 뱀처럼 엉겨붙은 뿌리들은
햇빛이 닿는 순간에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흙속에 흘러든 검은 체액을 빨아대고 있었다
향을 피우고 독한 술을 부었다
땅속의 썩은 입냄새를 감추기 위해
무덤의 꽃들은 현흑색을 입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아가, 나다, 할미다, 피 묻은 입술과
멍든 살코기 같은 잎을 매달고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삽으로 뿌리를 찍었다
할머니, 허연 머리털이 뽑혀나갔다
어둠에 촉수를 박아넣은 것들은 모두 음주광성
내 습한 겨드랑이가 간지러운 것도 그 때문
나를 빨아먹고서야 시들어버릴 털 때문
화장품을 바르고 향수를 뿌리고
내가 누군가의 몸에 꽃피우고 싶은 것도 그 때문
삽날에 찍힌 아카시아 뿌리들이 드러났다
나는 미친 듯이 할머니를 흔들어 깨웠다
할머니! 제발! 이제, 그만하세요!
꽃과 아이 / 최동문
꽃말이 배꼽 밑으로 떨어진다.
그녀는 수출용으로 실리는 꽃잎을 만든다.
밤이 지날수록 그녀는
잠근 단추를 하나씩 풀고,
전화선을 뽑고 싶다.
빨간 꽃잎은 하얀 눈동자 속에서 열린다.
그녀는 아이를 낳았다.
밤에서 걸어 나온 물빛 머금은
가슴 뛰는 아이는 깊고 푸른
밤의 갈채로 몸을 씻는다.
외로운 그녀와 그가 만나면 마을이 된다.
마을은 긴 시장을 세우고
그녀와 그는 시장에서 꽃을 산다.
만든 꽃도 곱다.
화병에 꽂으면 보기가 좋다.
만화 보는 아이와 화병이 어울린다.
아이는 어른이 되어 간다.
꽃은 마른다.
행복은 만져질까?
그녀와 그는 빈 들을 일군다.
빈 들이 꽃으로 가득 차면
먼 곳을 보는 눈은 지평선과 닿을까?
아이는 만든 꽃에 볼을 댄다.
아이의 입술에서 꿈 냄새가 난다.
투구꽃 / 최두석
사노라면 겪게 되는 일로
애증이 엇갈릴 때
그리하여 문득 슬퍼질 때
한바탕 사랑싸움이라도 벌일 듯한
투구꽃의 도발적인 자태를 떠올린다
사노라면 약이 되면서 동시에
독이 되는 일 얼마나 많은가 궁리하며
머리가 아파올 때
입술이 얼얼하고 혀가 화끈거리는
투구꽃 뿌리를 씹기도 한다
조금씩 먹으면 보약이지만
많이 넣어 끓이면 사약이 되는
예전에 임금이 신하를 죽일 때 썼다는
투구꽃 뿌리를 잘게 잘라 씹으며
세상에 어떤 사랑이 독이 되는지 생각한다
진보라의 진수라 할
아찔하게 아리따운 꽃빛을 내기 위해
뿌리는 독을 품는 것이라 짐작하며
목구멍에 계속 침을 삼키고
뜨거워지는 배를 움켜쥐기도 한다.
《제3회 혜산 박두진 문학상 수상자 대표시》
그 해의 꽃구경 / 최문자
그 해
그를 생으로 뽑아낼 수 없어서
생으로 사랑니 하나 뽑아내고 치통을 견디다 못해 꽃구경을 갔었다.
토종 흰 민들레 군락지, 제천 구인사
한꺼번에 피를 다 쏟아낸 듯한 핼쑥한 꽃들이
어금니가 보이도록 희게 웃고 있었다.
엎드려서 흰 꽃 두 송이 꺾는 사이
피가 한 입 가득 고였다.
흰 꽃 위에다 대고
시뻘건 그를 뱉고 또 뱉어냈다.
비린 입술을 흰 꽃으로 닦았다.
해질녘까지 지혈되지 않는 그를
약솜처럼 물고
하루 종일 그 산을 쏘다녔었다.
그 해
그게 꽃구경이었을까?
꽃은 자전거를 타고 / 최문자
그녀가 죽던 날
꽃은 자전거를 타고 왔다
그녀의 남자가 입원실 현관 앞에 자전거를 세우고
막 아네모네 꽃을 내리려고 할 때
그녀의 심장은 뚝 멎었다
꽃은 다시 자전거를 타고 영안실 근처로 갔다
죽을 자리에서도 타오른다는 아네모네가
놀란 자전거를 타고 앉아
헛바퀴만 돌리고 또 돌렸다
그날,
꽃은 온종일 자전거에게 끌려 다녔다
꽃을 태운 자전거는 참았던 속력을 냈다
꽃도 그녀처럼 자전거를 타고 앉아
남자의 등을 탁탁 때리며 달렸다
꽃은 내부가 무너지도록 달렸다
마지막 꽃 한송이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뭐라고 말했지만
바람이 그 말을 쓸어갔다
그날,
빈 자전거 한 대
고수부지 잡석 사이에 쓰러져 있었다
꽃을 스치고 죽음을 스치고 / 최문자
꽃은 죽음을 모른다네
꽃들이
그렇듯 피면
죽음조차 빛난다
깊은 밤
이 밤을 다 마시고도 괘종시계는 그 자리에 서있었지
창문을 열면
거기도 꽃과 죽음이 가득해
이 거리에서
죽음을 스친 꽃들은 모두 내가 가질게
꽃은 죽음을 모른다네
지구 모퉁이마다 죽은 자들 누군지 알 수 없고
몰려다니며 피는 더 아름다운 저 꽃들
꽃은 오늘
피려는 것인가 떨어져 죽음에 스치려는 것인가
바이러스로 희망을 뒤엎는 엔딩
요즘 목숨이 꽃잎처럼 자주 떨어지는데
누가 꽃을 스치는 이 죽음을 해명해주나
죽어본 적도 없는데
머나먼 지구 어느 나라의 언어로 죽어가는 그 나라의 꽃들과 그 나라 사람들 얼굴과 떠오르는 마지막을
나는 알 수 없다네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 / 최백규(1992~ )
나를 번역할 수 있다면 뜨거운 여름일 것이다
꽃가지 꺾어 창백한 입술에 수분하면 교실을 뒤덮는 꽃
꺼지라고 뺨 때리고 미안하다며 멀리 계절을 던질 때
외로운 날씨 위로 떨어져 지금껏 펑펑 우는 나무들
천천히 지구가 돌고 오늘은 이곳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단 한번 사랑한 적 있지만 다시는 없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과 너의 종교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몇 평의 바닷가와 마지막 축제를 되감을 때마다
나는 모든 것에게 거리를 느끼기 시작한다
누군가 학교에 불이 났다고 외칠 땐 벤치에 앉아 손을 잡고 있었다
운명이 정말 예뻐서 서로의 벚꽃을 떨어뜨린다
저물어가는 여름밤이자 안녕이었다, 울지 않을 것이다
새우등꽃 꽃잔치 / 최영준
유리 수족관 속,
새로 들여온 새우들이 허리를 구부린 채 잠들어 있다
품종이 달라선가 모양새도 각각이다
색유리에 불빛이 번지면 꽃모양이 되는 것만 똑같다
그날 밤, 나는 보았다 도시의 수족관에 모여든
새우들이 여기저기서 피워내는 새우등꽃을
등에 문신을 새기듯 그늘진 삶의 무늬가 온몸으로 번지고,
응어리진 뿌리마다 어둠을 자양삼아 피워내는 꽃,
낮이면 등 속에 꽃을 숨겼다가
등줄기에 뜨거운 핏덩이가 뭉클거리는 밤이면
다시 꺼내드는 마술의 꽃을 보았다
지하철역 노숙자의 등에 피어나는 신문지 종이꽃,
그 불꽃 속 저마다 숨겨둔 가족과 만나는 잠,
잠의 세계를 보았다
영이야 순이야 부르는 소리에
오그라들었던 등의 힘줄을
물 오른 나뭇가지처럼 빳빳이 세우고 일어서는 새우등꽃들,
새우등꽃, 그 꽃잔치를 보았다.
꽃 / 채성병
꽃은 씨앗 속에 얼마나 많은 기억들을 갖고 있는지!
내가 쉴 씨앗을 찾는다
천국으로 가는 계단은 멀기만 한데
어디에도 내 쉴 곳은 없다
영혼은 어느 때보다 오히려 젊어지고 있는데
육신은 이미 늙었다
지상에 마지막 꽃 한 송이 부디 피우고 싶어라
—때는 늦었다 라고 말하지 말아다오
자유!
오, 자유란 질서 속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나는 뒤늦게 깨닫는다
꽃은 씨앗 속에 얼마나 많은 기억들을 가지고 있는지
별들의 운행은 알리라
지천 피어 있는 꽃들이
내겐 너무 멀기만 하다
꽃의 사적인 연애방식 / 하 린
앞집 누나가 교복을 찢고 도시로 날아간다 날아간 자리에 나팔꽃은 피지 않고 온종일 축축한 웃음이 비릿한 생각을 타고 올라간다 꽃의 심장이 태양 아래서 팔딱거리듯 목구멍에서 욕(慾)이 팔딱거린다 꽃의 맨살을 찢고 싶은 밤은 결코 시들지 않는다 아침마다 눈깔이 뒤집히도록 태양에게 용서를 구한다 죄를 말리는 데는 도덕적인 태양이 최고
더듬이가 길어진 그림자가 자꾸 누나의 여백을 훔친다 심장이 만삭으로 부풀어 오르고 어제의 비굴이 오늘의 비굴을 복제한다 꽃이 내뱉는 기침소리가 자꾸 들린다 누나의 몸 안으로 스며들어간 곪아터진 상상들을 쭉쭉 빨아 삼키고 싶다 누나와 내가 나눠 가진 울음과 웃음이 죽지 않고 나비로 환생한다면 꽃을 껴안는 불순한 밤은 고독한 전설로 기록이나 될까 구질구질한 혀가 누설한 꽃의 말들은 이번 생이 다하기 전에 삭제될 것이다 사적인 물음만 던지다 하릴없이 썩어 들어갈 벌겋게 독이 오른 맨살*들의 사적인 연애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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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겋게 독이 오른 맨살 : 오규원의 「사내와 사과」에서 인용.
목련꽃 우화 / 한석호 (1958~ )
내 사랑은 늘 밤하늘 혹은 사막이었다.
멈칫멈칫, 허공의 쟁반을 돌리는 나뭇가지에
흰 불덩이들 걸려 있다.
염천의 사막을 탈주한 낙타의 식욕인지
고압 호스를 들이대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순정한 저 불의 잔이
나를 유혹하며 숨 막히게 한다.
시인이여,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 이런 것이라면
그대가 살았던 곳이 이 같은 지옥이라면
그건 환한 축복이었겠다.
그 지옥 몇 철이라도 견디며
온갖 술들로 지상의 식탁 넘쳐 흐르게 하겠다.
눈 속에서 선녀를 놓쳐버린 시인과
수천의 꽃잎을 날려버린 황제와
제 품에 들어온 대어를 놓쳐버린 태공의 전설, 그 아래쪽에
'내 사랑은 늘 밤하늘이었고 사막이었네'
라고 쓴다.
가출한 제 영혼과 줄다리기하던
반생(半生)의 시인과 마주 앉아 삭월의 잔 돌려 마시며
섭생(攝生)이 앙상한 내 시론(詩論) 태워버린다.
웃는 꽃 / 한성례
저 글자 무슨 뜻?
글자가 꼭 웃고 있는 모양이네
일본인 친구가 불쑥 묻는다
그 자리에 ‘꽃’ 자가 있다
웃고 있는 꽃 자
꽃집 유리문 밖으로 웃음을 던지며
시선을 잡아끄는 꽃무더기
무명씨의 꽃들
꽃처럼 꽃이라는 글자가 활짝 웃고 있다
웃는 꽃
꽃 이파리 행간마다
꺾인 자존심을 꼬깃꼬깃 구겨 넣어
얼굴에는 웃음만이 남아
웃음으로 가득 차 있다
웃는 꽃은 슬픈 꽃!
여행 중인 승합차 안에서 바라본
아주 짧은 한순간
꽃을 위한 꽃 자
꽃 자를 위한 꽃의 웃음
꽃이란 이름으로 화려하게 치장하고
웃음을 달고 살아야 하는
꽃의 생리
그 얼굴에 맞춰진
꽃이라는 이름
꽃을 켜다 / 한세정
눈을 감고 입을 다무는 것은
이곳의 일이 아니다
손바닥을 마주 대고
맹세를 하는 것도
더 이상 이곳의 일이 아니다
오늘부터 꽃은 꽃이 아니며
꽃들은 모든 꽃말을
잃어버린다
이제 우리는
언 손바닥 위에서
가장 뜨겁게 피어나는 꽃봉오리를
감싸 안는 꽃받침이
되기로 한다
두 손에서 두 손으로
어둠을 밝히며
하나의 꽃이 켜질 때
온몸이 입술인 채로
새롭게 써질 꽃말을
호명한다
꽃의 좌표 / 한영수
어쩌다가 한 번 붉은 게 아니다
피기 시작하고 있지만
누구의 혀도 물들이지 않았지만
피가 소란해진다
어떤 봄에도 닿지 못한다는 것은
지금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여전한 이곳에 서서
어쩌다가 붉은빛을 훔친 것이 아니다
바람마다 붉은 그림자 지는 것이 아니다
말을 여는 것처럼
말을 깨문다
망각을 흔들어 깨우는
불안처럼 불안에 연루된
부정처럼
붉은 것을 끄집어내야 했고
조금 더 밀어내는
동백, 꽃 바깥에
놓여 있는 꽃
그렇다 극소량의 태양 속이다
모과꽃 떨어진 물에 발을 씻고 / 한영수
서릿발이 닿자 모과는 나무를 버린다
아래로 아래로 전체를 다해 울퉁불퉁 맨주먹이 그러한 그대로 삶을 계속한다
봉건을 식민을 삼 년 돌림병에 삼 년 전쟁을 살아 내는 얼굴이다 정말은 무섭고 정말은 춥고 외딸은 시간이 익어서 향기를 풍길 때까지 모과는
주먹을 풀지 않겠다는 거다 닥치는 대로 생떼거리를 부릴 기세다
피어도 되겠습니까 / 한영수
—동백
충분히 불안합니다
순간 쏟아질 한 사발 피에
아름다움이 붐빕니다
빨강의 내부를 열고
들어가 더 완고한 빨강에서
베어 문 빛깔로
지배받지 않는
단어로
꽃 피어도 되겠습니까
겨울로 격리된
심장 한 덩이
변방을 두드려 댑니다
아우성치며 눈발이 때를 맞추는
이런 밤에
이런 밤에
꽃을 가진 겨울에 대하여
겨울을 가진 꽃에 대하여
한마디 넘쳐도 되겠습니까
검은 꽃 탄자니아 / 함기석
들판 여기저기 탄자니아 꽃이 검게 피어 있다 여자는 죽은 아이 아벨을 거적에 싸안고 노을 번지는 언덕을 내려온다 구릿빛 등의 남자는 샘을 파다 운다 인간의 혀보다 두렵고 거친 배신의 땅
작은 돌들 사이에서 풀들이 웃고 있다 나는 붉은 천막처럼 펄럭이는 하늘을 배경으로 피 묻은 빨래를 널고 찢긴 마음을 넌다 진흙 논처럼 쩍쩍 갈라진 남자의 눈동자에서 흘러내리는 검붉은 흙물
공중엔 무쇠 포탄보다 무거운 먹장구름 연대, 여자는 죽은 아이를 내려놓고 맨손으로 구덩이를 판다 흙먼지 풀풀 날리는 언덕 위로 아이와 놀던 강의 물고기들이 헤엄쳐 와 구덩이 속을 엿보고
남자는 말없이 또 땅을 판다 파고 파고 또 파도 나오지 않는 물줄기와 저린 어깨, 앙상히 뼈만 남은 나무뿌리 밑엔 더 앙상하게 뼈만 남은 노인들 아이들, 들판 저편에서 또 포성이 울린다
거적 밖으로 삐져나온 아벨의 피 묻은 발 하나를 저녁 햇살이 가만히 어루만지고 있다 수시로 포탄이 날아오던 모래능선 위의 하늘이 유리사발처럼 쩍 갈라지고 꽃들의 눈썹이 검게 흩날린다
깊은 땅 속에서 똥그랗게 뚫린 하늘을 올려다보는 남자, 저 스스로를 직립으로 매장하려는 걸까 어디서 누가 또 죽었는지 흰 풀이 비명처럼 돋고, 여자는 거적에 덮인 아이를 꺼내며 울음을 터트린다
구덩이 왼편 돌 틈에서 죽은 사람의 발을 닮은 꽃이 하늘하늘 웃고 있다 여자의 가냘픈 숨결처럼 찰랑찰랑 잔물결 일으키며 퍼지는 꽃가루, 약에 취한 새처럼 나는 나조차 알아들을 수 없는
잿빛 시를 낮게 웅얼거리며 빨래를 넌다 남자는 계속 땅속에 둥지 잃은 새처럼 빈 울음으로 서 있고 지옥에서 날아온 부고엽서 같은 노란 나비 한 마리 아물아물 구덩이 주변을 맴돈다
이 들판 저편 먼 아시아에도 촛불이 타오르겠지 맨드라미처럼 붉은 여자의 잇몸, 아이가 꾸던 단 꿈이 구덩이에 묻히고 남자는 검은 꽃의 지층 어딘가에 있을 천국을 찾아 더 깊은 곳으로 파들어간다
꽃 피는 경마장 / 함민복
경마장으로 건너가는 애마교 입구
비상하는 청동마상 두필
앞발이 허공을 힘차게 딛고 있는
그림자 밟으며
모든 비상의 첫발은 허공을 짚는 것이라고
희망에 중독된 사람들 우르르 몰려간다
정보지를 뒤적이며
지갑을 점검하며
걸인의 바구니에 반짝 동전을 떨구며
주차장 사이사이
한 나무가 수백 나무 꿈꾸는
고배당 노리는 벚꽃 화사하다
꽃의 파르테논 / 함태숙
꽃잎이 흐른다
흰 꽃잎이
대리석에 누워서
오래전에 부르던 노래를 듣는다
깊은 바다는
등 밑에 바닥을 깔고
뜨거운 혈관은 신들의 음성으로 채워지네
눈동자여, 납작하게 박힌
검은 무늬여
이젠 눈물 흘리지 않아도 좋다
슬픔의 온도가 너를 맞추니
얼어붙은 꽃들이 피어나리
찰칵 찰칵 영원의 조리개를 통과하며
한 소절의 기억이 하나의 신전이 되리
내게 각운을 맞춘 그대여
오래전부터 흐르던 노래는 여기서 굳었다
그러니 마저 달려라, 죽음이여
흰 피톨로 실어 나르는 대리석의 둔부여
얼굴을 숨긴 꽃이 내게 물었다 / 허 준
지하철 승강장에 섰는데
어디선가 꽃향기가 날아왔다
그때 그 꽃이 내게 물었다
당신은 안녕하냐고
주위에 아무도 없었고
향수의 잔향도 아니었는데
얼굴을 숨긴 채 스스로를 퍼올리는 구나
그렇게 슬픔이 우리 곁에 머무르고
양귀비꽃 / 허형만
덴마크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 솔뱅에 갔네
이백십여 년 전 세워진 산타 아이네스 성당에 들어가
잠시 묵주기도를 드리고 마당에 나오니
뜨락 한쪽 양귀비꽃이 나를 환히 반겨주었네
내가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별빛과 안개를 털어냈을까
몇 광년의 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냈을까
양귀비꽃은 나의 볼에 입을 맞추어주었네
은은한 감촉이 촉촉했네
나는 눈을 감았네
이 눈물겨운 만남의 신비를 어찌할까
사랑이여
잠시나마 그대와 함께 있기 위하여
칠십 평생이 걸렸구나
유채꽃밭에서는 모두가 황홀하다 / 허형만
햇살도 바람도 노랗게 물든
유채꽃밭 한 마지기가 제주에서 도착했다.
유채꽃밭을 시나브로 거니노라면
제주 앞바다 너울성 파도 소리도 노랗게 물들어 있고
그 위를 나는 갈매기 깃털도 노랗게 젖어 있다.
유채꽃밭에 놀러 온 구름
꽃과 꽃 사이 그늘도 노랗다.
유채꽃밭에서는 모두가 황홀하다.
꽃 / 황동규
나는 나무들이 꽃을 잔뜩 피워놓고
열매가 생기기를
우두커니 서서 기다린다고 생각할 수가 없다
사방에서 벌이 잉잉거릴 때
꽃들은 먼발치서 달려오는 벌을 맞으러
하나씩 문을 열 것이다
꽃송이 하나하나가
마침 파고든 벌을 힘껏 껴안는
이 팽팽함!
배나무나 벚나무 上空에서
새들은 땅 위에서 환한 구름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잠시 天上과 地上을 잊을 것이다.
꽃의 고요 / 황동규
일고 지는 바람 따라 청매(靑梅) 꽃잎이
눈처럼 내리다 말다 했다.
바람이 바뀌면
돌들이 드러나 생각에 잠겨 있는
흙담으로 쏠리기도 했다.
'꽃 지는 소리가 왜 이리 고요하지?'
꽃잎을 어깨로 맞고 있던 불타의 말에 예수가 답했다.
'고요도 소리의 집합 가운데 하나가 아니겠는가?
꽃이 울며 지기를 바라시는가,
왁자지껄 웃으며 지길 바라시는가?'
'노래하며 질 수도……'
'그렇지 않아도 막 노래하고 있는 참인데'
말없이 귀 기울이던 불타가 중얼거렸다.
'음, 후렴이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