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일시모음 35편
☆★☆★☆★☆★☆★☆★☆★☆★☆★☆★☆★☆★
《1》
검은 구두의 시
이병일
이제 나는 어둡고 축축한 신발장 속에서
아무도 들여다보니 않는 검은 흉기가 되었다
융기 : 이 무시무시한 물건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한때 나는 텅 빈 초원 속에서
스스로의 일생을 점칠 수 있는 뿔 달린 짐승이었다
분분히 몇몇 안되는 발굽들의 무리를 이끌고
풀의 낯짝 위로 건너오는 신성한 저녁을 응시했다
또 어떤 바람은 너무 쉽게 육체와 성욕을 버렸다고
말했다 나는 식욕보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러나 아무 때나 손을 흔드는 노을 속을
참방거리며 처음 지나는 벌판과 호수를 좋아했다
여러 번 접힌 꽃잎 속의 향기에 취할 때처럼
나는 악착같이 다가온 사냥꾼에게
고집 센 수컷의 힘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죽음은 무서울 만치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이생에서 내생으로 너무 많은 길을 운반한 죄로
다시 탄탄한 근육을 가진 짐승으로 환생했던 거다
그때 한번이라도 나를 신어본 신사복들은
근엄한 야망을 피력하기 위해 물광을 자주 내곤 했다
검은 영혼을 가진 구두코 거울 속에서
나는 운명을 점지하는, 흉기가 되었고
계단의 각도에 따라 나를 찌르는 아침 혹은 저녁이
발바닥과 굽의 중심을 키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2》
격장
이병일
작은 돌, 큰 돌, 옆구리가 깨진 돌, 대가리 날카로운 돌 모아 담장을 쌓아올린다. 황토와 짚을 잘 섞어서 두 집 사이에 돌 울타리를, 매화나무와 감나무의 경계선을 후회도 없이 쌓아올린다. 나는 큼지막한 돌덩이를 양손으로 옮긴다, 감나무 그늘로 옮긴다. 저만치 매화나무 꽃눈이 지켜봐도 돌풍과 작달비에 끄떡없는 돌담을 쌓는다.
오늘 나는 담장을 쌓아올리며 겨우내 잠자던 어깨 근육을 흔들어 깨웠다. 돌덩이 하나 놓고 수박만한 태양을 놓는다. 돌덩이 하나 놓고 굴참나무숲 그림자를 놓는다. 곰곰이 바람의 각도와 수평을 맞추고 또 다시 돌덩이와 재미없는 한낮의 하품을 마저 놓는다. 그때 나는 줄곧 이 담장타기를 좋아하는 장미나 능소화의 유쾌한 질주를 생각한다.
나는 자명하게도 담장을 쌓는 일에 끝없는 동작으로 있는 힘을 탕진 중이다. 누가 또 돌담을 쌓아 격장(隔墻)을 이루는가, 그러나 나는 돌담처럼 맑디맑게 정다울 것이다
☆★☆★☆★☆★☆★☆★☆★☆★☆★☆★☆★☆★
《3》
고모리 저수지
이병일
저 고모리 저수지는 악의도 없이 배알 꼴리는 것도 없다
발가벗은 물오리 울음으로 후미져 있을 것만 같은데
한 벌의 얼음 외투가 생길 때까지 출렁,
물소리는 뒤집혀도 물빛과 바닥은 뒤집히지 않는다
가을 고모리는 회복기 중일까, 검게 몸을 바꾸는 물결과
검불 바람 소리마저 비춰준다
물소리는 물결 끝에 흰 것과 푸른 것의 길을 놓는다
나는 그것을 숨길 수 없는 큰파랑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뱃구레 터진 것은 안 봐도 그만이지만
오늘은 부레로 일어나고 꺼지는 것이 질겨진다
머리꼭지까지 고저음을 끌어올린 풀벌레들,
달의 무릎에 앉거나 흙의 심장을 찌르기도 했겠지만
지금은 발자국도 없이 서리 빛에 삭고 있다
먼 능선도 나뭇잎 달게 지는 소리로 찢긴다
당고모 말투 같은 새 떼도 저물녘까지
까맣게 한눈팔 듯 꽤 높은 곳까지 치솟는다
착지와 추락은 수면에 달라붙는 말 같은데
한쪽은 정좌함으로 미끄러지고
저쪽은 절규로 더 깊이 가라앉는다
저수지 한가운데가 쳐다볼 새도 없이 어두워진다
물의 예수를 믿는 신도들아
진흙 바닥에도 그윽한 전망이 있구나
기도는 말을 쌓아 바닥을 보여주는 물질 같고
꼬리와 뒷다리를 가진 달의 물갈퀴 같다
나는 내 피의 수렁을 잠재우러 왔으나
물속 교회 십자가와 손깍지를 끼고 말았다
상처 많은 믿음만이 회개하고 천국에 가닿는다
해바라기 씨눈만 한 날빛이 복사뼈를 긁고 간다
☆★☆★☆★☆★☆★☆★☆★☆★☆★☆★☆★☆★
《4》
기린의 목은 갈데없이
이병일
기린의 목엔 광채 나는 목소리가 없지만,
세상 모든 것을 감아올릴 수가 있지
그러나 강한 것은 너무 쉽게 부러지므로 따뜻한 피와 살이 필요하지
기린의 목은 뿔 달린 머리통을 높은 데로만 길어 올리는 사다리야
그리하여 공중에 떠 있는 것들을 쉽게 잡아챌 수도 있지만
사실 기린의 목은 공중으로부터 도망을 치는 중이야
쓸데없는 곡선의 힘으로 뭉쳐진 기린의 목은
일찍이 빛났던 뿔로 새벽을 긁는 거야
그때 태연한 나무들의 잎눈은 새벽의 신성한 상처와 피를 응시하지
아주 깊게 눈을 감으면 아프리카 고원이,
실눈을 뜨면 멀리서 덫과 올가미의 하루가 속삭이고 있지
저만치 무릎의 그림자를 꿇고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기린의 목과 목울대 속으로 타들어가는 갈증의 숨을 주시할 때
기린의 목은 갈데없이 유연하고 믿음직스럽게
아름답지 힘줄 캄캄한 모가지 꺾는 법을 모르고 있으니까
☆★☆★☆★☆★☆★☆★☆★☆★☆★☆★☆★☆★
《5》
나무는 나무를
이병일
나무는 나무를 지나 커다란 물항아리로 앉았죠
꽃과 열매를 다 잊고 골짜기에서 짐승과 한철,
겹겹 산 능선을 이루면서 지친 기색도 없다지요
나무는 나무를 지나 죽고,
죽은 후에야 그루터기란 이름을 가진다고 해요
온화하게 산과 강을 건너는 저녁을 삼킨 나무
오늘은 신발 벗어 두고 달의 핏자국을 만져요
나무는 천둥새를 쫓아온 사냥꾼인데요
뉘우침도 많아서 왜 여기에 왔는지 금방 잊고요
첫서리에 제 혼이 핏빛으로 지나간다고 잎을 벗죠
출처 시집 : 《나무는 나무를》 중에서
☆★☆★☆★☆★☆★☆★☆★☆★☆★☆★☆★☆★
《6》
당나귀와 당귀
이병일
가장 먼 말 같기도 하고
가장 가까워 깨진 이름 같기도 하다
성질머리 더러운 당나귀는
방향감각을 갖기 위해
흙이나 모래를 퍼 먹기도 했다는데
정작 나는 조악한 마음을 달래려고
뻔뻔하게도 당귀차를 자주 마셨고
당귀잎을 뜯어 쌈 싸 먹기도 했다
당나귀는 악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짐승이고
나는 첫서리 깔린 들판에 죽은 뱀을 보고
비의秘儀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인데
정작 침착한 것은 노을 절벽이다
두 눈을 뜰 용기가 없는 해안선이다
부레란 이름만이 물 속을 걷는다는
우도, 어쩌다 생긴 절벽이 냄새를 가질 때
당나귀는 당근으로 얼굴을 바꾸고
나는 당귀차로 발바닥의 핏줄을 구부린다
저만치 체머리 떠는 창문과
우짖는 까마귀 바람이 있어
당나귀와 당귀란 말은 기이한 명랑 같고
해방 쪽으로 기울어가는 침묵 같고
반짝임을 저녁으로 닫아거는 꽃잎 같다
☆★☆★☆★☆★☆★☆★☆★☆★☆★☆★☆★☆★
《7》
당분간
이병일
폐허, 절로 외져 없었던 것들이 여기저기서 모여든다
날씨가 흐려도 목청을 높이는 사슴 떼가 청태를 뜯는다
여남은 뿔에만 골라 피는 봄빛이 흉터를 지우려 할 때
반은 희고 반은 분홍인 것이 그저 신성한 그 짓을 했다
다저녁 별자리와 뿔은 묵약도 없이 한 방향으로 자랐다
뿔에 난 꽃가지들은 쌀랑쌀랑 낙화도 없이 설경인데
당분간 몸이 되려고 하는 것들이 신열을 앓을 것이다
☆★☆★☆★☆★☆★☆★☆★☆★☆★☆★☆★☆★
《8》
돌로 된 그물 이야기
이병일
머리통에서 돌을 꺼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마침내 외과의사는 돌을 꺼내놓고 그것을 사리라고 부른다
백년에 한번쯤 나타난 피 흘리는 돌이라고 했다
돌에 미친 자는 돌이 한 마리의 새로 되돌아갈 때를 안다
빗소리로 웅크린 돌이 막막함으로 구를 때를 안다
홀연 아가미 숨기고 산 차돌도 피라미였음을 안다
돌 그물이 없는 강은 이미 죽은 강이다
그러나 돌은 솟고 구르고 뛰고 달리고 깨진다
오직 그물이 되기 위해
오직 그물로 남기 위해
그런데 나는 돌 속에 갇혀 있는 새발이다
아직 텅 빈 밤은 오지 않았다
나는 버들가지에 내려앉고 싶었다
하지만 금빛 날개가 없어
서고 눕는 것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빛을 삼키면서
백 년 동안 반짝반짝 떠 있는 저 돌
금 가거나 깨진 꽃달 같았다
어쨌건 부수고 부서지는 것은 돌이 아닌
물새였다 아롱진 그림자였다
참, 지구는 상하지 않는 돌이지만
반쯤 아무는 상처를 갖게 되었다지
그런데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것이 무섭다
오늘은 돌밭 언저리에 번지는 노을이
시커멓게 돌밭을 뭉개고 가는 것을 본다
그런데 웬일일까, 푸른 빛깔 차돌 하나가
민무늬 돌을 떼어낸 나를 보고 알은체 한다
돌은 웬만해선 마른 물빛을 마시지 않아요
비 갰다 흐렸다 하면서 추워지는데, 나는
오직 돌로 된 그물 이야기를 옮겨 적었다
출처 : 계간 《詩로 여는 세상》 (2022년 겨울호)
☆★☆★☆★☆★☆★☆★☆★☆★☆★☆★☆★☆★
《9》
라부여관
이병일
나의 피난처는 라부여관,
그런데 레바논의 백향목이 왜 생각날까
익힌 것은 깊고 잊힌 것은 춥겠지,
욕심은 나를 깨우고 잠들게 하고
핏줄보다 돈이 이끄는 대로
적과 싸우게 하고
총, 칼, 활이 내 관자놀이를 겨누게 한다
고흐, 까마귀 울음으로 칼을 갈아
귓등을 긋고서야 알게 된 것이 있다
왜 피에서 해바라기 냄새가 나는지
왜 피로 죄와 믿음을 씻으려 하는지
오늘 수염으로 가득한 나의 얼굴은
까마귀가 되었다가
사이프러스와 밀밭이 되었다가
다시 새 피 얻을 몸으로 되돌아온다
왜 죄는 눈꺼풀이 없을까
나의 탄식소리로 말미암아
인중에 괸 침묵도 일렁거릴 것만 같다
격리와 고립은 한몸 같은데
얼음구멍같이 갇혀있는 것은 아니다
찔끔, 코피가 흘러나온다
라부여관, 신기하게도 죽음보다
고백을 듣는 방이 많았다
나는 종교도 없이 신앙심을 갖고 싶었다
캄캄한 것이 꾸물꾸물 밝아진다
☆★☆★☆★☆★☆★☆★☆★☆★☆★☆★☆★☆★
《10》
매달리기
이병일
우리는 죽을 때까지 매달리기를 해야 한다
그림자는 종일 내 몸에서 매달리기 중이지만
나는 힘들어하지 않는다 그림자가 되고 싶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
새는 깃털 하나로 흔들리는 중력에 매달리고
물고기는 거꾸로 돋은 비늘로 강바닥에 매달린다
무언가에 매달려야 살아가는 것도 있고
무언가를 매달고 살아야 하는 것도 있다
☆★☆★☆★☆★☆★☆★☆★☆★☆★☆★☆★☆★
《11》
맨드라미
이병일
화단 앞에서 수탉 두 마리가 싸우고 있다.
땅을 박차고 허공을 날며 서로 대가리를 콕콕 쪼아대는데,
벼슬에서 피가 얼키설키 쏟아진다.
싸움에는 퇴로가 없다.
기세등등한 부리가 화살이자 곧 과녁이다.
장벽으로 마주 보고 있다가도 다시금 치받으니,
이것이야말로 생을 벼랑으로 밀고 가는 싸움이겠다.
급기야 한 마리가 이승 너머까지 나아가는 줄 알고 비명을 지른다.
수탉의 대가리에서 붉디붉은 맨드라미 활짝 핀다.
그때 대숲에서 은둔하던 족제비 부부가 수탉 한 마리씩 물고 논길로 사라진다.
한됫박의 피 흘리고 간 수탉의 저승길만큼
화단의 맨드라미가 막무가내 꽃 피우는 일도 혼곤하겠다.
☆★☆★☆★☆★☆★☆★☆★☆★☆★☆★☆★☆★
《12》
메두사의 눈부신 저녁을 목격함
이병일
땅 속 바위 속으로 들어가 바위의 꿈과 섞이고
다시 계곡 깊은 沼에
애써 채워둔 독니와 얼룩무늬를 씻고 있을 메두사가 있다면,
달 분화구 뚫고 나오는 빛에 몸과 척추를 늘이고 뻗어
녹황색 꽃 비늘 활짝 피워 올리는, 유월의 메두사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조각자나무 속에서 흐느껴 우는 메두사였으니
내 눈 속으로 걸어 들어오는 목격의 저녁을 무당같이 기록해두자
메두사는 죽을힘을 탕진하듯 움직이지 않기 위해
색과 향기를 조각자나무의 감각 속에 가두고 있었으리라
그러나 신의 문자를 몰래 벽화에 옮겨 적는 법으로
불사의 신이 될 팔자를 타고 났기에
까마득히 맑아지는 가시눈꽃으로 축생을 건너고 있었으리라
나뭇잎은 대가리의 잔뼈를 가리기 위한 보호색인데
팔랑팔랑 팔랑개비 돌리듯 바람의 밤낮이 한 번에 몰려와서
메두사의 기억이 제 갈길 찾아가라고
챙챙 번갯불을 켜고
제 뼛속까지 파고드는 달과 별을 가시무늬로 빚어냈으리라
차고 뻣뻣한 서리의 독으로 굳어지는 가시눈꽃은
물방울 듣는 소리를 긁어모아 나이테 원판을 만들었으리라
바깥에서 안의 풍경이 안에서 바깥의 풍경이 겹쳐지듯,
은은한 광채 나무껍질에 알알이 박혀 잎눈으로 트이듯,
오늘 나는 조각자나무 속에서 한 숨 한 숨 뜨거운 사랑을
서늘한 가시 비늘로 바꾸는 메두사의 눈부신 저녁을 목격하였으니
☆★☆★☆★☆★☆★☆★☆★☆★☆★☆★☆★☆★
《13》
물색과 작당
이병일
물소리 긷는 잉어가 수면을 갈아 낀다고 해서
봄밤이 오는 것은 아니지만
잉어는 제 몸에 잉걸불이 켜지면
봄밤이라는 것을 그냥 안다
보문호수는 둥근데 왜 모서리가 많을까
닫히지 않는 것이 수면이지만
수면은 물금으로 깨져있거나 붙어있다
잉어는 지느러미로 서서 걷기 시작한다
아가미가 믿는 것은
밤의 옷깃을 여미게 하는 갈대바람이다
조악한 그림자를 바투 붙여놓은 구름이다
호수의 공기는 미끄덩거리게 차갑지만
웅덩이를 골라 딛는 날쌘 물소리,
팔뚝만할까
장딴지만할까
산란이라는 말은 왜 비명으로 찢길까
호수를 한 바퀴 도니까
물이 물을 긁는 소리만이 상온이다
오늘도 아가미와 아가미는 알을 끌고 갈
밤의 잉걸불을 꿰기 위해
물색과 작당 사잇길에서 봄밤을 맞는다
감미롭게 끝장을 봐야 흐트러지는 알 빛들
촉촉 불탈 것만 같은데 척척 눈알이 생긴다
출처 : 계간 《시와편견》 (2023년 여름호)
☆★☆★☆★☆★☆★☆★☆★☆★☆★☆★☆★☆★
《14》
북극의 후예
―숨
이병일
물개 덫을 놓고, 확실치 않지만
확실하게 빙산 밑에 은닉해 있는 물개를 기다린다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추워야 어디로든 갈 수 있다
나는 암암리 움직인다 백야처럼 암암리
움직이니까 용감해진다
북극곰은 반들반들 핏물을 뒤집어쓰고서
발각되었다
물개의 숨을 으깨 놓고 크게 울부짖는다
저 강한 북극곰에게 심장을 뜯길까 봐
뒷덜미에 살얼음이 낀다
방아쇠를 당기는 검지가 얼어붙는 것이다
흰빛처럼 뜬눈으로 죽은 곰은
죽은 아비의 얼굴 같다
나는 곰의 두개골로 피를 퍼 마시며
아직도 이 사냥이 북극의 후예가 되는 일이라고 믿는다
어떻게든 어디가 됐든 멀리 가야 한다
사납게 밝은 북극곰 바지, 내가 모질다고 생각할까
씩씩하게 북극 앞으로만 걷는다
출처 : 계간 《문예바다》 (2023년 겨울호)
☆★☆★☆★☆★☆★☆★☆★☆★☆★☆★☆★☆★
《15》
불과 꽃과 잉어의 시
이병일
불과 꽃에 덴 것들이 참 이쁘더군
땅도 하늘도 붙어사는 연못, 불을 켜지 않았는데
환하더군
바람도 몇 개씩 보이는 얼음판,
춥고 반질반질하더군
눈발은 부싯돌을 긋듯
잔불로 녹아 끔벅거리면서
불빛은 밤을 뒤집고 불의 잔등을 먹더군
비늘 달린 것에 불을 덧씌우니
꽃잉어라 부르더군
쓰라림 혹은 석유 냄새로 올려다본 거기,
和色을 바꾸는 물소리만이 울긋불긋,
아니 툭 하고 깨지더군
습(濕)과 침묵을 파서
성냥만큼 단단한 달뜸으로 상처를 뭉개더군
출처 시집 : 《나무는 나무를》 중에서
☆★☆★☆★☆★☆★☆★☆★☆★☆★☆★☆★☆★
《16》
산양의 유산
이병일
내가 잃어버린 침구는
희고 아름다운 불면증을 가진 자작나무숲인데
자정 이후 나는
저 퍼붓는 흰 빛이
텅 빈 골짜기로 흘러가는 것을 보았다
내 그림자를 쫓아와
내 짧은 목을 와락 쑤시는 검은 털의 스라소니,
첩첩하게 더운 숨을 뚝, 뚝 부러뜨린다
목이 달랑거리고,
줄줄이 내장 뜯길 때까지
나는 잠들지 못했다
이 겨울밤은 침침한 비명으로 흘러가고 있었지만
나는 흰 빛이 숲을 표백시키고
뿔의 테두리마저 녹이는 소리를 들었다
침묵하고 있는 음침한 바람 계곡이
나를 검불로 헤집었지만
나는 입술을 달싹이며
이끼 낀 밤을 위해 기도했다
흰 빛을 좋아하는 것들은 꼭 겨울밤에 죽었지만
사실 나는 흰 빛이 눈 속에 가득 차서
숲의 불면증 속으로 들어가보지 못했다
☆★☆★☆★☆★☆★☆★☆★☆★☆★☆★☆★☆★
《17》
성벽을 걷다가
이병일
나는 그것이 짐승의 털가죽인 줄 알았다
성벽 한쪽, 발라당 뒤집어져 죽은 짐승
구더기와 개미 떼와 딱정벌레 같은 것들
새까만 윤으로 번쩍거렸다
하도 심심해서
긴 막대기로 짐승을 뒤집어 밀쳐놓으려는데
붉으락푸르락 장수말벌 집이
고운 잠 깨우지 말라고 드나들었다
험한 꼴의 다른 이름은 죽음인가
무언가 안 되는 일이 많았기에
고약하게 아름다운 그것에게 돌을 던졌다
고압전류처럼 막막함도
삶이 되도록 감전시켜주니까
큰 추위에 얼어버린 너도밤나무,
오소리의 불행을 염하다가 죽었다
그래도 오후에 온 까막딱따구리는
죽음이 잘 뚫린다고 죽음을 밝힌다
하기야 제풀에 죽는 것도 있지만
독침 맞고 잘린 마디가 되살아난 것도 있다
죽은 것에서 나온 것과
산 것에서 나온 것이 걸핏하면 짝짓기를 한다
☆★☆★☆★☆★☆★☆★☆★☆★☆★☆★☆★☆★
《18》
아름다운 영혼을 위한 소나타
이병일
땅을 파야합니다 봄엔 더 죽을 것도 없으니까
씨앗을 뿌려야 하겠지요
더 이룰 것도 없는 몸이니까 땅을 밟아야 하겠지요
세상이 어떠한지 묻지 않았지요
그냥 조용히 밤의 거인이 크게 자라지 않도록
한가지 노래를 고상하게 불렀겠지만
달라질 것이 있다면
거미에게 갉아 먹혀도 새는 새 몸으로 날아온다는 것이죠
손가락으로 눌러 죽일 벌레가 많으면 마음이 울렁거리지 않죠
땅에 몸을 맡기지 않으면 봄이 온다고 믿지 않게 돼요
사랑을 위해 쇄골 숨을 크게 돌렸다지요
피를 아홉 번이나 흘렸다는 것에 기꺼워하면서
죽음 따위 두려워하지 않았죠 왜냐하면
바위 언덕에 수수 씨를 뿌리며 맨발로 땅을 밟았거든요
땅을 예쁘게 밟으면 뺨과 이마 위에서 기쁨이 솟는대요
아, 세상 모든 것과 통하는 이 아름다움, 말로 하기엔
서러울지도 그러나 흙빛으로 밤새 씻듯이 얘기하면
새와 돌은 바람무늬로 몸을 깁고 낮과 밤을 꿰어오죠
* 영화 <타인의 삶>에서
출처 : 반년간 《상상인》 (2021년 7월 통권 2호)
☆★☆★☆★☆★☆★☆★☆★☆★☆★☆★☆★☆★
《19》
아쿠아리움이 문을 닫으면
이병일
통유리 한쪽을 닦아주지 않아도 된다
노골은 모든 것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뼈인데
이제 노출되지 않으니까 부력만큼 신중하다
사육이란 말은
여전히 피라루크의 죽음과도 연루되었지만
물결의 한가운데에 있어도 발견되지 않았다
지진과 정전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잠깐 인화된 아이들의 웃음소리 같은데
베네치아에서 온 대왕문어만은
산소호흡기 없어도 꽃게 한 마리 잘 발라 먹고
껍질만 잘게 뱉어낸다
신체 포기 각서 따윈 밑바닥 생활에 있다는 듯
오늘은 번드르르한 몸빛을 위해
입사각이 없는 낮과 밤을 위해
걸핏하면 죽음 쪽으로 통째 가라앉는다
그러나 삶은 종종 잠자는 법을 잊듯
대왕문어의 중력과 부력이 극에 달하듯
척척하게 노골을 썩게 한다
문 닫힌 아쿠아리움, 달아날 것도 없다
그렇게 노출과 죽음이 꼭 필요한가!
깨달음을 깨트리듯 뉘우침을 죽여준다
* 셀비 반 펠트의 장편소설 제목에서
출처 : 월간 《현대문학》 (2026년 8월호)
☆★☆★☆★☆★☆★☆★☆★☆★☆★☆★☆★☆★
《20》
어떤 평화
이병일
오일마다 어김없이 열리는 관촌 장날
오늘도 아홉시 버스로 장에 나와
병원 들러 영양주사 한 대 맞고
소약국 들러 위장약 짓고
농협 들러 막내아들 대학 등록금 부치고
시장 들러 생태 두어 마리 사고
쇠고기 한 근 끊은 일흔 다섯 살의 아버지,
볼일 다보고 볕 좋은 정류장에 앉아
졸린 눈으로 오후 세시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기력조차 쇠잔해진 그림자가 꾸벅꾸벅 존다
☆★☆★☆★☆★☆★☆★☆★☆★☆★☆★☆★☆★
《21》
어머니의 작은 유언
이병일
얘야, 자두 꽃이 한창이구나
불면의 신경 마디마디를 지우는
꽃비들이 희미하게 반짝이는데
벼락은 깜깜함에 눈먼 것들을 잘도 찾아가는구나
얘야, 생활이 편할수록 무르팍이 불편하구나
비를 켜는 악기, 먹구렁이 울음이 보고 싶구나
먼 데 있는 산사나무 그늘이 불어나듯
내 몸이 몹시 가려워지는구나
나는 캄캄한 무르팍 펴고
앞산에 나가 취 뜯고
들깨 모종을 해야 한단다
빈속이 허하도록
데면데면 놀아야 한단다
나는 흙으로 다시 오지 않으려
종교도 없이 지냈단다
얘야, 목이 마르구나
내게 이 빠진 호미를 다오
호미 끝엔 환한 세상이 와 있단다
☆★☆★☆★☆★☆★☆★☆★☆★☆★☆★☆★☆★
《22》
옆구리의 발견
이병일
나는 옆구리가 함부로 빛나서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먼 바다가 감쪽같이 숨겨놓은 수평선과 아가미가 죽어 나뭇잎 무늬로 빛나는 물고기와 칼을 좋아해 심장의 운명을 감상하는 무사와 무딘 상처 속에서 벌레를 키우는 굴참나무는 매끈한 옆구리를 지녔다
살아간다는 것은 옆구리의 비명을 엿듣는 일
그러나 일찍이 아버지는 백열등으로 괴는 늑막염소리 듣지 못했다
갈비뼈를 자르고 한쪽 폐를 후벼 파내는 시원한 통증을 맛봐야했다
옆구리에 속하는 것들아
옆구리에 속하지 않는 것들아
나는 먼 곳의 옆구리가 비어 있어 풍요롭다고 생각한다
오늘 나는 일몰의 격포바다에서
세상의 옆구리에 박히는 붉은 심장의 박동을 세어보기 위해
하루하루 고독을 씹어 빛나는 수평선의 옆구리를 위해
해와 달의 시간이 포개어지는 저녁이 되었다
옆구리는 환하고 낯선 하나의 세계 혹은 감미로운 상처가 풍미하는 절벽이다
나는 아버지의 옆구리가 길고 낮게 흐느껴 우는 걸 들은 적이 있다 그 옆구리는 촉촉이 젖었고 그 옆구리는 새까맣게 죽었고 그 옆구리는 비명을 삼킨 흉터가 되었다
이제 나는 옆구리의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쁜 옆구리를 가진 여자와 결혼하게 되었다
☆★☆★☆★☆★☆★☆★☆★☆★☆★☆★☆★☆★
《23》
우물
이병일
현기증 이는 푸른 물결무늬들
그 기억 속에는
아무리 메워도 메워지지 않는 우물이 있네
돌무더기 둥그렇게 잘 모아 개서
층층이 쌓아올린 우물, 속에서
누가
내려가도 내려가도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
물의 신전을 세우고 있네
한생이 유창하게 탈바꿈하듯
오래 준비된 침묵은 거꾸로 빛나는 웃음이고
꿈틀대는 바보 웃음이고
그러나 그 순전한 웃음이 글썽거리네
아프도록 멀리 있는 병이 씻기는 기분이랄까
거기, 하염없이 차갑고 맑은 여자가 사네
오늘밤 나는 우물 속에 얼굴 처박고
갈증으로 일렁이는 입술을 가만히 포개어보네
그때 월궁항아 목욕물 떠가는 두레박 소리 들리네
앙다문 견고함의 물빛 처녀막 찍기는 소리 들리네
☆★☆★☆★☆★☆★☆★☆★☆★☆★☆★☆★☆★
《24》
雲林山房에서
이병일
이 연못의 단추를 풀면
봄, 붓끝으로 지운 것들이 꽃을 찢고 물을 넘어서 가려움증으로 와요
온 힘으로 까맣게 와요
찔레 가시 울타리, 봄비 소리는 찔리지 않고
날마다 미끄러지면서 소금쟁이의 잠을 깨우고 갔죠
밤이면 한층 더 아름다워지는 줄기 많은 등나무,
낮은 등나무를 건너서 오고 새는 등나무로 숨어 오고
내 눈이 자꾸자꾸 홀려가는 건 부서진 흙빛 담장인데
담장 구멍이 믿는 것은 연못 속으로 나 있는
봄의 골목이랄까,
물결 지면 보이지 않다가
물결 없으면 잘 보이는 골목에서
나는 조용히 돌을 나르고 그 구멍을 메우고 있었죠
아직도 나는 벌거벗고 지내는 마음이 모자라요
밤의 연못에서 물고기가 물 밖으로 머리를 내민 것도
모두 제 상처를 달빛에게 말리기 위한 것이죠
사방이 모두 뚫려 있는데, 봄은 꼭 뒷문으로 온다지요
연못의 단추들, 모두 풀렸을 때
나는 나를 의심하면서
모서리 없는 수면을 걷는 소금쟁이가 되었죠
연못 옆의 등나무, 두 줄기 세 줄기 붓끝 같았죠
그러니까 초록은 나의 키를 넘어서 침 자국으로 번졌죠
☆★☆★☆★☆★☆★☆★☆★☆★☆★☆★☆★☆★
《25》
의자가 의자를 바라보는 정오
이병일
뼈가 있는 말은 애써 돌아가는 강물 같고
뼈를 때리는 말은 활시위를 떠난 촉 같다
의자가 의자를 바라보는 정오
피로 닿지 않을 곳이 없다는 사백년 된 나무
죽어 제 굳어진 심장을 꺼내볼까
나무는 죽는 것 말고도
능선이 가질 수 없는 벼랑을 끌어당긴다
벼랑을 뚫고 오는 새떼
발목이 없다
어스름 낮달 같다
뒤로 밀리는 것들아
막, 꽃을 떨군 것들아
말라비틀어진 몸도
한 손에 물병 들고 섰구나
골짜기 딛고 올라간 것들아
축축한 것의 몸을 가르면
구약전서가 나올까
천국은 여전히 멀고
요한계시록보다 교독문을 더 좋아하는
나는, 예언자가 아니지만
죽은 나무에서 걸어나오는 신을 본다
신은 벌떼에서 떨어져 나온 폐허 같다
나는 복사뼈가 부러진 채로
나와 신의 바깥을 구분할 수가 없었다
부활과 구원엔 참도 거짓도 없었다
기도하며 나쁜 피가 무엇인지 생각했다
죄지으면서 죄를 씻듯이
나는 아가야, 소리와 함께 양이 되었다
그런데도 아직 아버지의 이름을 모른다
출처 : 계간 《시로 여는 세상》 (2024년 여름호)
☆★☆★☆★☆★☆★☆★☆★☆★☆★☆★☆★☆★
《26》
죽순
이병일
수상하다.
습한 바람이 부는 저 대밭의 항문
대롱이 길고 굵은 놈일수록 순을 크게 뽑아 올린다 깊숙이 박혀있던 뿌 리들이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푸른 힘을 밀어내고 있다 댓잎이 쌓여있 는 아랫도리마다 축축이 젖어 뾰죽 튀어나온 수만의 촉이 가볍게 머리 내밀고 뿌리는 스위치를 올릴 것이다.
난 어디로부터 나온 몸일까?
대나무 숲, 황소자리에서 쌍둥이자리로 넘어가는 초여름이다 땅속에서 는 어둠을 틈타 안테나를 내밀 것이다 난 초록의 빛을 품고 달빛 고운 하늘에 뛰어오를 것이다 대나무 줄기가 서로 부딪쳐 원시의 소리를 내는 아침, 날이 더워질수록 물빛 속살을 적시며 얕은 잠을 자고 있었던가 초승달이 보름달을 향해 갈수록, 난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 하늘에 닿을 때 까지 단전에 힘을 줄 것이다 대나무향이 하얗게 깔리는 밤, 튀어나온 뿌리 마디마다 젖무덤처럼 불어올라 포개져있는 껍질을 열어젖힐 때, 댓잎 에 미끄러진 햇빛이 푸른 옷을 던질 것이다 나는 마침내 문을 열었다
☆★☆★☆★☆★☆★☆★☆★☆★☆★☆★☆★☆★
《27》
징
이병일
저 검은 놋쇠달, 뒤집어서 물 받아놓으면 대야이지만
옆으로 세워 들고 녹비(鹿皮)로 때려야만 징이다
꽹과리와 장구 사이를 메우는 별거리달거리*가 이울 때
웬걸, 징소리는 원시를 구부리는 양각이다
징소리는 무속을 꺼내놓는 필연을 가지고 있다
징소리로 난장과 분탕의 세계도 곱게 모을 수 있다
징은 금 가도록 울지만 깨지지 않는 거울이다
그 징을 타면 꽃에서 해 지는 사막까지는 가까워진다
한 뼘이면,
용서와 구원이란 춤이 무녀의 몸을 벗어던진다
징의 아름다운 소리를 바깥에 가두기 위해
누가 낮인 듯 밤인 듯 볏짚을 태워, 거뭇거뭇 그슬린다
자, 이제 나는 봉인되었으니, 힘줄 켜듯 나를 쳐라
* 영남 가락. 사물놀이.
출처 : 월간 《시인동네》 (2020년 5월호)
☆★☆★☆★☆★☆★☆★☆★☆★☆★☆★☆★☆★
《28》
파밭 가에서
이병일
어쩌자고 나는
대파를 뽑아 관솔불에 굽고 있는가
흙을 움켜쥔 흰 뿌리와 함께
통째로 구워야 단맛이 짙푸르러진다
나는 눈동자 벌겋게 자지러지도록
금이 간 연기를 탐했다, 그림자가 비틀거렸다
목구멍이 마르는 병과 함께
나흘을 굶은 힘줄이 물러져 있다
대파를 한입 찢어 뜯은 어머니
흙냄새가 침을 돋워낸다고 했다
무르팍에 힘이 들어간다고 했다
밤이 오는 쪽에서
어머니는 쑥을 뜯어 이마와 손을 씻었다
꽃잠을 부르는 거라 했다
어째서 두더지는 뜸하게 땅굴을 파는가
목구멍 헐벗고 배곯았을 때엔
구운 대파 하나면 그 무엇도 견딜 수 있다
까맣게 불탔더라고 대파의 피는 달았다
희고 푸르게 달아오르는 피였다
입에 대지 않았던 것
저 보잘것없는 것이었는데
끝이 정해져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할 때
어머니와 나는 파밭 가에서
삼우에 홀린 저승사자를 쫓아냈다
관솔불로 뒤통수와 이마를
파 향기로 입술과 눈가에 묻는 냄새를 털었다
출처 : 계간 《문예바다》 (2022년 여름호)
☆★☆★☆★☆★☆★☆★☆★☆★☆★☆★☆★☆★
《29》
편경
ㅡ전쟁이 나면 편경을 가장 먼저 숨겨라*
이병일
이것은 ‘ㄱ’모양의 옥돌인데 화음이 115°로 휘어져 있으면서 강약이 교차하는 예악기(禮樂器)이기도 하다. 무슨 술 이름 같지만 이것은 황종, 대려, 태주, 협종, 고선, 중려, 유빈, 임종, 이칙, 남려, 무역, 응종, 청황종, 청대려, 청태주, 청협종이란 음계를 지녔다.
부메랑 같기도 하지만 이것은 영생을 얻고자 악기가 되었다. 돌에서 난 빛은 굼실거렸으나 음이 되지 못했고 정물이 되었다. 물고기였던 내가 옥돌에서 발견되었을 때, 웅덩이에 오래 고인 구름이 비가 되듯이 해 지는 쪽에서 온 옥돌만이 소리를 낸다. 고적감 따위는 찾을 수가 없었다.
해와 달이 훌쩍 지나가도 이것은 부식이란 말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다. 딱딱한 직립으로 공중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차고 맑은 소리로 적신다. 눈 덮인 산을 넘는 오랑캐가 쳐들어왔을 때, 나는 우물 속에서 발견되었다. 우물이 인왕산을 올려다보는 땅에서. 물빛 먹은 돌이 악기로 몸을 바꾼 건 그때부터였다.
*『大典通編』.
☆★☆★☆★☆★☆★☆★☆★☆★☆★☆★☆★☆★
《30》
포도나무 교회
이병일
포도나무에 목을 얹고 죽었다 나는,
꽃과 꽃 사이로 난 영원의 길이 없으니
새들도 지평선을 꺾어 들어오지 못했다
여긴 포도나무 속인데
베개 하나 놓으니 닫을 문이 없구나
창이 없으니 성경책 읽는 밤도 오지 않는구나
십자가는 갈라졌으나 포도나무 잎사귀는 빛을 던진다
지금 나는 그냥 구겨진 구름 달인 것이고
눈길 다한 허수아비인 것인데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세상을 보지 못해
새처럼 밝게 보지 못해
간데없이 자란 포도나무의 핏줄과 어둠에 엉겨 붙었다
내 몸에도 넝쿨 치며 춤추는 포도나무
피 흘려야 사는 교회였기에
나는 혼자 피 흘리고
피 흘려서 무릎도 젖고 발도 젖어
더 이상 젖을 것이라곤 죄밖에 없었는데
대체 나는 어떤 죄를 지었단 말인가
왜 죄는 피로도 씻지 못하는가
땅에 없는 것들이
포도나무 가지 끝의 창이 될 때
나는 비어서 반짝이는 창의 벽화였다
나는 금가거나 깨진 것의 춤이기도 했다
출처 : 월간 《현대문학》 (2020년 3월호)
☆★☆★☆★☆★☆★☆★☆★☆★☆★☆★☆★☆★
《31》
풀과 생각
이병일
풀은 생각 없이 푸르고 생각 없이 자란다
생각도 아무 때나 자라고 아무 때나 푸르다
그 둘이 고요히 고요히 소슬함에 흔들릴 때
오늘은 웬일인지
소와 말도 생각 없는 풀을 먹고
생각 없이 잘 자란다고
고개를 높이 쳐들고 조용히 부르짖었다
☆★☆★☆★☆★☆★☆★☆★☆★☆★☆★☆★☆★
《32》
핑고 복사뼈의 여름
이병일
나는 복사뼈의 여름을 알지 못한다
뼈가 만져지지 않는 대신 핑고* 하나 솟았다
검수(劍樹)의 잎과 가지와 꽃이 칼인데
복사뼈는 둥그니까
그걸 쉽게 숨길 수 있다
물주머니 커진 복사뼈
가만 눌러보면 매끄럽지 않은 고독이 만져진다
거기 자주범의귀와 황새풀이 등 돌리고 자란다
고통은 푸르고 통증은 창백한데,
그렇담,
이 괴로움은 무채색인가
꿋꿋한 것은
나무와 길과 돌멩이인데
나는 그것들과 잘 헤어지고 돌아왔는데
핑고를 잘 알지 못하였으니
줄곧 그 죄는 작은 두통을 주었다
복사뼈와의 불화, 더 고부라진다
그렇다고 걷는 것은 포기할 수 없다
*북극 지방의 화산 모양의 얼음언덕
☆★☆★☆★☆★☆★☆★☆★☆★☆★☆★☆★☆★
《33》
허물 가진 것이 나는 좋다
이병일
우리는 허물 가진 것들을 보면
참, 독해
끔찍해
무서워
사막에 그슬린 돌덩이 같은 말을 한다
나는 허물 가진 것이 좋다
허물을 먹지 않고 사는 목숨은 없다
가재, 뱀, 누에, 매미
벗는 몸을 갖기 위해
끈끈한 허물을 가진다
숨을 갖기 위해
벗는다
몸이 출렁거리지 않도록
정말이지, 절망도 가둘 몸집을 가졌구나
허물 벗는데
여생을 모두 썼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러나 벗어도 벗겨내도 벗지 못한 허물이 있듯
히말라야 어느 고승은 정신이 허물이라고 했다
아하, 그렇다면 죽음도 허물이다
반 고흐, 칭기즈칸, 도스토예프스키
비석 뒤의 이야기로 반짝인다
한낱 이야기 앞에서
내가 공하게 믿어온 것들이 깨진다
다음이라는 것이 없는 몸들, 허물만 믿는다
☆★☆★☆★☆★☆★☆★☆★☆★☆★☆★☆★☆★
《34》
호두나무를 찾아서
이병일
죽기 직전까지 호두나무를 찾아나섰다
그 사람,
죽을 욕심이 먼저 죽으면
꼭, 호두나무 밑에 묻어달라고 했다?
죽음 속으로 들어가면
죄와 벌은 뜯기는 걸까, 굴러가는 걸까
호두나무 뿌리는 어긋나 있는데
마땅히 호두나무는 서쪽 땅끝에 있지 않고
벌판 한가운데
언덕이 언덕을 기어오르는 한가운데
언짢은 일도 없이 서있다?
호두나무엔 고여있는 빛보다
가지 끝에 매달린 하늘이 더 많았다
날개 끝에 붙어있던 구름무늬 빼곡했다?
나무와 돌과 바람과 도마뱀이
죽음을 모아 같은 종임을 상기시키듯
그렇게 욕심이 많고
헐거운 것보다 숭고한 것이 많은
그 사람, 결국?
잎사귀에 얼비치는 물병자리
한눈파는 사이
죽지 못했다
급기야 호두알 깨 먹으면서
무심코 번쩍,
한쪽 얼굴이 타들어가듯이
그의 기쁨은
나쁜 것 갖다 붙인 호두나무였다
눈 비벼 새까매진 쥐똥이었다
출처 : 계간 《미네르바》 (2024년 겨울호)
☆★☆★☆★☆★☆★☆★☆★☆★☆★☆★☆★☆★
《35》
희다
이병일
한겨울보다 한여름에 죽는 것이 더 많다
훌러덩, 발라당 숨 까진 것만 죽는다
섭씨 42°C
팔공산의 사과나무를
강원도 홍천에 옮겨 심은 사람도 있다
기후 재앙을 피해
사과 하나만 믿고 높은 곳만 생각한다
고산지대가 좋다는 것은 짐승이든 사람이든
물러지는 일이 없다는 거
우박처럼 조악한 것도 없으니
뭐가 됐든 반반하게 얼굴 내밀고 있다
그런데 전기톱을 가지고 온 벌목꾼들이
소나무 참나무 잣나무들을 벤다
이대로 죽을 줄 알았던 참나무가
기어이 벌목꾼을 깔아뭉겠다
굴삭기로 들어올리는 죽음 앞에서
물고 할퀴고 뜯긴 것은 지구밖에 없다
저기 저 벼락에 타서 죽은 산벚나무도
제 발등에 핀 꽃잎 줄기 하나로
깨지지 않은 죽음을 붙잡아 둔다
마치 발레리나의 발끝에서 피가 번지듯
언제나 불행 안쪽은 꽤 희다
☆★☆★☆★☆★☆★☆★☆★☆★☆★☆★☆★☆★
첫댓글 좋은글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