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8월 19일(월)
* 시작 기도
주님...
오늘은 열왕기서 묵상을 마무리 하는 날입니다.
유다가 하나님의 말씀에 쉐마하지 않고 불순종하여 결국 바벨론에 멸망당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요 하나님의 새로운 계획이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하지만 유다의 입장에서는 그 하나님의 계획을 안다 한들 믿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의 뜻인 영생을 현재로 알고 누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여전히 연약하여 넘어지고 자빠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의가 아니라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시는 아버지의 그 은혜 아래 거하는 자 되게 하옵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창세전 언약에 근거하여 오늘도 주님을 앙망하며 바라봅니다.
조그만 나의 의라도 제하여 주시고 오직 주의 은혜만을 바라게 하소서.
십자가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우소서.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사오니 나는 죽고 예수로 부요한 자 되기 원합니다.
주의 영으로 나를 장악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왕하 25:18-30
제목 :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놓아 그 머리를 들게 하고
18 시위대장이 대제사장 스라야와 부제사장 스바냐와 성전 문지기 세 사람을 사로잡고
19 또 성 중에서 사람을 사로잡았으니 곧 군사를 거느린 내시 한 사람과 또 성 중에서 만난 바 왕의 시종 다섯 사람과 백성을 징집하는 장관의 서기관 한 사람과 성 중에서 만난 바 백성 60명이라.
20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그들을 사로잡아 가지고 립나 바벨론 왕에게 나아가매
21 바벨론 왕이 하맛 땅 립나에서 다 쳐죽였더라. 이와 같이 유다가 사로잡혀 본토에서 떠났더라.
22 유다 땅에 머물러 있는 백성은 곧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남긴 자라. 왕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달리야가 관할하게 하였더라.
23 모든 군대 지휘관과 그를 따르는 자가 바벨론 왕이 그달리야를 지도자로 삼았다 함을 듣고 이에 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과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느도바 사람 단후멜의 아들 스라야와 마아가 사람의 아들 야아사니야와 그를 따르는 사람이 모두 미스바로 가서 그달리야에게 나아가매
24 그달리야가 그들과 그를 따르는 군사들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너희는 갈대아 인을 섬기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이 땅에 살며 바벨론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가 평안하리라 하니라.
25 7월에 왕족 엘리사마의 손자 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이 부하 열 명을 거느리고 와서 그달리야를 쳐서 죽이고 또 그와 함께 미스바에 있는 유다 사람과 갈대아 사람을 죽인지라.
26 노소를 막론하고 백성과 군대 장관들이 다 일어나서 애굽으로 갔으니 이는 갈대아 사람을 두려워함이었더라.
27 유다의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 지 37년 곧 바벨론의 왕 에윌므로닥이 즉위한 원년 12월 그 달 27일에 유다의 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놓아 그 머리를 들게 하고
28 그에게 좋게 말하고 그의 지위를 바벨론에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왕의 지위보다 높이고
29 그 죄수의 의복을 벗게 하고 그의 일평생에 항상 왕의 앞에서 양식을 먹게 하였고
30 그가 쓸 것은 날마다 왕에게서 받는 양이 있어서 종신토록 끊이지 아니하였더라.
* 나의 묵상
사반의 손자요 아히감의 아들인 그달랴는 느부갓네살에 의해 유다에 남아 있는 백성들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총독으로 세움 받았다.
그달랴가 총독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유다의 군대 지휘관, 군사들이 이스마엘과 요하난과 스라야 그리고 야아사니야와 함께 미스바에 있는 그달랴에게로 갔다.
그달랴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바벨론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또 바벨론 왕을 잘 섬기면 여러분이 평안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7월에 이스마엘이 그의 부하 10명을 데리고 와서 그달랴를 죽이고 또 유다 사람과 바벨론 사람을 죽였다.
그런 다음 노소를 막론하고 백성과 장교들이 모두 애굽으로 도망갔다.
그 이유는 바벨론 사람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사는 이들은 이 땅에서 현세적인 상식과 가치관에 의해 살아가는 사람들에 비하면 고난이 훨씬 크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은 세상의 상식과 가치관을 거부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사람이 상식적으로 사는 것만 해도 참 잘 산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세상의 일반적 가치척도에 준해서 산다고 하면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으며 살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이러한 세상의 상식과 가치를 벗어나라고 말씀한다.
본문의 당시 상황은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형국이다.
이런 상황에서 포로가 된 수많은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왜냐하면 이것이 상식이고 또한 일반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레미야와 그달랴는 이런 상식과 가치관을 뒤엎는 말과 행동을 한다.
예레미야는 유다 사람들을 향하여 바벨론에 항복하고 그들을 섬기며 그곳 바벨론에 가서 집을 짓고 밭을 갈며 결혼도 하고 자식에 자식을 낳고 대를 이어서 살라고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평안하게 인도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렘 29:4-7)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바벨론에 넘겨주지 않을 것이며, 설령 넘겨주실지라도 2년 만에 다시 돌아오게 하실 거라고 말한다.
(렘 28:10-11) 선지자 하나냐(거짓 선지자)가 선지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빼앗아 꺾고 모든 백성 앞에서 하나냐가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2년 안에 모든 민족의 목에서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이와 같이 꺾어 버리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선지자 예레미야가 자기의 길을 가니라.
하나님은 유다의 범죄로 인하여 그들을 심판하셨다.
그리고 이런 징계를 통하여 그들을 바로 세우시기를 원하셨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은 그런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무조건 우리를 이 상황에서 지켜주실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언약 백성을 복종과 사랑의 존재로 지으셨다.
즉 언약 안에서 서로 사랑의 교제를 할 수 있는 ‘언약적 교제의 존재’로 말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이 언약을 유지할 수 있는 계명을 주셨는데, 그 계명이 바로 ‘조건의 규정’이다.
조건의 규정인 계명을 지킬 때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다 내어주시며, 언약은 유지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광야 40년간, 사사시대 400년간, 왕정시대 400여 년간 계명을 지키지 않아서 언약이 깨지고 말았다.
그들은 조건의 규정을 무조건의 규정으로 변개시키고 만 것이다.
더 이상 참으실 수 없으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심판을 통하여 징계하기로 정하셨고 그 심판의 도구로 바벨론을 사용하셨다.
따라서 바벨론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민족적 수치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순종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뜻을 알고 선포하는 예레미야에게 백성들은 매국노 취급을 하며 엄청난 고통을 가하였다.
그가 당한 모진 고통을 예레미야는 이렇게 표현한다.
(렘 20:7-9)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그래서 다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씀을 선포하면 백성들의 조롱과 공격이 얼마나 심한지 예레미야는 욥과 같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기까지 하였다.
(렘 20:14-18)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부끄러움으로 보내는고 하니라.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그달랴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유다에 남은 사람들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총독으로 임명된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백성들에게 바벨론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왕을 섬기라고 한다.
그러면 너희가 평안할 것이라고 말이다.
이런 말을 듣는 유다 백성들은 세상적 상식과 가치관으로 볼 때 분명 심정이 뒤틀렸을 것이다.
그래서 이스마엘을 비롯한 몇몇 유대 사람들이 미스바에 있는 그달랴를 죽이고 또한 그달랴의 말에 동조하는 유다 사람들과 바벨론 사람들을 죽이고 애굽으로 도망한 것이다.
성경은 애굽을 세상이라고 말씀한다.
일반 상식과 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세상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문제는 이런 세상이 주는 위로와 평안은 모래성이나 물거품과 같다는 것이다.
이 땅 곧 만물 안에서는 어느 정도 위로와 안식을 줄 수 있을지 모르나 결국 그것들은 거짓 위로요 포장된 안식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들 뒤로 여전히 두려움과 불안이 그들을 지배한다.
문제는 그달랴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다가 죽음에까지 이르렀다.
그의 생이 끝난 것이다.
인간적으로 보면 비참해 보이고 끔찍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이 삶이 가장 복된 삶이요 행복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목숨이 끊어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의 삶은 현실적으로 고통을 당하지만 그 고통 속에서도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영생을 누리게 된다.
거기로부터 오는 기쁨은 세상이 주는 고통을 넉넉히 삼키는 기쁨이다.
이것이 바로 영생의 기쁨이다.
그 기쁨이 있는 자리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한다.
스데반 집사는 유대인들의 돌에 맞아 죽었다.
그의 죽음은 비참하고 끔찍하다.
그러나 그의 죽음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임했으며 부활의 주님은 하나님 우편에서 벌떡 일어나셨다.
(행 7:55)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스데반이 당한 상황은 고통스러우나 그 안에서 누리는 하늘의 기쁨은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 안에서만 나올 수 있다.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이란,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신 그 사랑을 말한다.
그 사랑 안에서만 이 땅의 고통과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
(롬 8:35-39)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나는 주님을 믿는 자로써 이 세상에서 고통당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던 자였다.
예수 믿으면 이 땅에서 무엇을 하든 잘 되고, 그것을 통하여 불신자들에게 보란 듯이 예수님을 증거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던 자였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서 시험에 떨어지고, 직장 일이 잘 안 되고, 사업에 실패하고, 건강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으면 견디지 못했다.
그러한 나는, 내가 이렇게 하나님 일에 열심인데 왜 나를 지켜주지 않느냐고 하면서 하나님께 대들기도 하고, 원망하기도 하였다.
나의 신앙은 철저히 보상신앙이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하나님은 나를 책임져 주실 거라는 보상신앙 말이다.
그 믿음 안에는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는 영생이 아니라 영생은 죽어서 가는 것이고, 나를 책임져 주실 거라는 믿음은 철저히 현세적인 것이었다.
나의 건강을, 나의 직장과 사업을, 나의 자녀들을, 나의 가정을 지켜주실 거라는 믿음 말이다.
이런 것들은 다 존재물로서 쇠락의 법칙에 의해 소멸되고 사라질 것들인데도 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온전한 복으로 오해하였던 것이다.
평신도 때는 이런 설교를 좋아하였고, 이런 보상신앙을 설교하시는 분들의 설교를 잘 하는 설교라고 응원했으며, 나 또한 거기에 녹아 들어갔다.
내가 목사가 되고 난 뒤에도 그런 신앙을 벗어나지 못했고, 나의 설교를 통하여 성도들에게 보상신앙을 넣어주었다.
이런 설교를 듣는 성도들은 위로를 받았고, 무언가 모를 힘이 솟아나기도 하였다.
“그래 열심히 섬기면 나도 복을 받겠구나.”
이런 설교가 주는 달콤함에 그들은 빠져 헌금을 하기 시작했고, 교회를 유지하는데 부족하지 않도록 넉넉히 들어왔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도 모르고 목회를 하던 나에게 복음이 찾아 왔다.
복음을 통해서 생명을 얻은 나는 이전에 설교하던 현세적이고 일반적 상식을 던져버리고, 하늘의 기쁨을 전하는 참된 생명을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하늘의 언어를 말하기 때문에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듣기가 어렵다.
잘 들리지도 않는다.
여기저기서 어렵다고들 하면서 아우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포기할 수 없다.
번영신학과 보상신앙으로 점철되어 그것을 복이라고 선포했던 이전의 목회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면서 이전에 당하지 않던 고통과 고난이 찾아오지만 넉넉히 그것을 수용한다.
그것은 주님의 뜻대로 순종함으로 당하는 고난이기에 이 또한 감사하다.
복음과 생명을 전하면서부터 교회에 변한 것이 있다.
성도들이 아멘 소리가 확연히 줄었다.
왜냐하면 나 스스로가 막연히 축복하는 의미의 ‘축원합니다’라는 말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저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아멘’을 외칠 기회가 별로 없다.
또한 헌금이 줄었다.
그래서 교회 재정이 많이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매달 교역자들 사례 주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였다.
하지만 옛 사람으로 행하던 것들과 타협은 불가하였다.
아니 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할 수도 없다.
나는 이미 아들의 생명을 가진 자로, 영생을 맛보며 살기 때문이다.
나의 삶은 세상적으로는 무미건조하다.
그러나 영은 늘 기쁘고 충만하다.
한국에서의 삶의 연장선에 있는 지금 이곳 베트남에서의 목회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내가 하는 일의 대부분은 말씀묵상과 기도 외에 달리 말할 것이 없다.
하지만 나는 이런 무미건조한 삶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나에게 주신 천국이기 때문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번영신학과 보상신앙에 사로잡혀 끌려가던 자가 여기 있나이다.
그런 나에게 복음과 생명을 알게 하시고 또한 그 생명을 나에게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이제는 어떤 고난이 올지라도 그 고난은 아버지의 뜻을 이룸으로 당하는 고난이기에 감사함으로 받습니다.
사방에서 욱여쌈을 당할지라도 내가 싸이지 않는 것은 주님의 온전한 사랑이 나를 두르고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성을 포위하고 있는 아람 군대를 보고 게하시는 벌벌 떨었지만, 그의 영안이 열려 아람 군대를 두르고 있는 하나님의 군대를 보고서는 진짜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던 것처럼, 오늘 나에게 닥치는 고난이 두렵지 않은 이유는 나를 사랑하시는 이의 팔이 나를 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행하며 순종하는 자는 이 땅에서 마땅히 고난을 겪습니다.
그달랴와 같이, 스데반과 같이 죽음에까지도 이를 수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두렵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서 영원에 잇대어 날마다 영생을 맛보기에 온전한 영생의 나라를 지금도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생명되신 주님을 사랑하고 찬양합니다.
나의 세포 하나하나가 다 일어나 감각적으로 전율을 느낍니다.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속으로 흐르는 눈물을 주께 올려 드리나이다.
주여, 받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