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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성시대* 차분한 20대들의 알흠다운 공간 원문보기 글쓴이: 불가촉
2011.6.20이후 적용 자세한사항은 공지확인하시라예
출처: 여성시대 불가촉
더딘 사랑 / 이정록
돌부처는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모래무덤이 된다
눈 깜짝할 사이도 없다
그대여
모든 게 순간이었다고 말하지 마라
달은 윙크 한 번 하는 데 한 달이나 걸린다
목숨의 노래 / 문정희
너 처음 만났을 때
사랑한다
이 말은 너무 작았다
같이살자
이 말은 너무 흔했다
그래서 너를 두곤
목숨을 내걸었다
목숨의 처음과 끝
천국에서 지옥까지 가고 싶었다
맨발로 너와 함께 타오르고 싶었다
죽고싶었다
헛된바람 / 구영주
어느
이름 모를 거리에서
예고 없이
그대와
마주치고 싶다
그대가
처음
내안으로 들어왔을 때의
그 예고 없음 처럼
몽혼 / 이옥봉
요사이 안부를 묻노니 어떠하시나요?
달 비친 사창에 저의 한이 많습니다.
꿈 속의 넋에게 자취를 남기게 한다면
문 앞의 돌길이 반쯤은 모래가 되었을 걸.
그날 / 이성복
그 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 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 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 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 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치는 노인과 변통(便桶)의
다정함을 그 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 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 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천장호에서 / 나희덕
얼어붙은 호수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
불빛도 산 그림자도 잃어버렸다.
제 단단함의 서슬만이 빛나고 있을 뿐
아무것도 아무것도 품지 않는다
헛되이 던진 돌맹이들,
새떼 대신 메아리만 쩡쩡 날아오른다.
네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
반성99 / 김영승
집을 나서는 데 옆집 새댁이 또 층계를 쓸고 있다.
다음엔 꼭 제가 한 번 쓸겠읍니다.
괜찮아요, 집에 있는 사람이 쓸어야지요.
그럼 난 집에 없는 사람인가?
나는 늘 집에만 쳐박혀 있는 실업잔데
나는 문득 집에조차 없는 사람 같다.
나는 없어져 버렸다.
주소가 없다 / 유안진
주어에도 있지 않고
목적어에도 없다
행간에 떨어진 이삭같은 낟알 같은, 떨군 채 흘린 줄도 모르는,
알면서도 주워담고 싶지 않은, 그런 홀대를 누리는 자유로움으로,
어떤 틀에도 어떤 어휘에도 담기지 못하고,
어떤 문맥 어떤 꾸러미에도 꿰어지지 않는,
무존재로 존재하며
시간 안에 갇혀서도
시간밖을 꿈꾸느라
바람이 현주소다. 허공이 본적이다.
반성 16 / 김영승
술에 취하여
나는 수첩에다가 뭐라고 써 놓았다.
술이 깨니까
나는 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세 병쯤 소주를 마시니까
다시는 술마시지 말자
고 써 있는 그 글씨가 보였다
어느 날의 커피 /
어느 날 혼자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허무해지고 아무 말도 할 수없고
가슴이 터질 것만 같고 눈물이 쏟아지는데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데 만날 사람이 없다.
주위엔 항상 친구들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날 이런 마음을 들어줄 사람을 생각하니
수첩에 적힌 이름과 전화번호를 읽어 내려가 보아도
모두가 아니었다.
혼자 바람맞고 사는 세상.
거리를 걷다 가슴을 삭히고 마시는 뜨거운 한 잔의 커피.
아, 삶이란 때론 이렇게 외롭구나.
사랑 / 이산하
망치가 못을 친다.
못도 똑같은 힘으로
망치를 친다.
나는
벽을 치며 통곡한다.
꿈 / 황인숙
가끔 네 꿈을 꾼다.
전에는 꿈이라도 꿈인줄 모르겠더니
이제는 너를보면
아, 꿈이로구나. 알아챈다
희망 / 황인숙
어제가 좋았다
오늘도 어제가 좋았다
어제가 좋았다, 매일
내일도 어제가 좋을 것이다.
방금 젊지 않은 이에게 / 황인숙
너는 종종 네 청년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나는 알지
네가 켜켜이 응축된 시간이라는 것을
네 초상들이 꽉꽉 터지도록
단단히 쟁여져 있는 존재라는 것을
지나온 풍경들을 터지도록
단단히 쟁여 지니고 날아다니는 바람이
너라는 것을
그때 너는 청년의 몸매를 갖고 있었다
희고 곧고 깨끗한
아, 청량한 너의 청년!
그 모습은 내 동공 안쪽
뇌리에 각인돼 있고
내 아직 붉은 심장에
부조돼 있다.
미안하다 /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미완성 교향곡 / 김행숙
소풍 가서 보여줄게
그냥 건들거려도 좋아
네가 좋아
상쾌하지
미친 듯이 창문들이 열려있는 건물이야
계단이 공중에서 끊어지지
건물이 웃지
네가 좋아
포르르 새똥이 자주 떨어지지
자주 남자애들이 싸우러 오지
불을 피운 자국이 있지
2층이 없지
자의식이 없지
홀에 우리는 보자기를 깔고
음식냄새를 풍길 거야
소풍 가서 보여줄게
건물이 웃었어
뒷문으로 나가볼래?
나랑 함께 없어져볼래?
음악처럼
풀꽃 / 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아픈 집 / 김재진
집이 아프다.
바깥에서 바라보는
불 켜진 집이
농아처럼 고요하다.
누가 내 삶의 시동
꺼놓고 즐기는가.
바퀴 자욱 선명한
꽃잎들이 아프다.
이쯤에서 그만
지나갔으면 좋을 삶
누가
느린 속도로 내 인생
검열하고 있다.
켜놓고 나왔는지
혼자서 돌아가는
비디오 속에서 누가
내 상처
느린 그림으로 재생하고 있다.
다시
눈뜨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잠드는 시간이 기쁜
사람들 있다.
너 누구니? / 홍영철
가슴속을 누가 쓸쓸하게 걸어가고 있다.
창문 밖 거리엔 산성의 비가 내리고
비에 젖은 바람이 어디론가 불어가고 있다.
형광등 불빛은 하얗게
하얗게 너무 창백하게 저 혼자 빛나고
오늘도 우리는 오늘만큼 낡아버렸구나.
가슴속을 누가 자꾸 걸어가고 있다.
보이지 않을 듯 보이지 않을 듯 보이며 소리없이.
가슴속 벌판을 또는
멀리 뻗은 길을
쓸쓸하게
하염없이
걸어가는
너 누구니?
너 누구니?
누구니, 너?
우리 뭐니?
뭐니, 우리?
도대체.
나는 빛을 피해 걸어간다 / 허연
그대는 오지 않았네. 삐뚤어진 세계관을 나누어 가질 그대는 오지 않았네.
나는 빛을 피해서 한없이 걸어가네.
나는 들끓고 있었다.
모두 다 내주고 어느 것도 새것이 아닌 눈동자만 남은 너를 기다렸다.
밤이 되면서 퍼붓는 어둠 속에 너는 늘 구원처럼 다가왔다.
철시를 서두르는 상점들을 지나 나는 불빛을 피해 걸어간다.
행여 내 불행의 냄새가 붉은 입술의 너를 무너지게 했는지.
무덤에도 오지 않을 거라고, 보도블록 위에 토악질을 해대던 너를 잊을 수는 있는 것인지.
나는 쉬지 않고 빛을 피해 걸어간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당신들이 저놈의 담벼락에다 대고 울다 갔는지.
이 도시에서 나와 더불어 일자리와 자취방을 바꾸어가며 이웃해 사는 당신들은 왜 그렇게 다들 엉망인지.
가면 마지막인지. 왜 아무도 사는 걸 가르쳐주지 않는지.
나는 또 빛을 피해 걸어간다.
농담 / 이문재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널 만나고부터 / 이생진
어두운 길을 등불 없이도 갈 것 같다
걸어서도 바다를 건널 것 같다
날개 없이도 하늘을 날 것 같다.
널 만나고 부터는
가지고 싶던 것 다 가진 것 같다.
★
나는 보고싶다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하는 건 더더욱.
하지만 보고싶다는 말을 대체할 수 있는 말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이 보고싶을때면 어김없이 '보고싶어요' 라고 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고싶다는 말을 할때면, 정말 가슴 싸하게 보고 싶을 때이다.
그럴때 상대방 마저 '나두 보고싶어.'라고 해버린다면 감당 할 수가 없다.
보고싶다는 말은 볼 수가 없으니 보고싶다는 말인데
내가 이렇게 먹먹하도록 보고싶어하는데 너 역시 그렇다고 한다.
이렇게 니가 너무도 보고싶은데 볼수가 없으니
싸하도록 니가 보고싶었던 나는, 너의 보고싶다는 말 한마디면
니가 죽도록 보고싶어진다.
나는 한때 나 자신에 대한 지독한 보호본능에 시달렸다.
사랑을 할 땐 더더욱이 그랬다.
사랑을 하면서도 나 자신이 빠져나갈 틈을
여지없이 만들었던 것이다.
가령, 죽도록 사랑한다거나, 영원히 사랑한다거나,
미치도록 그립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내게 사랑은 쉽게 변질되는 방부제를 넣지 않은 빵과같고,
계절처럼 반드시 퇴색하며,
늙은 노인의 하루처럼 지루했다.
책임질 수 없는 말은 하지 말자.
내가 한 말에 대한 책임 때문에 올가미를 쓸 수도 있다.
가볍게 하자, 가볍게.
보고는 싶지 라고 말하고,
지금은 사랑해라고 말하고, 변할 수도 있다고
끊임없이 상대와 내게 주입 시키자.
그래서 헤어질 땐 울고불고 말고 깔끔하게, 안녕.
나는 그게 옳은 줄 알았다.
그것이 상처받지 않고 상처주지 않는 일이라고 진정 믿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드는 생각.
너, 그리 살아 정말 행복하느냐?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죽도록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만큼만 사랑했고,
영원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당장 끝이 났다.
내가 미치도록 그리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미치게 보고싶어 하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사랑은 내가 먼저 다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버리지 않으면 채워지지 않는 물잔과 같았다.
내가 아는 한 여자,
그 여잔 매번 사랑 할 때마다 목숨을 걸었다.
처음엔 자신의 시간을 온통 그에게 내어주고,
그 다음엔 웃음을 미래를 몸을 정신을 주었다.
나는 무모하다 생각했다.
그녀가 그렇게 모든 걸 내어주고 어찌 버틸까,
염려스러웠다.
그런데, 그렇게 저를 다 주고도 그녀는 쓰러지지 않고,
오늘도 해맑게 웃으며 연애를 한다.
나보다 충만하게.
그리고 내게 하는 말,
나를 버리니, 그가 오더라.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사랑을 얻었는데,
나는 나를 지키느라 나이만 먹었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 유죄다.
자신에게 사랑받을 대상 하나를 유기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속죄하는 기분으로 이번 겨울도 난 감옥같은 방에 갇혀,
반성문 같은 글이나 쓰련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中 / 노희경
건물은 높아졌지만 인격은 더 작아졌다.
고속도로는 넓어졌지만 시야는 더 좁아졌다.
소비는 많아졌지만 더 가난해지고
더 많은 물건을 사지만 기쁨은 줄어들었다.
집은 커졌지만 가족은 더 적어졌다.
더 편리해졌지만 시간은 더 없다.
학력은 높아졌지만 상식은 부족하고
지식은 많아졌지만 판단력은 모자라다.
전문가들은 늘어났지만 문제는 더 많아졌고
약은 많아졌지만 건강은 더 나빠졌다.
너무 분별없이 소비하고
너무 적게 웃고
너무 빨리 운전하고
너무 성급히 화를 낸다.
너무 많이 마시고 너무 많이 피우며
너무 늦게까지 깨어있고 너무 지쳐서 일어나며
너무 적게 책을 읽고, 텔레비전은 너무 많이 본다.
그리고 너무 드물게 기도한다.
가진 것은 몇 배가 되었지만 가치는 더 줄어들었다.
말은 너무 많이 하고
사랑은 적게하며
거짓말은 너무 자주 한다.
생활비를 버는 법은 배웠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는 잊어버렸고
인생을 사는 시간은 늘어났지만
시간 속에 삶의 의미를 넣는 법은 상실했다.
달에 갔다 왔지만
길을 건너가 이웃을 만나기는 더 힘들어졌다.
외계를 정복했는지 모르지만 우리 안의 세계는 잃어버렸다.
공기 정화기는 갖고 있지만 영혼은 더 오염되었고
원자는 쪼갤 수 있지만 편견을 부수지는 못한다.
자유는 더 늘었지만 열정은 더 줄어들었다.
키는 커졌지만 인품은 왜소해지고
이익은 더 많이 추구하지만 관계는 더 나빠졌다.
세계 평화를 더 많이 얘기하지만 전쟁은 더 많아지고
여가시간은 늘어났어도 마음의 평화는 줄어들었다.
더 빨라진 고속 철도
더 편리한 일회용 기저귀
더 많은 광고 전단
그리고 더 줄어든 양심
쾌락을 느끼게 하는 더 많은 약들
그리고 더 느끼기 어려워진 행복
우리 시대의 역설 / 제프 딕슨
나는 겨울에 서 있는 편이 더 익숙하다.
네가 봄의 편에 서 있는 것이 더 어울리듯이.
아무리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걸어가는 두 사람이 있다고 해도,
들여다보면 봄과 겨울이라는 사랑의 계절로 나뉜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온기를 주는 쪽과 온기를 받는 쪽의 구별을 말하는 것이다.
겨울 속에 사는 사람은 늘 상대의 차가운 손에 익숙해 있다.
타인을 대하는 듯 무심한 말투, 상대에게 집중하지 않고 잡지를 뒤적이는 산만함,
한발 늦게 보내는 문자 메시지의 답, 일방적으로 잡는 다음 약속.
그렇게 한없이 섭섭해 하다가도,
상대 쪽에서 한 번씩 견딜 수 없다는 듯 도톰하게 열정이 오른 입술로 키스를 걸어오거나,
자상한 눈길로 만져주면 바로 감격한다.
반대로 봄에 사는 사람은 온기로 가득한 상대의 따뜻한 손에 익숙해져 있다.
기념일을 챙기는 쪽도, 눈길을 먼저 맞추는 쪽도 상대이기 때문이다.
시계를 보는 쪽도, 전화하는 쪽도 물론 상대다.
봄에 사는 사람이 시계를 볼 때도 있지만, 이유는 다르다.
겨울에 사는 사람은 상대가 몇 분이나 늦게 오나 보는 것이지만,
봄에 사는 사람은 다음 약속까지 상대에게 할애된 시간이 몇 분이나 남았나 재는 식이다.
그러다 어느 날 그 역할이 한 번이라도 역전되면
섭섭함을 견디지 못하고 사랑이 식었다고 재단한다.
싹둑. 사랑하는 마음이 자투리로 잘려나간다.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겨울에 사는 사람은 가슴에 굵은 글씨로 상처를 쓴다.
기다리지 않겠다. 원하지 않겠다. 그리워하지 않겠다.
마음을 꾹꾹 눌러 밟으며, 겨울의 한기에서 벗어나려고 뒷걸음친다.
하지만 쾅, 아무리 세게 마음을 닫아도 봄이 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스르르 문이 열리고,
제아무리 차갑게 얼었던 마음도 결국 봄에게로 흐르게 된다는 것을 안다.
겨울 끝에는 항상 봄이 오듯이.
내 끝에는 항상 네가 있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는다 中 / 조진국
사람들은
자기가 상대방에게 싫증이 났기 때문에,
혹은 자기 의지로,
또 혹은 상대방의 의지로 헤어졌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계절이 바뀌듯,
만남의 시기가 끝나는 것이다.
그저 그뿐이다.
하드 보일드 하드 럭 中 / 요시모토 바나나
내가 조숙한 척하면
사람들은 나를 조숙하다고 수군댔다.
내가 게으름뱅이인 척하면
사람들은 나를 게으름뱅이라고 수군댔다.
내가 소설을 못 쓰는 척하면
사람들은 나를 글 못 쓴다고 수군댔다.
내가 거짓말쟁이인 척하면
사람들은 나를 거짓말쟁이라고 수군댔다.
내가 부자인 척하면
사람들은 나를 부자라고 수군댔다.
내가 냉담한 척하면 사람들은 나를 냉담한 녀석이라고 수군댔다.
하지만 내가 정말
괴로워 나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냈을 때,
사람들은 나를 괴로운 척한다고 수군댔다.
자꾸만, 빗나간다.
사양 中 / 디자이 오사무
인간은 자신을 인간으로 알아주는 상대 앞에서만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그런 상대가 없는 곳에서는
자신마저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따라서 그런 상대와의 만남만이 진정한 만남이라는 것을,
외로운 것은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만남이 없어서라는 것을,
만남이 없는 모든 장소가 곧 사막이라는 것을,
사막은 도시에도 있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어린 왕자>를 썼습니다.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中 / 김용규
나는 그들 곁에 서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누나로 하여 연출되는 이 멜로 드라마의 한 토막 감격 속에서 나 또한 멋진 대사 한 구절을 껴 넣고 싶었기 때문이다.
-겨울이 간다. 누나야, 네가 이긴 겨울이 가고 있구나. -
겨울의 출구 中 / 전상국
"네가 가장 먼저 나무를 고르게 해주마."
나는 아빠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슬리퍼 사이로 발가락들이 비집고 나와 있었다.
그도 칙칙한 뿌리를 가진 늙은 나무였던 것이다. 아빠 나무였다. 그러나 내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나무였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中
그렇게 특별하다 믿었던 자신이 평범은 커녕 아예 무능력하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고,
쳐다보는것 만으로도 설레이던 이성으로부터 지루함을 느끼는 순간이 있고,
분신인듯 잘 맞던 친구로부터 정이 뚝 떨어지는 순간이 있고,
소름 돋던 노래가 지겨워지는 순간이 있고,
자기가 사랑하는 모든것이 그저 짝사랑에 불과하다고 느끼는 순간도 있다.
삶에 대한 욕망이나 야망따위가 시들어 버리는 순간이 있는가 하면
삶이 치명적일 정도로 무의미하게 다가오는 순간 또한 있다.
우리는 여지껏 느꼈던 평생 간직하고 싶던 그 감정은 무시한채
영원할 것 같이 아름답고 순수하던 그 감정이 타버려 날아가 버리는 순간에만 매달려 절망에 빠지곤 한다.
순간은 지나가도록 약속 되어 있고, 지나간 모든건 잊혀지기 마련이다.
어차피 잊혀질 모든 만사를 얹고 왜 굳이 이렇게 힘들어하면서 까지 살아가야 하냐는게 아니다.
어차피 잊혀질테니, 절망하지 말라는거다.
무라카미 라디오 中 / 무라카미 하루키
어느 날 페르시아의 왕이 신하들에게 마음이 슬플 때는 기쁘게,
기쁠 때는 슬프게 만드는 물건을 가져올 것을 명령했다.
신하들은 밤새 모여 앉아 토론한 끝에 마침내 반지 하나를 왕에게 바쳤다.
왕은 반지에 적힌 글귀를 읽고는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만족해했다.
반지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THIS TOO SHALL PASS ”
슬픔이 그대의 삶으로 밀려와 마음을 흔들고 소중한 것들을 쓸어가 버릴 때면
그대 가슴에 대고 다만 말하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행운이 그대에게 미소 짓고 기쁨과 환희로 가득할 때,
근심 없는 날들이 스쳐갈 때면 세속적인 것들에만 의존하지 않도록 이 진실을 조용히 가슴에 새기라.
“THIS TOO SHALL PASS”,
“이 또한 지나가리라”
"혹시 그런 문제입니까?
사람들 속에서 외롭다거나, 혹은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끼거나."
"외롭다고 느끼는 편이예요."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고 생각하시고요?"
"아뇨, 저는 사실 그 반대 입장입니다."
"반대 입장이라뇨?"
"우리는 사실 서로를 너무 잘 이해하고 있는 거죠.
그런데 별 도리가 없는 겁니다. 그건 이런 말이죠.
당신 외로운 것 알아. 당신도 나만큼은 외롭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그래서 우리는 외로워지는 거죠. 결국 같은 말이지만."
캐비닛 中 / 김언수
나는 늘 누군가가 나를 발견할까봐 두려웠고
막상 아무도 나를 발견해주지 않으면 서글펐다.
사립학교 아이들 中 / 커티스 시튼펠드
L : 어디가?
B : 커피 한 잔 사러 너도 사다줄까?
L : 난 핫초콜릿으로
B : 알았어
L : 언제 올 거야?
B : 5분이면 돼, 왜? 금방 올 거야
L : 돌아오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B : 온다고 했잖아. 5분 안에 올게. 핫초콜릿도 사다줄게
L : 나, 네가 정말 좋은데 돌아오지 않으면 너무 슬플 거야
안 오려거든 그냥 솔직히 말해줘. 정말로 올 거니?
B : 정 그러면, 나 안 나갈게... 핫초콜릿 먹고 싶다며?
L : 너도 커피 마시고 싶댔잖아. 오기만 하면 돼
B : 온다고 했잖아
L : 작별 키스하면 안돼?
B : 이러지마. 이러면 곤란해. 이게 다 문제의 시작이야
핫초콜릿 사준댔지, 누가 뽀뽀해준대? 나 간다
L : 그럼 안는 것도 안돼?
B : 이러지마. 그냥 악수나 하자
L : 알았어. 오겠다고 약속한 거 잊지 마
B : 약속할게
L : 빌리 이거 알아?
넌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잘 생긴 남자야
널 사랑해.
영화 '버팔로66' 中
솔직을 가장하여 곧이 곧대로 내 치부를 다 이야기 한다는 것은,
나는 이런 놈이니 알아서 하라는 식의 과시밖에 아니며,
결국 나한테 너는 그렇게 소중하지 않다는 뜻이다.
아담이 눈 뜰 때 中 / 장정일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지만, 다른 사람에게 내가 누구인지 이해시킬 수 없다는 사실이
둔중한 흉기가 되어 그의 뒷머리를 쳤다. 내가 누구인지 아무도 동의해주지 않는다면
내가 누구인지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만 알고 나 외에 내가 누구인지 아무도 모른다면
내가 알고 있는 나가 나라는 걸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어떻게 믿게 할 수 있는가......
유는 자기 자신에게 되풀이 질문했다.
이렇게 어이없이, 이렇게 삽시간에 존재가 흐릿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 소름을 돋게 했다.
그곳이 어디든 中 / 이승우
내가 어떻게 느끼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굳이 다른사람에게 밝히고 싶진 않다.
만약 모두가 내 음악을 통해 내가 어떤 인간인지 이해하는 것처럼 말한다면
그건 참 유감스러운 일이다.
/ 커트 코베인 (너바나)
난 스물 세 살이 되면 뭔가가 되어 있을 줄 알았어.
네가 스물 세 살까지 되어야 할 것은 너 자신이야.
영화 '청춘 스케치(Reality Bites)' 中
봄
삶이란 기다림만 배우면
반은 안 것이나 다름 없다는데……
그럴 것이다.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뭔가를 기다리지,
받아들이기 위해서 죽음까지도 기다리지.
떠날 땐 돌아오기를,
오늘은 내일을,
넘어져서는 일어서기를,
나는 너를.
여름
나는 그렇게 되어버렸지.
어느 날 우연히 내 눈을 거울에 비춰보다가
언젠가 네가, 네 속눈썹을 세어봤는데
마흔두 개야, 했던 말이 생각나면
그 생각 하나로
세상을 다 얻은 듯이 살아가지.
그걸 세어볼 정도면
너는 틀림없이 나를 사랑한다
여겨지기에.
가을
길거리를 지나가는데
무슨 벽보에
사랑이란
서로에게 시간을 내주는 게
아깝지 않은 것, 이라고 써 있었지.
금방 너를 생각했어.
언제부턴가 내게 시간을 내주지 않는 너를.
그 풀칠이 덕지덕지한 벽보 앞에서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얼마나 절망했는지.
나는 그렇게 되어버렸어.
겨울
슬픔에는
더 큰 슬픔을 부어넣어야 한다.
그래야 넘쳐흘러 덜어진다.
가득 찬 물잔에 물을 더 부으면 넘쳐흐르듯이.
그러듯이.
이 괴로움은 더 큰 저 괴로움이 치유하고,
열풍은 더 큰 열풍만이
잠재울 수 있고.
다시, 봄
너는
너 이외의 다른 것에 닿으려고 하지 말아라.
오로지 너에게로 가는 길에 길을 내렴.
큰길로 못 가면 작은 길로
그것도 안 되면 그 밑으로라도 가서
너는 믿고 살거라.
누군가를 사랑한다 해도
그가 떠나기를 원하면 손을 놓아주렴.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 그것을 받아들여.
돌아오지 않으면
그건 처음부터 너의 것이 아니었다고
잊어버리며 살거라.
깊은 슬픔 中 / 신경숙
엄마에게도… 라는 상상. 당연한 일을 왜 그제야 깨달았는지.
너에게 엄마는 처음부터 엄마였다. 너의 엄마에게도 첫걸음을 뗄 때가 있었다거나
세살 때가 있었다거나 열두살 혹은 스무살이 있었다는 것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너는 처음부터 엄마를 엄마로만 여겼다. 처음부터 엄마로 태어난 인간으로.
엄마를 부탁해 中 / 신경숙
“사는게 너무 힘들어요.어리기 때문인가요?”
“사는게 언제나 그래.”
영화 '레옹' 中
나오코의 죽음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어떠한 진리도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어떠한 진리도 어떠한 성실함도 어떠한 강함도 어떠한 부드러움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 슬픔을 실컷 슬퍼한 끝에 거기서 무엇인가를 배우는 길 밖에 없으며,
그리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다음에 닥쳐오는 예기치 않은 슬픔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상실의 시대(노르웨이 숲) 中 / 무라카미 하루키
'경혜야 너무 사랑해. 그런데 너 세상 그렇게 살지 마.'
“이거 쓴 사람, 너무 마음 아팠나 보다.
기왕이면, 경혜한테 세상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가르쳐주지.”
“자기도 몰랐겠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경혜가 틀렸다는 건 알아도, 맞는 건 또 못 가르쳐주는 법이거든….”
+
당신 말이 맞아. 나, 그렇게 대단한 놈 아니고…
내가 한 여자의 쓸쓸함을 모조리 구원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않아.
내가 옆에 있어도 당신은 외로울 수 있고, 우울할 수도 있을 거예요. 사는 데 사랑이 전부는 아닐 테니까.
그런데… 그날 빈소에서, 나 나쁜 놈이었어요. 내내 당신만 생각났어.
할아버지 앞에서 공진솔 보고 싶단 생각만 했어요. 뛰쳐 나와서 당신 보러 가고 싶었는데…
정신 차려라, 꾹 참고 있었는데… 갑자기 당신이 문 앞에 서 있었어요. 그럴 땐, 미치겠어. 꼭 사랑이 전부 같잖아.
+
"꼭 바람이 지나다니는 길목에 집을 지은 것 같아.
자주 덜컹거려서 매일 밤 라디오 틀어놓고 잤어요."
"저 바람, 재워버려요?"
"재워봐요, 한번."
"우리가 정신없이 키스하면 바람이 자요. 난 아까부터 못 들었으니까. "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中 / 이도우
세상 사람들의 말, 시선, 그게 그렇게 중요했니?
우리가 사랑하는 것 보다 더?
떠날 땐 모두 다 똑같은 말들을 하는구나. 내가 남자라서 떠난다고.
사랑할 땐 내가 남자인게 문제가 안 되더니. 떠날 땐 내가 남자인게 문제가 되는구나.
…가라. 잘 살고.
+
넌 왜 동성애자가 됐냐.
당신은 왜 이성애자가 됐습니까.
당신이 대답하지 못 하는 것 처럼, 나또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내 뜻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이 늙어가고, 회사에서 밀려나는게 당신 뜻이 아니었던 것 처럼.
여자를 사랑한 경험이 있냐.
그전에도 남자라서 사랑한 경험이 없는 것 같습니다.
진우라는 남자를 만나고, 경민이라는 남자를 만났지만, 그 사람들이 남자라서 만난 건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당신 부인을, 여자라서 만났습니까?
난 남자를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사랑한 사람이, 남자였을 뿐 입니다.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자. 회사에서 부딪히면 모른 척 하자.
널 몰랐던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 난, 남자를 사랑하는 법을 모른다.
당신이,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모르는 건 아닙니까?
드라마 '슬픈 유혹' 中 / 극본 노희경
"사람들이 왜 남들 하는 대로 때 되면 적당한 사람 골라 결혼하고
고슴도치 새끼 낳아 키우고 사는 줄 알아?"
"외로워서겠지."
"두려워서다."
"뭐가 두려운데?"
"괴물이 되는 게."
"내가 괴물 같니?"
"그런 뜻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것은 괴물로 만들어야
겨우 발 뻗고 잔다. 남들처럼 제대로 살고 있구나 안도하는 거다."
"넌 두렵지 않니?"
"두렵다. 남들처럼 살까 봐."
타인의 취향 中 / 김경욱
만일 네가 모든 걸 잃었고 모두가 너를 비난할때
너 자신이 머리를 똑바로 쳐들 수 있다면
만일 모든 사람이 너를 의심할 때
너 자신은 스스로를 신뢰할 수 있다면
만일 네가 기다릴 수 있고
또한 기다림에 지치지 않을 수 있다면
거짓이 들리더라도 거짓과 타협하지 않을 수 있다면
미움을 받더라도 그 미움에 지지 않을 수 있다면
그러면서도 너무 선한 체하지 않고
너무 지혜로운 말들을 늘어 놓지 않을 수 있다면
만일 네가 꿈을 갖더라도
그 꿈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다면
또한 네가 어떤 생각을 갖더라도
그 생각이 유일한 목표가 되지 않게 할 수 있다면
그리고 만일 인생의 길에서 성공과 실패를 만나더라도
그 두가지를 똑같은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네가 말한 진실이 왜곡되어 바보들이 너를 욕하더라도
너 자신은 그것을 참고 들을 수 있다면
그리고 만일 너의 전생애를 바친 일이 무너지더라도
몸을 굽히고서 그걸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다면
한번쯤은 네가 쌓아 올린 모든 걸 걸고 내기를 할 수 있다면
그래서 다 잃더라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그러면서도 네가 잃은 것에 대해 침묵할 수 있고
다 잃은 뒤에도 변함없이
네 가슴과 어깨와 머리가 널 위해 일할 수 있다면
설령 너에게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는다 해도
강한 의지로 그것들을 움직일 수 있다면
만일 군중과 이야기하면서도 너 자신의 덕을 지킬수 있고
왕과 함께 걸으면서도 상식을 잃지 않을 수 있다면
적이든 친구든 너를 해치지 않게 할 수 있다면
모두가 너에게 도움을 청하되
그들로 하여금 너에게 너무 의존하지 않게 만들 수 있다면
그리고 만일 네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1분간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60초로 대신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세상은 너의 것이며
너는 비로소 한 사람의 '어른' 이 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어른이 된다는 것 / 루디야드 키플링
강하다는 것은 약함을 아는 것이다.
약하다는 것은 겁을 내고 있다는 것이다.
겁을 내는 것은 소중한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소중한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강하다는 것이다.
걸음을 멈추고 잠깐 뒤를 돌아본다.
숨가쁘게 달려오던 삶이 깜짝 놀란 얼굴을 하고
무슨 일이냐고 내게 묻는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 다시 돌아선다.
내 앞에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삶이 놓여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지만
모든 순간은 영원으로 이어진다.
가끔 삶이 무료하게 여겨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
괜찮아, 하고 나는 나 자신에게 말했다.
난 이제 스무 살이 아니지만,
젊음을 바쳐 얻어낸 무엇인가가 내 속에 있을 거야.
비록 지금은 그게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것으로 인해 좋은 방향으로 삶을 지속할수 있을 거야.
수많은 이별 앞에서 조금이라도 더 용감해지기 위해
가끔 그곳으로 떠나고 다시 돌아온다.
+
이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흘러가면 인생은 조금 나아질 수 있을까.
여기에서 얻지 못한 것을 다른 곳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지금의 나를 버리고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자꾸만 여기가 아닌 곳으로 가고 싶다.
괜찮아, 그곳에선 시간도 길을 잃어 中 / 황경신
"갖고 싶은 거 있어?"
비가 묻는다.
".......갖고 싶은 거?"
"그래, 사줄게."
그 순간, 나는 비가 왜 나에게 다섯 번이나 메시지를 남겼는지,
왜 우리 집 앞에서 새벽까지 기다렸는지, 그 모든 이유를 알게 된다.
비는 나를 떠나려 하고 있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인다.
"오기 전에 뭘 하나 사려고 했어. 그런데......네가 뭘 좋아했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났어."
그래, 그렇겠지.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내가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 무슨 음악을 자주 듣는지, 어디를 가고 싶어하는지, 하나도 알고 싶어하지 않으니까.
아니, 그게 아니지. 난 너에게 내가 원하는 걸 한 번도 말하지 않았으니까.
언제나 언제나 나에게는, 네가 원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보다 중요했으니까.
내가 원하는 것들은 네 앞에서 너무나 사소한 것들이니까.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나는 너를 사랑하므로,
내가 원하는 걸 네가 모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
그러니까 난 하나도 슬프지 않아.
+
사람들은 가끔 내게 무엇을 보느냐고 물어. 무엇을 생각하느냐고.
무엇 때문에 세계의 끝과 같은 깊은 한숨을 쉬느냐고.
내게 그런 버릇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처음 알았어.
내가 가끔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허공을 응시하다가 깊은 한숨을 쉬곤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상실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얼마 전에 알았지.
상실감? 아니야. 그건 감 같은 게 아니야.
그냥 상실이야. 순수한 의미의 상실.
우리는 무엇을 얻을 때마다 중요한 무엇인가를 잃게 돼. 나는 그걸 알고 있어.
더 슬픈 것은, 무엇을 얻고자 할 때는 자신이 얻고자 하는 무엇과, 앞으로 잃게 될 무엇을 다 알고 있다는 거야.
하지만 무엇을 얻었을 때, 자신이 잃은 것이 무엇인지는 몰라. 정말 몰라.
완전하게 잃어버렸기 때문에, 짐작도 할 수 없는 거야.
내가 잃어버린 그것은 우주 저 밖으로 던져지고, 아무도 돌아보지 않아.
혹시 나를 진심으로 알고 있는 누군가가 있어,
내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다라고 이야기해주어도, 나는 그걸 기억해낼 수 없을 거야.
그건 정말 완벽한 상실이니까.
모두에게 해피엔딩 中 / 황경신
갑자기 아무것도 모를 때가 있다.
문득 떠올라 펼쳐본 추억의 귀퉁이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사랑도,
반복적으로 찾아오는 그리움도, 내 주변의 소중한 인간관계도,
하물며 가장 잘 알고 있다고 믿어왔던 내 자신에게조차,
이유없는 우울함을 끌어와 갑자기 아무말 없이 슬퍼질 때가 있다.
적당히 내 자신을 위로하다가도,
오히려 깊숙한 슬픔으로 다그칠 때가 있다.
갑자기 아무것도 모를 때가 있다, 그래서 갑자기 슬퍼질 때가 있다.
내가 어디에 있고 어디를 향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
정말 아무것도 모를 때가 있다.
내 마음과 만나다 中 / 조수진
떨어져 있을 때의 추위와, 붙으면 가시에 찔리는 아픔 사이를 반복하다가
결국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 쇼펜하우어
내 눈을 바라보고 있는 여러분은 제게 정말 소중한 사람입니다.
만약에 이 중에 직장상사 한테 다구리를 맞거나
학교에서 왕따를 당할때 이렇게 생각하세요.
아 씨발 난 존나 왕따인데, 타이거JK에게는 존나 소중하구나
라고
대학이란 곳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 다른 곳이었다.
긴 시간을 오래달리기를 해서 목적지에 도착했더니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는 그런 기분이었다.
환경은 어른의 것이었지만 나와는 묘한 이질감이 있었다.
+
넌 미래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본적 있어… ?
직업 같은건 둘째치고 앞날에 대한 풍경을 머릿속에 떠올려본적이 있냐고.
니 옆에 누가 있을지. 누구랑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예를 들어 5년 후에 생일날에, 일찍 결혼했을지도 모르지.
누군가와 맛있는 걸 먹고 수다를 떨고 그렇게 보내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네가 생각하는 그 애들은 그자리에 없는거야…
모두 네가 앞으로 알아가야 할 사람들이라고 생각해본적 있냐구.
+
그런 풍경을 구체적으로 생각하면 쓸쓸해지지만, 미래에도 어떻게든 연이란걸 이어가겠지ㅡ 하는 생각은 들어.
양쪽이 만나야 한다는 의지만 있으면 되는 거잖아. 안된다면 어느 한쪽의 의지만 있어도 된다고 믿어…
그게 충분히 강력하다면ㅡ
그래.. 마음만 먹는다면 찾는 건 일도 아니지.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깨닫게 되는게 있다면 한쪽만의 의지로는 연이 이어지는게 아니라는거다…
그렇게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고 다들 변해갈텐데,
나만 변하지 못한채, '그 시간'에 머물러 있을까봐 그런게 너무 무섭다…
+
사람일은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거고, 그게 자연스러우면 되는거야.
만화책 '다정다감' 中 / 박은아
왜 난 아직 아이들의 꿈을 꾸는데
갈수록 두렵지 아침에 눈을 뜨는게
무서운게 형제조차 믿을 수 없어
약속은 새끼 손가락만큼 쉽게도 꺾여
참 부질 없어 없어도 있어도 병든 현실
붙잡아 봤자 삶의 끝은 홀로 남은 병실
태평양보다 깊은 사랑 알고 보니 얕더라
남자의 자존심 수표 한 장보다 얇더라
그 숲을 알고 보니, 그 늪을 알고 보니
도망치듯 스쳐가는 세월의 손을 잡고보니
'알고보니' 가사 中 / 에픽하이
나는 날마다 똑같은 생활을 하고 있어. 나는 병아리를 쫓고 사람들은 나를 쫓지.
병아리들은 모두 똑같이 생겼고, 사람들도 다 똑같이 생겼어.
그래서 나는 조금 지겨워.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내 삶은 환하게 밝아질 거야.
나는 모든 발자국 소리와는 다른 어떤 발자국 소리를 알게 되겠지.
다른 발자국 소리들은 나를 땅 속에 숨게 만들지만,
너의 발자국 소리는 마치 음악처럼 나를 밖으로 불러낼 거야.
그리고 저길 봐! 저기 밀밭이 보이지? 나는 빵을 먹지 않아. 내게 밀은 아무 소용이 없어.
밀밭은 나에게 아무것도 생각나게 하지 않지. 그건 슬픈 일이야!
그런데 너는 황금빛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어.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놀라운 일이 생길 거야.
앞으로 금빛 밀밭을 보면 나는 너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게 될 거야.
그리고 나는 밀밭에 바람이 스치는 소리를 사랑하게 될 거야…….
어린 왕자 中 / 생텍쥐페리
한순간도 아니었다고는 하지마라, 그건 거짓말이니까.
분명, 너도 잠깐은 고민했을거야, 나랑 사귀어줄까 말까.
마음에 있던 자 같은걸 꺼내서 이리저리 재어 봤겠지.
그랬더니 아무래도 내가 마땅치 않았겠지.
그냥 데리고 다니기엔 괜찮았지만
막상 '내 거다, 내 애인이다' 말하기엔 눈에 차질 않았을거야.
넌 바라는게 많은 사람이니까.
나도 그건 알지.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날거 같기도 했을 테고
또 막상 이렇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니까 부담스럽기도 하고
내 어떤 점이 갑자기 확 싫기도 했을 거야.
그래서 빨리 정리해야 하겠다 싶었을 테고.
그러니까 네가 지금 이렇게 말하는 거겠지.
한 번도 날 좋아한 적이 없다고.
근데
넌 내가 그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나를 되게 순진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으로 봤나 보다.
하지만 너만 계산하고 재고 그랬던게 아니거든.
나도 마음에 질러 놓은 빗장이 있었고 그걸 푸는데 오래 걸렸어.
나도 너, 그냥 마음만 가지고 좋아한 거 아니었어. 머리를 굴렸지.
쟤가 나 좋아하나?
아니구나.
가끔은 좋아하지만, 내가 좀 가깝게 다가서면 저렇게나 확 물러나는구나.
아, 아직은 쟤가 날 재고 있구나.
내가 고백을 하면 받아줄까?
지금은 아닌 것 같다.
그러다가 엊그제 네가 나 불러냈을때 난 분명히 봤어.
네 마음도 움직인거..
내가 모를수가 없잖아, 나는 계속 네 눈동자만 보고 있는데.
네가 숟가락 잡는 것만 봐도 네 기분이 어떤지 다 아는데.
네가 걸어가는 뒷모습만 봐도 네가 지금 뒤에 있는 나를 의식하는지 안 하는지, 나는 그거 다 아는데.
니가 나를 애인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거,
그건 네 선택이니까 존중할게.
내가 널 좋아하게 만들었으니 책임지란 이야기도 아니야.
그치만 너, 지금처럼 그렇게 말하면 안 돼.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다고, 이게 다 나 혼자만의 착각이라고,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거야.
어차피 거절할 거라고, 어차피 사귈 거 아니라고,
이제와서 사람 바보 만들지는 마라.
너무 속상하다, 너무 실망스럽고.
그냥 생각해보니 안 되겠다고,
그렇게만 말해 줘도 좋았을 텐데.
나도 다 아는데, 내가 아는걸 너도 알텐데,
정말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어차피 아니라고 해도,
조금만 더 솔직해 주면 좋았을텐데..
사랑, 고마워요 고마워요 中 / 이미나
(+) 이건 여시에서 본 댓글인데 너무 인상깊어서 올려봐.
모바일 배려:
아가 어서 나아서 맘껏 뛰어다니렴 햇살은 너의 얼굴을 빛나게 해주고 싶어 안달이란다ㅠㅠ
너의 발바닥과 만나는 땅들도 너를 향해 달려들꺼야ㅠㅠ 힘내렴 아가 ㅠㅠ
이 세상 모든 햇빛과 땅과 바람은 너를 사랑해ㅠㅠㅠㅠㅠㅠ
이 언니는 언어의 연금술사인가봐.
힘내 여시들.
+ 그리고 2012년 5월 11일 추가글.
꽤 예전 글인데도 꾸준히 찾아주는 언니들이 있다는게 신기해.
이 글에 처음 혹은 두번째 들른 언니들은 이 글을 보겠고,
아닌 언니들은 못 보겠지. ㅎㅎ
내 시간을 공유한 느낌이라 이 게시물 쓰고나서
솔직히 허한 기분도 들고 그랬는데
이제는 오히려 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꾸역꾸역 참아온 눈물을 펑펑 흘린 후에
술 기운에 쪽지 보냈다던 외로운 언니도 생각나고
글 보고 힘냈다던 언니들 모두 고마워. 덕분에 나도 힘이 났어.
산산조각 / 정호승
룸바니에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산산조각이나,얼른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고 서랍속에 넣어두었던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
그 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다정히 쓰다듬어 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수 있지.
+ 2012년 5월 21일 추가글.
청춘의 문장들 中 / 김연수
내가 갇혀 지내는 세상이 다가 아니라
더 아름다운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모두가 올라가려고 발버둥치는 사다리 따위는 걷어차고
당신 옆에 남겠습니다.
나는 당신의 외로움을 압니다.
나는 당신의 그림자를 압니다.
당신의 조각들 中 / 타블로
+ 2012년 11월 23일 추가글.
어떤 사랑 / 정호승
내가 너를 사랑했을 때
너는 이미 숨져 있었고
네가 나를 사랑했을 때
나는 이미 숨져 있었다
너의 일생이 단 한번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일이라면
나는 언제나 네 푸른 목숨의 하늘이 되고 싶었고
너의 삶이 촛불이라면
나는 너의 붉은 초가 되고 싶었다
너와 나의 짧은 사랑
짧은 노래 사이로
마침내 죽음이
삶의 모습으로 죽을 때
나는 이미 너의 죽음이 되어 있었고
너는 이미 나의 죽음이 되어 있었다.
+ 2013년 01월 10일 추가글.
낮은 곳으로 / 이정하
낮은 곳에 있고 싶었다.
낮은 곳이라면 지상의
그 어디라도 좋다.
찰랑찰랑 물처럼 고여들 네 사랑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한 방울도 헛되이
새어나가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그래 내가
낮은 곳에 있겠다는 건
너를 위해 나를
온전히 비우겠다는 뜻이다.
나의 존재마저 너에게
흠뻑 주고 싶다는 뜻이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푸른 밤 / 나희덕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한 사람을 사랑했네 2 / 이정하
한번 떠난 것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네.
강물이흐르고 있지만 내 발목을 적시던 그때의 물이 아니듯,
바람이 줄곧 불고 있지만
내 옷깃을 스치던 그때의 바람이 아니듯,
한번 떠난 것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네.
네가 내 앞에 서 있지만
그때의 너는 이미 아니다.
내 가슴을 적시던 너는 없다.
네가 보는 나도 그때의 내가 아니다.
그때의 너와 난 이 지구 상 어디에도 없다.
한번 떠난 것은 절대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아아,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그 부질없음이여.
편지, 여관 그리고 한 평생 / 심재휘
사는 법 / 나태주
그리운 날은 그림을 그리고
쓸쓸한 날은 음악을 들었다.
그리고도 남는 날은
너를 생각해야만 했다.
+ 2013년 01월 14일 추가글.
명왕성에서 온 이메일 / 장이지
안녕, 여기는 잊혀진 별 명왕성이야.
여기 하늘엔 네가 어릴 때 바닷가에서 주웠던
소라 껍데기가 떠 있어.
거기선 네가 좋아하는 슬픈 노래가
먹치마처럼 밤 푸른빛으로 너울대.
그리고 여기 하늘에선 누군가의 목소리가
날마다 너를 찾아와 안부를 물어.
있잖아, 잘 있어?
너를 기다린다고, 네가 그립다고,
누군가는 너를 다정하다고 하고
누군가는 네가 매정하다고 해.
날마다 하늘 해안 저편엔 콜라병에 담긴
너를 향한 음성 메일들이 밀려와.
여기 하늘엔 스크랩된 네 사진도 있는걸.
너는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웃고 있어.
그런데 누가 넌지 모르겠어. 누가 너니?
있잖아, 잘 있어?
네가 쓰려다 지운 메일들이
오로라를 타고 이곳 하늘을 지나가.
누군가 열없이 너에게 고백하던 날이 지나가.
너의 포옹이 지나가. 겁이 난다는 너의 말이 지나가.
너의 사진이 지나가.
너는 파티용 동물 모자를 쓰고 눈물을 씻고 있더라.
눈 밑이 검어져서는 야윈 그늘로 웃고 있더라.
네 웃음에 나는 부레를 잃은 인어처럼 숨 막혀.
이제 네가 누군지 알겠어. 있잖아, 잘 있어?
네가 쓰다 지운 울음 자국들이 오로라로 빛나는,
바보야, 여기는 잊혀진 별 명왕성이야.
+ 2013년 02월 20일 추가글.
나의 자랑 이랑 / 김승일
넌 기억의 천재니까 기억할 수도 있겠지.
네가 그때 왜 울었는지. 콧물을 책상 위에 뚝뚝 흘리며,
막 태어난 것처럼 너는 울잖아.
분노에 떨면서 겁에 질려서. 일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네가 일을 할 줄 안다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는 날이면, 세상은 자주
이상하고 아름다운 사투리 같고. 그래서 우리는 자주 웃는데.
그날 너는 우는 것을 선택하였지. 네가 사귀던 애는
문밖으로 나가버리고. 나는 방 안을 서성거리며
내가 네 남편이었으면 하고 바랐지.
뒤에서 안아도 놀라지 않게,
내 두 팔이 너를 안심시키지 못할 것을 다 알면서도
벽에는 네가 그린 그림들이 붙어 있고
바구니엔 네가 만든 천가방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좁은 방 안에서,
네가 만든 노래들을 속으로 불러보면서.
세상에 노래란 게 왜 있는 걸까?
너한테 불러줄 수도 없는데.
네가 그린 그림들은 하얀 벽에 달라붙어서
백지처럼 보이려고 애쓰고 있고.
단아한 가방들은 내다 팔기 위해 만든 것들, 우리 방을 공장으로, 너의 손목을 아프게 만들었던 것들.
그 가방들은 모두 팔렸을까? 나는 몰라,
네 뒤에 서서 얼쩡거리면
나는 너의 서러운,
서러운 뒤통수가 된 것 같았고.
그러니까 나는 몰라,
네가 깔깔대며 크게 웃을 때
나 역시 몸 전체를
세게 흔들 뿐
너랑 내가 웃고 있는
까닭은 몰라.
먹을 수 있는 걸 다 먹고 싶은 너.
플라타너스 잎사귀가 오리발 같아 도무지 신용이 안 가는 너는, 나무 위에 올라 큰 소리로 울었지.
네가 만약 신이라면
참지 않고 다 엎어버리겠다고
입술을 쑥 내밀고
노래 부르는
랑아,
너와 나는 여섯 종류로
인간들을 분류했지
선한 사람, 악한 사람……
대단한 발견을 한 것 같아
막 박수치면서,
네가 나를 선한 사람에
끼워주기를 바랐지만.
막상 네가 나더러 선한 사람이라고 했을 때. 나는 다른 게 되고 싶었어. 이를테면
너를 자랑으로 생각하는 사람.
나로 인해서,
너는 누군가의 자랑이 되고
어느 날 네가 또 슬피 울 때, 네가 기억하기를
네가 나의 자랑이란 걸
기억력이 좋은 네가 기억하기를,
바라면서 나는 얼쩡거렸지.
+ 2013년 03월 29일 추가글.
이렇게 서른을 맞을 줄은 몰랐다.
서른이 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세상이
한눈에 조감되고 인생의 길목에도
가로등 같은 것이 켜져 있을 줄 알았다.
결국, 인생을 십진법 단위로 인식한 것부터 환상이었다.
열 살이 되어도 아홉 살과 다르지 않았고
스무 살이 되어도 열 아홉 살과 다르지 않았는데,
어쩌자고 서른이라는 나이에 그토록 큰 기대를 걸었던 것일까.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 中 / 김현경
+ 2013년 08년 12일 추가글.
나, 그들을 만나 불행했다.
그리고 그 불행으로 그 시절을 견뎠다.
깊은 슬픔 中 / 신경숙
숲 / 이정하
내 안에서 너를 찾았다
내 안에 갇혀 있는 것도 모른 채
밤새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헤매 다녔다
벗어날 수 없는 숲.
가도 가도 빠져 나갈 길은 없다.
묘한 일이다.그토록 너를 찾고 다녔는데
너를 벗어나야 너를 볼 수 있다니.
네 안에 갇혀 있는 것도 모른 채
나는,
한평생 너를 찾아
헤매 다녔다
지금도 찾아다니고있다...
어쩌죠 / 원태연
까맣게 잊었더니 하얗게 떠오르는 건.
알아! / 원태연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
+ 2013년 09월 06일 추가글.
사랑의 물리학
상대성원리
/ 박후기
나는 정류장에 서 있고,
정작 떠나보내지 못한 것은
내 마음이었다
안녕이라고 말하던
당신의 일 분이
내겐 한 시간 같았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생의 어느 지점에서 다시
만나게 되더라도 당신은
날 알아볼 수 없으리라
늙고 지친 사랑
이 빠진 턱 우물거리며
폐지 같은 기억들
차곡차곡 저녁 살강에
모으고 있을 것이다
하필,
지구라는 정류장에서 만나
사랑을 하고
한시절
지지 않는 얼룩처럼
불편하게 살다가
어느 순간
울게 되었듯이,
밤의 정전 같은
이별은 그렇게
느닷없이 찾아온다
겁내지마
과거는 너의 뒤에 있는 모습이고
미래는 네 앞에 있는 너의 모습이야
과거와 미래는 항상 너와 함께 하는거야
그것이 가끔 널 유혹할거야
'좀 앉아 쉬어'
'휴식을 취해'라고 말하면서
네가 원하는 무언가를 약속하면서 말이야
하지만 그 말 듣지마
계속 앞으로만 가
그리고 시계는 차지마
항상 몇 시인지만 알려고 하니까
항상 '지금'이란 시간만 가져
알겠지?
영화 '파니핑크' 中
+ 2013년 09년 27일 추가글.
봄 밤 / 심재휘
날이 저물자 라일락 꽃나무가 내게로 왔다
길의 바깥쪽으로 기운 것은 추억이었는데
몸이 아팠다 두리번거리며 찾아보아도
사람들로 어두워진 길에서 꽃나무는 여전히
보이지가 않았다 밤은 오직 깊어만 갔다
봄날의 여러 저녁 무렵 나는 늘 외로웠으나
스쳐가는 그 고독을 기억하지 못하고
흩날리는 벚꽃잎 사이의 밤으로
걸어 들어가고는 하였다 내일은 아름다워서
더욱 위험하였다 방법이 없었다
라일락 꽃향기가 밤에 더 짙어지는 이유를
모두 알았지만 아무도 말하지는 않았다
나는 줄곧 한 방향으로 걸으면서
내가 만난 꽃들을 노래했다 절망의 뿌리와
분노의 가지 두려움에 떠는 잎들에 대해서는
모른 체했다 생이 우리의 머리카락을
뒤로 날릴 때 꽃은 어김없이 바람에 지고
라일락 잎을 씹으며 배우던 사랑도 낡아갔다
오랫동안 봄밤은 창백했으나 오늘밤
나는 여기에 있다 가까운 어딘가에
그 나무가 있고 나의 추억은
어디로도 흘러 가지 않는다
이별 / 정양
길가에 너를 내려놓고
남은 말들이 신호등에 걸려 머뭇거린다
뒷거울 속 네 발길 밑에는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다고 적혀 있다
뒷거울 속은 멀어도 가깝고
뒤에 있는 것들은 가까워도 멀다
돌아보지 말자고 우리는
서로 뒤에 있는데
맘 놓고 돌아보라고
신호등에 걸린 세월도
저만큼씩 뒤에 있구나
멀리 보이는 슬픔보다
참아버린 말들이 가깝다
가까워도 멀리 보이는
뒷거울 속 네 뒷모습
비 / 윤보영
내리는 비에는
옷이 젖지만
쏟아지는 그리움에는
마음이 젖는군요
벗을 수도 없고
말릴 수도 없고
눈물 / 피천득
간다 간다 하기에
가라 하고는,
가나 아니가나
문틈으로 내다보니
눈물이 앞을 가려
보이지 않아라
너의 의미 / 최옥
흐르는 물 위에도
스쳐가는 바람에게도
너는 지워지지 않는 발자국을 남긴다
한때는 니가 있어
아무도 볼 수 없는 걸 나는 볼 수 있었지
이제는 니가 없어
누구나 볼 수 있는 걸 나는 볼 수가 없다
내 삶보다 더 많이 널 사랑한 적은 없지만
너보다 더 많이 삶을 사랑한 적도 없다
아아, 찰나의 시간 속에
무한을 심을 줄 아는 너
수시로
내 삶을 흔드는
설렁줄 같은 너는, 너는
짝사랑 / 김병훈
한 사람을 알고 부터
내 스스로가 선택한 가장 아름다운 고통이다
나는 네가
비싸도 좋으니
거짓이 아니기를 바란다
나는 네가
싸구려라도 좋으니
가짜가 아니기를 바란다
만약 값비싼 거짓이거나
휘황찬란한 가짜라면
나는 네가 나를 끝까지
속일 수 있기를 바란다
내 기꺼이
환하게 속아 넘어가 주마
함부로 애틋한 듯 속아 넘어가 주마
함부로 애틋하게 中 / 정유희
무화과 숲 / 황인찬
쌀을 씻다가
창밖을 봤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옛날 일이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이별 이후 / 문정희
너 떠나간지
세상의 달력으론 열흘 되었고
내 피의 달력으론 십년 되었다
나 슬픈 것은
네가 없는데도
밤 오면 잠들어야 하고
끼니 오면
입 안 가득 밥알 떠넣는 일이다
옛날 옛날에
그 사람 되어가며
그냥 그렇게 너를 잊는 일이다
이 아픔 그대로 있으면
그래서 숨막혀 나 죽으면
원도 없으리라
그러나
나 진실로 슬픈 것은
언젠가 너와 내가
이 뜨거움 까맣게
잊는다는 일이다
영화 '나홀로 집에 2 中'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다들 지지 마시길. 비에도 지지 말고, 바람에도 지지말고,
눈에도, 여름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으로 사시길. 다른 모든 일에는 영악해지더라도
자신에게 소중한 것들 앞에서는 한없이 순진해지시길. 지난 일 년동안, 수많은 일들이 일어났지만
결국 우리는 여전히 우리라는 것. 나는 변해서 다시 내가 된다는 것. 비에도 지지 말고, 바람에도 지지말자는 말은
결국 그런 뜻이라는 것. 우리는 변하고 변해서 끝내 다시 우리가 되리라는 것.
12월 31일 밤, 차가운 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선 겨울나무가
새해 아침 온전한 겨울나무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다들 힘내세요.
우리가 보낸 순간(소설) 中 / 김연수
+ 2013년 09월 29일 추가글.
너 제비뽑기 해서 한번도 당첨된 적 없지?
맨날 꽝만 나왔지? 미안하다. 나도 내가 꽝인 줄 몰랐어.
널 만났을 때가 내 최고였을 때였나봐. 내 전성기.
난 그것도 모르고 앞으로 점점 더 잘할 거라고 믿었어.
드라마 '난폭한 로맨스' 中 / 극본 박연선
누구나 스스로의 나이에 대한 무게는 스스로 감당해 내면서 지냅니다.
10대 때에는 거울처럼 지내지요. 자꾸 비추어 보고 흉내내고. 선생님, 부모님, 또 친구들.
그러다 20대 때쯤 되면 뭔가 스스로를 찾기 위해 좌충우돌 부대끼면서 그러고 지냅니다.
가능성도 있고 ,나름대로. 주관적이든 일반적이든 뭐 객관적이든 나름대로 기대도 있고, 그렇게들 지내지요.
자신감은 있어서 일은 막 벌리는데 마무리를 못해서 다치기도 하고, 아픔도 간직하게 되고.. 그럽니다.
그래도 자존심은 있어서 유리처럼 지내지요.
자극이 오면 튕겨내 버리던가, 스스로 깨어지던가. 그러면서 그 아픔같은 것들이 자꾸 생겨나고,
또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면, 더 아프기 싫어서 조금씩 비켜나가죠.
피해가고. 일정부분 포기하고, 일정부분 인정하고. 그러면서 지내다보면, 나이에 ㄴ자 붙습니다.
서른이지요. 뭐 그때쯤 되면, 스스로의 한계도 인정해야 하고,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도
뭐 그렇게 재미있거나 신기하거나.. 그렇지도 못합니다.
뭐 그런 답답함이나, 재미없음이나 그런 것들이 그 즈음에, 그 나이 즈음에.
저 뿐만 아니라 또 후배뿐만이 아니라 다들 친구들도 그렇게. 비슷한 느낌들을 가지고 있더군요.
가수 故 김광석
+ 2013년 10월 01일 추가글.
지하인간 / 장정일
내 이름은 스물 두 살
한 이십 년쯤 부질없이 보냈네.
무덤이 둥근 것은
성실한 자들의 자랑스런 면류관 때문인데
이대로 땅 밑에서 발목 꽂히면
나는 그곳에서 얼마나 부끄러우랴?
후회의 뼈들이 바위틈 열고 나와
가로등 아래 불안스런 그림자를 서성이고
알만한 새들이 자꾸 날아와 소문과 멸시로 얼룩진
잡풀 속 내 비석을 뜯어 먹으리
쓸쓸하여도 오늘은 죽지 말자
앞으로 살아야 할 많은 날들은
지금껏 살았던 날에 대한
말없는 찬사이므로.
사막 / 오르탕스 블루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나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외로움이 말을 건넬 때 / 홍수희
외로움은
외로움을 알아본다
저를 닮은
얼굴을 알아본다
너의 외로움이
내 안의 외로움에게
끈질기게 말을
건네는 이유가 그것
어깨 위에 바람을 싣고
쓸쓸히 돌아서던
뒷모습이여,
내 안의 외로움이
너의 외로움을 불러 세워
따뜻이 손 잡아주고 싶지만
세상에는
애초에 시작하지 말아야 할
만남이 있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도
있는 것이다
내 안의 외로움이
저를 닮은 외로움에게
눈 시리게 손을 흔든다
외로우니까 / 이만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그래, 어쩌면 맞는 말이겠지
사람 같지도 않은 내가 외로우니까
어쩌면 좋은 말이지
깊은 슬픔이다
그래, 누구나 그런 걸 갖고 있겠지
나도 깊은 슬픔을 갖고 있으니
말만 들어도 가슴 아린 소리지
나보다 현명한 사람들의 이야기라니
당연히 옳겠지만
정말 믿지 못할 일이야
외로워서 사람 같지 않은데
괴로워서 나는 점점 더러워지는데
그게 사람 같아 보이는 길이란 말이지
그래 좋아, 그 좋은 세상에서
나도 어서 사람이고 싶어
정말 그렇게 믿고 싶어
외로우니까 나는 괴로우니까
너무 깊은 슬픔 속이니까
어둠에 숨어서 사는 난 요괴인간이니까
어서 어서 자라고 어서 많이 착한 일 해서
사람이 되고 싶어
외롭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어 죽겠어
어쩌면 좋지 / 윤보영
자다가 눈을 떴어
방안에 온통 네 생각만 떠다녀
생각을 내 보내려고 창문을 열었어
그런데
창문 밖에 있던 네 생각들이
오히려 밀고 들어오는 거야
어쩌면 좋지.
그런 날 있었는지 / 김명기
집으로 돌아가기 싫어
가급적 아주 먼 길을 돌아가 본 적 있는지
그렇게 도착한 집 앞을
내 집이 아닌 듯 그냥 지나쳐 본 적 있는지
길을 마음을 잃어
그런날은 내가 내가 아닌 것
바람이 불었는지 비가 내렸는지
꽃핀 날이었는지
검불들이 아무렇게나 거리를 뒹굴고 있었는지
마을을 다 놓쳐버린 길 위에서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날
숨쉬는 것조차 성가신 날
흐린 달빛 아래였는지
붉은 가로등 아래였는지
훔치지 않는 눈물이 발등 위로 떨어지고
그 사이 다시 집 앞을 지나가고
당신도 그런 날 있었는지
+ 2013년 10월 02일 추가글.
빈 의자 / 황경신
나는 여태 이렇게 비어 있고
너는 여태 그렇게 비어있어
그러나 대수롭지 않은 운명으로 만나
대단치 않은 것처럼 곁을 훔치다가
모든 것이 채워지는 인생은 시시하다고 중얼거리며
밀쳐내는 이유를 만들기도 하다가
붙잡을 것 없는 텅 빈 밤이면
너의 텅 빈 마음을 파고드는 꿈을 꾸기도 하다가
아직 이렇게 비어 있는 나는
아직 그렇게 비어 있는 너 때문인지도 모르니
조금 더 기다려 보자고 한다
조금 더 비워두기로 한다
불귀 2 / 김소연
이해한다는말
이러지 말자는말
사랑한다는 말
사랑했다는말
그런 거짓말을 할수록 사무치던 사람
한 번 속으면 하루가 갔고
한 번 속이면 또 하루가 갔네
날이 저물고 밥을 먹고
날이 밝고 밥을 먹고
서랍속에 개켜있던 남자와 여자의 나란한 속옷
서로를 반쯤 삼키는데 한 달이면 족했고
다아 삼키는 데에 일 년이면 족했네
서로의 뱃속에 들어앉아 푸욱푹
이 거추장스런 육신 모두 삭히는 데에는
일생이 걸린다지,
원앙금침, 원앙금침
마음의 방목
마음의 소리가 내버려진 흉가
산에 들에 지천으로 피고지는 쑥부쟁이
아카시아, 그 향기가 무모하게 범람해서
나, 그 향기 안 맡고 마네
너무 멀리 가지 말자는 말
다 알 수 있는 곳에 있자는 말,
이해한다는 사랑한다는
잘 살자, 잘 살아보자
그런 말에도 멍이 들던 사람, 두 사람이 있었네
불귀 5 / 김소연
너를 베고 누웠네
두 허벅지 내어주고서 너는
길게 누워 잠든 내 머리칼 쓸어주었네
처마 밑 벤치에 앉아 조심스럽게
그러나 하염없는 시간을
새가 날고 이파리가 떨어지고
빗방울이 멈출 때까지
이제는 내가 그러고 있네
하루해가 다 저물 때까지
집 앞 공원 은행나무 아래에서
너는 내 다리를 베고 누워 눈을 감고
나는 십년 전 너의 시를 몇 수 읽어주네
너무 멀리 온 것은 아닐까
돌아가자 우리
말은 하지 않았어도
알아들을 것 같은 저녁
여자는 나이를 먹으면 남자가 되어
남자는 나이를 먹으면 여자가 되어
두 다리는 튼튼하고 저리지도 않네
큰 머리가 새처럼 가볍기만 하네
잘 살고 있는 거지
매일 만나면서도 그게
가장 궁금한 근황
응, 끄덕이며 대답해도 그게
가장 무거운 한 음절
옛날이라면 두 손 잡고 걸었을 낙엽 길을
각자의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네
그림자는 길고 길어
각자의 시선 또한 멀고 멀어
무릎 관절이 알아서 찾아가는
우리 둘이 사는 집
현관물을 따고 들어가
너는 테레비를 켜고
나는 컴퓨터를 켜고
밥 먹을까
누가 먼저 말 건넬 때 까진
뒤통수와 뒤통수만이
다정하게 마주하는 저녁
핏덩어리 시계 / 김혜순
내 가슴속에는 일생을 한번도
쉬지 않고 뚝딱거리는 시계가 있다
피를 먹고 피를 싸는
시계가 있고, 그 시계에서 가지를 뻗은
붉은 줄기가 전신에 퍼져 있다
저 첨탑 위의 시멘트 시계를 둘러싼
줄기만 남은 겨울 담쟁이처럼
나는 너의 시계를 한번도
울려보지 못했다 그리고 누구도
내 핏덩어리 시계를 건드리지 않았다
참혹한 시계에게도 생각이 있을까
백년은 짧고 하루는 길다고 누가
나에게 가르쳐준 걸까
태양 시계를 쏘아보다 기절한 적도 있지만
바닷속으로 시계를 품은
내 몸통을 던져버린 적도 있지만
어떤 충격도 어떤 사랑도
이 시계를 멈추진 못했다
각기 출발한 시각이 다르므로
각기 가리키는 시각도 다른 우리 식구 셋이
식탁에 둘러앉아 묵묵히 시계에 밥을 먹이고 있다
우리 중 누구도 시계를 풀어
식탁 위에 놓지 않았다. 아직
아아, 안간힘 다해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너의 귀에 대고 말해본다
네 시계까지 들리라고, 네 시계를 울리라고
큰 소리로 말해본다
그러나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오후 세시의
뚝딱거리는 말, 정말일까?
우리는 우리의 시계까지 들어가본 적이 없다
시계 밖으로 일진 광풍이 일자
겨울 담쟁이 붉은 줄기들이
우수수 몸 속에서 바람에 흔들리고
내 눈에 눈물이 고인다
잠시만이라도 내 시계 바늘을 멈추어볼 수 있니?
이 바늘 없는 시계를 네 품에 안을 수 있니?
+ 2013년 10월 05일 추가글.
과거의 느낌 / 신해욱
등을 맞고
고개를 돌렸다
그게 아니라
다른 일이 일어날 거야, 틀림없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나는 인간과 같은 가정을
몇 개씩 달그락거려본다
이럴 때 인간이라면 보통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이상하다.
이렇게 시간이 많은데
죽지 않은 지
참 오래된 것 같은데
나는 더 이상
키가 크지 않는데
하이네 보석가게에서 / 김행숙
언니, 나는 비행기를 탈 거야.
나는 아무것도 버리지 않았는데, 갑자기 너무 가벼워졌어.
마리오는 아름다운 남자야.
안녕. 나는 보따리 장사를 할 거야.
보석가게에서 나는 아름다움을 감정하지.
가짜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아는 건 멋진 일이야.
언니, 곧 부자가 될게. 라인 강가에서.
한국 남자를 사랑해보지 못했어.
오늘밤에도 언니는 시를 쓰고 있니?
언젠가는 언니 시를 읽고 감동하고 싶어. 안녕.
11월에 나는 마리오를 만나지.
언니는 한국어로 사랑을 고백할 수 있어?
우리가 어렸을 때 문방구에서 마론 인형을 훔치는 언니를 봤어.
눈물이 주르르 모래처럼 흘렀어.
언니, 우리가 아주 어렸을 때 모래는 가장 아름다운 흙의 형상이었지.
나는 매일 밤 기도를 해.
언니가 우리 집을 떠나던 날에 나는 왜 쓸쓸해지지 않았을까?
언니를 위해 기도할게.
안녕.
+ 2013년 10월 12일 추가글.
영화 '은하해방전선' 中
+
+
+ 2014년 01월 02일 추가글.
당신의 텍스트 6
ㅡ수신확인
/ 성기완
헤어지자고 했습니다
수신확인 확인안함 수신확인 확인안함
수신확인 확인안함 수신확인 확인안함
수신확인 확인안함 수신확인 확인안함
수신확인 확인안함 수신확인 확인안함
수신확인 확인안함 수신확인 확인안함
수신확인 확인안함 수신확인 확인안함
수신확인 2007-10-26 13:50
헤어졌습니다
당신의 텍스트3
- pc통신 시대
/ 성기완
웬일이죠
오히려 당신이 생각날 때
당신에게 연락을 안 한다는
당신은 그렇게 먼
그러나 때로는 가까운
당신의 나신이 기억나지 않아요
우리는 어두운 곳에서 벗었죠
불이 켜져 있을 때는
눈을 감았죠
그렇게 우리는 척척한 몰입의 순간에도
비밀을 유지했다는
이건 뭐죠
나는 몇 번이나 참았어요
사랑한다는 말을
입에서 그 말이 튀어나오기 직전에
이를테면 사정의 순간 직전에
나는 다른 말을 내뱉었죠
안에다 싸도 되냐는 식의
대답은 늘 하나였어요
안 된다는 것
나는 늘 그 대답에 안도했죠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
무거워지지 않을 거라는 거
도대체 왜일까요
당신에게 연락을 안 하기로 마음먹을 때
자꾸 당신에 관한 나의 비밀은
검은 흙 위에 돋아나는 봉숭아 새싹처럼
마음의 텃밭에서 연두색으로 자라나요
싹을 똑 똑 꺾어요
수신된 문자를 지우듯
그러나 자꾸 묻지만
웬일이죠
당신의 문을 똑 똑
두드리며 비를 맞는
내 그림자를 박 박
지우고 싶지는 않은 것은
그래요
그대로 있겠죠
당신도
나도
절대로 사랑하지 않으리라는
굳은 결심 속에서
오늘도 혀를 감아요
시인의 책상 中 '겨울메모' / 황인찬
이석원 산문집 보통의 존재 中 '그 애' / 이석원
한적한 엔딩 / 성기완
의외로 마지막 날
한적하다
함께 이 텅 빈 밤을
걸어갈까
수업이 있는 날이면 혼자 버스에서 내려 천천히 진입로를 걸어 올라가는 걸 좋아했지. 교문까지 1.5킬로미터나 되는 길, 다시 스쿨버스를 잡아타지 않으면 안 되는 꽤 긴 거리. 하지만 난 그 길을 걸어다니는 것이 좋았어. 수업은 이미 시작된 지 오래고, 멀리서 희미하게 호각소리와 웃음소리 같은 것이 들렸어. 여름의 대기는 종종 팽팽하게 잡아당겨져 있어서 피부가 떨리도록 긴장되었고, 커다란 렌즈를 대고 올려다보는 듯 휘어진 하늘도 있었고, 휘핑크림같은 적란운도 있었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의 기척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한낮의 신기한 적막도 있었어. 학교로 들어가는 발걸음은 점점 느려지고, 커다란 느티나무 밑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그 따뜻한 바닥에 손을 대고 있으면 문득 참매미의 껍질이 만져지기도 했지. 곧 흙으로 돌아갈 매미의 껍질. 본체가 빠져나간 허물은 용케도 원래의 형상을 기억하고 있었어. 하지만 곧 그 메마른 껍질이 부서지는 걸 보고 있으면 이유 없이 사무치는 순간이 찾아오는데, 그건 뭐랄까, 기이한 침잠과 순연한 인정과, 잠시의 나른함으로 이어지는 상형문자같은 감정이어서 끝내 해독할 수 없는 이미지만 남기고 흩어졌어. 눈을 돌려보면 버려진 농기계와 수풀 사이로 청명한 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샘물, 발목에 떠오르는 차가운 감각과 지열을 따라 피어오르는 생명 있는 것들의 가벼운 날갯짓. 순간 부웅 소리를 내며 대기를 들어올렸다가 시원하게 구멍을 내고 날아가는 풍뎅이. 낮은 건물들 사이로 분지의 반대쪽 끝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풍경들의, 풍경들의 평화롭고 가벼운 이동. 그 사이로 저기 희미하게 사라지는 얼룩, 얼룩 같은 그림자. 그날의 시 창작 시간은 학교 뒤 숲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어서, 나는 사막 위를 건너온 건조한 바람처럼 바스락거리며 숲 속으로 스며들었지. 어느새 발목은 조금 가벼워졌고, 입술은 더 촉촉해졌어. 모두들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있어서 눈인사 뒤엔 종이 위를 지나가는 펜 소리만 들렸던 시 쓰는 시간. 너에게 닿기 위해선 산그늘이 내려앉은 호수를 헤매야했는데 나는 벌써부터 마음을 들킨 것처럼 얼굴이 달아올라 있었지. 수면 위를 스치는 소금쟁이가 그 은밀한 부력을 감추려는 듯 제 그림자를 끌고 종종종 물 가운데로 파문을 그리며 사라지면 어느새 나는 너를 보고 있었어. 넌 가만히 턱을 고이고 호수를 보고 있더라. 모두들 시 쓰기에 여념이 없는데 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니? 너를 보면서 난 중학교 때 보았던 한 여학생을 떠올렸어. 거긴 개방식 도서관이었지. 내 맞은편에 바로 그 애가 앉아 있었어. 시험 기간이라서 모두들 자석처럼 웅크려 앉아 책 속에 고개를 묻고 있는데 그 애는 참으로 한가해보였지. 책상 위엔 달랑 책 한권과 연습장이 전부. 그리고 주변엔 온통 뭐가 있었는지 아니? 펜이 있었어. 무지개를 열개는 그리고도 남을 것만 같은 펜이 말야. 그 애는 펜이 얼마나 잘 나오나 시험이라도 하듯이 그 많은 펜을 찬란히 늘어놓고 하나씩 공책 위에 뭔가를 적고 있었어. 아마도 암기해야 할 중요한 내용인 것 같았는데, 실상은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없다는 듯이 펜을 바꾸어가면서 말야, 예쁘게 뭔가를 적고, 정리하는 것 그 자체를 즐기는 것 같은 태도였어. ……아름다워…… 나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리고 말았지. 그때 느꼈던 아름다움을, 너에게 다시 느끼고 있었지. 그걸 뭐라고 이름 붙여야 할까. 호수를 바라보며 가끔 눈을 감기도 하고, 붉은 뺨을 바람에 내맡기는 것처럼 15도 정도 고개를 살짝 기울이기도 하고, 詩라는 것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는 듯, 그랬던 너. 그리고 너를 바라보고 있었던 나. 내가 그때 무지개를 열개는 그리고도 남을 것만 같은 펜으로 마음속에서 너의 이름을 계속 쓰고 있었다는 걸 너는 알고 있었을까? 그날 너의 손을 잡고, 아이들의 눈을 피해 숲 속으로 난 길을 빙빙 돌아 버스를 잡아탔을 때까지 난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몰랐어. 아주 잠시 네 손에서 풍겨 나오던 기분 좋은 핸드크림 냄새를 맡았던 것뿐이었지. 너와는 단둘이 있어본 적도, 눈인사 이외에는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어본 적도 없었던 내가 손을 이끌었을 때, 너의 눈동자가 크게 부풀어오르며 흔들렸었는데, 숲의 그늘과 호수의 파문이 교차하며 출렁거렸는데, 그 전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그런 식의 행동을 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무슨 말도 쉽게 꺼낼 수가 없었지. 내가 보았던 것은 그저 오후 두 시의 햇빛과 열려진 창틈으로 날아 들어오던 하얀 꽃가루와 작은 연기가 피어오르던 비탈에 가득한 눈부신 여름빛뿐이었는데. 몇 번 사람이 탔다가 내리고, 기어이 뒷좌석에 앉은 우리 둘만이 승객으로 남았을 때, 그대로 버스가 영원히 달려갈 것만 같았던 그 순간, 너라는 세계에, 내가 닿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 그런데 정말 무슨 힘이었을까, 말없이 창밖만 내다보고 있던 네가 가방을 열고 무언가를 꺼냈지. 그래, 그건 캔디였어. 탄생석이 가득한 보석함을 열 때처럼 반짝이며 열린 상자. 그 안에서 꺼내주던 후르츠 캔디. 우리 둘은 여전히 말없이, 하지만 나란히 캔디를 입에 넣고 그 길을 더 달려갔지. 버스 안은 달콤한 향기로 가득 차고, 점점 행복해지고.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니? 아름다워. 이 아름다움을 어떻게 하지……. 이 순간을 기억하고 싶은데, 영원히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하지. 난 마치 우리들의 미래를 미리 보고 온 사람처럼 그때부터 이미 가슴이 아파오고 있었어. 배달시킨 지 얼마 되지 않은 얼음덩이를 부수어 넣은 빙수기가 돌아가고 있어. 이 기계는 좀 오래된 것이라서 압력을 가하는 나사에 자주 기름칠을 해주어야 하지만 칠이 벗겨진 파란색 몸체가 무색할 정도로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어서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믿음이가는 이 가게의 명물이지. 아, 미안, 네가 들려준 말인데 이젠 내가 너에게 아는 척을 하고 있구나. 하지만 오늘은 좀 더 계속하도록 허락해주지 않을래? 이젠 이런 얘기, 어디에도 하지 않을래. 오늘을 끝으로 캔디 상자는 영원히 닫아두기로 했거든. 그렇지 않으면 이 향기가 모두 날아가 버릴 것 같아. 살짝 녹다만 눈송이 같은 얼음 보숭이 위에 이번엔 유지방이 많은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바람개비 모양으로 맵시있게 올리고, 마지막으로 냉동보관하여 두었던 차가운 딸기를 먹기 좋은 크기의 슬라이스로 잘라내어 얹으면 딸기 빙수 완성! 이집 빙수 맛은 이렇게 단순하고 신선한 재료의 조화에 있지. 먼저 눈으로 그 생생한 차가움을 즐기고, 살짝 얼음이 녹아 딸기가 가라앉은 모습이 포착되면 사각사각 소리가 날 것 같은 빙수에 수저를 꽂아 살살 돌려가며 한 숟갈을 뜨는 거야. 딱 한입에 들어갈 만큼만. 빙수는 첫 숟갈의 맛이 다 먹을 때까지 하나의 화려한 인상을 만들며 미뢰를 자극하지. 딸기의 상큼한 맛과 바닐라 아이스크림의 부드럽고 달콤한 맛이 얼음알갱이들과 순간적으로 결합하여 만들어내는, 혀를 얼려버릴 것만 같은 신선한 맛. 이렇게 혼자서 딸기 빙수를 먹고 있으려니 다시 너의 말이 생각나. 딸기 빙수를 먹을 때마다 두꺼운 외투를 입고 겨울거리로 나섰던 때의 짜릿함을 떠오른다는 말. 머리칼이 난 구멍구멍마다 저릿하게 약한 전류가 흐른 것 같은 느낌, “너무 추워”라는 소리를 내뱉으면서도 그렇게 감각이 살아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했다는 말. 너무 시려 눈가에 눈물이 맺히도록 선연히 살아 오르고는 했던 그 겨울의 감각. ……그런데, 그런데 말야, 때론 그 감각이 너무 날카롭게 살아있어서, 결코 누군가를 잘 잊지 못하는 사람도 있어. 그때 우리가 호숫가에서 그 시간 내내 시를 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참 바보 같은 생각이지? 어쩌면 난 그때 못 쓴 시를 지금 이렇게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나만 여전히 나머지 공부를 하는 기분이야. 넌 여전히 눈을 감고 호수의 바람을 흠향하고 있고. 그런데 써도써도 그날의 아름다움을 그려낼 수 없으니 어쩌면 좋을까. 내가 가진 펜으로는 그려낼 수 없으니 어쩌면 좋을까. 미안, 이젠 정말 네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아. 후르츠 캔디 버스 / 박상수 |
들길 따라서 / 홍성란
발길 삐끗, 놓치고 닿는
마음의 벼랑처럼
세상엔 문득 낭떠러지가 숨어 있어
나는 또
얼마나 캄캄한 절벽이었을까,
너에게
새 / 심보선
우리는 사랑을 나눈다.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아주 밝거나 아주 어두운 대기에 둘러싸인 채.
우리가 사랑을 나눌 때,
달빛을 받아 은회색으로 반짝이는 네 귀에 대고 나는 속삭인다.
너는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너는 지금 무슨 생각에 빠져 있는가.
사랑해. 나는 너에게 연달아 세 번 고백할 수도 있다.
깔깔깔. 그때 웃음소리들은 낙석처럼 너의 표정으로부터 굴러떨어질 수도 있다.
방금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 미풍 한 줄기.
잠시 후 그것은 네 얼굴을 전혀 다른 손길로 쓰다듬을 수도 있다.
우리는 만났다. 우리는 여러 번 만났다.
우리는 그보다 더 여러 번 사랑을 나눴다.
지극히 평범한 감정과 초라한 욕망으로 이루어진 사랑을.
나는 안다. 우리가 새를 키웠다면,
우리는 그 새를 아주 우울한 기분으로
오늘 저녁의 창밖으로 날려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함께 웃었을 것이다.
깔깔깔. 그런 이상한 상상을 하면서 우리는 사랑을 나눈다.
우리는 사랑을 나눌 때 서로의 영혼을 동그란 돌처럼 가지고 논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정작 자기 자신의 영혼에는 그토록 진저리치면서.
사랑이 끝나면, 끝나면 너의 손은 흠뻑 젖을 것이다.
방금 태어나 한 줌의 영혼도 깃들지 않은 아기의 살결처럼.
나는 너의 손을 움켜잡는다. 나는 느낀다.
너의 손이 내 손안에서 조금씩 야위어가는 것을.
마치 우리가 한 번도 키우지 않았던 그 자그마한 새처럼.
너는 날아갈 것이다.
날아가지 마.
너는 날아갈 것이다.
봄을 닮은 사람인줄 알았는데
그래서 여름이 오면 잊을줄 알았는데
또 이렇게 니 생각이 나는 걸 보면
너는 여름이었나
이러다가 네가 가을도 닮아있을까 겁나
하얀 겨울에도 네가 있을까 두려워
다시 봄이 오면
너는 또 봄일까
/
시인의 책상 中 '키스' / 박진성
_ Joel-Peter Witkin, <The Kiss>, 1982
너는 결심을 잘했지. 너는 친구였고 너는 죽었고 너는 조상이 되었지.
애도의 가장자리에서 네가 태어난 별자리의 계절에서 너의 이름이 책상에 앉았고.
나도 결심을 잘했지. 꽃이 불가능한 기후였고 무언가 떨어졌다. 그걸 기원이라 부르기로 했잖아.
벽지는 높아. 여기는 허기져. 누가 자살할 결심을 한다. 너는 아니지?
창문들이 소리를 데리고 장례식을 버린다.
왜 그랬어.
어떤 밤은 모든 과거잖아. 어떤 기도는 모든 후회고.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악기처럼.
그리고 결심처럼.
밤을 벗은 나무들이야.
장기臟器가 피로한 건 장기의 결심이야.
서해 해상 파고波高 높음, 너는 그쪽으로 걸어갔어.
잘못 배운 기도의 중심이 무너진다.
기도를 하지 않기로 너는 결심했지.
왜 그랬어.
몰라서 그랬어.
오전의 가로등.
얼음과 미소.
네가 쓴 편지는 서랍에 있기로 결심을 하고.
안과 밖을 없애기로,
암수로 구분하지 않기로,
결심의, 시작, 모든, 밤이, 되고.
거대한 착각 / 박노해
나만은 다르다
이번은 다르다
우리는 다르다
모과 / 서안나
먹지도 못하고 바라만 보다가
바라만 보며 향기만 맡다
충치처럼 꺼멓게 썩어버리는
그런
첫사랑이 내게도 있었지
바람 속을 걷는 법 / 이정하
바람이 불었다
나는 비틀거렸고 함께 걸어주는 이가 그리웠다
서시 / 나희덕
단 한사람의 가슴도
제대로 지피지 못했으면서
무성한 연기만 내고 있는
내 마음의 군불이여
꺼지려면 아직 멀었느냐
잠시, 천년이 / 김현
우리가
어느 생에서
만나고
헤어졌기에
너는
오지도 않고
이미 다녀갔나
등나무
의자에 앉아
잠시, 천년이 지난다
사랑 / 이진우
네 몸에 쓰네
내 모든 것
잠수 / 그림자
사랑속에 얼굴 담그고
누가 더 오래버티나 시합을 했지
넌 그냥 져주고 다른 시합하러 갔고
난 너 나간것도 모르고
아직도 그 속에 잠겨있지
첫사랑 / 문숙
공사중인 골목길
접근금지 팻말이 놓여있다
시멘트 포장을 하고
빙 둘러 줄을 쳐 놓았다
굳어지기 직전,
누군가 그 선을 넘어와
한 발을 찍고
지나갔다
너였다
짝사랑 / 이남일
어쩌다
내 이름을 불러 준
그 목소리를
나는 문득 사랑하였다
그 몸짓 하나에
들뜬 꿈속 더딘 밤을 새우고
그 미소만으로
환상의 미래를 떠돌다
그 향기가 내 곁을 스치며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나는 그만
햇살처럼 부서지고 말았다
순간의 꽃 中 / 고은
어쩌자고 이렇게 큰 하늘인가
나는 달랑 혼자인데
+ 2014년 06월 08일 추가글.
일요일의 노래 / 황인숙
알아?
네가 있어서
세상에 태어난 게
덜 외롭다.
아름다운 사람 / 나태주
아름다운 사람
눈을 둘곳이 없다
그렇다고 아니 바라볼수도 없고
그저 눈이 부시기만한 사람
발자국 / 도종환
아, 저 발자국
저렇게 푹푹 파이는 발자국을 남기며
나를 지나간 사람이 있었지
섭씨 100도의 얼음 / 박건호
너의 표정은 차갑고
너의 음성은 싸늘하지만
너를 볼 때마다 화상을 입는다
내게 짜근 소망이 있다면 스크랩 할땐 하더라도,
꼭 한 번은 다 읽고 스크랩 해줬으면 좋겠다는 것.
스크랩 해 놓았다는 이유로 나중에 나중에 하다가
영영 들여다보지 않게 되는 게시물이 되고 싶지는 않기 때문에.
스크랩 해갈 때 추천이나 댓글 꼭 남겨주었으면 좋겠다.
댓글은 내게도 힘이되니까.
(BGM은 정준일의 '안아줘')
첫댓글 엄청 길어요 나중에 맘잡고 읽어야할듯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