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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밤길에서
제법 육중한 느낌이었고 규모도 넉넉한 이층 가옥이었다, 이층에는 발코니가 있었고 삼단 층계를 따라 금속 난간이 돌려져 있는 포치는 넓었다. 이곳 중류 이상 러시아인들의 주택 양식이지만 중국취향을 약간 곁들인 벽돌 건물이다. 집주인은 심운희. 이 지방에서는 쎄리판 심으로 통하는 귀화한 조선인이다. 러시아 정부의 도헌이며 부호요. 이범윤과 손을 잡고 일찍부터 항일투쟁에 앞장선 최재형의 비호아래 청부업자로서 칠팔천 원의 자산을 모았으며 인품이 온유하여 신망있는 인물로서, 쎄리판 심은 비교적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재산에 비하여도 그렇거니와 두 딸아이를 가진 내외의 단출한 식구에는 집이 아무래도 분에 넘는 것이 사실인데 그럴 만한 이유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쎄리판 심에게는 하얼빈에서 큰 약종상을 하는 형이 있었다. 쎄리판 심이 연추에 집을 신축하려 했을 때 형은 적잖은 보조금을 내 놓았다. 그리고 하는 말이 "허비하는 게 아니니까 집이란 돈 넣은 만큼, 팔 때도 그 값 지니고 있는 게야. 잘 지어." "하지만 푼수에 맞게," "모르는 소리, 인종이 다른 곳에서 제대로 행셀 하려면, 행셀 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사업의 터전이고 그러니까 신용이라는 게 제일인데 신용이 뭐냐, 재산이거든 재산. 재산이란 은금보화로 뭉쳐서 농짝 속에 넣어두어서는 모르는 게야. 그렇게 할 필요가 있는 사람은 그럴 것이나 장사 혹은 사업하는 사람이랄 것 같으면," 하다가 말이 길어질 듯 싶었던지 "그러니까 한마디로 집이란 집임자의 재산을 남한테 알리는 거고 실컷 살고서도 집이란 제 값 제 짊어지고 있는 거니까, 신용 얻어, 남한테 대우 받어. 그러니 버젓하게 집은 지어야 한다 그 말이야." 보조금뿐만 아니라 형은 "뭐니뭐니해도 벽돌 쌓는 데는 중국인이 젤이고." 하얼빈에서 기술자까지 보내주었다. 그리하여 집을 지은지 어느덧 오년. 지금은 견사 같은 느낌의 어둠이다. 엷고 맑은 어둠의 시각이며 밤이다. 쎄리판 심의 이층집 발코니가 하얗게 떠 있는 것 같다. 아래층만이 방마다 불이 환하게 켜져 있고 포치도 환하다. 낮보다 훨씬 하강해버린 기온은 한랭하다. 설마 수확을 앞둔 들판의 곡식들이 얼어버리기야 했을라구. 문이 열린다. 불빛이 환한 포치에 남자 손님 두 사람이 나온다. 주인 내외가 따라나오고 마지막 금녀도 모습을 나타낸다. 금녀는 검정 통치마에 미색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금녀는 바로 쎄리판 심 집에 기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녁에는 러시아 아이들과 함께 그네들 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두 딸아이에게 한글을 가르쳐주고 낮에는 조선인 학교에 나가는 것이었다. 장인걸이 이 집에 금녀를 소개해주었을 때 쎄리판 심은 온유한 미소를 머금으며 "내가 심씨를 만나서 기쁜게 세 가지 있소. 그 하나는 종씨라는 게요. 심씨는 그리 흔한 성은 아니지 않소. 둘째는 식구가 적어서 넓은 집이 적적했는데 손님은 잦은 편이지만 늘 집에 눌리는 기분 이었거든. 그리고 셋째는 애들이 우리 조선나라 글을 배울 수 있게 됐으니 그것 또한 다행아니겠소? 아 참 또 한가지 있지. 야소교 학교에서 공불 했다니까 신자일테고 말이오. 당신도 그렇게 생각 안 하오?" "네 그렇구먼요. 여러 가지가 우리 형편에 안성맞춤이지 뭐겠어요? 다 장선생님 덕분 아니겠어요?" 부인은 장인걸과 금녀를 번갈아 보았다. 금녀는 얼굴을 붉혔다. "그렇구말구. 장선생 덕분이지. 하여간 우리 화조 아가씨들이 돌아오면 언니 하나 생겼다고 젤 기뻐할 게요. 하하하.." 큰 딸애 이름은 수연이요, 작은따랭 이름이 수앵, 해서 쎄리판 심은 딸들을 말할 적에 곧잘 화조 아가씨라 했던 것이다. 언동이 온유하고 여자를 존대하며 점잖게 우스갯소릴 잘하는 쎄리판 심과 자연스럽게 남편 말에 동조하며 대화를 보충하며 항상 여유가 있는 부인, 이들 내외는 외유내강, 겉보긴 부드러우나 마음가짐은 매우 엄격한 편이었다. 금녀는 새로운 가풍 속에서 이들 내외의 영향을 적잖이 받았다. 지적인 여교사의 품위를 갖추게 된 것도 화목하고 질서 있는 이 행복한 가정의 일상에서 비롯된 것이며 과거 이력에서 온 열등감을 극복하고 신념과 허식없는 정직한 자세로 인생에 대한 희망을 깨우쳐 준 것은 장인걸이었다. 금녀는 많이 변하였다. 배우며 가르치며 구각에서 빠른 속도로 탈피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들어가십시오. 바람이 찹니다." 뜰을 질러 앞서가던 사내는 코트 호주머니 속에 손을 찌르고,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장인걸이다. "네. 이제 들어가십시오."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쓴 이동진이 돌아보며 장인걸과 같은 말을 했다. "그럼 또 봅시다." 쎄리판 심이 말했고 "안녕히 가세요." 부인과 금녀가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거리에 나온 두 사내는 묵묵히 걸음을 옮겨놓는다. 하늘 가득히 뿌려진 별은, 별 하나하나 에서 뿜어낸 여광들은 서로 녹아 흘러서, 그야말로 은하인가, 지상에도 견사 같은 엷고 맑은 어둠이 부유하고 있는 아름다운 밤이다. 밤바람이 한랭하여 더욱 맑은 느낌인지, 멀리 있는 성당의 첨탑이 뚜렷하게 솟아올라 있다. "장동지." "네." "고집은 이제 그쯤 해두는 게 어떻소?" "네?" "내 말 알아듣겠소?" "..." "심운회 씨 내외분이 장동지 생각을 많이 하지. 번번히 저녁 초대하는 저의쯤 장동지도 모르진 않을 게요." "..." "살림을 차리시오." 장인걸은 성당 첨탑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띤다. "저보다 선생님께서 생각하실 일 아니겠습니까?" "허허 내게는 조선 땅에 내자가 있고 장가든 자식놈이 둘이오. 몰라서 그러는 게요." "..." 이동진은 담배를 꺼낸다. 장인걸에게 하나 주고 자기도 한 개비 입에 물고서 바람을 막으며 담뱃불을 붙인다. "자아 붙이시오" 두 손을 오므리며 내미는 성냥불에 장인걸은 등을 꾸부리고 담뱃불을 붙인다. "죄송합니다." 깊이 빨아넘긴 담배연기를 토하면서 이동진은 "야박하다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미 없어진 지 십년 가까이 되는 처자, 언제까지 염두에 두는 것도 못난 짓 아니겠소?" "염두에 두는 것은 아닙니다만," 말과는 달리 빨아당기는 담뱃불에 비친 장인걸의 얼굴, 왼편 귀 근처로 해서 입술 가까이까지 푸르스름한 반점이 드러난 얼굴은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러니까 구 년 전의 얘기다. 노일전쟁 당시 이범윤 휘하에서 젊은 열정을 태우던 장인걸은 러시아군에 가담한 이범윤의 명령을 받고 국경을 넘은 일이 있다. 적군의 동태를 염탐하기 위하여. 그때 장인걸은 임무의 효과적인 수행을 위해 처자가 있는 집으로 갔던 것이다. 그것을 근거지로 하여 얼마 동안 일군의 동태를 살피다가 보고차 본진으로 돌아간 사이 뒤늦게 밀정이 장인걸의 정체를 탐지했고 처자는 일군에 의해 살해된 것이다.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은..." 혼잣말 같이 중얼거리는 이동진은 요즘 자주 하동에 있는 가족을 염두에 떠올리는 자기 자신을 생각한다. 늙었을 아내와 아들, 그리고 상봉한 일 없는 자부, 손주, 양자 보낸 작은 아들의 소출이긴 했으나. '내가 늙은 탓일까.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탓일까. 심씨댁 환한 불빛, 딸아이들의 웃음 소리, 그 속에서 왜 내 눈시울은 뜨거워졌을까. 늙은 탓이 아니다. 늙도 젊도 않기 때문일 게야. 늙은 골수파들은 한치 의심없는 충성심으로 끝장냈고 끝장내려 하고 있다. 젊은 사람들...허허허어. 물줄기라도 찾아주려고 내가?' "처성자옥이라 아니 합니까?" 장인걸의 말이 귓전을 지나간다. "음...그런 생각을 한다면 대처 할 사람 아무도 없지." "사람 따라서 처지도 매우 다르지 않겠습니까. 다시는 가슴에 못 박히는 일...글쎄요. 먼 훗날엔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순 없지만요." "뭐 무서워 장 못 담근다는 말이 있지. 너무 억제하는 것도 심신에 좋질 않아." "남 보기에 제가 억제하는 것처럼 그랬을까요?" 장인걸은 웃는다. 목쉰 것 같은 웃음 소리였다. 이동진도 싱긋이 웃는다. "그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일 게요. 또다시 그런 일이 일어날 리도 없고." "선생님." "..." "심금녀 그 여자 고생 많이 했습니다. 제 나이 젊습니까? 돈이 있습니까?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놈이," "서른다섯...늙었소?" "그 여잔 스물하나, 둘이라던가요? 선생님 더 이상 그 얘기는 하지 맙시다. 그보다," 장인걸은 말머리를 꺾었다. "권선생께선 어째 이리 소식이 없지요?" 장인걸의 어조는 다분히 신경질적이었다. "글쎄...아닌게 아니라," "어디서 화를 당하시지나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동진도 어젯밤에 그런 생각을 했었다. 해서 숙소 주인인 염씨에게 어디서 화를 당하지나 않았는지 모르겠군, 하고 장인걸과 같은 말을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지난 삼월 초순, 급변하는 중국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면서 상해 방면으로 떠나 지금은 구월도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데 권필응에게선 아무런 소식이 없었던 것이다. 예전 이동진과 장인걸이 동석한 자리에서 장인걸과 동배인 강일석을 상대로 격론을 벌인 일이 있었다. 격론이라기보다 감히 맞설 수 없는 강일석은 조심스런 의견을 내비쳤을 뿐이었는데 비판이나 반론을 혀용치 않겠다는, 거칠고 독선적인 분위기를 독기처럼 뿜어내며 권필응 혼자 앞질러간 그 날의 토론이었다. '그 친구가 왜 그랬을까?' '그 양반이 왜 그랬을까? 전에 없었던 일이었어.' 구두 소리만 울리는 밤길에서 두 사내는 동시에 그때 일을 상기하며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다. '부질없는 생각이야. 망상이다. 기우다. 그분만은 끝까지... 허술하게 죽진 않아.' 장인걸은 자신이 얼마나 권필응의 무사함을 바라고 있는가를 비로소 깨닫는다. 얼마나 깊이 그를 신뢰하고 있는가를 깨닫는다. 청년처럼 그에게 열광하고 있는 자신을 깨닫는 것이었다. 영하 사십 도, 한천을 나는 쇠붙이 화살처럼 냉엄하고 재빠르며 방향 감각이 정확한 권필응이다. 그가 위대하다는 것은 그의 언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요 강렬하며 전파력을 갖는 암시, 그 천태만변하는 암시의 눈빛에 연유한다. 그의 눈은 음성보다 더 많은 얘기를 들려주었으며 때론 명령하고 설득하고... 특히 강압하는 그 눈빛은 마수 같아서 아무도 거역하거나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다.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는 그의 눈동자 속에서 통곡을 들을 수 있었고 따스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고 무자비한 결단을 볼 수 있었다. 예민한 젊은이들, 감성이 풍부한 젊은이일수록, 그의 암시는 신비로움이다. 이 시대의 소위 지도자로서 그는 전혀 유형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단점으로 볼 수 있겠으나... 그는 많은 사람, 군중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누구하고나 어울리어 시국을 논하고 이상을 말하는 일이 없다. 비분하여 눈물짓는 일이 없다. 호탕하게 그를 상상할 수 있을까? 송진처럼 찐득찐득 눌어붙어서 협상하는 그를 상상할 수 있을까? 구렁이 담 넘어가듯 교활한 관용을 그에게선 바랄 수 없다. 그는 생래가 수줍은 사내였는지 모른다. 과대한 몸짓 과대한 변설, 발이 땅에 붙어 있지 않은 그 많은 자칭 타칭의 독립지사 영웅들, 권필응의 수줍음은 그러나 영웅심에 대한 강한 제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며 항상 환상을 배제하며 정확하고 적확하게 사고를 집중시킬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상대적으론 그 정확함으로 하여 그를 환상하게 된다. 믿게 된다. 불가사의한 힘을 느끼게 한다. '그러한 권선생이 어째 그땐 흥분했을까? 다변했을까? 초조했다. 왜? 까닭을 모르겠군.' 장인걸은 권필응의 특성을 생각하다가 그때 광경을 눈앞에 떠올린다. 얘기는 흑룡강에서 시작되었다. 청국이 흑룡강 좌안을 러시아 영토로 양보하기에 이르는 1858년 애훈조약에 얽힌 얘기였다. 그때 권필응은 벽에 등을 기대듯 앉아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지난 이월 청조 마지막 황제로서 종지부를 찍은 선통의 퇴위로 얘기는 넘어갔고 가정부를 조직한 원세개가 혁명정부의 대총통 손문을 밀어내고 자신이 대총통으로 취임한 중국 정변에 화제는 이르렀다. 과연 원세개는 조선독립군을 도와줄 인물이냐 하는 것이었다. "원세개?" 벽에 기대서서 말이 없었던 권필응이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날카로운 어조로 쏘았다. "어림 반푼어치도 없지. 그자는 틀림없이 일본과 야합할걸? 내뱉었다." "그렇지요? 인물이랄 것 같으면 뭐니 해도 손문이," 강한 어세에 당황한 강일석은 얘기의 중심을 잃었다. "손문? 손문보다 위대했던 것은 삼민주의였지." 이번에는 냉소했다. "위대한 것 많았지 손문보다 위대한 것 말이야. 삼합회를 위시한 여러 비밀결사가 위대했어. 기라성 같은 혁명지도자 혁명군 그리고 홍수전이 뿌려놓고 간 씨앗을 줏어먹은 농민들, 그리고 또 있어, 광산노동자들! 손문은 뭘 했나? 삼민주의? 손문은 일찍이 홍수전 막하의 한 숙로에게 배웠건만 삼민주의는 태평천국의 정치요강을 앞서지 못하였고 그건 아류에 불과한 것. 온건파 강유위의 대동사회사상에 비하면 월등 뒤떨어진다 그 말이야. 그러나 삼민주의는 손문보다 위대했어. 손문은 뭘 했나? 했지. 메뚜기처럼 뛰었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해서 믿지 못할 일본 낭인과의 약속을 믿고 삼백만 발의 탄약을 믿고 목이 빠지게 기다렸지. 얻은 게 무엇이냐? 혁명군의 희생과 좌절이었어. 혁명정부 대총통 손문이 직접 전선에 나선 것은 불과 사오 년 전의 일이야. 막대한 무기가 있으리라 믿었던, 그렇지, 그때도 믿었었지. 막대한 무기가 있으리라 믿고 공격한 진남관 사건 때가 처음이었단 말이야. 그나마 진남관의 무기고는 빈털터리, 번번이 그랬었다. 망명 잘하는 것만이 능순냐? 부지런한 것만 능수냐? 불은 부지런히 지르고 다녔으니까. 손문이 위대했던 것은 마카온지 아모인지 그곳 양인 의사 중에서 유일한 중국인 양의였었다는 그 점일 게야. 하하하..." 흥분한 권필응은 여지없이 손문을 깔아뭉개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원세개 같은 간물하고야 월등 다르지." 이동진의 말이었다. 장인걸과 강일석은 이동진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야, 양다리 걸쳤다가 앉아서 집어삼킨 원세개에 비하면 고생도 했고 깨끗하기야 했겠지요. 거대하고, 얼마든지 더 거대할 수 있는 혁명군과 민중들을 떠메기엔 역부족이란 뜻입니다. 그만한 인물, 혁명당 속엔 기라성같이 많았었다 그거지요 뭐." 권필응은 갑자기 시무룩해졌던 것이다. "인물 비교는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하고의 연관을 생각할 때 사정이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친일은 손문 쪽이고, 삼원보 그곳에서 원세개가 이판서댁 형제분들과 친문이 있다 하여 큰 기댈 걸고 있질 않습니까?" 강일석이 비비적거리며 말했다. "정치야, 정치! 정치에 친분이 어딨어!" 권필응은 화를 벌컥 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게 어찌 됐다는 게야!" 보통 신경질이 아니었다. "사고무친한 곳에서 기반을 닦자면 내실은 어찌 되었든 명색이 대총통인데 그 위력이란 망국의 유랑민과 진배없는 지금 처지로선 막대한 것 아니겠습니까?" 강일석은 꾸역꾸역 말을 밀어냈다. 이동진과 장인걸은 묵묵히 두사람을 지켜보고 앉아 있었다. "실낱 같은 게지. 인정가화에 속할 문제고, 망국의 유랑민일 경우엔 말이야! 그래 자네는 자네 자신을 유랑민이라 생각하나?" "그 그건," "아니지이! 분명 아니렷다? 그래, 정착을 허용해주고 학교 설립 인정해주고... 조선 땅에서 먹고 살 수 없어 남부여대건너온 망국의 백성들 경우엔 그 정도의 호의란 대단한 거겠지. 허나, 적어도 자네나 나, 또 삼원보에 온 사람이면 원세개한테 감사하고 기댈 건다는것은 그건 밸 빠진 수작이야! 왜냐, 그건 지엽이니까, 근간은 아냐! " 권필응의 얼굴은 검붉어졌다. "큰몫들을 노리는 투전판에서 망이나 보아주고 구전 먹는 날건달 이라도 좋다! 방편으로 한다면은. 너도 살고 나도 살고, 너 죽으면 나 죽게 되고 나 죽으면 너 죽게 된다는 바로 그 점에서만이 손을 잡는게 정치야! 친면이 어딨어? 이해관계야, 이해관계! 하물며, 음, 우리에겐 정치할 한치의 영토도 없어. 각박하고 가혹한 싸움이 있을 뿐인데 누구에게 감사하고 누구에게 은헬 느껴? 신뢰는 더욱 금물, 그따위 자질구레한 잡티가 붙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아! " 도시 왜 이리 화를 내는지 모를 일이었다. 얘기도 산만하였다. 투전판이니 정치니 하는 말의 내용도 모호하였다. 권필응은 다소 어세를 누그러뜨렸다. "앞으로 군벌시대가 올 게다. 아니 이미 왔어. 군벌의 용병들은, 일본의 사정과는 다른 소위 용병인데 정권유지 정권탈취 그 어느편이든 도구에 불과한 용병에게 총을 쥐어주어야 하고 급료를 건네주어야 하고, 그 막대한 돈이 어디서 나오나? 만신창이 된 형편에서 백성들을 짜보아야 과부족, 어렵잖게 원세개는 일본과 야합할 게야. 싫든 좋든. 일본이 그낭 놔두지도 않을 거구," "그렇게 단순하게, 쉽사리," "물론 단순하게는 아니지. 그도 중국인이니까..." "그,그러면은 결국 우리 독립군에게는 어느쪽이, 어느편도 아니야. 우리 스스로, ... 비밀조직에 접근해가는 게야." "네?" "원세개를 타도하고 손문도 견제하는 세력. 중국이 혼자 서지 못할 때 조선 독립은 불가능이야. 정권을 위해, 혁명을 위해 외세를 업는 자들과 우리는 친구가 아냐. 태평천국도 동학도 외세에 무너졌어. 태평천국이나 동학이 어떤 성질의 것이든 그것은 순전히 순수한 백성들의 힘이었다는 점을 자네, 강일석은 앞으로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할 게야. 만일 해답을 얻지 못할 시, 자네는 향리로 돌아가야 해." 이야기는 대충 그것으로 끝이 났다. 그 마지막 말은 이동진과 장인걸에게도 들으라는 얘기 같았다. "선생님."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동진을 향릴로 돌아가야 해, 그 말을 되씹고 있었던 것이다. '왜 나는 이리 늙었고 권필응 씨는 그리 젊었는가. 나는 불꺼진 잿더미 같고 그는 활활 타는 관솔불 같다. 쏜살같이 앞날을 내다보는데 나는 무거운 이조잔재에 눌리어 이리 늙어가고 있다. 한땐 나도 그 굴레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을 했었지. 옛날 그 동학란 무렵만해도 그들을 이해했었다. 처음 이곳 노만 국경을 방황하면서 무엇인가를 잡은 듯했었다. 그러나 서희와 길상의 혼인을 나는 진심에서 축복하지 못했고 새로운 물결을 타려 할 때 왜 난 내 언동은 어릿광대로만 느껴졌을까.' "장동지." "네." "십오륙 년 전 일이군. 내게 최치수라고 괴팍한 친구 한 사람이 있었지. 그러니까 그대가 장동지 지금 나이쯤 됐겠군. 그 친군 비명에 갔지만... 내가 이곳으로 떠나올 때 그 친구... 자네가 마지막 강을 넘으려 하는 것은 누굴 위해서? 백성인가 군왕인가, 하고 묻더군.허허헛... 악의에 차서 한 말이었지. 나느 백성이라 하기도 어렵고 군왕이라 하기도 어렵고 굳이 말하려면 이 산천을 위해서, 그렇게 말할까? 했던 것 같아. 지금 생각하니 군왕이면 군왕 백성이면 백성이지 산천은 무슨 놈의 산천인지, 결국 땅덩어리 얘기겠는데 사람 없는 땅에 무슨 뜻이 있을까..." "산천은 조국이고 조국이면 민족은 함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공연한 일을 생각하십니다." 근간의 이동진 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장인걸은 위로하듯 말했다. "아니지. 그때 분명히 말했던 것 같애. 군왕이라 하기도 어렵다는 말을 했거든. 오늘날 내 허점은 십오 년 전 이미 그때 그 말 속에 있었던 게야. 나는 어느편이냐 어느편에 속하느냐. 모호했지. 군왕에 대한 역도들로서 동학당 농민들이 학살당한 그 시절에. 십오 년 세월이 지난 지금 나는 왜놈에 의해, 혁명군에 의해서 조선과 청국의 두 왕조가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느 내가 어느편인지 알질 못했고 내 나라 내 땅을 위해서. 내 나라 내 땅, 거 좋은 말이지, 그 얼마나 좋은 말인가? 허허헛 허허허허..." 웃음 소리가 어둠 속에 메아리 친다. "선생님, 우리 숙소로 가지 말고 술집에 안 가시렵니까?" "이 사람아... 술이야 심씨댁에서 하지 않았나." "그게 어디 술입니까? 병아리 오줌이지. 그나마 마우재 양반댁이라서 그놈의 격식은. 술은 술집에서 마셔야 합니다. 가시지요." 그들은 가던 길에서 방향을 바꾸었다. 조선인이 경영하는 주점에 들어섰을 때 주점 안엔 담배연기가 자욱했다. 최도현댁 심부름꾼 두 사람과 젊은 연락원 한 사람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동진과 장인걸은 그들을 피해 구석진 자리에 가서 앉는다. 럼주를 마시면서 장인걸은 주정 비슷이 말했다. 독한 술이라 주기가 쉬 오르기도 했었고. "선생님은 아직 목욕을 안 하셔서 그렇습니다." "뭐이라구?" "목욕치고도 여자 목욕 말입니다. 술과 투전과 아편은 그만두구 요. 그 술과 투전과 여자 중에서 청백리 후손의 탈을 벗기엔 여자가 젤이다, 그 말씀입니다. 푸욱 빠져보시란 그 말씀입니다. 체면 차리느라 남의 눈 피해가면서 그러지들 마시라 그 말씀입니다. 외고 펴고 오입쟁이 한번 되어보시라그요." 말뚱말뚱한 눈을 하고서 장인걸은 선생이라 부르는 사람에게 실로 대담무쌍한 모욕을 퍼부었다. 술집으로 가자 한 것도 어쩌면 그말을 하기 위해선지 모른다. 이동진의 눈은 게슴츠레했다. 무슨 버르장머리냐! 할 만도 한데 오히려 기대나 했던 것처럼 듣고만 있다. "기생방에서 에헴! 그건 안 됩니다. 이곳에 기생방이 있을 턱도 없지요만. 여잘 가지고 논다 생각지 말구요, 너무 억제하면 심신에 해롭느니 못난 짓이니 하시지도 말구요, 여자한테 한번 빠져보시라 그 말입니다.! 체통요? 도덕? 군자지도? 다 내팽개쳐보십시오. 그러면 인간의 살갗가 살갗이 닿는 것 이외 아무것도 없을 거란 말입니다. 상놈 양반, 식자고 까막눈이고 없어질 거란 말입니다. 사실 선생님이 이곳에 오셔서 고생하시는 것, 향리에서 처자 궁둥이나 뚜드려주시고 사시느니보다 못할 것이다. 그 말씀 드리고 싶소, 왜냐하면 선생님은 처자 생각에 피를 줄줄, 네 마음으로 고통하십니까? 하시겠지요. 그러나 남아장부 할일을 하는데 으흠! 하시는 거 아닙니까? 남아장부도 좋기야 좋지요. 그러나 인간이 더 좋습니다. 남아장부도 필경엔 사람이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그놈의 남아장부탓으로 선생님이 거추장스러워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군왕이라 할수도 없고 백성이라 할 수도 없고 산천 얘기가 나오는 거지요." 젊은 연락원과 최도현댁 심부름꾼은 어느새 가버렸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마우재, 그러니까 목공 예르밀이 수염을 흔들며 입을 함박같이 벌리고서 그 또래의 사내들과 떠들어대고 있었다. 장인걸은 계속 횡설수설이었다. "선생님 저는 말입니다, 군왕? 물론 군왕은 아니구요, 백성보다 조국보다 저는 말입니다! 내 처자를 죽인 자들! 네, 그자들에 대한 보복심이 제일입니다. 뼈를 깎고 살을 저미니까요. 네. 보복심입니다! 내 실책에 대한, 뼈를 깎고 살을 저미는 뉘우침이구요!" 쎄리판 심 집에서 나와가지고 함께 길을 거닐며 한 자신의 말을 장인걸은 뒤집어엎는다. "애국애족이 뭡니까. 애국애족은 피가 통해야, 피란 말입니다. 싸늘하게 식은 피말구요 펄펄 끓는 피 말입니다. 그건 시초에 부모형제 처자식에서 시작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제가 옛날에 미친 것은 헛미쳤던 것입니다. 그, 그렇습니다! 헛미쳤기 때문에 처자를 죽인 겁니다. 바로 그놈의 남아장부라는 허깨비 때문에요. 처자를 죽인 겁니다. 바로 그놈의 남아장부라는 허깨비 때문에요. 처자를이, 잃은 후 저, 저는 참말로 미쳤습니다. 애국애족의 신념도 생기구요, 가차없이 한점 주저없이 왜놈과는 하늘을 같이 아니 하겠다는 맹세를 해, 했습니다. 했지요? 그리구 비로소 비, 비로소 고통과 슬픔에서 일어서는 힘을 어, 얻은 것입니다." 하다가 장인걸은 주먹으로 탁자를 쾅 쳤다. "심금녀 그 여자 좋아합니다. 사랑합니다! 쎄리판 심 집에 맡기지만 않았더라면 버, 벌써 사고가 났을 겁니다. 네? 심씨 부처가 결혼을 원한다구요? 압니다. 알아요. 얌전하게 말이지요? 얌전하게... 하하핫핫... 얌전할 적에는 생각이 깊어지니까요. 안 되지요. 그 여자 앞날을 생각하게 되니까요. 남보고는 빠지라면서 너는 왜 안 빠지느냐구, 그러시겠지요. 선생님, 이거 빠진 겁니다. 안빠지고서야 그 여자 앞날을 새, 생각하겠습니까? 빠, 빠진 것보다 더하지요, 더해요. 그여자 안아보고 싶어요. 탐이 납니다!" 두 사내는 상당히 술을 마셨다. 밤도 깊어졌다. 목공 예르밀 일행이 남아 있었다. 예르밀이 주먹을 내밀고 아래턱도 내밀고 이빨을 악물며 눈알을 굴린다. 싸움이 났는가 싶었으나 그게 아니었다. 누구의 흉내를 낸 모양, 까르르 깔깔 웃음 소리가 터져나온다. 주점 여자가 그들 곁에 다가서며 제법 그럴싸한 러시아 말을 지껄였다. 장인걸은 "선생님! 우린 뜨내깁니다! 선생님도 저도 모두가 뜨내기란 말입니다. 만주 일대 연해주 일대에 산재해 있는 수, 수십만 우리 개척민들에게 말입니다!" 그새 얘기의 내용은 사뭇 달라져 있었다. "우린 개척민들에게 있어선 군식굽니다. 그들을 계몽하여 그들에게 독립운동 사상을 고취하고, 그거 망상입니다. 처음부터 잘못이었단 말입니다. 똑똑히 기억해야 할 일은, 그렇지요, 개척민 그네들은 조선 위정자 밑에 살 수 없었던 가난뱅이들이었고 우린 왜적 치하에서 살 수 없었던 민족주의자들입니다. 그네들은 황망학 무인경을 피땀으로 일쿠었습니다. 피땀으로 일쿨 때 그들에게 보호해줄 정부도 호소해줄 위정자도 없었습니다. 민족주의자 조오치요, 독립투사 얼마나 훌륭합니까? 그 훌륭한 양반들이 나라 잃고 이곳 타국에 와서 개척민들, 일찍이 버림받았었던 그네들을 언덕 삼아 비비댄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으나 그래 그네들에게 호령하고 지도할 푼수가 되나요? 애국애족이면 단가요? 국토회복이면 단가요? 염치없는 짓 아니고 뭡니까? 그들에겐 피땀 흘려 일쿠은 땅보다 버림받았던, 은덕이라곤 받은 일이 없는 조국이란 게 더 소중할 리 없지 않습니까? 제가 무슨 얘길 하는고 하니 그네들에게 주도권을 주라 그 얘깁니다. 그래야만 수십만 이민들은 한 깃발 밑에 모일 거란 그 말입니다. 그들 스스로, 그들 속에서만이 조직은 가능하고 공고할 것이며 확대될 거란 그 얘기죠. 홍수전이든 이수성이든 양수청이든 그들 속에서 나와야 한다 그 얘깁니다. 일전에 권선생께서도 말씀하셨지만 동학이나 태평천국에 동원된 그 엄청난 민병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거지요? 지금 이곳엔 모두 잘나고 슬기로운 대가리들만... 총 몇백 정 가지고 뭘 하겠다는 거지요? 수십만 이민들에 수천의 독립군, 수천이나마 그게 뭉쳐진 것도 아니잖습니까. 물론 누워서 떡먹듯 되는 일 아니라는 걸 저도 잘 압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뜯어고쳐야 할 것은 그네들을 종속적 존재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 그겁니다. 군자금을 내라! 우리는 독립군이다! 편리를 보아주게, 우린 독립군이다! 그 얘기는 국내에 살 만하여 남은 사람들한테나 할 일이지요. 안그렇습니까? 최재형 씨가 있지 않느냐 하시겠지만 행동 범위가 좁구요, 솔직히 말해서 식자 몇 사람의 무대 아니냐 말씀입니다. 반일 감정만 유도할 뿐 밑바닥 사람들에겐 미치지 못하고 있소. 군자금을 내라 편리를 보아주게, 그럴 게 아니라 수십만 이민들 모두가 일선에 서게끔 시일이 걸리더라도, 전투가 아니더라도, 제가끔 생업을 영위하면서 그물고리처럼 맺어나가야 한다 그 얘기," "점잖으신 분들이 오늘밤엔 웬일이세요? 졸려 죽겠습니다." 주점 여자가 살랑거리듯 걸어오며 웃었다. 주점에 남은 사람은 두 사람 이동진, 장인걸뿐이었다. "어 참, 이거." 두 사내는 마지못해 일어선다. 장인걸이 셈을 하고 밖으로 나갔을 때 어둠 속에 이동진이 뻗치고 서 있었다. "장동지." "네." "걷자." 걷자 아니 해도 걸어야 할 것을, 주점 앞에서 얼마나 걸어갔을까. "장인걸!" "네?" "너 나한테 좀 맞아야겠다." 말이 끝나기 전에 이동진은 장인걸의 뺨을 연거푸 갈겨댄다. 졸지간이긴 했으나 장인걸은 허수아비처럼 맞는다. "남아장부가 널 때린다. 나는 남아장부 아닐 수 없고, 중구난방도 하근이야!" 다음날 이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면했다. 그리고 이틀뒤 조선에까지 동행하기로 한 공노인과 함께 혜관이 찾아왔을 때 이동진은 지극히 평정한 마음으로 그들을 대하였고 서희가 생남하였다는 소식도 담담하게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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