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10장25-37절 장성한 분량에 이를수록
우리가 사는 시대를 초개인주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우리나라는 단독가구가 33.4%에 이르고 2인 가구를 포함하면 60%에 육박합니다. 방안에서 나오지 않고 몇 달씩을 지냅니다. 그런 것이 사회구조도 영향을 미쳐 가까운 사람들하고만 지내려고 합니다. 이전에는 친척이 사돈네팔촌까지였지만 지금은 부모형제로 좁아졌습니다. 점점 시야가 좁아지고 관계가 축소되고 있습니다.
극단적 이기주의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이 땅의 삶이 피폐해져 갑니다. 그런 변화는 성도에게도 교회에게도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영광의 영생이 시작되었는데 장성한 분량에 대한 이해를 하지 못하고 관계가 축소되면서 영광의 영생을 누리지 못하고 인격과 삶과 공동체가 점점 메말라져가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율법사의 질문에 답하시고 질문하시는 말씀을 통해 우리가 영광의 영생을 누리는 장성한 분량에 이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주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천국을 확산시키고 천국을 누리며 살다가 하늘의 첫 열매로 추수되려면 어린아이의 일을 벗고 장성한 성도가 되어야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장성한 분량에 이르면 나타나는 증거가 어떤 것인지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장성한 분량에 이른 증거가 무엇일까요?
성경을 일고 듣고 하는 것, 예배를 드리고 주님 앞에 나오는 것, 그것더 장성한 증거입니다만 진짜 증거는 이웃의 지경이 넓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의 모든 것이 예배의 모든 것이 신앙의 모든 것이 삶에 배어들어 삶이 그리스도의 살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가 성장하면 점점 확장됩니다. 늙어 생명이 약해지면 점점 오그라듭니다. 이처럼
성장의 특징은 확장입니다. 사망의 특징은 소멸입니다. 장성한 분량의 증거는 이웃의 지경이 얼마나 넓은가에 있습니다.
복음의 씨가 우리마음에 뿌려져 자라면서 시작되는 이웃의 지경은 어디일까요?
그리스도의 공동체입니다.
교회가 이웃의 출발입니다. 함께 모이고 예배드립니다. 그런데 이웃이 되지 못합니다. 뒤만 보고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서로 말을 나누고 음식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런데 낯선 이들과 함께 삶을 나누고 식사를 하고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처음 시작이 너무 어렵습니다. 풍선을 부는 것처럼 힘이 듭니다. 벽지 발라보셨습니까? 잘라놓은 벽지처럼 자꾸만 서로에 대하여 오그라듭니다. 그러나 복음은 품게 합니다. 손을 내밀게 합니다. 따뜻이 맞이하게 합니다.
이 이웃의 확장이 교회 안에서 실패한다면 우리는 영적으로 미성숙에 머물러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안에서 더욱 장성하면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넘어 이디로 이웃이 확장될까요?
불신자에게까지 확장됩니다.
물론 악한 자들에게 역사하는 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죄와 저주에서 풀려나야 합니다. 주님은 [눅13:11] 18년이나 메여있던 여종을 풀어주셨습니다. 안디옥교회에서는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들어갑니다. 귀족 왕족 아프리카사람 유대인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사도는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성령의 역사를 따라 대륙을 넘어갑니다.
그것이 주님의 마음으로 채워진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성숙의 증거입니다. 교회 밖의 양들을 우리의 이웃으로 느끼고 있으신지요? 타인이라고 무관심하게 지나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비록 직분과 사역이 남달랐지만 영적으로는 미성숙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만이 아닌 지역사회에 유익하도록 이웃의 폭을 넓혀야 합니다.
그리고 대륙과 인종을 넘어 이웃을 넓혀야 합니다.
우리가 주안에서 더욱 장성하면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넘어 이디로 이웃이 확장될까요?
만물까지 확장됩니다.
지금 지구상의 모든 만물 중에 인간처럼 무서운 사람은 없습니다. 맹수가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자연재해가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무섭습니다. 사람들은 동물들의 서식지를 파괴하고 그리고 살려고 몸부림치며 밭으로 도시로 내려오는 동물을 극약으로 죽입니다. 우리는 살리는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았지만 그리스도의 장성은 분량에 이르지 못하여 만물을 도구로만 여기고 있습니다. 만물을 이웃으로 느끼는 사람 그들의 고통을 싸 메어주는 사람이 장성한 사람임을 사마리아인을 통해 주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생명을 가졌기에 우리 안에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우리를 통해 주님이 주님의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선교사였습니다. 이 땅에 파송되어 이곳에 무덤을 두신 선교사였습니다. 사도바울도 서바나까지 가리라 말했습니다. 그것은 이웃의 확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주님의 말씀은 주님의 생각입니다. 주님의 살점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를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게 합니다. 그리고 자라고 있는 증거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이 이웃의 넓이입니다.
우리는 깊이깊이 더 깊이 내면으로 인격으로 신의 품성에 다가 가야 합니다.
우리는 위로 위로 올라가 올라가 하늘 아버지의 하늘 영광에 다가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넓게 더 넓게 넓혀가야 합니다.
아니 그렇게 우리 안에 예수생명이 생명이 하십니다.
그것이 나의 복음이고 그들에게 복음이 됩니다.
정죄가 복음이 아니라 내가 피를 흘려 남의 죄를 덮는 것이 복음입니다.
주님이 복음이셨듯이 이제 우리가 복음이 되어
우리의 인생여행의 경비를 남을 위해 나누어 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