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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선한 선생님이여, 영생을 상속받으려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없다.(누가복음 18:18) 누가 복음의 이 구절은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 여겨지고 하늘에서 높임을 받는 것과 연관하여 종교적 지배계층과 죄인을 노골적으로 대조시킴으로 질문의 핵심을 건드리고 있다.
대조적으로 오늘의 구약성서 두 본문은 하나님의 지속적인 사랑과 인간의 약함에 관한 가르침을 준다. 요엘서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시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주의 이름을 찬양한다.(요엘 2:26-27) 하나님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얻도록 당신의 영을 인류 모두에게 퍼붓는다.(요엘 2:28,32) 비슷하게 시편 65편은 우리의 죄와 악행으로 인해 슬픔, 죄책, 수치 등이 우리를 뒤엎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로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 가까이 계신다고 말한다.(시편 65:3;5) 느헤미야 9장 6-37절에서 지속적인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이 인간의 오만과 극적으로 대비된 기념비적인 고백의 기도를 발견할 수 있다.
전적 타락. 칼 바르트는 그의 대작 『교회 교의학』 중 “인간의 태만과 비참”이란 제목의 한 장에서 누가복음 본문의 비유를 간결하게 논하고 있다. 바르트에게는 창조주 하나님의 선함과 피조물의 악함 간에 뚜렷한 차이가 있다. 이것은 예수가 그의 청중이 이해하기를 바라는 확실한 요점이다. 바리새인은 자신이 행한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신분의 근거가 된다고 여긴다. 그의 기도는 그가 행하고 있는 것에 관한 것이다. 세리는 자신의 행위를 부끄러워한다. 그의 기도는 그가 행했던 것에 관한 것이다.
바르트 말에 의하면 두 사람은 하나님 앞에 동등하게 “부끄럽다”고 하지만 둘 간의 명백한 차이는 바리새인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부끄러움은 그들의 죄의 결과이자- 칼빈이 그것을 이해한 대로- 그들의 전적 타락의 결과이다. 바리새인은 그 자신을 다른 사람들, 심지어 하나님 보다 높였기에 거만과 교만의 죄에 빠졌다. 그는 자신이 도둑과 창기 심지어는 세리보다 더 낫다는 것에 주목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표한다. 그는 단식과 기부에 관한 그의 종교적 행위들을 자랑했으며 스스로를 의롭게 여겼다. 반면에 세리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 앞에 자신을 낮추고 부끄러워했다. 그는 진정으로 그의 악행을 인정했다. 가슴을 치면서 한탄하며 온 존재가 무너졌다.
바르트는 두 사람의 수치를 하나님의 거룩과의 대조의 결과로 해석하지만, 칼빈은 타락을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에 의해 범한 원죄의 결과로 이해했다. 원죄의 교리는 아담의 죄가 모든 인류에게 전가되었다는 신학적 관점이다. 칼빈은 이런 식으로 그것을 서술했다. “(아담이)본성의 질서를 몽땅 왜곡시켰을 때, 그는 그의 배신을 통해 전 인류를 파괴에 넘겨주었다.” 바울은 인간의 타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한 사람의 불순종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죄인이 되었다.”(로마서 5장 19절) 칼빈이나 바르트와 같은 개혁 신학자들은 성서가 인간이 원죄로 인해 전적으로 죄의 지배하에 있게 되었다고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교리는 “전적인 타락(total deprivity)”으로 종종 언급된다. 그 핵심은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a human being cannot not sin.) 다른 말로하자면 우리는 죄를 짓도록 운명 지어졌다는 것이다.
칭의의 선물. 개혁주의적 조직 신학의 가르침의 렌즈를 통해서 보자면. 이 비유는 모두가 원죄의 지배를 받고, 우리가 본질적으로 완전하게 타락했다는 것을 인정할 때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수긍하게 된다는 것을 매우 적절하게 지적한다: (1) 우리가 죄에 깊이 빠져있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가 없다 (2)우리는 구원에 관한 한 전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하나님께 의존한다.
이 구절에서 솔직하지 못한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 그 자신을 높임으로 자신이 의롭게 여김을 받기를 원했다. 그는 하나님의 편에 서기 위해 그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행했고, 무엇을 행하지 않았는지에 관해 기도했다. 반면 세리는 그 자신이 죄로 가득함과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절대적인 요구로서 그 자신을 겸손히 낮추었다. 비유에 끝에서 그 바리새인은 그가 자신을 높였기 때문에 낮아졌고, 세리는 그의 낮아짐 때문에 높아졌다. Donald Guthrie에 따르면, 그 바리새인은 그 자신과 인간 상태에 관해 지나친 낙관주의적 관점을 보이고, 세리는 원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더 강조됨으로써 비관적인 관점을 보인다.
이 구절에서 키워드 중 하나가 “의롭다 인정을 받다(justified)”이다. 세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위해 겸손하게 기도했다. 본문은 말한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자기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이 세리이다.”(14절) 칭의의 교리는 하나님의 시각에서 어떻게 우리가 의로움의 상태에 이르는지를 묻게 한다. 바리새인은 그의 자신의 의로움을 위해 그 자신을 의지했다. 세리는 의로움을 위해 하나님을 의지했다. 그는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만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자비는 그에게 값없이 주어졌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셔서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확증했다”(로마서 5장 8절)
에베소서 2장 8절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확언한다.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칭의는 우리의 죄책과 수치를 인정하고, 그 결과 우리가 용서받았고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들이셨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종교 개혁의 모토 중 하나는 “sola gratia”(오직 은혜)의 개념이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의롭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오직 은혜만이 그리스도의 의를 상속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어떤 다른 수단에 의해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제안하는 것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거절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가 다음과 같이 적을 때 이것을 반복했다. “일하는 자에게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로마서 4장 4절)
주석적 관점
- 누가복음에서 예수의 비유는 흔히 도덕적 목적으로 사용된다. 그 비유들은 하나님나라의 신학적 체현을 위한 것만큼 기독교인으로서 적절한 행동을 권고하는 “가서 그대로 실천하기”를 담고 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진지한 이야기를 담고 있긴 하지만.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는 그러한 이야기이다.
- 누가는 예수가 이 비유를 교만과 종교적 자부심에 반하여 설파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비유는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고 남을 멸시하는 몇몇 사람들”(9절)에게 말한 것이다. 칼 바르트(Karl Barth)는 교만을 신앙인들의 가장 큰 죄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교만은 근본적으로 우상숭배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피조물, 선물을 준 사람과 선물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누가도 이에 분명히 동의할 것이다. 다른 사람을 경멸하는 사람들은 정의가 하나님께 올바르게 속한 사람의 특성이 아니라(눅18:19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선한 분이 없다”) 자신의 특성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비유에서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선함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기보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자신의 고귀한 행동들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그의 기도가 보여주는 겸손과 모순되는 것이다.
- 10절에 상황이 나와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세리였다.” 두 사람은 공통점도 있고 차이점도 있다. 둘 다 유대인이다(성전에 올라갔다 것). 그리고 둘 다 경건하다(기도하러 갔다). 바리새인은 대단히 경건하다고 묘사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가 성전으로 갔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만인제사장직”을 추구하는데 앞장서는 사람(평신도)들이고, 그들의 종교생활의 자리는 성전보다는 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성전에서 기도한다. 다른 사람은 세리이다. 그는 바리새인인과 같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세리들이 로마에 협조하고 돈을 취급하고 민중들을 착취하기에 특히 경멸했다.
- 바리새인은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11-12). 비록 그는 하나님을 자신의 선함의 원천으로 인정하는 듯 보이지만, 또한 하나님이 이런 훌륭한 예배자를 가진 것이 얼마나 행운인가 하나님께 상기시키고 있다. 그 사람은 십계명에 복종하여, 훔치거나 탐내지 않고, 불의를 행하지 않고 간음하지도 않는다. 그는 지정된 날에 금식할 뿐만 아니라 하루 더 한다. 십일조도 낸다. 샤론 린지(Sharon Ringe)는 바리새인의 기도를 시편17:3-5과 비교한다. “주님께서는 나의 마음을 시험하여 보시고, 밤새도록 심문하시며 샅샅이 캐어 보셨지만 내 잘못을 찾지 못하셨습니다. 내 입에서 무슨 잘못을 발견하셨습니까? 남들이야 어떠했든지, 나만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따랐기에, 약탈하는 무리의 길로 가지 않았습니다. 내 발걸음이 주님의 발자취만을 따랐기에, 그 길에서 벗어난 일이 없었습니다.” 이 사람은 귀감이다. 그가 아닌 존재가 바로 세리이다.
- 고대 팔레스틴의 세리가 물론 오늘날의 세금을 집행하는 세무청 직원과는 다르다. 그들은 가난한 자를 사취하여 부를 누리는 부패하고 권모술수를 부리는 위탁업자들이다. 부자로 불리는 세리들은 이웃들에게 쥐어 짤 대로 짜 모은 금액 중 상당부분을 로마에 바친다. 비록 그가 맡은 지역에서 개인적으로 부과된 책임이 있지만, 그가 원하는 대로 돈을 거둘 수 있는 재량권이 있고, 그가 받을 이익 이상으로 얼마든지 거둘 수 있었다. 회개하는 세관장 삭개오(19:1-10 다음주 본문)가 그들의 관습을 암시한다.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19:8).
- 세리들은 종종 이방인들이었는데 그들은 부정축재의 완벽한 피라미드 구조를 만들기 위해 그들의 책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하청을 주기도 했다. 그들이 심한 경멸을 받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세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인정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자비에 내맡긴다. 그는 시편기자의 도움을 받아 기도한다. “하나님,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으로 내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의 크신 긍휼을 베푸시어 내 반역죄를 없애 주십시오”(시51:1). 그러한 이유로 누가는 하나님의 자비로 “의롭다고 인정받았다”(눅18:14)고 했고, 자신을 의롭다고 여긴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지 못했다고 했다.
- 한편으로 두 기도자는 하나님께서 교만보다는 겸손을 원하신다는 것을 강조해서 보여준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18:14b)라는 말은 예수가 “보아라, 꼴찌가 첫째가 될 사람이 있고, 첫째가 꼴찌가 될 사람이 있다”(눅13:30)라고 말한 것의 교정이요 개작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전반에 걸쳐서 나타나는 주제인 경건과 윤리의 강한 연결을 보여주고 있다. 린지는 이 비유를 지난 주 성서본문과 연결 지어서 두 본문 모두 올바른 삶에 관심을 보여준다고 했다. 불의한 재판관과 바리새인 모두 하나님의 정의에 의해 그들의 평결이 뒤집어 졌다. 그들은 “그들 사회에서 지배계급에 호의적인 사회적 경제적 경쟁 시스템과 명예와 지위의 계급구조에 갇혀있다. 두 비유 모두 기도는 그러한 체제를 전복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비록 세리가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고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갔지만, 우리는 그의 회개의 결과를 알 수 없다. 그가 실제로 효과를 낸 자비의 요청은 반드시 바른 행동을 낳아야 한다. 예수께서 다른 세리인 레위를 불렀을 때,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고, 자기 집에서 예수께 큰 잔치를 베풀었다(눅5:27-32). 삭개오가 예수의 부름에 응했을 때 그는 그가 훔친 것을 반드시 갚겠다고 약속했다(눅19:1-10). 아마도 우리도 이 무명의 세리에게서도 같은 일을 예상할 수 있다.
목회적 관점
당신은 누구인가? 바리새인인가 아니면 세리인가? 이 비유를 읽을 때, 자신을 이 역할 혹은 다른 역할에 놓거나 아니면 양쪽 편 입장에서 이야기를 듣거나 하지 않고는 이 비유를 읽을 수 없다. 우리 가운데 누가 일요일 아침에 약간이라도 자기만족을 느끼지 않겠는가? “하나님, 나는 다른 사람-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골프를 치러 간 옆집 사람; 하나님이 우리나라 편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당에 속한 내 친구; 예배당에서 내 두 자리 앞에 앉아있는 단정치 않아 보이는 택시기사-과 같지 않아서 감사합니다: 나는 매주 일요일 아침과 수요일 저녁에 여기 있습니다; 나는 신실하게 서약합니다; 나는 세 개의 중요한 교회 위원회에서 봉사합니다.”
우리가 세리의 겸손을 가질 때는 우리가 일을 대대적으로 망쳐놓았을 때 뿐이다. 회복 프로그램 중인 사람들은 이것을 “밑바닥 치기”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라도 때때로 큰 실수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도 세리의 말을 따라하게 된다.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13절)” 교회는 이런 식으로 확실한 참회와 겸손을 하는데 상당히 부적당한 장소가 될 수 있다. 우리가 모두 죄인이라는 생각이 주는 위로는 우리의 특별한 죄에 대하여 자세하게 듣기를 원하게 되지 않으니 참 감사한 일이다.
이 비유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인 우리 자신에 관하여 말한다.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바리새파 사람처럼 행동하려는 생각을 참회하는 것이 우리를 날카롭게 아프게 한다면,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 세리의 겸손함을 가지게 한다. 이 비유는 또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비에 관하여 우리에게 말한다. 하나님은 자기 희생을 통해 구속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어떤 일을 해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다. 자선과 같은 좋은 일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그것은 적어도 우리 힘으로 “성취”할 수는 전혀 없다. 의롭게 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죄인들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자비를 통해 온다.
예수는 성전에서 기도하는 두 사람에 관한 짧은 이야기에 들어 있는 심오한 진리를 전해준다. 전형적인 예수의 방법으로, 겉모습에 속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한 사람은 사회에서 거룩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는 장엄한 독선에 싸인 채 성전을 여기저기 걸어 다닌다. 좋은 교인들에게 욕을 먹는 사람은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 자기 집으로 내려간다.”(14a) 이 비유에서 현 상태는 뒤집어진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14b, 14:11)
우리가 의롭다고 우리 스스로 믿으면서 다른 사람을 경멸하는 건 얼마나 매력적인 일인가?(9절) 우리는 주일마다 우리의 선한 의무를 하고 우리의 죄를 고백한다; 우리는 헌금봉투를 헌금바구니에 넣거나 자동이체가 되게 한다. 우리는 아주 여러가지 방식으로 교회와 세상을 섬긴다. 우리에게 만세를. 우리가 하는 규칙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야유를. 그들이 하는 일은 가증스러워서, 우리와 함께 같은 교회 의자에 앉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이 정도로 극단적으로 정죄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기대하는 행동의 표준을, 특별히 종교적인 실천에 있어서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경멸의 눈으로 보지 않기는 힘들다.
예수는 믿는 사람들에게 율법을 충족시키는데 있어서 자신의 노력을 신뢰하지 말고 자비로우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낮추라고 도전한다. 신뢰가 필요하지만, 우리 자신을 믿거나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우리의 능력을 신뢰하라는 건 아니다. 여기서 요청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신뢰하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성취를 아주 높게 평가하는 문화에서는 무리한 요구일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율법을 충족시키는 우리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도록 조심하더라도, 우리가 율법을 무시하게 되지는 않는다. 제자도는 모순되는 상황을 잘 해결하는 것이다.
스코틀랜드의 Iona 공동체는 복잡한 세상에서 제자직의 다양한 기쁨과 도전을 곡조와 가사로 명료하게 표현하는 은사를 가지고 있다. “목수를 위해 즐겁게 노래하라”라는 그들의 노래에서, 예수는 한때 우리의 의미와 위로의 근원이었던 잘못된 것들을 버림으로 찾아오는 해방을 축하하면서. “나와 함께 가자, 함께 돌아다니자”라고 예배자들을 초청한다. 합창 부분은 (예수라는 이름의) 목수가 연장을 버리는 것을 축하한다. 계속해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들의 규칙을 버리는 것을 기쁘게 노래하라! 어부가 그물을 버리는 것을 기쁘게 노래하라! 사람들이 더 이상 후회하지 않게 되는 것을 기쁘게 노래하라!”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들의 후회 역시 버린다는 것을 주목하라. 이것은 세리의 겸손이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도록 확인한다. 하나님께서 자비로우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는 해방은 우리의 사역에서 혹은 우리 신앙 공동체에서 우리가 성취한 것에 대한 의존을 버릴 수 있다는 뜻이다. 그들은 그들의 자리를 가지고 있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과 가난한 형제들의 관계의 중심은 아니다.
이번 주일을 위한 개정된 성서정과에서 복음서 독서가 디모데후서 4:6-8, 16-18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낯선가? 6-8절에서 바울은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는 확신과(7절) “의의 면류관”이 그를 위해 마련되어 있다는 확신에 대해 말한다. 이것은 예수의 비유에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하는 말과 너무나 비슷하다. 하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편안하게 서 있었다. 바울은 감옥에서 쓰고 있다. 바리새파 무리들은 자기보다 덜 의롭다고 간주하는 사람들을 비웃는다; 바울은 면류관이 “나에게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속한 것(8절)이라고 주장한다.
균형이 열쇠다. 우리는 율법을 성취하는 우리의 능력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율법을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비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낮춘다. 하지만 주님의 약속을 확신한다. 바리새파 사람이나 세리나 모두 본래 하나님의 성전에서 환영받는다. 즐겁게 노래하라!
설교적 관점
-비유는 마치 낚시할 때 미끼로 쓰는 고기와 같다. 그것은 밝은 색깔로 만들어져 움직이면서 주의를 끌고 또 그 끝은 날카로운 작은 바늘을 가지고 있다[비유를 잘못 이해하면 해가 된다는 의미]. 바리새인과 세리의 이 비유는 단지 그냥 비유일 뿐이다. 표면적으로 이 비유는 영적 교만의 위험성과 참회가 주는 유익에 관한 쉽고도 간결한 이야기이다. 그렇더라도 설교자는 청중들이 진리를 얻을 수 있는 메시지를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이 본문을 해석함에 있어 오늘날 청중들이 빠지기 쉬운 어떤 함정이 있음을 염두에 두는 일이 중요하다.
-바리새인들과 세리들은 우리에게 있어 성서에 자주 등장하는 모습들이다. 긍휼과 성찰은 없이 스스로 의롭다 여기고 규율을 강조하는 종교적 지도자라는 이미지는 회개하고 연약하며 순진하고 겸손한 세리와는 대조가 된다. 사실 “바리새”라는 단어는 형용사 형태로 일반적인 영어에 도입되어 위선과 자기 의로움으로 행동하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그래서 설교자는 이 이야기를 처음 듣는 청중들[예수의 청중들]에게 바리새인과 세리가 지닌 특성을 말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 우리의 이해와는 다르다는 점을 말함].
바리새인들은 진보적 성서해석자였고 율법의 목적은 토라를 누구나 지킬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반면 세리는 이들이 미워하던 로마의 협력자로 여겨졌다. 겸손하거나 순진하기는커녕 이들은 때로는 부패하고 부도덕하며 정직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런 익숙하고 정형화된 개념에 빠지지 않고 설교들 듣는 사람들이 이 비유를 새롭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정관념을 넘어서야 한다.
-이 이야기를 신선하게 들리게 하기 위해서는 설교 내용 안에 1세기 고대근동세계에서 바리새인들과 세리들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일이 필요할지 모른다. 이것은 또 교인들의 경험들에 비추어 공통점이나 유사한 점을 찾아내거나 영적 교만이나 겸손에 관한 설교자의 경험을 소개하는 일 그리고 예배참석자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자랑하고픈 유혹을 받았던 일을 회상하도록 유도하는 일을 뜻할 수도 있다. 그것은 회중들이 다른 사람들의 경건에 대한 추정이나 가정을 다시 생각하도록 돕는 일을 의미할 수 있다.
-피상적으로 이 비유는 겸손을 장려하고 영적 교만을 비난하는 단순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영적 교만에 빠져보지 않고 어떻게 겸손에 대해 설교할까? 분명히 이것은 가장 놀라운 영적인 역설이다. “겸손하라!”(Be humble!) 우리가 어떤 수준의 겸손이라는 단계에 도달하자마자 우리가 얻은 성취에 자부심을(pride) 같도록 유혹을 받게된다.
-비슷한 위험성이 예전에서 드러날 수 있다. “하나님, 죄인인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는 익숙한 외침이다. 그 의미는 분명해보인다: 너의 영적 순결함을 자랑하지 마라; 겸손해라. 너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참회하라 그러면 너는 이 세리처럼 의롭게 되어 집으로 갈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 세리가 그 다음에 이렇게 외친다면, “하나님 나는 저 바리새인처럼 되지 않아서 감사합니다!” 이 세리처럼 핑계대지 않고 우리의 죄를 대면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간청하며 진실로 겸손하게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참회의 기도를 사용하는데도 몇 가지 주의가 필요하다. 만일 참회기도가 예배 순서 안에 보통 들어있다면 이 본문이 말하려는 초점과 예배순서의 참회기도가 잘 일치하는지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설교준비하면서] 필요하다. 만일 참회기도가 고정된 형태라면 설교에서 이 본문을 그에 대한 참고형태로 설명해주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또는 [고정된]참회기도문을 설교본문이나 메시지를 반영하여 바꾸어주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 본문과 이 본문이 경계하는 영적 교만이 예배 시 사용하는 모든 본문과 잘 맞는 지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일단 이 이야기가 지닌 함정을 이해하게 되면 이 본문이 말하려는 주제나 관심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 비유는 종교성이 지닌 위험에 대한 생생한 사례를 보여준다. 이 비유에 나온 바리새인은 무엇보다 종교적인 사람이고 동료 유대인 가운데 지도자이며 하나님의 법을 신실하게 따르기를 바라는 이들에게 영적 가이드 역할을 한다. 그는 종교적 실천에 대해 엄격하고 자신의 돈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분명히 그는 세상의 눈이나 자신의 눈으로 보았을 때 선한 사람이고 종교적인 사람이다. 여기서 문제는 그의 종교적 실천이나 경건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또 하나님께 자신의 것을[경건을] 돌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대부분 우리 회중들에게 있어 이 바리새인과 같은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그들 역시 규율을 잘 지키고 자신에 대해 관대하다. 물론 설교자나 목회자는 늘 이들에게 비슷한 점을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감사의 기도는 이러한 점에서 종종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는 일은 바리새인이 그랬듯이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형태가 우리의 영적교만이라는 유혹으로 진전될 수 있음을 깨우치는 것일 수 있다.
-세리의 기도를 언급하는 것이 적절할 수 있다. 그 진솔함, 소박함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절대적 신뢰는 그 기도를 모범적 기도로 만들고 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자기정당화 (justification)가 이 기도에 뒤 따라 올지 모른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이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핑계없이, 특별한 간구함이 없이, 기대하는 것도 없이, 어떤 것에 대한 요청없이 오직 하나님의 자비만을 구하며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리의 기도를 모범적 기도로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자비를 생각하게 된다. 이 세리의 죄는 의심할 바 없이 사실이고 또 심각하다. 세리들은 일반적으로 세금을 징수한 자들로부터 자신들을 위해 돈을 챙겼다. 그들은 그들 백성을 억압하는 자들과 협력했고 일상적으로 뇌물을 받았다. 다른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는 그것을 반환한 회개한 세리들을 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아니다. 이 비유는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그의 신뢰에만 관심이 있다. 만일 어떤 세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비를 발견할 수만 있다면 어느 누가 마다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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