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 댁은 허리가 구십도 굽어있고 얼굴에는 깊은 골이 사방에 깊이 뻗어
유난히 작은 얼굴에 눈인지 주름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백전노장의 용모다.
그러나 언제나 만면에 웃음을 잃지 않는 예쁘고 고운 하회탈을 닮으셨다 세상 사람들을 낳아 기른 어머니요 큰 누님이다.
숨을 몰아쉬며 걷는 걸음걸음이 지나온 과거시간만큼 멀고 아득하다
원래 아담하고 작은 키인데 다가 굽은 허리 때문에 보리밭에 앉아
풀을 맬 때면 보이지 않아 소리를 지르거나 크게 불러야 그때 등이 먼저
보인다.
부안 댁의 고단한 모습을 대 하다보면 나의 낭비되고 있는 삶이 부끄러워지고 경건해져 숙연한 생각이 든다.
“젊었을 때는 무척 예뻤을 것 같은데 맞지요 ? ”
“예뻐 봐야 뭣에 쓰간디 ?
자신의 삶보다 남편의 삶과 자식들의 안녕을 위해 행복이 뭣인지 자신의
즐거움이 뭣인지 알 겨를이 없이 남존여비의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부안 댁,
열아홉에 시집와서 친정에는 한번도 가보지 않아서 친정동네 이름도
잊어버려 그저 부안이 친정이라 해서 내가 부를 때 ‘부안 댁’ 이다.
결혼사진도 없어서 아들의 성화에 하얀 두루마기 입은 신랑과 찍은 사진,
하얀 적삼과 치마를 입은 허리에는 꽃 댕기 같은 허리띠가 질끈 동여 메어
있는 부부사진을 읍내에 나가서 찍었단다.
그리고 지게에 가득 얹어진 짚단 옆에서 두 부부가 찍은 다정한 사진은
행복하게 보이려고 표정을 간추린 흔적이 역력하다.
남편을 30대에 여의고 홀로 소 두 마리를 기르기 시작하여 지금은 70여두의
한우를 아들에게 물려준 여인이시다
“이것이 몇 살 때 찍은 거래요 ? ”
“몰라 우리 아들이 찍어준 것이여 ”
어느 날 운전석 뒷자리가 너무 조용해서 돌아보니 하얀 손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소리 없이 울고 게셨다.
나는 요양원 주간보호 센터에서 아침에는 모셔오고 저녁에는 집에 모셔드리는 일을 하면서 부안 댁의 세세한 표정을 읽는데 익숙해 있는지라 필경
어젯밤 아들이나 며느리와 어떤 일이 있었으리라 생각되어 자꾸 캐묻기
시작했다.
안보여야 될 것을 들킨 듯 눈물을 급히 훔쳐낸 그는 창밖을 하염없이
응시하다가 “일찍 죽어야 할 텐데 너무 오래 살아서 이 꼴을 당하고 살아서
어쩔까 모르것소” 말문이 열리니 한탄의 소리가 시작 된다.
내용은 이러했다.
지난 일요일에 마당에 각종 체소를 체취해서 무치고 절여서
밥상에 올렸는데 아들과 며느리가 ‘어머니가 만든 반찬은 안 먹을라요
일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또 밖에 나가서 흙일을 했소?’ 하더란다
어머니의 손때가 묻은 호미와 방석을 깊숙이 감춰버린 후 아들 내외는 어머니가 뙤약볕에 고생하신다고 핀잔을 줬으나 어머니는 한없이 서러웠단다.
남편 없이 고생 하며 먹이고 가르치며 금지옥엽으로 길렀건만 이제 그 사랑을 거절당하는 서러움과, 한 가족 구성원에서 소외되는 허탈이 그렇게
쓸쓸하게 느껴졌단다.
뭐라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침묵만 흘렀다. 효도가 무엇인지 모르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늙으면 자꾸 간섭하면서 가족의 일원에서 제외되는 위험을 축소하려 하는 것이 자연스런 방어기제 일터
우리는 편히 모시는 것만 효도인줄 알고 있으나 그렇지 않을 것 같다
‘당신은 젊었을 때와 꼭 같이 언제나 우리에게 뭔가를 해 주시는 여전한
우리 어머니로서 어머니가 만들어 주시는 모든 음식은 여전히 맛있고 당신의 손맛이 아니면 그 맛을 느끼지 못 한다’ 는 말로 용기와 희망을 드리는 효도야 말로 삶의 의미와 자존감을 지속하게 하는 일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늙음의 공포 중 공허감만 한 것이 있을까. 할 일이 없어지거나 주변의
친구가 별안간 사라져 갈 때나 늙었다는 이유로 특별한 단절을 경험한다면 저렇게 평생 쏟고 쏟아 말라버린 눈물샘에서 한의 눈물이 쥐어짜듯 흐르게 되는구나. 어깨를 토닥토닥 어루만져 드리는 것 말고는 더 할 말이 없어서 등 뒤에서 고개만 숙인다. 나도 그러 했으므로 끝
첫댓글 고귀한 작품, 잘 음미했습니다.
늘 행복한 날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