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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林
孔林은 다른 말로 宣聖林 또는 至聖林이라 부르는 공자와 그 후손들이 전용으로 사용하는 가족묘지이다. 곡부시내에서 북쪽으로 약 1.1Km 떨어진 곳에 있으며, 전체 면적은 약 3천무에 이른다. 魯哀公 16년인 BC479년에 공자가 세상을 떠난 후에 그의 제자들이 공자의 시신을 이곳에 묻었고, 그 이후로 약 2400년 동안 공자의 후손들도 이곳에 묻혔다. 지금까지 이곳에 형성된 묘지는 모두 10만여개나 된다.
공자의 후예들이 이곳에 묻히게 되면서 묘원의 면적은 끊임없이 늘어나, 명대말에 이미 1,800무나 되었으며, 청의 강희제 23년인 1684년에는 3천무가 되었다. 현재 공림의 담장 둘레는 5,591M이며, 大門과 二門 그리고 돌다리가 설치되어있다. 대문 밖에는 숲길이 있으며 그 안에 길이 있다. 현재 공림 안에는 돌로 만든 85점의 기념물이 있으며, 4천여개의 비석이 있다. 또한 오랜 세월동안 조성한 약 42,000여 그루의 송백과 고목이 하늘을 뒤덮듯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그 숲 사이로 60여개의 누각, 정자, 전각과 같은 건물들이 깊이 숨어있다. 그야말로 웅장하고 거대한 인공원림이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공자는 73세에 자신의 천명이 다할 것을 미리 예견하고, 인생이 덧없이 짧음을 한탄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태산이 무너지는구나! 기둥이 넘어지는구나! 철인이 사라지는구나!(泰山壞乎! 梁柱摧乎, 哲人萎乎)!”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안 그는 제자들을 데리고 자신이 묻힐 묘지를 찾으러 다녔다. 그는 후대에 이르기까지 후손들이 길이 번영을 누릴 만한 곳을 찾아 헤맸다. 숱한 고생 끝에 그는 마침내 곡부성 북쪽의 泗水가 흐르는 곳을 골랐다. 子路가 이런 의견을 제시했다.
“이곳은 風脈은 좋지만 전면으로 물길이 없군요!”
그러나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걱정할 것 없다. 秦나라 사람이 와서 물길을 터 줄 것이다.”
공자가 세상을 떠난 지 270여년이 지나자 秦始皇의 焚書坑儒 사건이 일어났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유학을 망하게 하려면 우선 공자묘의 풍수를 파괴해야 합니다. 공림에 하천을 없애려면 공자묘 앞쪽으로 물길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공림과 공자고택이 단절될 것이고, 공자는 더 이상 성인으로서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진시황은 즉시 사람들을 파견하여 공자묘 앞쪽으로 물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공자의 생각이 주효를 한 것이다. 결국은 진시황이 공자묘의 마지막 공정을 담당한 꼴이 되었다. 공림은 별다른 수고로움을 겪지 않고서도 제대로 된 풍수를 갖추게 된 것이다.
중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가장 큰 규모 및 가장 잘 정비된 가족묘지이자 나무와 숲이 어우러진 대형 묘원인 공림은 1961년에 국가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한 가족의 묘원인 이곳이 어떤 매력이 있기에 그리도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찾아올까? 명대의 유명한 시인 李東陽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수 백 년이 지난 오늘날도 앞서 이곳을 구경했던 시인의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墓古千年在, 林深五月寒.
恩沾周雨露, 儀識漢衣冠.
駐蹕亭猶峙, 巢枝鳥未安.
斷碑深樹裏, 無路可尋看.
묘지는 천 년을 두고 변함이 없고,
숲은 우거져 오월에도 추위를 느낀다네.
공자의 은택은 단비나 감로처럼 사방이 두루 젖어들어,
한족이 의관을 바로 할 수가 있었다네.
숱한 방문객이 끊임없이 찾아오니,
새들은 둥지에서 불편하기만 하구나.
깎아지른 비석과 우거진 숲 속에,
길은 없어도 이곳저곳 찾아다니며 구경할 수는 있다오.
1. 萬古長春坊
앞쪽으로 가서 공림을 구경하고자 하면, 곡부성 북문으로 나와 마치 교룡이 하늘로 오르는 듯한 우거진 송백 사이로 난 길을 따라가면 된다. 이곳이 공림으로 가는 神道이다. 이 도로 중간에 우뚝 솟은 건축물이 바로 萬古長春坊이다. 돌로 만든 이 구조물은 6개의 기둥과 5곳의 공간 그리고 5개의 누각이 있다. 꼭대기에는 용과 짐승이 조각된 기와가 덮여 있다. 앞쪽에 있는 공간의 입구 양쪽에는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조각이 있고, 다음 공간에는 두 마리의 봉이 조각되어 있으며, 맨 마지막 공간에도 용이 조각되어 있다.
돌기둥은 사각형이며 가운데 있는 2개에는 浮彫로 雲龍이 새겨져있다. 기둥 전후로 抱鼓石이 있고 그 위에는 각각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작은 獅子가 앉아있다. 명의 萬歷 22년인 1594년에 지은 이 坊은 청의 雍正 년간에 重修했다.
남쪽의 동서 양쪽에는 녹색 기와가 덮인 정자가 있고, 그 안에는 커다란 비석이 들어있다. 동쪽에 있는 것은 만력 22년인 1594년에 鄭汝璧과 連標가 세운 것으로 ‘大聖至聖先師孔子神道’라는 10개의 커다란 글씨가 새겨져 있고, 서쪽에 있는 것은 그 이듬해 두 사람이 세운 ‘闕里重修林廟碑’이다. 이 비석의 머리부분에는 정교한 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하단에는 살아있는 듯한 거북이 있다.
2. 林門
神道의 끝머리에 있는 공림의 대문으로 보통은 大林門이라 한다. 문 앞에는 두 개의 겹처마로 된 목제 牌坊이 있다. 이 패방은 명의 永樂 22년인 1424년에 처음 지었고 청대에 중수를 거쳤다. 정중앙에는 ‘至聖林’이라는 3개의 금빛 글자가 있다. 뒤쪽으로 잇닿은 곳에는 녹색 기와로 덮인 3간짜리 누각이 있다. 그 안에는 공림을 수리했거나 공자에게 제사를 올린 기록이 새겨진 9개의 비석이 있다.
공림의 대문으로 들어가면 약 4백M 정도의 길이 나오고 그 양쪽으로는 붉은 담장이 있다. 담장 내부에는 푸른 잣나무와 홰나무가 잘 정돈된 모습으로 서있고 정면으로 깊숙한 拱門이 보인다. 拱門 위에는 높은 전망대에는 돌에 새긴 ‘至聖林’이라는 전서체 세 글자가 걸려 있다. 이 공문은 청의 옹정 10년인 1732년 7월에 보수공사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문 앞의 동서 양쪽에 있는 담장 안에는 살아있는 듯한 돌사자가 마주 보고 있으며, 양쪽으로 펼쳐진 주홍대문 위에는 81개의 꽃무늬를 아로새긴 鐵門釘이 박혀있다. 뒤쪽에 있는 돌계단으로 올라가면 전망대가 나온다. 이 문은 원래 고대 魯城의 북문이었다. 공림의 대문에서 至聖林의 문까지는 공림의 앞에서 돌출된 부분으로 고대 성시건축의 月城과 흡사하다. 林門으로 들어가면 5Km에 이르는 環林路가 좌우 양쪽으로 길게 이어져있다. 이 길을 따라가면 공림의 주요부분을 살펴볼 수가 있다.
공림의 묘지는 동서로 긴 장방형이다. 공자의 묘는 가운데에서 남쪽으로 치우쳐있으며, 그의 후예들은 차례로 뒤쪽에 묻혀있다. 전국시대에 형성된 묘지는 대부분 공자묘의 주변에 있으며, 漢代의 묘지는 공자묘의 서북쪽과 동북쪽에 있다. 唐宋時代와 金代의 묘지는 공자묘의 북쪽과 서쪽에 있으며, 元明代의 묘지는 공림의 서쪽에서 서북쪽으로 치우쳐있다. 청의 康熙帝 이후의 묘지는 淸代에 확장한 곳인 공림의 동쪽, 서쪽, 북쪽에 있다. 가운데 공한지에는 明淸代의 묘지 몇 기가 있다. 적장자손의 묘지에는 대부분 墓碑와 墓表가 있으며, 明代 중기 이후의 衍聖公 묘지에는 모두 石儀와 享殿이 있고, 더러는 石門과 石坊과 같은 건축물이 있는 곳도 있다. 尙書 이상의 관직을 지낸 사람의 묘지에는 石人과 石獸 등의 石儀를 세워놓았다.
3. 洙水橋
聖林門에서 약 200M 앞으로 나아가면 도로 북쪽에 洙水橋가 있다. 洙水河는 원래 周代에 성에서 나오는 물을 배출하기 위해 만든 작은 하천으로, 중국북방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에 이루어졌던 수리사업 가운데 하나이다. 지금 이 하천은 성인의 묘지 앞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聖脈’이 되었다. 따라서 후세에 ‘영원무궁토록 천지와 더불어 오랜 세월을 흐르는(永遠無窮, 宜與天地共長久)’ 하천이라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 이 하천에 정교하고 운치가 있는 다리와 石坊을 설치한 것은 그러한 의미를 더욱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 돌다리 위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우뚝 솟은 공림의 담장 아래로 토담이 보인다. 초목이 우거진 이곳은 고대 노나라의 北城이다. 또 북쪽을 바라보면 묘문 사이로 그윽한 길이 보인다. 길 양쪽으로 떡갈나무가 우거져 있고 봄이면 눈처럼 흰 앵두꽃이 만발한다.
다리의 남북에는 역대로 洙水橋를 보수한 기록이 새겨진 비석이 있다. 다리 북쪽에는 雲龍을 새겨놓은 石坊이 있다. 못된 기운을 막는 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 남쪽의 양쪽에는 洙水橋라는 3글자가 새겨져있으며, 뒷면에는 명의 嘉靖 2년에 쓴 衍聖公 孔聞韶의 서명이 있고 전면에는 雍正 13년이라는 년호가 있다. 이 石坊에 기록된 년대가 두 개인 것은 무엇 때문일까?
원래 雍正帝는 뽐내기를 좋아하여 곳곳에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예를 들어서 북경의 고궁에 있는 용을 새긴 계단도 조칙을 내려 다시 새기게 하고, 그곳에 자신의 연호를 곁들이게 했다. 그는 평소에 이런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위에 있는 대들보가 잘못 놓여 있으면, 아래에 있는 것은 당연히 구부러진다.”
“군주를 보면 신하를 알 수가 있다.”
청의 雍正 9년 5월 25일 陳世倌과 張體仁이 聖旨를 받고 孔林을 수리하러 왔다. 그들은 막대한 수리비용을 착복했다가 巡按御使가 감사를 하러 오자 할 수 없이 대들보를 빼서 기둥을 세우는 짓을 해야 했다. 洙水橋坊의 전면에 있던 ‘明嘉靖二年’이라는 글자를 파내고 ‘淸雍正十年’이라는 글자롤 새겨 넣은 것이다. 이 때 전면에 있던 글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참으로 웃기는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수수교 아래에는 푸른 풀이 우거져 있고 맑은 물이 졸졸 흐른다. 다리 위에 있는 난간에서 아래를 바라보면 깨끗하고 고요한 풍경이 멋들어지다. 다리 동북쪽에는 思堂이라는 정방형의 건물이 있다. 이곳에서 공자에게 제사를 올릴 때 옷을 갈아입는다. 실내에는 우세의 문인들이 공자를 칭송하여 세운 다음과 같은 비석이 있다.
“鳳凰有時集嘉樹, 凡鳥不敢巢深林.”
봉황이 나타나면 좋은 나무가 우거지니,
보통 새들이야 깊은 숲 속에서 둥지를 만들 수가 있겠는가?
“荊棘不生茔域地, 鳥巢長避楷林風.”
가시나무는 묘역에서 자라지 못하고,
새들도 개림에서는 둥지를 집을 짓지 않는다네.
楷林은 공자의 제자 자공이 공자묘에 직접 심었다는 나무를 가리킨다. 성인이 묻힌 곳에는 아무 나무나 자라지 않고 보통 새들은 그곳에서 집을 짓지 않는다니 살아서 군주들로부터 박대를 받았던 공자가 죽어서는 최고의 대접을 받고 있는 것 같다. 동쪽에 있는 작은 집은 ‘神庖’라는 곳으로 공자에게 제사를 올릴 때 희생물을 잡는 곳이다.
4. 享殿
洙水橋 북쪽에는 녹색 기와로 덮인 ‘擋墓門’이라는 대문이 있다. 문으로 들어서면 공자에게 제사를 드리는 享殿이 있다. 향전으로 가는 길 옆에는 宋代와 淸代에 만든 華表, 文豹, 甪端, 翁仲이라는 4개의 거대한 석조물이 있다.
華表는 묘지 앞에 있는 돌기둥으로 望柱라고도 한다. 팔각형으로 된 이 돌기둥은 공림 내부에 있는 다른 石彫華表와는 큰 차이가 난다. 華表는 중간에 구름문양이 있지만 望柱는 그 자체가 구름과 같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天門으로 통한다는 같은 의미가 있다. 즉 亡者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길이라는 뜻이다.
文豹는 일종의 신통력이 대단한 神獸로서 그 모양이 표범을 닮았다. 겨드랑이로 뜨거운 불을 뿜고 있지만, 성질은 온순하고 선량하여 바라보면 웃음이 나올 것 같이 친밀하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공자가 독서를 할 때 문표가 양쪽에서 시립을 하고 있다가 책을 가져다주거나 먹을 갈아 주기도 하면서 시중을 들었다고 한다. 이곳에 있는 문표는 아주 교묘하게 만들어서 한 편으로는 위엄과 용맹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온화하고 조용하게 느껴진다. 만면에 봄바람을 머금고 도로 양쪽에 서서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출입금지 지역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표정을 짓고 있다.
甪端은 상상속의 괴수로서 머리에 외뿔이 나있다. 땅바닥에 배를 깔고 앉아서 무엇인가를 하고 있으면서 사람들이 함부로 다가오지 못하게 막는 것과 같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 짐승은 아주 거대하여 하루에 18,000리를 간다고 한다. 따라서 저승에 다녀올 일이 있으면 금방 다녀오기도 하며 세상에서 통용되는 모든 언어를 마스터하고 있다고 한다. 공자가 주유천하를 할 때 마차를 끌기도 했으며, 어려운 일에 처하면 좋은 계책을 제시하기도 했고, 언어가 통하지 않은 곳에서는 훌륭한 통역관 노릇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도 통역을 하는 사람들은 甪端의 면전에서 공손하게 절을 하거나 국궁을 하면서 존경심을 나타내고 있다.
翁仲은 石人像이다. 笏을 들고 있는 문인과 칼을 품고 있는 무인으로 나누어지는 이 石物은 옷자락 하나 표정 하나도 빼놓지 않고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으며, 고풍스러움과 질박함을 함께 지니고 향전의 좌우에 시립하고 있다. 翁仲은 중국 건축학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가 된다. 원래 翁仲은 진시황의 부하였던 무장이다. 漢代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성은 阮이었고 신장이 1장 3척이나 되었던 특이한 사람이었다. 진시황이 흉노를 정벌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대단한 용맹을 떨쳤으므로 그 위용이 변방에 진동했다. 그가 죽은 후에 진시황은 함양궁의 문밖에 동상을 세워주었다고 한다. 그 후부터 동상이나 석상을 翁仲이라 하다가 나중에는 묘지 앞에 세우는 文武像을 翁仲이라 불렀다.
도로 정면에 있는 향전은 황금색의 용마루와 녹색의 기둥이 덮여있으며, 날아갈 듯 치솟은 처마와 붉은 기둥이 위엄을 나타내고 있다. 향전 앞에는 돌로 만든 거대한 향로가 있다. 이 전각은 명의 황제 朱翊鈞 이 처음 지었다. 내부에는 청대의 弘歷이 직접 쓴 “가르침의 은택이 천고에 드리워, 태산이 무너져도 끊이지 않는다(敎澤垂千古, 泰山終未頹)”라는 글귀가 새겨진 ‘謁孔林酹酒碑’가 있다. 중국에서 내전이 벌어졌을 때 중공군 사령관 朱德이 향전에서 군사회의를 개최했다는 기록이 새겨진 돌이 있다. 따라서 이곳은 중국혁명을 기념하는 장소로 지정되어 있다.
5. 孔子墓
享殿의 뒤쪽은 공림의 중심으로 공자묘가 있다. 이 묘는 말의 잔등처럼 생겼기 때문에 ‘馬鬣封’이라 부른다. 이러한 형태는 특별히 존귀한 사람의 무덤이다. 묘의 둘레에는 붉은 담장이 둘러싸고 있다. 묘 앞에 있는 거대한 비석에는 明의 正統 8년인 1443년에 黃養正이 쓴 전서체의 ‘大聖至聖文宣王墓’라는 글씨가 있다. 묘 앞에 있는 석대는 漢代에 처음 만들었으나, 唐代에 태산에서 가져온 ‘封禪石’을 깎아서 다시 수축했으며, 청의 건륭시대에 확장공사를 했다.
공자는 생전에 자신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태산이 무너지는 것에 비유했다. 그가 살아있을 때는 애써 멀리했던 권력자들도 죽은 후에는 스승으로 받들었다. 유능한 인재들을 제자로 거느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따르는 공자를 맞이하는 군주의 마음은 참으로 복잡했을 것이다. 받아들이자니 위협적이고 거절하자니 천하의 인심을 잃을 것이니 만나지 않은 것이 상책이었을 것이다. 강대국 제나라의 군주마저 공자를 존경하지만 권력을 주는 것은 거절했으니 약소국의 군주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스스로를 태산에 비유했던 공자의 자존심에 호응을 하듯이 사람들은 제왕들이 태산에서 封禪祭를 올릴 때 쌓았던 제단의 돌을 이곳으로 가져와 높다란 석대를 쌓았다. 공자묘이 규모와 형상은 제왕의 묘에 비해 손색이 없다. 오히려 제왕의 무덤이야 제대로 관리되고 있는 것이 드물지만 공자의 무덤은 오랜 세월동안 철저히 보존되고 발전했기 때문에 제왕의 무덤보다 훨씬 낫다. 중국 사람보다 더 중국 사람답고 싶었고 할아버지 강희제에 뒤지고 싶지 않았던 과시욕의 황제 건륭제도 공자의 무덤을 보고 이렇게 감탄했다.
가르침의 은택이 천고에 드리웠으니,
태산은 결국 무너지지 않겠구나
(敎澤垂千古, 泰山終未頹)
공자묘 동쪽에는 그의 아들 孔鯉의 묘가 있으며, 남쪽에는 손자인 孔伋 즉 子思의 묘가 있다. 공리는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특별히 대접을 받지 못하다가, 성인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송의 희종이 ‘泗水侯’로 봉했다. 공자의 후손들은 그를 ‘二世祖’라 부른다. 孔伋은 공자의 학문을 계승하여 발전을 시켰기 때문에, 元의 지순 원년인 1330년에 ‘沂國述聖公’으로 봉해졌다. 후손들은 그를 ‘三世祖’라 부른다.
이 세 사람의 무덤은 작은 묘원을 따로 만들어서 모셨다. 3기의 무덤은 ‘品’字 형태로 앉아있다. 孔伋의 묘가 맨 앞에 있으며, 뒤쪽에서 오른쪽에는 공자의 묘가 있고 왼쪽에는 孔鯉의 묘가 있다. 이러한 형태의 묘원은 자식을 데리고 손자를 품에 안은 행태라 부른다. 즉 공자가 아들인 孔鯉의 손을 잡고 손자인 孔伋을 품에 안고 있는 ‘携子抱孫’의 형태이다. 속설에 따르면 아들과 손자를 품안에 안고 있으면 대대로 큰 공적을 쌓는 사람이 나오고, 아버지가 아들을 품고 있으면 영원히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한다. 이 3기의 묘소 앞에는 각각 2기의 비석이 있다. 뒤에 있는 작은 것은 宋代에 세운 것이며, 앞에 있는 큰 것은 明代에 세운 것이다.
至高至善의 성인이었던 공자의 손자 孔伋은 字를 子思라 했다. 그는 BC492년에 태어나 BC411년에 세상을 떠났다. 일생을 성실하게 공부에 전념했던 그는 《中庸》을 지었다. 孔鯉는 BC533년에 태어나 BC483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당시의 노나라 군주였던 昭公이 커다란 잉어 두 마리를 선물로 보냈다. 공자는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아들의 이름을 잉어라는 뜻을 가진 ‘鯉’로 삼았으며, 백부가 보낸 잉어라는 뜻으로 字를 伯魚라 했다.
후세의 사람들은 공자의 祖孫 3대가 학술적으로 후대에 미친 영향을 기리며 다음과 같은 전설을 만들었다. 어느 날 孔鯉는 아버지 공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아들은 제 아들보다 못합니다.”
즉 자기 아들은 孔伋이 자기보다 뛰어난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말이다. 그 다음에는 아들 孔伋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네 아버지는 내 아버지보다 못하다.”
즉 자기 아버지 공자는 聖人으로서 위대한 인물이지만, 공급의 아버지인 자기는 평범한 인물이라는 말이다. 비록 후대의 사람들이 지어낸 말이지만, 그들 祖孫 3대가 후세에 미친 영향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나타낸 이야기이다.
孔鯉와 孔伋의 묘 앞에는 크고 작은 두 개의 비석이 있다. 공급의 묘 앞에 있는 한 쌍의 翁仲과 享殿 앞에 있는 것은 서로 유사하다. 이곳에 있는 것은 北宋의 宣和 년간에 세운 것으로, 원래는 향전 앞에 있었던 것을 청대의 雍正 년간에 향전에 새로 크게 만들어 세우면서 이곳으로 옮겼다. 청의 雍正帝는 孔林의 보수공사를 하다가, 翁仲이 너무 작아서 도로 옆에 있는 望柱, 文豹, 甪端 등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새로 크게 만들어서 향전에 세우고 원래 있던 것을 孔伋의 묘 앞으로 옮겼다.
이곳에 있는 翁仲은 작지만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마치 살아있는 듯하다. 오른쪽에 있는 문관인 옹중을 文雍仲이라 하고, 왼쪽에 있는 무관인 옹중을 武雍仲이라 한다. 무옹중은 눈을 부릅뜨고 호시탐탐 문옹중을 노려보고 있지만, 문옹중은 빙그레 웃음을 머금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 있는 듯하다. 사람들은 이러한 옹중의 모습을 보고 다음과 같은 전설을 만들었다.
역사적으로 누가 권좌에 올라 천하를 장악하든지 무장은 군대를 이끌고 원정을 다녀야 한다. 그러나 천하가 안정이 되면 재상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문관이다. 이러한 현상에 불만을 품은 무관은 문관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항상 어떻게 하면 모욕을 줄 것인가를 생각한다. 문관은 관대한 마음으로 마음을 비우고 국가와 백성의 이익을 생각해야 하며, 한 개인의 이익과 은원관계를 따지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문옹중이 머리를 흔들며 빙그레 웃고 있는 것은 수많은 모순관계를 해결하는 모습이다. 즉 이곳에서는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 소리를 내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러한 고사가 중국의 역사에서 자주 보이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廉頗가 가시나무를 지고 藺相如를 찾아간 것을 개편한 京劇 ‘將相如’에는 이와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6. 子貢廬墓處
공자묘 서쪽에 있는 3간짜리 西屋이 子貢廬墓處이다. 공자가 세상을 떠난 후 여러 제자들이 3년 동안 스승의 묘를 지키다가 대부분 이런저런 사유로 작별하고 떠났다. 그러나 子貢은 그 이후로도 3년을 더 지켰다. 후세 사람들은 그것을 기리기 위해 3간짜리 집을 짓고 비석을 세워 子貢廬墓處라 불렀다. 子貢의 성은 復姓으로 端木이었으며 이름은 賜였다. 衛國 사람이었던 그는 공자의 제자 가운데 학문이 높았던 사람이었다.
子貢은 왜 스승의 묘를 6년 동안이나 지켰을까?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첫 번째는 子貢이 제자로서의 효도를 다하기 위해서라는 견해이다. 두 번째는 자공은 말을 사고파는 상인으로 집안이 비교적 부유하여 생활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라는 견해이다. 공자의 병이 위독했을 때, 여러 제자들이 모여서 극진히 병구완을 했지만, 자공은 마침 장사를 하러 먼 길을 떠났다가 곁에서 모시지를 못했다. 자공을 사랑하는 마음이 유별났던 공자는 위독한 와중에서도 여러 번이나 자공을 찾았다. 자공이 도착했을 때 공자는 이미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자공을 원망하듯이 이렇게 말했다.
“賜야! 왜 이렇게 늦었느냐! 왜 이렇게 늦었느냐!”
자공은 스승에 대한 죄송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가 6년 동안이나 스승의 묘를 지킨 것은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과 세상을 떠날 때 곁에서 지키지 못했던 죄송함을 갚기 위한 것이었다.
스승의 묘소를 지키는 동안 자공은 엄청난 고생을 했다. 작은 초막을 짓고 살았으며 소박한 음식을 먹었다. 세수를 할 수도 없었고 집으로 돌아가거나 친구들을 만날 수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지만, 자공의 스승에 대한 존경심과 효도하는 마음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후세 사람들은 자공이 스승을 그리워하며 심었다는 나무를 ‘楷’라고 부른다. ‘楷’는 일반적으로는 ‘해’로 읽지만 자공이 심은 나무를 가리킬 때에는 ‘개’라고 읽는다. 그 뜻은 본보기 또는 모범적인 것을 가리킨다. 명대에는 공자묘 앞에 ‘子貢廬墓處’라는 비석을 세우고 3간짜리 집을 지어 자공의 뜻을 기렸다.
子貢廬墓處 동쪽으로 享殿 뒤쪽에는 회색 기와로 덮인 ‘楷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정자 안에 있는 비석에는 한 그루의 늙은 楷나무가 새겨져 있다. 남쪽에 자공이 손수 심었다는 楷나무이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자공이 문상을 하러 온 이후에 묘목을 얻어 심은 이 나무는 큰 나무로 자랐지만 청의 강희 년간에 번개를 맞아 불에 타버렸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이 그것을 아쉬워하여 그 그림을 돌에 새겨두었다.
楷亭 북쪽에 있는 駐蹕亭이라는 3개의 碑亭이 있다. 북쪽에 녹색 기와로 덮인 비정에는 宋眞宗 趙恒이 공자에게 제사를 올린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 있다. 가운데와 남쪽에 있는 2개의 碑亭에는 청의 황제 玄燁과 弘歷이 세운 비석이 있다. ‘蹕’은 황제가 출행을 할 때 타는 어가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3개의 碑亭은 황제가 공자에게 제사를 얼리러 왔을 때 수레를 세워두었던 곳이다.
7. 孔尙任墓
環林路를 따라서 孔林의 동북쪽으로 가다가 石坊을 지나면 길가에 거대한 비석이 있다. 이 비석에는 ‘奉直大夫戶部廣東淸吏司員外郞東塘先生之墓’라는 글씨가 있다. 淸初의 유명한 극작가이자 ‘桃花扇’의 작가인 孔尙任의 묘비이다. 孔尙任은 자를 聘之, 호를 東塘이라 했다. 이름난 가문에서 태어났던 그는 일찍부터 재능이 뛰어났지만, 어느 날 갑자기 집을 떠나 雲門山에서 은거를 했다.
음률과 악기를 다루는데 통달했던 그는 수많은 글을 남겼다. 은거를 하던 도중에 ‘桃花扇’을 처음 지었던 그는 5년 후인 1685년 강희제의 부름을 받고 북경으로 가서 國子監博士가 되었다. 관리가 되어 지방을 순찰했던 그는 청병이 자행한 약탈과 살육의 현장을 보고난 후, 오랜 시간동안 각고의 노력을 기우려 세 번이나 원고를 고친 끝에, 마침내 망국의 한을 담은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도화선이 공연을 시작하자 수도인 북경은 하루도 그냥 지나가는 일이 없이 그에 관한 이야기로 소란스러웠다. 수많은 귀족들과 관리들은 물론 시인과 묵객들이 구경을 와서 앉을 자리가 없을 지경이었다. 강희제도 내시를 보내어 극본을 구해오도록 한 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읽었다. 공상임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관직을 떠나게 되었다.
관직을 잃은 공상임은 처음에는 북경에 미련이 남아 있었다. 재기를 노리던 그를 격려하면서 벗이 다음과 같은 시를 전했다. 그의 벗은 차마 공상임을 보내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그대의 노래 소리가 지극하니 곧 다시 황제의 부름을 받을 것이라 했다.
揮淚酬知己, 歌騷向上天
눈물을 뿌려야 벗에게 감사하겠지,
노래 소리 소란하면 하늘로 향하겠지.
그러나 그는 벗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그러한 자신의 노력이 허된 것임을 알고 다음과 같은 시로 자신의 마음을 알렸다.
眞嫌芳草穢, 未信美人姸
참으로 보기 싫은 것은 아름다운 풀이 시드는 것이라네,
미인의 고운 모습을 믿을 수 있겠는가?
고향 곡부로 돌아간 그는 석문산에 은거하면서 책을 벗삼아 지내다가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공상임의 묘 서쪽에는 ‘鸞音襃德’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묘방이 있고, 그 뒤쪽에는 淸乾隆帝의 딸로서 공자의 72대손 연성공 孔憲培의 아내였던 于氏의 묘가 있다. 于氏墓 서쪽에는 漢代의 묘지들이 있다. 공자의 후손인 孔謙, 孔宙, 孔彪, 孔襃 등이 이곳에 묻혔다. 漢代墓에서 서쪽으로 가면 명대의 묘지들이 있다. 수많은 무덤과 비석들이 모여 있는 이곳에는 명대의 서예가 李東陽과 嚴嵩이 쓴 비석도 있다.
8. 顔廟
곡부시 북쪽 거리에는 復聖이라 부르는 顔回의 사당이 있다. 안회는 자를 자연이라 했던 공자의 이름난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유달리 그를 사랑했던 공자는 “안회야 말로 배우기를 좋아하고 어지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으며 잘못을 두 번 저지르지 않는다”라고 했으며, “밥 한 그릇에 음식에 물 한 잔 마시며 초라한 곳에 살아도 걱정을 하지 않으니 안회야말로 즐거움을 한다. 참으로 현명하구나! 안회야!”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후세 사람들은 그를 가난했지만 배우기를 좋아했던 사람의 전형으로 여긴다.
《陋巷志》에 따르면 顔廟는 한고조 유방이 東巡을 하다가 공자에게 제사를 올릴 때 처음 지었다고 한다. 나중에 당, 송, 원, 청대에 각각 여러 차례 보수공사와 확장공사를 하여 지금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안묘는 총면적 85무에 159간이나 되는 건물이 들어서 있으며 5개의 원락으로 구성되었다. 仰聖門 안에 있는 復聖殿이 주건물이다.
9. 少昊陵
곡부시에서 동쪽으로 4Km 떨어진 舊縣村 동북쪽 높은 언덕에는 중국의 선사시대에 삼황오제 가운데 오제의 첫머리에 해당하는 少昊의 무덤이 있다. 전설상의 인물인 그는 84년 동안이나 제위에 있었으며 10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이곳에 묻혔다고 한다. 이 묘는 언제 만들었는지 불분명하다. 《曲阜縣志》에 따르면 宋代에 돌을 쌓아 무덤을 만들었다고 한다. 明淸時代에는 여러 차례 보수공사와 확장공사가 있었다. 현재 이 능의 면적은 125무이며, 17간의 건물과 明淸時代에 세운 20개의 비석이 있고, 391그루의 고목이 있다.
少昊陵 맞은편에는 청의 건륭 3년에 지은 3간짜리 石坊이 있다. 石坊을 지나면 양쪽으로 돌을 다듬어서 쌓은 담장이 나오고 그 안에 享殿이 있다. 건물 위에는 건륭제가 쓴 ‘金德貽祥’이라는 편액이 있다. 향전 뒤쪽에 있는 少昊陵은 높이가 15m이며, 아래쪽은 넓고 위쪽은 좁은 피라밋 형태로 되어 있다. 꼭대기에는 작은 사당이 있으며, 그 안에는 송의 선화 년간에 백옥석으로 새긴 少昊像이 있다. 소호릉에서 남쪽으로 약 50M정도 떨어진 곳에는 宋代에 소호의 아버지 軒轅 黃帝를 위하여 지은 景靈宮의 유적지가 있다. 그 옆에는 북송의 선화 연간에 세웟다고 하는 높이가 7M인 ‘萬人愁’라는 거대한 비석이 있다. 무게가 140톤이나 되는 이 비석에는 글자가 없다.
10. 周公廟
곡부시에서 동북쪽으로 1Km 떨어진 곳에 있는 周公廟는 元聖廟라고도 한다. 주공은 문왕의 넷째 아들로서 고대중국의 유명한 정치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형인 무왕을 보좌하여 두 차례나 동쪽으로 殷의 紂王을 정벌하러 갔으며, 禮樂을 제정하여 천하를 크게 다스렸다. 《曲阜縣志》에 따르면 “무왕 13년에 천하가 평정이 되자 주공을 少昊의 고장이던 곡부에 봉했다. 그러나 그는 중앙조정의 일을 처리하느라고 취임을 하지 못했다.
형인 武王이 죽고 조카인 어린 成王이 즉위하자, 이제는 더 바빠져서 봉지로 간다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한 주공은 자신의 아들인 伯禽에게 노나라를 맡겼다”고 한다. 伯禽은 노나라에 있던 太廟에서 周公에게 제사를 올렸다. 그러나 노나라가 망한 후에 태묘는 점차 황폐해졌다. 大中祥符 원년인 1008년에 宋眞宗이 周公을 文憲王에 봉하면서 노나라에 있던 옛 태묘터에 주공묘를 세웠다. 원, 명, 청대에 여러 차례 보수공사와 확장공사를 거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주공묘의 서북쪽에는 약간 융기된 곳이 있다. 사람들은 이곳을 ‘望父臺’ 또는 ‘伯禽臺’라 부른다. 伯禽이 서쪽을 바라보며 아버지 주공에게 제사를 올렸던 곳이라 한다.
11. 尼山의 孔子廟
尼山은 공자의 출생지라고 알려진 곳으로, 곡부시에서 동남쪽으로 30Km 떨어진 곳에 있으며, 원래 이름은 尼丘山이었다. 공자의 이름이 ‘丘’이므로 避諱를 하기 위해 ‘丘’字를 빼고 尼山이라 불렀다. 尼山의 공자묘는 五代時代 後周의 顯德 年間에 처음 지었으나 나중에 兵火로 불에 타서 없어졌다. 元順帝 至元 2년인 1336년에 연성공 孔恩晦 가 다시 공자묘를 지을 때 觀川亭 과 尼山書院을 함께 지었다. 명의 성조 영락 15년인 1417년에 현재 규모로 확장되었다.
공자의 아버지 叔梁紇은 원래 노나라 陬邑의 大夫였으며, 대단한 힘을 가진 용기의 사나이였다. 그는 처음 노나라 여자 施氏를 아내로 삼아 9명의 딸을 낳았지만 아들을 얻지 못했다. 숙양흘은 대가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향을 피우며 아들을 기원하는 한 편 시씨를 내쫓았고 첩에게서 孟皮라는 아들을 얻었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다리에 병이 있었던 孟皮는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했다. 숙양흘은 顔氏 가문의 3째 딸 ‘征’을 아내로 맞이했다. 숙양흘은 이미 60세를 넘긴 노인이었고 정은 젊고 아름다운 소녀였다.
司馬遷의 《史記》에는 “紇과 顔氏의 딸이 野合을 해서 공자를 낳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野’란 ‘正’과 반대 의미를 지닌 말로서 禮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紇과 征은 나이차가 유난히 많았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은 그들의 결혼이 예의에 맞지 않는 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결혼을 한 후 이들 부부는 尼山으로 가서 열심히 기도를 한 끝에 소중한 아들 공자를 낳았다. 그들은 아들의 이름을 ‘丘’, 字를 ‘仲尼’라 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공자는 태어날 때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정수리는 사발을 뒤집어놓은 듯, 가운데는 움푹 들어갔고 네 모퉁이는 높이 솟아 있었다. 또 눈은 살을 뚫고 튀어나왔으며 들창코에 귓바퀴는 뒤집어져 귓구멍이 들여다보일 정도였고 심한 뻐드렁니였다. 치아와 눈, 귀, 코의 구멍이 모두 밖으로 튀어나와 있으므로 사람들은 ‘七路’라 불렀다. 거의 괴물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어머니 안씨는 이 괴물을 산 속에 있던 동굴에 버렸다. 어느 날 궁금해서 다시 찾은 顔氏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거대한 맹호가 공자에게 젖을 먹이고 있었던 것이다. 몹시 더운 여름에는 커다란 매가 날아와 날개로 더위를 식혀주고 있었다. 공자는 그렇게 살아났다. 안씨는 공자를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 일대에는 봉이 낳고 호랑이가 길렀으며 매가 부채질을 했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지금 尼山에는 동굴 하나가 있는데 후세 사람들은 이 동굴을 ‘夫子洞’ 또는 ‘坤靈洞’이라 부른다.
공자가 3세가 되자마자 叔梁紇이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안씨도 홀로 아들을 기르다가 공자의 나이 24세에 세상을 떠났다. 예로부터 공자의 부모가 야합을 하여 공자를 낳았으며 어려운 청소년시기를 지냈다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한다. 그러나 공자의 출생과 관련된 사실은 대체로 이와 같다.
尼山의 공자묘는 모두 5개의 원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東側門 밖에 있는 것은 尼山書院이라는 학당으로 북경의 국자감을 본떠서 지었다. 尼山書院의 동쪽에 있는 산자락을 따라 흐르는 개울을 智源溪라 한다. 이 개울을 건너서 남쪽으로 가면 공자가 태어났다고 하는 坤靈洞이라는 천연동굴이 있다. 공자묘의 동남쪽에는 沂河가 흐르고 있으며, 공자가 끊임없이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보고, “가는 것은 이와 같구나! 밤낮을 멈추지 않는구나!”라고 감탄했던 觀川亭이 있다. 이 정자는 元의 순제 至元 2년인 1336년에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었다.
첫댓글 *&* 공부하고 갑니다. '공림'공자의 출생배경... 돌아서면 남는게 없다해도 여기가 아니면 어디에서 또 이런 역사를 배울수 있을까요? "“가는 것은 이와 같구나! 밤낮을 멈추지 않는구나!” 우리 인생도 이렇구나